<베터 콜 사울>(2022, Better Call Saul)
20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은 한국 영상예술의 위상을 새롭게 확인시켜 준 무대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한국 극예술 부문에서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프라임 드라마 시리즈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이정재), 감독상(황동혁), 게스트상(이유미), 디자인상(채경선 감독 외), 스턴트상(심상민 무술 팀장 외), 특수 시각효과상(정재훈 슈퍼바이저 외)까지 무려 여섯 개 부문에서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으나 박해수, 오영수, 정호연 배우가 각각 남우조연상과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이후 한국 영상물이 또 한 번 세계 무대에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성과는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롭고, 그간 축적된 한국 콘텐츠의 저력과 가능성을 증명하는 쾌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언론과 소셜 미디어가 쏟아내는 평가는 ‘몇 개의 상을 휩쓸었는가’, ‘첫 수상 기록’, ‘작품상 수상 실패에 대한 아쉬움’ 등 ‘어워즈’ 자체에 대한 숫자와 순위 경쟁에 치중되어 있다. 마치 올림픽 메달 집계표를 들여다보듯 ‘트로피 몇 개’, ‘상별 위상’만을 따지는 태도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감독마저 “작품상을 기대했다”고 솔직한 수상 욕심을 드러내었지만, 그 또한 경쟁과 승패에만 초점이 맞춰진 현재의 ‘시상식 풍토’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더군다나, 지구 반대편의 전쟁에도 ‘이겨라’고 응원하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로서, ‘이야기’가 사라진 ‘어워즈’라는 현실 앞에서 마음 한편이 무겁다. 이야기란 인류가 지닌 가장 고유하고도 숭고한 창작의 산물이며, 드라마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적 가치다. 그런데 이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트로피를 자랑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현재의 문화 양상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어워즈’가 진정 축하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승패나 숫자가 아니라, 무수한 손길과 땀방울이 깃든 ‘이야기’여야 한다. 이 본질을 잃어버릴 때, 시상식은 그 의미마저 흔들릴 위험에 처한다.
이제 우리는 시상식 그 너머에 자리한 ‘이야기’의 힘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워즈’가 이야기의 힘과 가치에 주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축제이자 의미 있는 문화적 순간이 된다. 그러니 다음번 트로피를 바라보며 손에 쥐는 기쁨보다, 그 트로피를 가능케 한 이야기의 결실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야기의 부재를 애도하는 동시에, 그 회복을 희망한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드라마의 깊이
해외 영상물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주말의 명화 키즈 세대’가 접한 외국 작품은 고작 스크린, 비디오, DVD로 한정된 영화 트레일러들이 전부였다. 그들이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마주한 세계는 완전히 달랐다.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 중국 드라마, 영국 드라마 등 ‘해외 시리즈물’이란 장르가 일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 한국 드라마는 사전 제작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쪽대본’이라 불리는 당일치기 대본 작업이 난무했고, 실시간 시청자 반응에 맞춰 급조되는 이야기 구조 속에, 안방 프라임 시간대의 가족 단위 시청자들이 주 대상이었다. 자연히 이야기의 폭과 깊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악한 구성, 허술한 이야기, 그리고 어설픈 연기가 겹쳐지면서 작품들의 완성도가 높을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혁명적 매개가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케이블과 무선 전파를 타고 들어온 해외 드라마들은 ‘음으로 양으로’ 새로운 이야기 세상을 열었다. <로스트>, <24>, <로마> 같은 작품들이 그 문을 활짝 열었다. 그제야 우리는 드라마라는 장르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얼마나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이야기’의 그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드라마’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드란(dran)’, 곧 ‘행동하다’에서 비롯된다. 연극, 희곡 등 극예술의 총칭인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전개되고 진행되는 행위’로서의 이야기, 즉 ‘행동’에 내재한 카타르시스를 궁극적 목표로 삼는 예술이다. 현대 미디어 환경이 복잡한 장치와 기술을 쌓아 올렸어도, 드라마의 근본은 언제나 ‘이야기’다. 이야기가 결여된 드라마는 본질에서 멀어져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어렵다.
제74회 에미상 주요 수상 후보작들을 보면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오징어 게임>도 예외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후보작 중 가장 깊이와 무게를 인정하고 싶은 작품은 <베터 콜 사울>이다. 십여 년 전부터 입소문으로 ‘꼭 봐야 할 미국 드라마’라 평가받던 <브레이킹 배드>의 스핀오프 작품인 이 드라마는 수년에 걸쳐 시즌을 이어가며 이야기에 이야기를 쌓았다. 메인 스트림에서 벗어난 스핀오프가 이렇게 오랜 기간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받은 것은 드문 일이다. 이처럼 ‘이야기’는 스스로를 증명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낳는다. 그래서 드라마는 계속해서 그 깊이를 더해간다.
'타임머신'이라 쓰고 '후회'라고 읽는다
넷플릭스 시리즈 <베터 콜 사울>은 본류 작품인 <브레이킹 배드>의 등장인물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 변호사 ‘사울 굿맨’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파고든다. 스핀오프라는 꼬리표가 무색할 만큼, <브레이킹 배드>를 접하지 않은 시청자들도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인물의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과, ‘사울’ 역을 맡은 밥 오든커크의 능청스럽고 치밀한 연기 덕분에 가능하다. 그의 미묘한 표정과 기민한 말투 하나하나가 이야기의 결을 살려내며, 시청자는 쉽게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 드라마가 가진 매력의 중심에는 바로 ‘이야기’가 있다. 한 명의 인물이 품고 있는 개인사와 그가 살아가는 세상, 그 속에서 만들어내는 선택과 갈등의 파편들이 모여 다채롭고도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사울이라는 인물의 삶 자체가 곧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쌓여 작품 전반에 걸쳐 묵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단순한 범죄 드라마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이 작품은, 이야기의 힘이 어떻게 인물을 성장시키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절묘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베터 콜 사울>은 단순한 스핀오프 이상의 존재로, 독립된 드라마로서도 충분한 감동과 완성도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울’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얼마나 다층적이고 풍부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며, 시청자에게 깊은 공감과 여운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드라마의 본질과 진수를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드라마는 주인공 사울 굿맨, 본명은 지미 맥길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의 깊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구박덩어리’였던 철모 시절을 나름의 수완으로 극복해 나가는 그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투쟁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냉혹하다. 정상 범주에 든 호소인들이 판치는 그 세계에서 한 번 도태된 존재에게는 재기와 회복이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냉정한 현실 속에서, 지미는 결심한다. 멀쩡한 척 주류에 끼어들기보다 ‘나사가 여러 개 빠진 별종’으로 살아남기로. 돈이 된다면 사건의 모양새 따위는 개의치 않기로. 그가 선택한 길은 법과 윤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약육강식의 정글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는 옷차림도, 법률 사무소인지 흥신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한 사무실 운영도 모두 주요 대상층을 겨냥한 ‘비즈니스 전략’으로 채운다. 그리고 결정적 변화는 이름에서도 찾아온다. ‘제임스 맥길’에서 ‘사울 굿맨’으로 개명하는 순간, 그가 스스로 만든 가면과 세계가 드러난다. ‘사울’이라는 이름이 갖는 성경적, 유대민족적 의미까지 엮어 보면, 이는 단순한 예명이 아닌 그 존재 자체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보인다. 개인사의 진솔함을 넘어서, 이 이름 하나가 이야기하는 바는 그의 내면과 운명을 한껏 압축한다.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무거운 메시지는 바로 마지막 시즌, 마지막 회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즌 6은 FBI의 수배를 피해 외진 북부에 숨어 지내는 사울의 현재 도피 생활과 그가 과거를 회상하는 플롯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때 흑백으로 표현되는 현재와 컬러로 살아나는 과거의 대비는 처음에는 단순한 시각적 장치로만 보인다. 그러나 에피소드가 쌓여가며, 이 대조는 결국 ‘시간’과 ‘기억’, ‘후회’라는 드라마의 본질적 주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장치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 회에서 반복되는 장면, 사울과 그의 아내가 침대에 누워 나누는 ‘타임머신’에 대한 대화는 작품 전체의 정수를 응축한다. 사울은 습관처럼, 상대가 누구든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겠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몸에 익힌 루틴이나 영업사원이 손님과 쌓는 라포처럼, 끊임없이 던져지는 이 질문은 사실상 ‘후회’라는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면을 탐색하는 행위다. 대부분의 상대들은 가볍게 웃어넘기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 고지식한 말기 암 환자이자 마약 제조상이 된 그는 격렬하게 반응한다.
“당신은 타임머신 같은 게 아니라,
지금 ‘후회(regret)’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잖아요? 아닌가요?!”
이 한마디는 드라마가 내내 품고 있던 주제를 단번에 꿰뚫는다. 결국 <베터콜 사울>은 ‘후회에 관하여’라는 이야기다. 주인공의 내면은 물론 주변 인물과 사건들을 파편화하고, 그 파편들이 복잡하게 얽히며 서로 교차하는 다층적 서사 속에서 ‘후회’라는 감정이 뚜렷한 빛을 발한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죄책감을 넘어서, 인간 존재가 겪는 근본적인 ‘삶과 선택’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특별히 귀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주제를 거대한 도덕적 교훈이나 철학적 담론이 아닌, 평범한 한 개인의 ‘삶의 현장’에서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지미가 사울로, 다시 ‘굿맨’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깊은 울림이자 이야기이다. 그의 잘못과 선택, 실패와 고뇌가 쌓여서 비로소 드라마가 품은 메시지가 관객의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는다. <베터 콜 사울>은 단순한 범죄 드라마를 넘어,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으며 우리 삶에 미치는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바로 그 점에서 참 좋은 드라마로 기억될 만하다.
‘코드’와 ‘클리셰’에 가려진 ‘이야기’
최근 한국 드라마의 화려한 수상 소식과 흥행 이면에 “좋은 드라마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대한 SNS와 포털 뉴스의 환호는 대단했다. 흥행 공식에 맞춘 ‘대박 코드’와 흔히 쓰이는 ‘클리셰’를 적절히 활용하고, 힙한 기획으로 소구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개인적인 생각은 조금 다르다. ‘돈이 되는 콘텐츠’가 곧 ‘훌륭한 작품’과 동일시되는 상황에는 분명 괴리가 존재한다. 더군다나 그 성공의 핵심을 ‘코드’와 ‘클리셰’로만 치환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에서 멀어질 위험이 크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충격적 성공 이후,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독창적 콘텐츠 생산지로서의 매력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소비 시장으로서도 입지를 굳히고자 하는 ‘양손잡이’ 전략 말이다. 그러나 최근의 행보는 기대와 달리 실망과 우려로 이어지기도 한다. <종이의 집: 공동 경제구역>은 단순한 차용을 넘어선 리메이크 전략을 취했으나, 문화적 충돌과 가치의 부조화, 그리고 캐스팅의 실패가 겹쳐 아쉽게도 주저앉았다. 이어 영화 <리얼> 이후 손꼽히는 ‘괴이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카터>와 정체 불명의 우당탕탕 혼란극 <서울 대작전>은 흥행과 작품성 모두에서 실패를 면치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콘텐츠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정체성과 독창성은 점차 희석되고, 기민한 시장의 소비자로서의 위상마저 위태로워질 위험마저 드러났다.
흥행의 공식이라는 것이 사실 결과론적 측면이 강하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대중음악에서 ‘황금 코드’라 일컬어지는 공식들도 그것이 의도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하면 그 실체가 드러나며 힘을 잃는다. 드라마, 더 넓게는 이야기 창작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요행과 성공 법칙을 따라가며 손쉽게 성공하려는 순간, 오랜 시간 진리처럼 느껴졌던 예술의 본질은 흐려지고, 결국 사라질 위험에 놓인다. 모방은 결코 ‘모조’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와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담아낼 때 비로소 위대한 예술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용한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실은 우리에게 ‘코드’와 ‘클리셰’ 너머의 ‘진짜 이야기’를 찾으라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속삭인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드라마를 드라마답게 만드는 근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넘치는 박수에 방향을 잃은 한국 콘텐츠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2021년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시즌 1에서 드러난 서사는 빈부 격차와 계급적 폭압을 게임이라는 극단적 서바이벌 형식으로 재현하며, 인간 존재를 ‘생존과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았다. 여기서 작가는 자본과 권력의 착취 구조,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기보다 내몰리는 개인의 무기력함과 절망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후 시즌 2와 3에 이르러 이 작품은 중요한 서사의 원격성을 잃은 듯 보인다. 즉, 처음에 가졌던 ‘현대 자본의 구조적 폭력과 그에 맞선 개인의 윤리적 투쟁’이라는 주제는 점점 희미해지고, 단순한 서바이벌의 스펙타클에 집중하는 흐름으로 변질되었다. 원초적 생존의 절박함은 무너지고, 참가자들은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욕망의 발현자로 축소되면서 캐릭터의 입체감과 내적 동기 역시 퇴색한다. 결국, <오징어 게임>은 서사의 도약과 성장 대신 반복과 쳇바퀴를 걷게 되었다.
<오징어 게임>은 처음부터 계급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장치로서 출발했다. 참가자들이 게임에 진입하는 방식은 자유의지처럼 포장되지만, 실상은 선택지를 박탈당한 채 구조적으로 밀려난 이들이라는 점에서, 자유라는 단어마저 자본이 구성한 착취의 언어임을 드러낸다. 번호로 불리는 참가자들, 얼굴이 가려진 관리자들, 그리고 무기명화된 병정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라 ‘기호’로 기능한다. 이름 없는 죽음은 숫자와 이미지로 소비되며, 그 위에 군림한 VIP 관객들은 서구 백인과 중국 자본가로 표상된 최상위 계층의 포식자들이다. 이 모든 구성은 계급 권력이 폭력과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어떻게 공공연하게 자신을 ‘현시’하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고대 콜로세움처럼, 약자는 죽음으로 증명되고 강자는 그것을 향유하는 장면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구조는 바르트가 말한 ‘기표만 존재하고 기의는 사라진’ 신화 체계와 닮아 있다. 참가자들은 사회적 정체성, 인간적 내면, 윤리적 지향을 잃고 단지 게임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이 지닌 내면의 복잡성은 단순화되고, ‘어떤 과제를 해결했는가’가 그 존재 전체를 대체해버린다. VIP 관객들이 이 과정을 낄낄대며 관람하는 장면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낸 시선의 구조—즉 고통을 '소비 가능한 콘텐츠'로 전환시키는 문화 장치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은 시즌이 거듭될수록 이러한 고발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시즌 1이 계급 폭력의 스펙터클을 비판하는 장치로 기능했다면, 시즌 2와 3에 이르러 그 스펙터클은 곧 서사의 목적 자체가 되어버린다. 구조적 폭력은 더 이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시청률을 위한 자극으로 반복되며, 시청자는 게임의 의미가 아니라 게임의 연출을 기다리게 된다. 이는 바로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진실을 이미지로 치환하며 현실을 위장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폭력은 더 이상 비판의 언어가 아니라 오락의 포맷이 되고, 서사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보다 ‘다음 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즉각적 소비욕망에 예속된다.
‘이야기’가 전하는 힘과 현실감, 그 진짜 ‘핍진성’은 사라지고, 오직 익숙한 클리셰들의 나열과 편리한 코드들만 반복될 때, 작품은 결국 쉽게 잊히는 유행가처럼 끝나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흥행’과 ‘완성도’를 저울질할 때, 우리는 이야기의 본질, 즉 공감과 진실성에 대해 좀 더 엄격해져야 하지 않을까.
<오자크>, <브레이킹 배드>, <나르코스> 같은 검증된 작품들은 한국의 넷플릭스 콘텐츠 <수리남>과 디즈니 플러스 <카지노> 등의 참조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저 ‘클리셰’라 부르며 이런 작품들을 겉핥기식으로 인용하고 차용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결국은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에 다름없다. 그 지점에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대중 예술이 흥행을 목표로 삼는 한, 그 열기는 쉽게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진정한 좋은 작품은 단순한 욕망과 야망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과거의 시간과 허구의 공간을 지금 이 순간의 공감으로 끌어내는 고된 작업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문화와 사유의 영역에는 지나친 지적 허세가 넘쳐난다. 누군가 “좋다”고 하면, 대중은 금세 이리저리 쏠리기 쉽다. 심지어 <네 멋대로 해라>조차 보지 않은 이들이 영화계의 거장 장뤼크 고다르의 조력 자살 사건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린다. 마치 『전쟁과 평화』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서문 몇 장만 펼쳐 보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거들먹거리는 허세꾼들처럼 말이다. 이 허세와 유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이야기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만의 목소리와 진심을 작품에 담아낼 수 있는가?’ ‘대중과 진정한 소통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지금 한국 콘텐츠가 맞닥뜨린 근본적 과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현대 사회는 과잉의 이미지와 정보 속에서 ‘읽기’와 ‘생각하기’가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다. 우리는 ‘성공 공식’처럼 여겨지는 조각조각의 ‘코드’와 ‘클리셰’ 들을 손쉽게 모으고 조합하며, 그것들이 바로 ‘좋은 작품’이나 ‘훌륭한 소프트웨어’의 전부인 양 착각한다. 하지만 이 ‘조립된 성공’은 허상에 가깝다. 진짜 창작과 깊은 공감은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난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각적 요소만이 아니다. 그것은 미학적 감수성과 철학적 성찰, 그리고 ‘이야기’가 지닌 내면적 진실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드러남’과 ‘숨겨짐’의 긴장 속에서 설명한다. 즉, 어떤 진리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며, 그 ‘은폐됨’과 ‘불완전함’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전부 노출되어 버리면, 그것은 단지 표피적 정보가 된다. 진정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것, 감춰진 채 독자와 관객이 스스로 깨닫도록 내버려두는 ‘침묵의 여백’ 을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핍진성(逼眞性)’이다. ‘핍진성’은 진짜 같음을 넘어서는 ‘실재감’을 창출한다. 표면적인 ‘코드’와 ‘클리셰’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이야기의 이 ‘핍진성’이 빠지면 독자는 공감하지 못하고 금세 멀어지게 된다.
현대의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메타포 속에서도 이 원리는 유효하다. 겉으로 보이는 코딩은 화려할지 몰라도, 그 기저에 흐르는 ‘철학적 사고’와 ‘서사적 구성’이 없다면 결국 아무리 완성도 높은 코드도 빛을 잃는다.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는 ‘맥락’과 ‘철학’, 즉 왜 그것이 필요한지, 무엇을 향하는지에 대한 내면적 물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기능하는 기계’ 이상이 될 수 없다. 그저 ‘기능’ 만을 쫓는다면, 소프트웨어는 예술이 아니라 단순한 공학품일 뿐이다.
‘이야기’란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 이며,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창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 기억과 상상은 이야기 속에서 재구성되고 변주된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긴밀히 얽힌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가 말한 “보이는 것만 찍으면 TV 영화가 된다”는 경고는 이 맥락에서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미학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면, 그저 시각적 유희에 머무를 뿐, 관객과의 깊은 정서적, 존재론적 만남을 일구어내지 못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단순한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세계와 몸이 상호작용하는 능동적 과정으로 본다. 좋은 이야기는 이 ‘지각의 능동성’을 자극한다. 이야기 속 보이지 않는 요소들, 즉 맥락과 은유, 미묘한 감정선은 관객이 자신의 경험과 연결 지어 능동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이 능동적 해석 과정에서 이야기는 비로소 ‘살아난다’. 그런데 최근의 많은 영상 콘텐츠들은 그 능동적 참여를 고려하기보다는, ‘정해진 코드’를 주입하는 데 급급하다. 그래서 관객은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하고, 이야기는 진부한 클리셰에 머물러 버린다.
‘소프트 파워’의 시대라 하지만, 그것이 ‘기술의 권력’으로만 오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진정한 소프트 파워는 내러티브와 문화적 깊이, 그리고 타인과의 진정한 공감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단순한 성공 공식이 아닌 ‘진실의 이야기’를 품어야 하며, 그 진실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차원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봉준호 감독과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은 바로 이 지점을 꼬집는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창작자와 개발자는 ‘코드’와 ‘클리셰’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여행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내면의 침묵과 대화하며, 현실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행위다. 이야기의 미학이자 철학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술’과 ‘기술’이 서로를 살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후회는 한 번의 이불 킥으로 날려버리고, 지금이야말로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할 때다. 왜냐하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결국 가장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뤼크 고다르의 말을 빌려 본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카메라로 보이는 것만 담는다면, 그건 그냥 텔레비전용 영화일 뿐입니다."
"Il y a le visible et l'invisible. Si vous ne filmez que le visible, c’est un téléfilm que vous faites."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힘이다. 단지 ‘코딩’ 기술로 치장한 허울뿐인 성공 대신,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이야기’를 창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예술과 문화의 세계에 닿을 수 있다.
이야기라는 이름의 혼란, 혹은 서사의 실종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 중
우리는 매일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소비한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보고듣는 드라마 속 서사, SNS 알고리즘이 골라준 짧은 감정의 스냅숏, 어느 강연자가 강조하는 브랜드 스토리.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삶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존재의 맥락인가, 아니면 휘발성 감정의 조각인가.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겪는 정체성의 붕괴, 공동체의 해체, 기억의 표피화를 ‘서사의 상실’로 진단한다. 그는 말한다. 이야기가 더는 삶을 조직하지 못한다고. 이 말은 단지 문학의 쇠락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고통과 구원을 의미화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도발적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를 포함한, 가슴에 콕콕 박히는 거부감을 느낀다. 이 가슴 저리는 거부감에는 서사를 저버리고 손 쉬운 스토리 콘텐츠를 쫓는다는 단발의 비평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 한국어 안에서 ‘story’와 ‘narrative’는 모두 ‘이야기’라는 동일한 얼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언어적으로 이미 서사의 감각을 더 잃어버리고 있는 것 아닐까.
한국어의 ‘이야기’는 설화, 전설, 구비문학, 개인 체험담, 소설,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서술된 내용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개념이라, 'story'든 'narrative'든 다 그냥 ‘이야기’로 뭉뚱그려 번역되는 일이 많다. ‘줄거리가 좋아’라는 평가는 어쩌면 ‘삶을 해석하는 힘’이 아니라 ‘감정 몰입의 강도’를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서사를 스토리로 오해하고, 이야기의 무게를 점점 가볍게 만든다.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 속에서 서사는 스토리의 그림자처럼 퇴색되고 있다.
‘서사’라는 단어의 전문화된 쓰임으로 호출된다. 원래는 ‘이야기 구조’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뜻으로, 문학이론이나 서사학에서 사용되던 ‘narrative’ 번역어다. 그런데 점점 ‘이야기의 뼈대’라는 뜻으로 일반화되면서, 많은 이들이 ‘서사=스토리’라고 이해해버리는 혼동이 생겼다. ‘스토리’가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되면서 역설로 확장되었다. 드라마, 영화, 광고, 유튜브 영상 등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스토리’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다 보니, ‘이야기=스토리’라는 감각적 반응이 먼저 일어나고, 서사는 오히려 ‘무거운 이론어’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서사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껴안는다. 그것은 말해지지 않는 고통, 도달할 수 없는 과거, 이해되지 않는 운명을 향해 침묵으로 답한다. 한병철은 서사는 설명 불가능한 것의 외곽을 돌며, 그 침묵 안에 머문다고 말한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고, 그 침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간이 만들어진다. 서사는 그러한 ‘머묾'의 기술이다.
반면 스토리는 설명되지 않는 것을 결핍이나 실패로 간주한다. ‘이야기가 안 된다’는 말은 종종 플롯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런 구조는 곧 ‘상품성 없음’으로 해석된다. 감정은 명확해야 하고, 갈등은 빠르게 해소되어야 하며, 독자는 이입하고 만족해야 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개입될 자리는 없다.
이런 구조는 실존적 고통의 이야기들을 밀어낸다. 예컨대 상실, 죽음, 병, 무력감, 기다림, 실패, 그리고 그 어떤 구원도 약속되지 않는 불확실성은 오늘의 스토리 구조에서 너무 무겁거나 너무 느리기 때문에 삭제된다. 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자가치유, 빠른 극복, 감정의 표피적 회복이다. 한병철 식으로 말하자면, 서사가 쇠퇴할수록 인간은 자기로부터 도망친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내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플롯의 소비자로 위치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때 서사의 깊이는 정보의 빠른 전달로 대체되고, 의미는 곧 ‘쓸모’로 환원된다. 요약하자면, 오늘날의 스토리는 “의미가 아니라 기능을 가진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는 ‘이야기’를 무수히 만들어내고 소비한다. SNS의 ‘나만의 이야기’부터 브랜딩을 위한 개인 스토리텔링, 대중문화 속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콘텐츠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서사가 아니라 ‘스토리’의 범주에 머문다. 한병철이 지적한 대로, 현대 사회에서 ‘서사’는 점차 위기를 맞는다. 서사는 멀리서 오는 ‘느린’ 의미를 포용하는 존재였지만, 오늘날 스토리는 ‘바로 다음’을 위한 ‘즉각적’ 정보의 나열이다. 서사가 지닌 ‘설명할 수 없음’의 무게는 사라지고, ‘설명할 수 없으면 무가치하다’는 기준이 지배한다. 이는 근대화와 기술 발전이 원격성을 해체하고, 모든 것이 바로 눈앞에 즉시 설명되고 소비되는 상황과 맞닿는다.
특히 한국어 ‘이야기’의 중의성은 이 구조적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서사’와 ‘스토리’ 모두를 ‘이야기’라 부르면서, 서사의 깊이와 무게가 묻히고 만다. 이 ‘언어적 환원성’은 문화적 차원에서 서사의 소실을 가속한다. 말하자면, 우리 문화는 ‘이야기’를 통해 ‘서사’가 내포하는 침묵과 설명 불가능성, 그리고 시간의 깊이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져 ‘서사’를 잃어간다.
현대에 필요한 것은 이 ‘서사’의 회복이다. 설명 불가능한 침묵을 견디고, ‘말해질 수 없음’을 품으며, ‘멀리서 오는 의미’를 기다리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단순한 정보 소비를 넘어 삶의 깊이와 인간 존재의 진실에 닿는다. 그렇기에 서사는 예술과 철학, 신학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깊고 먼 길이다.
오늘날 ‘스토리셀링’의 홍수 속에서 진짜 ‘서사’는 점점 소멸해가고 있다. 속도와 즉각적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 깊이와 침묵을 견뎌내는 서사의 시간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서사가 사라진 자리는 결코 공허하지 않다. 그 자리는 허망한 ‘즉각적 의미의 허상’으로 채워질 뿐이다. 진정한 서사의 회복, 설명 불가능한 존재의 무게를 품고 먼 곳에서 오는 의미를 기다리는 일만이 우리 시대의 문화적·철학적 과제를 완성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