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볼버> (2024, Revolver)
코로나 팬데믹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단순히 거리의 적막이나 마스크의 질감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변모며, 더 나아가 영화를 향유하는 방식 자체의 전환이다. 팬데믹은 다중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그 물리적 제약은 기술 발전과 맞물려 새로운 관습을 빠르게 정착시켰다. 대용량 영상 파일을 안정적으로 송출하는 스트리밍 기술, 그리고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는 클라우드 스토리징이 그것이다. 이 두 축은 OTT라는, 이전에는 주변적이던 매체 플랫폼을 단숨에 전면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관객의 발걸음은 극장에서 스마트폰과 거실로 옮겨갔고, 한때 절대적이던 ‘개봉관’의 지위는 균열을 맞았다.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향유하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게 되었고, 그곳을 전통적 유통망으로 의존하던 영화 제작 생태계 또한 급속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제작사와 배급사는 새로운 시간표와 경로를 설계해야 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다중 유통 전략’이라 불리는 방식이다. 멀티플렉스 스크린을 통한 개봉 이후, 지체 없이 OTT 스트리밍으로 전환하거나, IPTV·케이블 채널에 빠르게 편성하는 모델이다. 경우에 따라선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예전이라면 ‘극장 독점 상영 기간’이 당연시되었지만, 이제는 블록버스터급 흥행작을 제외한 다수의 영화들이 이 전략에 의존한다. 영화가 스크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은 짧아졌고, 개봉일은 더 이상 ‘시작점’이라기보다 여러 유통 경로 중 하나의 문턱에 불과해졌다.
물론 이 전략은 양날의 칼이다. 너무 빠른 스트리밍 전환은 극장에서의 몰입 경험을 약화시키고, 흥행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접근성을 연다. 물리적 거리나 경제적 이유로 극장을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최신작을 거의 동시대에 제공하고, 마음에 든 작품을 N차 관람으로 재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 흐름이 빚어낸 예기치 않은 순기능 중 하나는 ‘재발견’이다. 개봉 당시 스크린에서 저평가되거나 묻힌 작품이, OTT 환경에서 다른 호흡과 다른 시선으로 다시 읽히는 일. 작년 여름 개봉해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미지근한 반응을 받으며 조용히 사라졌던 <리볼버>가 최근 OTT에 올라오면서, 전혀 다른 평가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플랫폼의 변화가 단지 상영 경로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더 이상 ‘한 번의 개봉’을 통해 생을 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창구를 넘나들며 각기 다른 시간과 맥락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OTT에서의 감상은 극장에서의 감상과 다르다. 화면의 크기, 주변의 빛과 소리, 앉은 자리의 온도, 재생을 멈추고 되감는 손짓— 이 모든 것이 영화를 또 다른 예술적 경험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제 ‘동시대에 본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본다’는 것을 더 이상 동일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국 이 변화는, 영화가 하나의 고정된 사건이 아니라 유통과 재생, 기억과 재평가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 놓여 있는 매체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순환 속에서 비로소, 한때 스크린에서 퇴장했던 작품들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다른 관객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의 세풍 속에서 새롭게 바라 보았던 작품이 <리볼버>다.
열린 구조의 복수극, 허무의 미장센
영화 <리볼버>의 뼈대는 복수극이다. 그러나 그 복수는 칼날처럼 단호하게 내리꽂히기보다, 불완전하게 열려 있고, 마침표 대신 여백을 남긴다. 전직 경찰 수영(전도연)은 2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온다. 윗선이 범죄조직과 얽힌 커넥션이 드러나자, 그녀는 모종의 보상을 조건으로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약속은 부서졌다. 윗선의 주축이자 내연남이었던 석용(이정재)은 두어 달 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그가 맡겨 두었던 아파트의 등기는 어느 낯선 여자 명의로 넘어갔다. 게다가 범죄조직 ‘이스턴 프로미스’가 주기로 한 7억 원은 중간에서 앤디(지창욱)가 ‘배달 사고’를 내며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은 수영에게 되찾아야 할 목록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통속적인 하드보일드의 질주로 처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복수극의 통쾌한 한방, 요란한 파괴의 스펙터클은 없다. 대신 영화는 수영이 하나씩 단서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담히 그린다. 이 지점에서 개봉 당시 관객의 호불호가 갈렸다. 복수의 완성을 쥔 인물은 황정미라는 전직 무당인데, 그 그림자는 영화 전반에 드리워져 있으면서도 정작 그녀는 이미 죽어 있는 처지다. 살아 있는 증인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재가 서사의 축을 지탱하는 설정은 필연적으로 허무를 불러온다. 아마도 이것이 영화가 전하고자 한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적 쾌락과 강렬한 전개에 길든 요즘의 관객에게 이 허무는 손쉽게 닿지 않는다.
모든 복수는 궁극적으로 허무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얻기보다, 훼손된 자리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으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수는 종종 ‘야생의 정의’로 불린다. 수영은 애초에 석용의 죽음을 끝까지 규명하겠다는 의지를 버린다. 짧은 플래시백은 석용이 타살되었다는 사실만 암시하고, 범인이 이스턴 프로미스 내부 인물인지, 선후배 관계의 기현(정재영)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제삼자인지에 대한 답을 끝내 주지 않는다. 진실은 열린 채로, 혹은 흩어진 채로 남는다.
이 열린 구조는 영화의 형식적 태도와 맞물린다. 수영은 진실 규명에 매달리지 않는다. 마치 복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임을 아는 듯, 그저 필요한 만큼만 복잡한 길을 걸을 뿐이다. 극 중 윤선(임지연)과의 대화가 이를 압축한다. 윤선이 “좀 복잡해요”라고 말하면, 수영은 “그래. 복잡하네”라고 담담히 맞받는다. 복잡함과 허무함이 복수의 쌍둥이 얼굴이라는 사실을 이 짧은 문장이 은근히 새긴다.
서늘한 색감의 화면처럼, 영화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처럼 관객이 길을 잃지 않게 전후 사정을 반복 설명하거나, 혹여 놓칠까 우려해 회상의 장면을 친절히 삽입하는 일도 없다. 대신 매 장면마다 둘에서 세 명의 인물이 화면을 채우고, 그 밀도의 대화를 통해 정황과 서사를 전한다. 구조만 놓고 보면 <존 윅>의 복수 사다리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의 사다리는 물리적 액션이 아니라 언어와 표정, 그리고 미묘한 기류로 연결된다. 액션 대신 대화가, 총격 대신 침묵이 복수의 단계를 이끈다.
<리볼버>는 ‘이야기의 예술’로서의 영화를 되새긴다. 관객을 즉각적인 감정의 폭발로 끌어들이기보다, 허무의 질감을 서서히 번지게 한다. 끝내 닫히지 않는 복수의 서사는, 정의가 완성되는 순간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걸음이 끝없이 이어지는 장면에서 멈춘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복수란 완결의 서사가 아니라, 부재와 허무를 견디는 서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알려면 들어야 한다 — ‘리볼버’와 서사의 미학
이야기꾼이란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서사를 풍성하게 하고, 그 서사가 스스로를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기억과 꿈, 드라마와 상징으로 가득한 장치를 동원하여,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새로 창조한다. 탁월한 이야기꾼은 듣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다시 써보게 한다. 관객은 감상자가 아니라, 서사라는 거대한 직조에 참여하는 공동 창작자가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화면에 대한 집착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서사를 해독하는 능력은 얕아지고, 피상적·수동적 사고가 고착된다. 그 빈자리를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가짜 이야기’가 점령해 버린다. 이 흐름 속에서 진짜 이야기가 가진 쓸모—특히 문학이 지니는 해독제적 기능—는 절실해진다. 서사는 세계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며, 가짜를 구별하는 감각이다.
오승욱 감독은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각본으로 한국 영화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연출작은 드물다. <킬리만자로>(2000), <무뢰한>(2015)에 이어 <리볼버>(2024)는 무려 9년 만의 신작이다. 그 사이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각색, 제작 지원, 시나리오 컨설팅 등,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전작보다 더 덜어내고, 더 비워내는 방식을 택한 듯하다.
<킬리만자로>의 유혈 낭자한 세계, <무뢰한>의 쫓고 쫓기는 하드보일드 긴장과 달리, <리볼버>는 듬성듬성 여백이 느껴지는 영화다. 그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열린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수영(전도연)은 전직 경찰이자 범죄조직의 하수인으로 살았다. 출소 후 배신당한 그녀는 ‘이스턴 프로미스’라는 조직을 향해 리볼버의 총구를 겨눈다. 복수의 이유는 단순하다. 회색의 운명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이 회색의 질감은 오승욱 필모그래피를 관통한다. <킬리만자로>의 쌍둥이 형제 해식과 해철(박신양)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경찰과 건달이라는 서로 다른 인생이 만든 회색지대에 서 있다. <무뢰한>의 재곤(김남길) 역시 경찰이지만 언더커버라는 이중 신분을 지닌다. <리볼버>의 수영은 이 계보 위에 있다. 또한 극중 ‘이스턴 프로미스’라는 조직명은 크로넨버그의 2007년 작 <이스턴 프라미스>를 환기시킨다. 그 영화 속 니콜라이(비고 모텐슨) 역시 마피아 내부에서 언더커버로 활동하는 비밀 요원이다. 이 반복되는 ‘위장된 정체’의 서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감독이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세계관의 일부다.
영화학자 에드 시코브는 『영화학개론』에서 영화 매체를 ‘다른 예술 장르들의 성질을 공유하는 혼합 예술’로 정의한다. 소설에서 서사라는 뼈대를 가져오고,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의 관계를 빌려오며, 회화와 사진에서 특정 프레임 안의 시각적 구성을 계승한다. 그러나 영화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은 ‘카메라의 움직임’—즉 동적 프레임(mobile framing)—에 있다. 이 동적 프레임은 종종 ‘미장센’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고, 상징과 복선 대신 단순한 클리셰로 소비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시각적 장치를 음미하기보다는, 그것을 ‘빨리 감기’로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각 중심의 자극 소비는 결국 이야기 해독 능력의 퇴화를 불러오고, 가짜 서사에 쉽게 속아 넘어가게 만든다. 그렇기에 <리볼버>와 같은, 복선과 상징을 인물의 대사와 관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영화는 귀하다.
회색의 방아쇠 — 열린 복수 서사와 영화미학의 윤리
<리볼버>는 친절하지 않다. 전후사정에 대한 과도한 설명도, 관객을 배려한 회상 장면도 거의 없다. 오직 인물들의 대화와 침묵, 그리고 제한된 공간 속에서의 시선 교환이 서사의 실마리가 된다. 관객은 듣지 않으면, 놓친다. 이야기를 알려면, 먼저 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리볼버>의 미학이다. 요란한 총격전 대신, 대사와 침묵을 리볼버처럼 겨누는 영화. 관객이 스스로 서사의 공백을 채우게 만드는 영화. 이 영화의 평점은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영화가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미완의 상태는, 서사의 폐쇄를 거부하는 ‘열린 결말’의 전략이자, 복수라는 장르 코드 자체에 대한 사유의 요청이다. 로랑 주네가 말하는 열린 서사는 관객을 해석의 공범으로 만든다.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단정하는 대신, ‘무엇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 질문은 단지 플롯의 미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 자체를 흔드는 균열이며, 이야기라는 구조물에 바람이 드나들 수 있는 창문을 내는 일이다.
<리볼버>의 수영이 겨누는 총구는 단순히 적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때 속했던, 선과 악의 경계마저 흐린 구조를 향해 있다. 고전적 복수극의 단선적 궤도 — 악을 처단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서사 — 와 달리, 여기서 복수는 어떤 귀결로도 순순히 봉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는 모순과 불확실성을 응시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다. 주네식 열린 구조는 이 불완전성을 서사의 결핍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가능성의 원천으로 본다.
데이비드 보드웰이 ‘아트 시네마 서사’라 부른 미학은 이 지점에서 <리볼버>의 형식과 맞닿는다. 아트 시네마는 명확한 인과 대신 우연과 심리의 복잡성을, 사건의 마무리 대신 느슨하고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강조한다. 오승욱의 카메라는 이를 충실히 따른다. ‘동적 프레임’의 과도한 기교 대신, 정지된 시선 속에서 인물의 침묵과 주저함, 그리고 공기를 오래 기록한다. 화면은 사건을 ‘결정’하기보다 ‘유예’하며, 관객이 스스로 그 빈자리를 채우도록 초대한다.
이렇게 열린 복수 서사는 관객을 단순한 감정의 수혜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연루자로 만든다. 우리는 수영이 쥔 리볼버의 방아쇠를 대신 당기지도, 내려놓지도 못한다. 그 결정을 미뤄둔 채, 그녀의 회색지대는 관객 각자의 회색지대와 겹쳐진다. 복수는 더 이상 단일한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도덕과 생존, 배신과 충성, 희망과 체념이 뒤엉킨 다층적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질문이 된다.
결국 <리볼버>는 ‘이야기를 알려면 들어야 한다’는 명제를 영화적 방식으로 구현한다. 듣는다는 것은 기다림이며, 여백을 견디는 일이다. 그 여백 속에서 복수는 해소되지 않은 채, 하나의 열린 세계로 남는다. 속도와 자극의 화면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에, 이처럼 복수의 서사를 열어둔 채 남기는 일은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오늘의 문화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자 해독제다.
허무의 설계도 — 열린 서사와 복수의 필연
복수는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그 늦음 속에서, 복수는 목적지를 잃는다. 고전적인 서사는 이 지연을 단호하게 잘라내어, 결말이라는 이름의 문장을 찍는다. 그러나 <리볼버>는 그 문장을 찍지 않는다. 총구는 울리지 않거나, 울린다 해도 관객의 청각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방아쇠와 탄환 사이의 공기를 오래 바라본다. 그 공기는 이야기의 공백이자, 세계의 균열이다.
로랑 주네의 열린 구조론에 따르면, 이러한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다. 결말을 봉합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는 하나의 정답에서 무수한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복수극에서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미학적 변주를 넘어, 복수라는 행위의 본질을 드러내는 철학적 장치가 된다. 왜냐하면 복수의 완성은 필연적으로 허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복수가 끝나는 순간, 주인공은 더 이상 그 복수로부터 살아갈 이유를 받지 못한다. 목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공허와 자기 소멸뿐이다.
<리볼버>의 수영은 이 필연성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녀는 끝까지 적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대신, 관계와 사건, 배신과 연민이 얽힌 그물 속에서 맴돈다. 그리고 그 맴돎 자체가 결말이 된다. 복수는 완결되는 대신 계속 진행된다. 아니, 진행되지 않는 채 남는다. 그 미완이야말로 진실이다.
이렇게 열린 서사는 복수의 필연적 허무를 감춘 채 보여주는, 일종의 미학적 덫이다. 관객은 결말의 부재를 불편해하면서도, 그 부재 속에서 더 깊은 공명을 듣게 된다. 그 공명은 ‘복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도, ‘끝내 이룰 수 없는 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결국 열린 이야기 구조는 복수라는 장르의 허무성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마치 건축 도면 속 미완의 벽처럼, 완성되지 않은 형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완결된 건축물은 기능을 수행하지만, 미완의 설계도는 무한히 읽히고 해석된다. 복수극에서의 열린 결말은 바로 그 설계도다. 허무를 직시하게 하는, 그리고 그 허무를 견디게 하는, 이야기의 마지막 공간.
허무를 드러내는 열린 결말은 단지 복수의 불가능성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욕망이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시청자에게 체험시키는 장치다. 그 욕망은 처음에는 분명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서사의 여백과 회색지대 속에서 그 단단함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부서진다. 이렇게 부서진 욕망의 잔해는, 마치 모래시계 속에 남은 마지막 몇 알의 모래처럼, 끝을 재촉하면서도 끝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그 거부의 순간을 오래 응시하며, 복수란 결국 자신을 지워버리는 방식의 사랑 혹은 자기애였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자각에 이른다.
그래서 <리볼버>의 여백은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라, 인물과 관객 모두가 허무를 함께 감당해야 하는 심연의 무대다. 닫힌 결말은 질문을 멈추게 하지만, 열린 구조는 질문을 지속시킨다. 이 지속은 끝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인간 경험의 가장 본질적인 자리—의미와 무의미가 공존하는 자리—로 데려간다. 복수라는 극적인 서사가 허무라는 철학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길은, 바로 이 열린 구조의 길이다. 그것은 완성된 건축이 아니라, 영원히 공사 중인 폐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서만,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폐허 위에 서서, 우리는 비로소 이야기의 불확실성을 품고, 허무 속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