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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옷장이라는 은유, 세계를 다시 짓는 시간의 문

<어바웃 타임> (2013, About Time)

by 박 스테파노

리처드 커티스의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 2013)은 시간여행이라는 익숙한 판타지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환상은 거대한 서사도, 세계의 구원도 아닌, 오직 조용하고 나직한 일상 안에서만 조용히 작동한다. 고백처럼 시작되는 이 영화는 운명을 바꾸려는 장대한 시도 대신, 사랑과 실수, 그리고 반복되는 하루 속에 깃든 감정들을 되살리는 일에 집중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팀(도널 글리슨)은 스물한 살 생일날,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대대손손 내려온 집안의 비밀을 듣는다. 그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그 방법은 실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 두 주먹을 꼭 쥔 채,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마음속에 또렷이 그리는 것. 마치 기도처럼. 그 의식을 치르는 장소는 다름 아닌 집 안의 옷장이다.


<어바웃 타임>의 시간 여행은 장소성이 부각된다. ChatGPT


보통 시간여행이라 하면 우리는 차가운 금속성과 윙윙대는 기계음, 미래를 제어하는 도식과 거대한 세계의 역학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어바웃 타임>은 그 모든 상투에서 멀리 비켜선다. 이 영화는 기술이 아닌 감각, 외부가 아닌 내부, 공공의 시간 아닌 사적인 세계로 방향을 틀어 나아간다. 팀이 처음 시간여행을 시도하는 장소엔 복잡한 장치도, 찬란한 빛도 없다. 오래된 코트들이 걸려 있고, 발끝엔 먼지가 내려앉은 작은 옷장 하나.


문을 닫고 눈을 찔끈 감고 두 손을 불끈 쥔 채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는 그 의식은, 기계적 조작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을 향해 천천히 침잠해 들어가는 행위에 가깝다. 그것은 외계의 기술이 아닌, 기억과 감정의 은밀한 통로를 여는 사적인 수행에 가깝다. 시간여행의 출발점이자 기억의 문지방이 된 이 옷장은, 단지 실내의 평범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가장 사소한 장소에 숨어 있는 비범한 문이며, 감정의 밀실이고, 회상의 영점이며, 가장 가까운 타인을 되불러내는 조용한 성소다.



어둠 속으로 향하는 문, ‘옷장’이라는 기억의 통로


옷장은 보통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장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으며, 셔츠를 접어 넣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묵은 코트를 정리하는 공간. 그러나 팀에게 이 옷장은 단지 의복을 수납하는 기능적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통로’이며, ‘감정의 축적소’로 기능하는 내면적 장소다.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시간을 따라 삶을 되짚는 사유의 훈련이며, 어떤 사적인 의례이자 내밀한 작별의 연습, 혹은 반복과 마주하기 위한 자신과의 약속에 가깝다.


<어바웃 타임>에서 옷장이 지닌 의미는 단층적이지 않다. 그것은 다양한 사유의 층위를 내포한, 은유적 밀도로 가득 찬 장소다. 우선, 감정의 기념관으로서의 옷장이 있다. 옷 한 벌에는 시간이 스며 있다. 특정한 냄새, 몸에 닿는 촉감, 그 옷을 입고 마주한 얼굴, 스쳐간 계절, 떠올리는 말투와 표정. 옷장은 단순한 수납 공간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이 다층적으로 퇴적된 내면의 장소다. 일상에 축적된 감정들이 가만히 눌어붙은 장소. 그 안에는 계절의 흔적이, 향기의 잔재가, 누군가와 나눈 시간이 녹아 있다.


영화에서 시간여행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설정은, 시간을 '선형의 흐름'이 아닌 '장소의 층위'로 사유하게 한다. 이는 곧 “시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정서적 시간, 감정 안에 살아 있는 시간. 팀이 옷장 속에서 되짚는 과거는 단순한 사실의 회귀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자 감정의 재조명이다. 이는 시간을 '감응'하는 문제로 전환시킨다.


또한 옷장은 내면 통과의 의례를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팀이 옷장의 문을 닫는 행위는 바깥 세계와의 단절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외부의 소음과 빛을 끊고, 자신의 기억 속으로 잠수하듯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층위로 들어가는 통과의식이며, 외부와 내부, 현실과 회상을 가르는 경계의 문이다. 이 옷장은 단지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심리적 변이의 공간이 된다.


팀이 옷장을 통해 이동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존재의 또 다른 결로 진입하는 행위다. 그는 매번 옷장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매번 같은 결말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 차이들이 축적되는 반복의 과정 속에서 영화는 말한다 — 시간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이라고. 시간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기호가 아니라, 내면에서 감응되는 감각의 방식이라는 점을.


가족의 유전적 서사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AI Sora


그리고 이 옷장은 가족 서사의 유전적 상징으로도 읽힌다. 그것은 팀만의 은밀한 장소가 아니다. 이 옷장은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시간의 기술’이 실행되는, 일종의 세대적 비밀의 방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시간여행이 아니라, ‘가족 내면의 서사’가 전승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같은 방식으로 이 어둠 속을 지나갔을 것이다.


시간여행은 개인적 특권이 아니라, 삶의 상실과 감정을 되새기는 가족적 유산으로 주어진다. 옷장은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의 반복을 새기며, 감정의 연속성을 품은 장소로 거듭난다. 팀이 그 공간에서 시간여행을 연습하는 장면은, 아버지와 아들의 기억이 교차하는 감정의 중첩 지점이다. 말하자면 옷장은 가족의 감정을 공유하고, 되물림하는 정서적 통로다.


이러한 해석들은 영화가 지닌 판타지적 설정을 넘어, <어바웃 타임>이 사실상 시간에 대한 철학적 명상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영화는 말한다 — 시간은 되돌리는 대상이 아니라, 감각하는 방식의 문제이며, 우리의 하루는 기계적 작동이 아니라 감정의 되새김질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이처럼 <어바웃 타임>은 시간여행이라는 매혹적 장치를 가장 평범한 공간인 ‘옷장’에 배치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비범한 삶은, 다름 아닌 평범함에 대한 감각의 회복에서 시작된다고.



기술적 시간에서 감응의 시간으로 ― 반복에서 벗어난 감정의 윤리


<어바웃 타임>의 진정한 시간여행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감응을 확장하는 일에 있다. 팀은 처음엔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통해 실수를 고치고, 사랑을 얻으며, 삶을 통제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 반복은 점차 무의미해지고, 오히려 정서적 회복을 방해하는 역설적 장치가 되어간다. 결국 그는 시간여행의 능력을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되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내려놓는다. 이 영화에서 시간여행은 권능이 아니라, 유예된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마침내 도달한다 — 삶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응하며 살아내는 것이라는 윤리로.


팀이 옷장 속에서 반복적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중심적 선택의 반복이 아니다. 그 체험을 통해 그는 점차 배운다. 고통 또한 살아야 할 삶의 일부이며, 실수조차도 그 순간의 감정과 불완전함을 간직한 채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시간여행은 삶의 재편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재해석이다. 그것은 존재를 구성하는 감정의 층위를 다시 느끼게 하는 사유의 장치이며, 동시에 ‘기억을 덧입는 감각의 예술’이다.


기술적 시간 — 곧 과거를 통제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결과를 최적화하려는 시간의 관념 — 은 이 영화 안에서 조용히 유보된다. 팀은 그런 시간의 방식에서 점차 멀어진다. 대신 그는 같은 하루를 두 번 살아보는 실험을 통해, 감정의 질감을 바꾸는 법을 익혀간다. 처음에는 무심히 통과한 하루를, 그 다음에는 음미하며 살아낸다. 바뀐 것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존재의 태도다. 영화는 말한다 — 시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느끼는 능력이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이러한 전환은 옷장이라는 장소의 의미와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옷장은 반복의 장치이면서도, 반복으로부터의 해방을 배우는 장소다. 그 어둠 속에서 팀은 마침내 깨닫는다. 시간을 되돌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며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것은 시간여행이라는 장르적 틀의 해체이자 초월이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감정의 충만과 현재성의 밀도로 재정의하며, 그 안에서 시간에 맞서는 인간이 아니라 시간과 화해하는 인간상을 조용히 제시한다.


이는 가부장적 상속의 이미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사이의 감정은 서사가 깊다. AI Sora


이 전환의 중심에는 팀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놓여 있다. 아버지는 이미 시간여행의 본질과 한계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아들에게 유산처럼 남긴다. 그들에게 시간은 가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순간의 질감을 음미할 수 있는 계기로 기능한다.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을 시간여행으로 연장하며, 아들과의 산책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 그 자체가 아니다.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의 지속성, 다시 말해 사랑의 기억이 시간을 지탱하게 만드는 힘이다.


<어바웃 타임>은 말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보다, 매일의 반복 속에서도 그 하루를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고. 기술은 기억을 바꾸지만, 감응은 존재를 바꾼다. 팀이 마지막에 옷장으로 들어가지 않는 선택을 하는 순간, 우리는 시간여행의 종결이 아니라 감정의 윤리로의 전환, 삶을 받아들이는 내적 성숙의 완성을 목도하게 된다.


이 영화는 시간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감정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기적은 언제나 옷장 속 어둠에서 시작되어, 아주 평범한 하루의 햇빛 아래에서 조용히 끝난다.



옷장 밖으로 나오는 시간 ― 일상, 여성적 감응, 그리고 반시간의 윤리


영화 <어바웃 타임>이 궁극적으로 가닿는 정서는 거창한 영웅담이나 스펙터클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버겁고 비루하지만 성스러운 일상”이라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으로 구성된 시간의 밀도다. 시간여행이라는 과장된 능력조차, 실은 그 평범함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때 영화가 묻는 것은 “시간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감응할 것인가”이다. 그 감응은 윤리의 다른 이름이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다시 시간 속에 위치시키는 존재론적 실천이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 무심코 뱉은 사소한 말실수, 늦은 기차에 발을 동동 구르는 초조함, 엉킨 머리칼을 정리하지 못한 채 나선 아침,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꼭 다문 채 건넨 눈빛 하나. 이렇듯 겉보기에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순간들이야말로, 삶이라는 과대망상을 지탱하는 현실적 버팀목이다. 이 영화는 시간여행의 환상을 통해 시간의 절대성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의 감정들이 얼마나 서사적이고 크로노토프적인 감각을 지녔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바흐찐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개념은 결정적인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크로노토프란 시간과 공간이 한 개인의 구체적 삶 속에서 응축되는 지점이며, 세계관과 존재론적 감각이 형성되는 서사의 시간-공간이다. <어바웃 타임>에서 ‘옷장’은 단순한 과거 회귀의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감정이 밀착되어 있는 폐쇄적이고 은밀한 존재의 장소이며, 동시에 남성적 헤리티지가 계승되는 밀실이기도 하다. 시간여행의 능력은 오직 남성에게만 허락된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시간의 권능은 전통적이고 위계적인, 말하자면 가부장적 시간 구조의 은유다.


그러나 이 옷장적 공간은 점차적으로 균열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메리(레이철 맥아담스)의 존재가 있다. 팀이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다름 아닌 메리와의 삶, 특히 아이의 탄생 이후이다. 과거를 바꾸는 순간 현재의 삶 전체가 변형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는 더는 시간여행이라는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이 전환은 단순한 플롯상의 제약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향이 바뀌는 장면이며, 옷장 안의 시간에서 옷장 밖의 감각적 실존으로 건너가는 계기이다. 그것은 기술의 시대에서 감응의 시대로, 통제의 윤리에서 수용의 윤리로 전이되는 내면적 사건이다.


메리는 팀을 감정의 성숙으로 이끈다. AI Sora


이때 메리는 단지 연인의 대상이나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다. 그녀는 시간여행 능력의 외부에 머물면서, 그 능력의 무력함을 비추는 거울이자 타자의 현현이다. 기술로는 되돌릴 수 없는 삶의 진실을 환기시키는, 시간의 경계 너머에서 도래하는 존재. 그녀는 근대적 자아가 망각해온 타자성의 화신이며, 팀이 진정으로 감정적 성숙에 도달하도록 이끄는 결정적 타자이다. 푸코와 데리다의 사유에서 이어지는 반권위적 주체 개념을 따른다면, 메리는 주체의 외부로부터 주체를 다시 구성하는 존재이며, 시간의 권능을 무화시키는 비-시간적 감응의 힘이다.


팀은 옷장 속에서 ‘혼자’ 시간을 바꾼다. 그러나 메리와의 삶에서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는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삶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더 이상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살아내는 감각적 리듬이 된다. 옷장은 기술적 시간의 밀실이자 남성적 통제의 상징이며, 메리는 그 문을 열고 나가야 할 현실이자 정서의 근거다. 결국 팀은 시간을 '관리'하는 자에서, 시간을 '공유'하는 자로 변모한다.


<어바웃 타임>은 이처럼 시간의 통제 가능성이라는 현대적 과대망상에 조용한 반비판을 가한다. 그것은 능력의 포기에서 비롯된 성숙이고, 반복의 중단으로부터 도출된 윤리이며, 기술이 아니라 감응을 통해 회복되는 관계의 진실이다. 시간은 반복될 수 있지만 감정은 되풀이되지 않는다. 정서의 진실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오직 옷장 밖에서만 발화된다. 메리는 그런 점에서 남성적 시간의 폐쇄 회로를 깨뜨리는 존재이며, ‘비-시간적 타자’의 윤리적 형상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철학적 반론이자, 여성성과 감응성, 그리고 일상성에 기초한 존재론적 회복의 서사이다. 시간여행은 이제 ‘언제’로 향하는 기술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 감각적 실천으로 재정의된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조용히 묻는다. 옷장 안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었는가가 아니라, 옷장 밖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About Time ― 시간에 관하여, 또는 시간을 둘러싼 감정의 윤리


<About Time>이라는 영화 제목은 단순히 “시간에 관하여”라는 명시적 의미를 넘어서, 언어유희와 철학적 여운이 교차하는 층위 깊은 기호다. 그것은 이 영화가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살아내는지를 다시 묻는 복합적 언술이기도 하다.


‘About time’이라는 영어 표현은 일상 대화에서는 “이제야 말이지”, 혹은 “드디어 그럴 때가 됐군”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것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논리적 주제에서 정서적 기미로 전환시키는 일상 언어의 방식이다. 팀이 시간여행의 능력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들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되돌아갈 수 없게 된 시간의 갈림길에서 ― 그가 도달하는 통찰은 반복의 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일상의 윤리다. 그 순간 우리가 던질 수 있는 말은 어쩌면 단 하나일 것이다. “About time.” ‘드디어’, ‘이제야’, ‘지금에서야’. 그것은 감정의 시간이며, 삶이 늦게라도 제자리를 찾아오는 그 어떤 결정적 시점이다.


이 감각은 바흐찐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개념과도 절묘하게 연결된다. 크로노토프는 시간과 공간이 구체적인 삶의 장면 속에서 응축되고 드러나는 감각적 지평이다. 추상적 시간이 아니라, 몸과 장소, 관계와 감정이 얽힌 시간-공간의 밀도다.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은 바로 그러한 존재론적 시간, 체화된 시간이다. 옷장이라는 폐쇄된 기술적 밀실의 환상을 벗어던진 뒤, 시간은 더 이상 선택과 제어의 문제가 아니라, 감응과 반응의 문제로 전환된다.


팀의 마지막 여정은 바로 이러한 시간에 대한 성찰의 서사다. 그가 하루를 두 번 살아보던 습관을 멈추고, 이제는 하루를 단 한 번만 살아내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에서, 시간은 기술적 장치가 아니라 윤리적 태도가 된다. 반복의 권능을 내려놓음으로써 그는 비로소 진정한 삶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때 시간은 물리적 거리도, 선형적 기억의 배열도 아니다. 그것은 “누구와 함께,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따라 형성되는 관계적 시간이다. 시간은 이제 소유나 조작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와의 감응을 통해 드러나는 실존의 리듬이다.


더 이상 시간을 돌리지 않기로. 가족이 사랑이 지워지지 않도록. AI Sora


이 감응의 축에는 다시 메리가 있다. 팀에게 시간여행의 능력은 철저히 ‘혼자’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메리는 그 기술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이며, 바로 그 바깥성으로 인해 팀을 다시 ‘삶’이라는 개방된 시간 속으로 이끌어낸다. 그녀는 시간을 조작할 수 없는 자리에 머물면서도, 오히려 그 시간을 가장 깊이 살아내는 윤리적 타자다. 그녀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를 통해 존재하고, 반복이 아니라 감정의 일회성을 통해 팀을 변형시킨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말하듯, 주체는 자족적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차연과 관계 속에서만 구성된다. 메리는 팀의 시간에 틈을 내고, 그 틈 속에서 존재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파열의 힘이다.


이렇게 <어바웃 타임>이 도달하는 시간은 더 이상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고, 실패하고, 잃고, 다시 살아내는 감각의 경험이다. 영화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느냐는 고전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감각하고 살아낼 수 있을지를 묻는다. 이것이 바로 “시간에 관하여” 말하면서도 동시에 시간에 복속되지 않는 삶의 가능성에 관하여 사유하는 방식이다.


결국 영화의 제목은 단순히 시간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 시간의 감정적, 관계적, 윤리적 주름을 더듬는 말의 몸짓이다. 그것은 시계의 분침을 따라 흘러가는 냉정한 시간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이 밀도 깊게 중첩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팀의 시간이 더 이상 옷장 속에서 조정되는 기술적 기교가 아니라, 부드럽고 조용한 일상의 감응 속에서 태어나는 윤리적 실천이 될 때, 우리는 이 제목을 다시 읽게 된다.


About time.
이제야 시간이 도래했다.
지금에서야, 시간이 시작된다.
비로소, 시간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Il Mondo ― 그 노래는 결국 이 세계를 위하여


비가 내렸다. 작은 교회는 축복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자연의 소란으로 가득 찼고, 팀과 메리는 우산도 없이 흠뻑 젖은 채 식장으로 들어섰다. 친구들의 웃음, 아이들의 울음, 친척들의 재잘거림이 제각기 자기 목소리를 내며,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결혼식.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 감정을 다 감추지 못한 얼굴들. 그러나 그 안에야말로 어떤 진실이 있었다. 팀은 시간여행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단 한 번의 생생함으로 그 시간을 살아냈다. 아무런 수정도, 반복도 없이.


이 결혼식 장면은 영화 전체의 미학을 압축한 시적 순간이다. 그것은 조작되지 않는 진짜 시간, 기술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범람, 삶의 우연성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존재의 전율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관통하듯 흐르는 음악이 있었다. 바로 엔리코 마시아스의 Il Mondo. “세상은 멈추지 않아, 설령 너 없이도”라고 속삭이는 이 노래는 단순한 러브송이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핵심 주제, 시간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 존재의 자리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되묻는 응답이다.


Il Mondo는 팀과 메리의 세계, 그들만의 일상, 그리고 그 일상을 이루는 감정의 섬세한 결을 말없이 비춘다. 세계는 변하고, 시간은 흐르며, 우리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무력감과 덧없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지금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감각하는 일. 그 일상의 감도야말로 진정한 세계와의 접속이다.


이 장면은 옷장이라는 폐쇄적 시간 장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첫 번째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더 이상 가부장의 세계가 아니다. 메리는 더 이상 팀의 시간 속에 들어온 대상이 아니라, 그를 옷장 밖으로, 시간의 통제라는 환상 너머의 삶으로 이끌어낸 인물이다. 그녀는 반복도, 되돌림도 없이 축적되는 생활의 리듬, 기억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의 조각들, 실패와 우연 속에서도 지속되는 정서의 윤리를 환기시키며, 팀을 ‘시간의 주인’이 아닌 ‘세계의 존재자’로 다시 연결한다. 기억과 통제를 벗어난, 예측할 수 없고 불완전한 세계. 그곳에서 메리는 시간의 대상이 아닌 윤리적 타자가 된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그 순간, 팀은 시간이라는 환상을 내려놓고 세계의 불완전성과 타인의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변화한다. Il Mondo는 그렇게 속삭인다. “세상은 흘러간다. 너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러나 그 흐름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세계에 대한 가장 깊은 응답이다.”


Il Mondo가 흐르는 그 장면. AI Sora


시간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내려놓고, 삶을 감각할 수 있다는 용기로 나아갈 때, 팀은 비로소 시간여행자가 아닌 세계의 거주자가 된다. 그리고 그곳에는 메리가 있다. 옷장 밖의 시간, 반복 없이 한 번뿐인 매일, 그리고 그 반복 속에 숨겨진 수많은 감정들 ―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세계’는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Il Mondo. 그 노래는 시간에 관한 노래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남는 것들 ― 사람, 감정, 우산 없이 맞는 비, 젖은 드레스, 웃음, 그리고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를 어떤 순간들. 그것들이 모여 이루는 하나의 세계,

그 세계를 위한 노래다.


결국,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다였다.

그 세계에 관하여.

Abou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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