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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운명은 항상 우연을 닮았다

-<500일의 썸머> (2009, 500 Days Of Summer)

by 박 스테파노

건축가를 꿈꾸었으나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결국 그는 카드, 그러니까 신용카드가 아니라 생일 카드,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축하 카드 문구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한다. 그 남자, 톰(조셉 고든 레빗). 그는 연애에 있어 철저한 운명론자다. 언젠가 나타날 인연,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그 사랑은 시작된 만큼 오래가리라는 믿음. 누가 증명해주지 않아도 확신처럼 품고 있는 감정.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정말 운명처럼 한 여자가 나타난다. 썸머(주이 디샤넬). 회사 사장의 새 비서로 등장한 그녀는 톰의 심장을 한순간에 휘어잡는다. 첫눈에 빠졌고, 톰은 마음을 다해 그녀를 원한다. 하지만 썸머는 진지한 관계보다 느슨한 연애를 택한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은 그녀에게 사랑이란 ‘쉽게 시작하고 쉽게 끝나는 것’이라는 인식을 남겼다. 톰은 운명을 좇고, 썸머는 경계를 둔다. 그 틈에서 500일의 이야기가 피어난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먼저 알아둘 것은,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문장 하나로 영화는 자신의 방향을 예고한다. 그러니까 <500일의 썸머>는 애틋한 서사나 비극적 로맨스를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오해와 망상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이 사랑이었고, 무엇이 사랑이 아니었는지를 되짚으며, 보는 이의 마음속 ‘기억의 조각’을 건드린다.


기억은 꼭 좋은 것만 남지 않는다. AI Sora



사랑을 기억하는 언어의 충돌


마크 웹 감독의 이 영화는 2009년에 만들어지고, 2010년에 국내 개봉했다. 그 무렵의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감정 곡선은 이미 진이 빠져 있었고, 사랑이라는 주제를 거론하기조차 귀찮던 시기였다.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설레는 감정을 다시 품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무심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작고 단정한 영화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잊은 줄 알았던 어떤 사람처럼. <이터널 선샤인>이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재개봉작이 보여준 잔잔한 회복과 공감의 흐름 속에서 <500일의 썸머> 또한 관객에게 작은 쉼표 하나를 건넨다. 삶에 지친 감각을 다시 가볍게 흔드는 바람처럼.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개념이 삶에 어떤 ‘균열’ 을 내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은 운명일까, 아니면 그 순간의 감정일까. 혹은 양자택일로 정리될 수 없는 복잡한 교차의 한가운데에 있는 걸까. 톰에게 사랑은 언제나 운명이었다. 그녀의 어긋난 앞니는 귀엽기만 하고, 자다 일어난 눈은 부었어도 사랑스럽고, 무릎의 살 하나조차 애틋해진다. 그는 썸머가 좋아하는 비틀스 멤버가 링고 스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고 확신한다. 생각해 보면 한두 가지 겹치는 지점만 있어도 운명이라 단정짓는 경향은 우리 모두의 안에 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르지만, 톰은 그 다름마저도 사랑으로 환원한다. 관계는 때때로 그렇게 한 사람의 믿음만으로 성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얼마나 애틋하고도 위험한 환상인가.


하지만 썸머에게 톰은 운명이 아니었다. 호감은 있었고, 순간의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그녀가 살아온 경험들이 그다지 너그럽지 않았다. 썸머는 ‘좋은 사람’과 ‘운명의 사람’ 사이에 분명한 간극을 느꼈고, 그 감정의 단계를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은 예정된 운명이 아니라, 삶의 어느 국면에서 스치고 가는 한 장면일 뿐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사랑의 찬란함』에서 말하듯, 사랑은 ‘둘의 진리’가 아니라 ‘둘의 사건’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므로 썸머는 사랑을 증명할 필요도, 지켜야 할 필연도 느끼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더 정직했다.


사랑은 각자의 언어로 발화한다. AI Sora


결국, 사랑은 똑같은 언어를 다르게 발음하는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려 있다. 톰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향으로 사랑했고, 썸머는 끝까지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렇다고 둘 중 누가 틀렸다 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말없이 보여줄 뿐이다. 서로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그 다름이 때로는 사랑을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만든다는 것을.


<500일의 썸머>는 누군가의 기억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든 가지지 않든, 그 안에 잠시 머문 감정들은 분명히 삶의 결이 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그 기억이 한 사람을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라기보다, 사랑을 통과한 사람의 이야기다. 운명이든 우연이든, 우리는 늘 그 뒤에 남겨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톰처럼. 또는 썸머처럼.



우연이 만든 필연, 그 안에 남은 감정


“지금은 그냥 좋은 점만 기억하는 거야.”


영화는 썸머의 500일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썸머를 향한 톰의 마음이 겪는 500일의 궤적을 따라간다. 앞의 절반은 사랑에 빠져 감정에 젖어 드는 나날들이고, 뒤의 절반은 그 사랑이 떠난 자리를 맴돌며 괴로워하는 시간들이다. 썸머의 부재가 시작된 이후 톰의 일상은 일상 같지 않다. 그녀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그러면서도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모습들과 사랑의 순간들을 밤을 새워 곱씹는다.


걱정하는 친구의 권유로 소개팅 자리에 나가지만, 결국 또다시 '그녀 이야기' 로 시간을 허비한다. 여전히 썸머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모든 생각이 그녀로 수렴될 뿐이다. 그럴 때 어리지만 이상할 만큼 성숙한 여동생 레이철(클로이 모레츠)이 한마디 던진다. “오빠가 그녀를 특별하게 느끼는 건 알겠는데,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 같진 않아. 그냥 좋았던 점만 기억하는 거야.”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좋아했던 그 시절의 톰 자신이 특별했던 건 아닐까. 결국 톰은 썸머의 좋은 점보다, 그 점들을 사랑했던 자기 자신을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빤, 그냥 좋았던 점만 기억하는 거야." AI Sora


영화 중반, 썸머와의 좋은 시간을 보낸 톰은 출근길에 마치 온 세상이 뮤지컬처럼 보인다. 거리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신호등조차 그를 응원하는 듯하며, 평범한 아침은 찬란한 쇼로 탈바꿈한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 더 깊이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그 시절의 감정이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건 허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위대한 우주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어. 우연! 그게 바로 우주의 이치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옛 유행가 가사가 있다. “우연, 우연보다 강한 인연, 인연보다 강한 신의 사랑으로 만나~” 같은 노래 말이다. 우리는 흔히 ‘운명’과 ‘우연’을 완전히 다른 편에 놓인 대립 개념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연도 어쩌면 신의 섭리이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질서의 일부일지 모른다. 썸머가 운명이라 여긴 사람을 만난 건 단지 어느 식당에 갔기 때문이었다. 다른 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만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썸머는 톰의 운명론에 처음으로 공감한다. 이제는 안다고, 사랑에는 어쩌면 필연에 가까운 기운이 있다는 걸.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 톰은 자신의 운명론을 되묻게 된다. 만약 이 모든 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내 운명은 그저 상실의 이야기로 남게 되니까.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주 작은 우연들


“난 엉망이에요. 한편으로 그녀를 잊으라 하고, 한편으로는 전 우주를 통틀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라는 것을 알아요.”


누군가를 잊기 위해 지나온 기억과 감정을 하나하나 걷어내야 할 때가 있다. 숨을 쉴 때마다, 고요히 흘러가는 하루의 결마다 잊으려는 노력은 역설처럼 기억을 더 짙게 불러낸다. 잊는 것이 맞다고 여겨질 때조차, 그가 나를 환하게 비추던 모든 찰나들은 ‘그럴 수도 있는’ 사건이 아니라 내 생의 결정을 좌우한 우연들이었다. 사람들은 ‘미련’이라 이름 붙이겠지만, 톰이 떠나간 썸머를 잊지 못했던 건 단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와 마주한 수많은 우연의 순간들이 톰 자신을 형성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500일의 끝에서 톰은 새로운 건축사무소 면접에서 ‘오톰(가을)’이라는 이름의 여성을 만난다. 이 운명처럼 반복된 계절의 전환 속에서, 오톰은 말한다.


“그때 그 주변은 별로 살피지 않으셨나 봐요.”


그 말은 곧, 톰의 시선이 여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음을 일깨운다. 한 계절을 끝없이 반복하는 루프 속에서 톰은 마침내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가장 뜨거운 여름의 열병을 지나야만 선선한 바람의 속삭임이 들린다. 지나간 시간들이 나를 지배하던 세계가, 또 다른 우연에 의해 균열을 일으킨다.


운명이라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우연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AI Sora


우주의 이치와 신의 섭리가 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필연의 궤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기 망설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주하는 진정한 운명은 예고된 필연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우연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톰에게 썸머는 운명이었고, 나중에는 오톰도 운명이 된다.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철회될 수 없는 감정의 개연성들이다.


‘운명은 우연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해석된다.’


이 문장을 곱씹다 보면, 사랑과 이별이 주는 고통이 단지 기억의 퇴적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사랑의 감정은 대상보다도 그 감정을 품은 '나'를 기억하게 하며, 이별의 고통은 그 '나'를 상실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보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나 자신을 더 오래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마주하다


그리하여 여름이 지나간다. 아니, 여름이라는 계절이 아니라 여름이라는 이름, 썸머가 끝난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비극이라 부르지 않는다. <500일의 썸머>는 시간의 순서를 해체한 채 사랑의 기억을 조각낸다. 그것은 서사의 흐름이 아니라 감정의 파편들이다. 그리고 그 파편들을 다시 잇는 것은 오직 관객의 몫이다. 이는 미학적 구성의 전환점이자, 사랑이 갖는 인식론적 본질을 되묻는 장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톰이 새로운 사람 ‘오텀(가을)’을 만나는 장면은 의도된 대칭이다. '썸머'에서 '오텀'으로 이어지는 이름의 변화는 계절의 흐름인 동시에 감정의 형이상학적 이행을 상징한다. 그 만남은 드라마틱한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조용한 가능성의 문턱이다. 다시 사랑을 꿈꿀 수 있는 시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미세한 각성. 영화는 그 찰나를 대사보다도 표정과 시선, 그리고 컷의 호흡으로 길게 담아낸다.


그러니 <500일의 썸머>는 사랑이 실패했는가, 이루어졌는가를 묻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다시 쓰게 만드는가에 대한 미학적 고백이다. 톰은 썸머와의 관계를 통해 운명과 우연의 간극을 배운다. 사랑은 언제나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그 우연을 운명으로 믿게 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비로소 시작하게 된다.


사랑은 감정의 클로즈업이다. AI Sora


사랑은 서사적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무수한 클로즈업이며, 회상의 몽타주 속에서 되살아나는 한 인물의 내면이다. 톰에게 썸머는 하나의 계절이었다. 그러나 삶은 사계로 이어진다. 그러니 영화는 말한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그 단순한 진실을, 이토록 아름답게 편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영화라는 예술이 사랑을 말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끝났지만, 계절은 끝나지 않는다. 한때 나를 잠식하던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면, 언젠가 가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도 또다른 여름이 될 수도 있다. 삶은 그렇게, 매 순간이 단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흘러간다. 운명은 그렇게 도래한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우연으로, 우리의 사소한 선택과 놓침 속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견뎌낸 자에게만 가만히 말을 걸어오는 방식으로.


그러니 다음 계절이 문을 두드릴 때,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사랑은, 때로는 우리가 가장 외면한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계절의 틈, 사랑 이후의 문장들


운명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조금씩 주춤거리는 발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단호하게 말해지기보다는 주저 끝에 흘리는 숨결에 더 가까워서, 누구에게는 숙명처럼 믿어지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우연에 가려진 허상으로 잊히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재했느냐가 아니라, 한때 그것이 믿어졌다는 사실이다. 믿었던 기억, 그로 인해 감정의 무늬가 달라졌던 시간. <500일의 썸머>는 바로 그 믿음의 시간들을 조각낸다. 누군가를 향했던 마음, 그 마음이 허공에서 만든 세계, 그리고 그것이 허물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남는 감각.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리움이나 비극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방식으로 되묻는다. 그것은 감정의 진위보다,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바꾸었는지를 추적한다.


사랑은 어쩌면 사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감각의 틀이다. 알랭 바디우가 “사랑은 진리의 과정이자 사건의 시작”이라 말했을 때, 그는 사랑을 논리적 귀결로서가 아니라, 한 세계의 생성으로 보았다. 즉, 사랑은 타인을 통해 나의 세계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시 조명되는 사건이다. 그것은 신념의 수직선도 아니고 감정의 평면도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 나 사이에 열린 경계 없는 공간이며, 그 안에서 감정은 한 사람을 두고도 끝없이 겹치고 어긋난다. 톰은 썸머의 눈빛에서 자신의 감정을 읽고, 썸머는 톰의 신념 속에서 물러서는 법을 배운다. 이 불균형은 파국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이며 질서이며, 결국에는 개인의 내면으로 되돌아오는 거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관계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개인의 역사로 스며드는 방식을 보여준다. 감정은 언제나 한 순간의 반응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감정은 반복된다.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고, 같은 음악에 마음을 주며, 같은 문장을 곱씹는다. 감정은 연기처럼 피어올라 삶의 전면을 덮기도 하고, 특정한 사물과 장면에 붙어 있다가 문득 다시 피어난다. <500일의 썸머>가 택한 단절적 서사의 구조는 바로 이 감정의 시간성을 따라간다. 그것은 선형적 삶을 해체하고, 기억의 몽타주로 사랑을 기록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미래가 아니라 기억을 먼저 품는다. 미래는 늘 불확실하지만, 기억은 언제든 소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과거형으로 가장 강렬하게 존재한다.


이별의 순간은 단지 관계의 종료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구조가 다시 조립되는 시간이다. 누군가가 내 안에 남겼던 언어와 침묵, 눈빛과 오해의 잔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이별은 자아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이 아니라, 또 다른 정체성이 움트는 시작이다. 그러니 톰이 오톰을 만나는 마지막 장면은 단지 새로운 사랑의 예고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선언이다. 사랑은 결국 자기 서사의 재건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타인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 속에서 구성되었던 ‘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 ‘나’를 다시 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향해 문을 연다.


이 영화가 끝끝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썸머가 옳았는가, 톰이 더 사랑했는가는 이 이야기의 초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필연적으로 품는 균열, 다시 말해 ‘완전하지 않은 감정의 대화’를 어떻게 견디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은 언제나 언어 이전에 시작되며, 그 언어는 서로 다르게 조율된다. 누군가는 침묵을, 누군가는 확신을 택한다. 누군가는 끝을 예감하며 시작하고, 누군가는 끝이 없다는 믿음 아래 스며든다. 이 간극은 해소되지 않지만, 그 틈 안에서 감정은 더욱 생생하게 요동친다. 영화는 그 흔들림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삶의 다음 계절이 열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닫는다.


감정에 대한 책임도 정확한 사랑의 한 모습이다. AI Sora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슬픔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만이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슬픔은 단지 눈물의 총량이 아니라, 감정의 책임을 지려는 태도다. 자신의 감정을 미화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이 나를 무너뜨린 방식과 다시 일으킨 방식을 끝까지 바라보는 힘. 그러니 <500일의 썸머>는 슬픔의 실험이다. 실패의 감정을 끝까지 붙잡고, 그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선이다. 누군가를 통해 내가 달라졌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의 전환이며, 그것은 결코 실패로만 환원될 수 없다.


우리는 늘 우연을 통과한 뒤에야 그것이 필연이었음을 깨닫는다. 처음엔 단지 스쳐간 이름, 눈빛, 동선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내 삶을 뒤흔든 사건이었음을 안다. 운명은 그래서 존재론적 회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앞서 닥쳐오는 예고가 아니라, 지나간 감정의 궤적으로부터 역산되는 통찰이다. 그렇게 사랑은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나를 다시 쓰는 문장이 된다. 우리는 사랑이 남긴 문장들을 모아, 하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사랑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온다. 우리는 여전히 그 계절의 순서를 예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변화를 감지할 줄 아는 감각은 남는다. 그 감각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그러니 잊지 말자. 사랑은 결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었지만, 끝내 나라는 존재를 다시 말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500일의 썸머>는 그런 사랑의 철학이다. 사랑의 실패를 말하지 않고, 사랑을 기억하는 자의 용기를 말하는 영화. 그러니 우리가 그 계절을 지나왔다면, 다음 계절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지나가지만, 사랑했던 사람은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은 존재는 이미,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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