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2012)
승민(엄태웅-이재훈)은 이제 이름 앞에 ‘신예’라는 수식이 사라질 무렵의 건축사다. 건물의 구조보다 그 안에 흐르는 시간과 체온을 더 궁리하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첫 번째 집이란 작품을 설계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사무실 동료와의 비밀 연애도, 결혼이라는 사회적 전환점도, 그리고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미국행마저 이미 삶의 궤적 위에 놓인 확정처럼 다가온다.
그런 그의 하루에, 정말이지 불현듯 서연(한가인-배수지)이 찾아온다. 대학 1학년 시절, 그의 가슴에 묻혀 있던 첫사랑. 쉽지 않았을 결혼생활을 정리한 뒤,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운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고향 제주에 집을 새로 짓고 싶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마음보다, 다만 끝나가는 것을 조용히 감싸 안고 싶은 그런 바람이었으리라.
승민은 서연의 집을 맡아 설계하고, 공사를 책임진다. 그것은 단순한 건축 행위가 아니라, 기억의 지층 위에 새 집을 세우는 일이었다. 길지도 깊지도 않았던 첫사랑의 어렴풋한 단편들이 점점 선명해지는 시간 속에서, 그는 자문한다. 그날의 감정이 과연 짝사랑이었을까, 혹은 서로 말하지 못했을 뿐, 나란히 걷고 있었던 사랑이었을까.
결혼 날짜는 가까워지고, 서연의 집은 마무리되어 간다. 집이란 공간은 흔히 현재를 위한 것이지만, 이 집은 오히려 과거를 복원하고, 기억의 균열을 메우는 용도로 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내일이기도 했다.
매운탕 같은 삶에 찾아온, 미더덕처럼 터지는 기억의 조각들
모든 것이 끝날 무렵, 제주를 떠나려던 두 사람은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승민이 던진 무심한 한마디에, 두 사람은 그저 돌아서지 못하고 남는다. 그렇게 마주 앉은 저녁, 제주의 바닷가 항구,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이름 없는 식당, 그리고 이름보다 더 선명한 매운탕이 식탁 위에 오른다. 서연은 말한다.
"사는 게 매운탕 같아"
다른 탕들은 갈비탕, 생태탕처럼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따라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매운탕은 오직 매운맛만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것은 재료의 의미가 지워진, 감정의 결을 감춘 채 그저 얼큰하고 자극적인 맛 하나로만 남아 있는, 그런 삶의 은유처럼 들린다.
이름 없이 남은 매운탕. 삶도 종종 그런 식으로 흐른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매운 자극만 남긴 채, 그냥 그렇게 삼켜지고 마는 날들. 그러나 바로 그 매운탕 속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미더덕처럼, 삶은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의 잔상을 터뜨린다. 크지도 않고, 전조도 없이—그저 ‘톡’ 하고—삶의 어딘가에서 터지는 순간들. 그것은 미완의 감정이자, 유예된 의미다.
기억은 언제나 논리보다 빠르다. 우리는 기억을 애써 소환하기도 하지만, 더 자주 기억은 우리를 덮쳐 온다. 예고 없이, 파도처럼, 또는 저녁의 그늘처럼. 그렇게 불쑥 떠오른 기억의 파편들은 때로는 소중한 추억이 되기도 하고, 다시 꺼내기조차 민망한 후회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추억인지 후회인지를 판단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기억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어떤 감정이 더 진실했는지, 어떤 기억이 더 오래 남을지를 서둘러 결론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아남네시스(Anamnesis)’—기억을 통해 진리를 환기하는 과정을 닮았다기보다는, 벤야민이 말한 '지나간 시간의 잔광들'처럼, 한 줌의 빛으로만 삶에 흔적을 남긴다.
'매운탕 같은 삶'. 그 말은 너무 많은 의미를 품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 진실하다. 삶은 종종 무명의 국물처럼, 의미의 재료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만 ‘매움’만 남긴다. 그럴 때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은, 바로 그 국물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미더덕 같은 기억들이다. 그 기억이 ‘톡’ 하고 터질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감각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묻는다. “그때 그 마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기억은 삶의 잔여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의 변증법이다. 우리를 오늘로 끌고 오는 가장 내밀한 에너지이며, 언젠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기다리는 무언의 질문들이다. 삶이 매운탕처럼 얼큰한 국물로만 남는다면, 기억은 그 속을 찌르는 미더덕의 파편이다. 작고 뜨겁고 명료한—그러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기억의 증언.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기억을 '견디며', 때론 기억에 '기대며, 오늘을 살아간다. 마치 그때 그 매운탕 속 미더덕처럼, 톡 하고 무언가를 터뜨릴 준비를 하면서.
그 집 앞을 지나며, 어쩌면 나도모르게 멈추게 되는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 현재명 작곡, 이은상 작사 「그 집 앞」
영화를 보는 내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마치 체내의 이명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영화의 배경이 된 90년대 초중반이 내 청춘의 시간과 겹쳐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시절 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혹은 혼자 자취방의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들었던 그 노래들.
마치 먼지 낀 필름처럼, 영화는 내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어 빛을 쬐게 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갈 무렵, 문득 다른 노래가 떠올랐다. 스테레오 음향처럼 내 머릿속 좌우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다름 아닌 가곡 「그 집 앞」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이 곡을 처음 배웠던 그날의 교실이 선명히 떠올랐다. 사춘기의 끝자락에서 내 삶의 결에 깊은 흔적을 남긴 한 음악 선생님이 있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반 전체가 중창하던 그 시간, 선생님은 갑자기 반주를 멈추고 질문하셨다.
“‘그 집 앞’이란, 어떤 집이냐?"
지금 생각해 보면 불교의 선문답과도 같은 물음이었다. 대부분은 예상 가능한 대답을 내놓았다.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집 앞이라거나, 사귀는 아이의 집 앞이라고. 그 시절 열여섯, 검푸른 혼돈 속을 헤매던 사내아이들이 할 만한, 순도 높은 감정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엇갈린 대답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집 앞이요."
그저 던진 말 같기도 했지만, 그 말 속에는 뭔가 모를 중의적 감정이 얽혀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날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간헐적으로 그 질문과 나의 대답이 떠오르곤 했다. 바로 오늘처럼,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는 영화를 보던 순간에도.
내가 말한 ‘내가 살던 집’은 여러 겹의 의미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 유년의 기억이 머무는 고향집일 수도 있고, 오늘의 내가 머무는 이 집을 언젠가 미래의 내가 돌아보며 그리워할 자리일 수도 있다. 혹은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한 사랑, 그 사랑의 시간을 살아가던 그 시절의 나의 집일 수도 있었겠다.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껏 서울을 떠난 적 없는 내게, 먼 고향집에 대한 향수는 어쩌면 인위적 상상일 수 있다. 반면 ‘미래의 나’가 오늘을 회상하며 품을 그리움은 일종의 의식적 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또렷하게 다가오는 것은, 잊히지 않기를 바랐던 과거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그 집 앞을 지날 때의 그 멈칫함이었다. 어쩌면 그리워 나도 모르게 발이 머물고, 되오며 그 자리에 다시 서게 되는 장소.
내게 ‘그 집 앞’이란, 바로 그런 집이었다.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과 나의 기억이 머무는 자리. 어쩌면 지금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 해도, 30년 전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면, 그 재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아련하게 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시절의 나, 그때의 마음,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살던 내 자신의 모습일 테니까.
그렇게, 영화는 내게 ‘그 집 앞’을 다시 걷게 했다. 그것은 물리적 주소가 아니라, 마음의 지형이었다. 사라졌으되 사라지지 않은 시간의 문 앞에 나를 세워두고, 이따금 내 삶을 되짚어보게 만드는 문득의 장소. 그것이 기억의 지리학이라면, ‘그 집 앞’은 내 마음속 지도에 여전히 표기된 지점이다. 삶은 늘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어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걸어가게 만든다. 그럴 때, 우리는 묻는다. ‘그 집 앞’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집은, 누구의 집이었는가. 그 물음이야말로, 결국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깊은 자아의 서성임일지 모른다.
기억은 늘 습작이다
영화에서 ‘집’은 단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다. 집은 시간의 결을 안쪽으로 밀어넣는 주름이며, 사람의 얼굴처럼 사연을 품고 있는 표면이다. <건축학개론>이 제시하는 세 개의 집―서연의 유년이 머문 ‘제주의 집’, 순대국밥 냄새와 함께 억척같이 살아낸 승민과 어머니의 ‘대문 부서진 집’, 그리고 감정의 진동이 스며든 ‘정릉의 빈 한옥’―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이 가만히 눕는 장소이다. 이 집들은 모두 과거에 속하지만, 현재로 환원되고, 때로는 ‘그들이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잔재처럼 뒤엉킨다. 그런 점에서 이 세 집은 영화 속 인물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어귀 어딘가에 붙박인 ‘그 집 앞’ 의 ‘그 집’이기도 하다.
어릴 적 아버지와 키를 재던 담벼락, 자라난 발자국이 남아 있는 그 집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이유도, 아마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알량한 자존심에 스민 상처―짝퉁 티셔츠를 입은 채 시장을 누비던 엄마의 손때―그 모든 것은 마치 나를 향해 되묻는 듯한 흔적이다. 한때의 부끄러움과 미성숙이 낙인처럼 찍힌 그 벽에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매만지는 마음. 어쩌면 서연이 고이 간직한 승민의 첫 모델하우스 모형이야말로, ‘그들이 가고 싶었던 집’의 가장 순수한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이층에 창이 많고, 햇빛이 드는 마당이 있으며, 그 마당 한켠에 누군가의 숨결이 머물 수 있는 그런 집. 우리가 욕망하는 ‘집’이란 결국, 함께이고 싶은 시간의 형상이 아니던가.
기억은 과거에만 거하지 않는다. 기억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재편되고 재해석되며, 반복되는 현재로 도래한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리듬처럼, 기억은 동일한 것을 다르게, 다름 속에서 동일함을 끌어내며 되풀이된다. <건축학개론>이 가장 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그저 공간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살아 있는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래서 영화가 끌어들이는 ‘건축학’은 단순한 설계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의 윤곽을 포착하는 인문적 사유다.
수업 첫 시간, 교수는 학생들에게 ‘거리’를 이해하라고 말한다. 거리란 점과 점 사이의 수학적 간격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가 엮이는 서사적 간극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도시의 파사주처럼, 거리에는 발걸음의 기억이 누적되며, 그 기억은 다시 공간을 살아 있는 장소로 전환시킨다. 이처럼 영화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결국은 ‘기억’이라는 살아 있는 사유의 구조물이다. 기억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되풀이되는 삶의 음영이며, 현재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사유의 형태다.
영화는 플래시백 없이도 과거로의 전이를 이뤄낸다. 이것은 시간의 구획이 명료하지 않음을, 현재와 과거가 이음매 없이 맞닿아 있음을, 기억이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감각으로 되살아남을 암시한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에서 발생하며, 그 안에서 재해석된다. 들뢰즈가 ‘시간의 이미지’로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순간들이다. 과거가 현재를 가로지르고, 현재가 과거를 다시 씌우며, 그 모든 이음 사이에 미세한 떨림이 발생하는 것. 그래서 영화는 결코 플래시백을 쓰지 않는다. 기억은 단선적인 회귀가 아니라, 늘 미완의 습작으로 남는 상흔이기 때문이다.
승민이 기억하는 서연은, 선배와의 밤을 품은 ‘쌍년’이라는 말 속에 남겨져 있다. 서연이 기억하는 승민은, 아무런 맥락 없이 “꺼져버려”를 내뱉은, 도망치는 남자였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서로의 입장에서 시간의 결을 되짚을 여유도 갖지 못했다. 그 틈은 건축이라는 매개로, 보다 정확히는 ‘건축학개론’이라는 장치로 재조명된다. 그들은 그 매개를 통해 자신들이 놓쳐버린 집의 모형을, 관계의 가능성을, 시간의 곡선을 다시 손끝으로 매만지는 것이다. 기억은 그렇게 회상에서 실천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옮아간다.
교수의 선문답 같은 과제는 말하자면 삶의 방향을 묻는 시선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관찰하고, 가장 먼 곳까지 가보고, 날씨 좋은 날 잘 놀다 오라.” 이 말은 단지 수업의 서론이 아니라, 생의 태도에 대한 요청이다. 영화 속 과거의 학생들이 그 과제를 수행했듯, 현재의 그들도 여전히 삶 속에서 그 과제를 반복한다. 지금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먼 곳 제주에 가보고, 좋은 날 잔디밭에 누워 지난 기억을 되새긴다. 기억은 그렇게 시간 속을 걷고, 공간 속에 눕고, 관계의 틈을 매운다. 공간은 기억을 머물게 하고, 시간은 기억을 되살리며, 그 모든 것을 이끌어내는 힘이 바로 ‘습작으로서의 기억’이다.
기억은 완성될 수 없다. 기억은 언제나 오류의 여지를 품고 있으며, 재구성되고, 덧칠되며, 지워지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건축에서 개념 설계에서 모형 제작, 그리고 최종 시공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닮아 있다. 완전한 집은 없듯, 완전한 기억도 없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시간의 집을, 누군가와 함께 짓고 싶었던 그 집을, 지금도 마음 안쪽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기억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도면이며, 늘 다시 써야 하는 습작이다.
그곳에 가고 싶다
영화의 한 장면,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이 저 멀리 흘러간다. 마치 라디오 전파처럼, 낮은 안테나로 퍼져나가다 골목을 돌아서는 순간 사라지는 어떤 기억처럼. 수입 병맥주로 후배를 꾀는 ‘압서방파’ 오렌지 선배의 모습이 등장하고, 동네 독서실에서 시간과 싸우다 나른해진 재수생 친구의 추임새 같은 “졸라”가 대사에 묻어난다. 자취를 감춘 CD플레이어가 테이블 위에 조용히 앉아 있고, 펜티엄 컴퓨터는 그 시절 유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던 미래였다. 작은 버스정류장에서 빌려준 어깨는 낯설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익숙해 그리울 지경이다. 그렇다. 그렇게 그 모든 장면에, 저의 기억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시절을 억지로 밀어냈다. 애써 지워야만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변화무쌍하고 버거웠던 20대, 추억조차 사치라 여겨야 했던 시간들. 그 모든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허세를 부리곤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잊은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있어 차마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미련이 아니다. 다만 그때의 나, 세상의 방식에 온전히 길들여지지 않았던 나, 애틋함 하나로 하루를 견디던 순진한 내 감정이 그리운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감정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이, 어느 날 문득, 오래된 노래처럼 되돌아온다. 그렇게 내게 또 다른 기억 하나가, 습작처럼 조용히 다가왔다.
기억은 마감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조명하는 빛이다. <건축학개론>이 말하는 기억은 그렇게 현재를 지탱하는 지난날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언제나 ‘집’이라는 장소와 엮여 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공간과 시간, 존재의 흔적을 되짚는 서정적 사유다. 건축학 개론의 교실, 그와 그녀가 처음 마주한 그 공간은 설계도가 아닌 감정의 좌표를 그려나가는 장소다. 그리고 마치 시간의 벽에 적힌 연필 자국처럼, 그 집의 구조마다 그 시절의 나와 우리가 머물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집이 실제로 존재하든, 기억 속에만 남아 있든, 그 ‘공간’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특정한 시간의 어느 날이라기보다, 그 시절의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나, 세상이 아직 복잡한 해석으로 물들기 전의 나, 누군가를 서툴게 좋아하던 그 순전한 마음. 그래서 영화가 그려내는 집은 물리적인 장소를 넘어서, 존재의 흔적이 오롯이 스며 있는 ‘사유의 구조물’이다.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했듯, 집은 단지 피난처가 아니라, 내면의 은신처이며, 우리가 기억이라는 감각으로 귀환하는 장소다.
오늘같이 궂은 생각이 오가는 밤, 불현듯 그 집으로 가고 싶어진다. 마당에는 감나무가 있고, 대청마루에는 저녁 햇살이 들고, 낡은 책상 위에는 내가 아직 풀지 못한 그때의 감정이 얌전히 놓여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그 시절의 집으로, 그 시절의 나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그 시절 나의 사랑, 나의 슬픔, 나의 무모함, 나의 용서, 그리고 나의 순정을 고스란히 담아두었던 그 집. 기억은 언제나 현재형이며, 우리는 그 집의 주소를 마음속에 조용히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같이 사소한 고단함이 목덜미를 짓누르는 밤, 나는 문득 그곳에 가고 싶다.
나의 기억과 함께. 그 모든 것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