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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여전히' 즐거움이다

글쓰기에 지친 모두에게, 나를 포함한

by 박 스테파노

글쓰기 플랫폼의 공간에 머문 세월이 어느덧 십 년이 흘렀다. 오래 머물다 보니 이곳에도 계절 같은 감각이 깃들었다. 비가 오기 전에 무릎이 쑤시고, 환절기마다 얼굴이 당기는 것처럼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다. 공모나 이벤트가 열리면 갑자기 공간은 들끓는 온도를 띠다가, 결과 발표 즈음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히 식어 버리곤 했다. 어김없는 주기였다. 최근 열 돌을 맞이한 대규모 이벤트의 발표가 끝난 뒤에도, 체감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의 기온이 내려앉았다. 그 차가운 공기 속으로 당선과 탈락을 알리는 글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9만 5천 명의 등록 작가 가운데 단 백 명의 이름이 불려 나왔다. 그 소수의 대표로 선발된 이들에게 먼저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하고 싶다. 그것은 작은 도전의 결실이자 누구보다 노력한 증거이기에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선택받지 못한 이들의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 또한 외면할 수 없다. 혹여 낙심과 무력감 속에 고개를 떨구고 있을 누군가에게, 오래된 동료로서 따뜻한 응원의 기운을 보내고 싶다.


나는 십 년 묵은 고인물로서 이번 공모에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축하의 글을 쓰면서도 2천 자의 기쁨 뒤에 솔직한 심정의 만 자를 덧붙였고, 때때로 궁시렁 같은 비판을 남기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으니 결과에 미련을 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떨어진 이들의 의욕마저 식어 버릴까 염려되어, 늘 그래 왔듯 지난 글들을 다시 들추어 본다. 슬럼프 때마다 곱씹던 것은 다름 아닌 ‘글쓰기’ 자체에 관한 기록들이었다.


내게 글쓰기는 특별한 묘수나 요령이 아니라 자기 수련의 과정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뾰족한 비밀은 없지만, 각자가 겪어낸 실패와 작은 성취를 나누는 일은 언제나 귀하고 값지다. 그 경험의 조각들이야말로 서로의 마음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슬럼프의 이유는 수만가지. 그러나 힘들다는 것은 마찬가지. AI Sora


오늘 오전에는 병원 진료 자리에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한 의사의 무성의한 말 한마디로 등 통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흉추 압박골절이라는 늦은 진단을 받아들여야 했다. 담도계나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했던 시간이 허망하게 흘러갔고, ‘그저 노화의 흔적일 뿐’이라는 무심한 말에 스스로를 달래며 제법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던 날들이 후회스러웠다. 강직척추염으로 골절 주의에 백혈병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을 함께 달고 살던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지나온 일은 지나간 일로 남는다. 다행히도 남들보다 조금 더 단단한 회복탄력성이 아직 내게 남아 있어, 오늘도 그 힘으로 하루를 살아낸다.


글쓰기가 싫어지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처럼 느껴질 때마다 꺼내 보던 문장들이 있다. 지금은 그 글들 위에 현재의 마음을 다시 얹어 본다. 이 기록이 나 자신에게 건네는 주문이자, 이곳에 남아 같은 길을 걷는 모두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흔들려도 다시, 힘내자. 그 말 하나로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맞이한다.



특기가 뭐예요?


IMF라는 거대한 그늘이 짙게 드리웠던 시절, 치열했던 취업 전선에서 나는 자주 멈칫하곤 했다. 고학생이었던 X세대의 청춘에게 ‘이력서’라는 종이는 늘 허전하고 쓸쓸해 보였다. 적어 넣을 만한 스펙이랄 것이 마땅치 않았다. 자기소개서는 그나마 기억과 추억을 각색해 채울 수 있었지만, 서늘하게 비어 있는 칸칸의 ‘필수 조항’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이렇다 할 경력도 없었고, 누군가의 이력서처럼 석·박사 학위가 빛나지도 않았다. 인턴이라는 제도조차 낯설던 시대, 고작 과외나 공사장,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써 넣기란 어쩐지 초라해 보였다. 억지로 다녀온 교환학생 경험 한 줄을 길게 늘려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마주한 항목. ‘취미’, ‘특기’. 그 칸 앞에서 타자기는 묘하게 멈춰섰다. 요즘 청년들은 그런 것을 이력에 적을까 싶지만, 그때는 거의 빠지지 않는 단골 조항이었다. 다른 이들은 무엇으로 채웠을지 궁금했지만, 나의 선택은 전형적이었다. ‘취미: 독서, 영화·음악 감상’. 그리고 ‘특기’ 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적어 넣었다. ‘운동’. 군필자라는 표식을 은근히 드러내라는 조직의 요상한 조언이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로는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덧붙였다. ‘글짓기·작문’.


취미와 특기를 이력서에 쓴다. 경향신문


돌이켜보면 그것은 억지스러운 연결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 조부께서 붓글씨와 펜글씨를 쓰며 천자문을 가르쳐 주시던 풍경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글씨를 잘 써야 좋은 직장을 얻는다”는 말씀이 귀에 맴돌았다. 아마 그 기억이 글씨와 글짓기를 단순히 이어 붙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제법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어린 시절 글짓기 대회에서 받아 들고 돌아오던 상장의 감각이나, 군 생활 동안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며 PX 추진비를 아끼던 소소한 일화가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인사권자가 되어 수많은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을 진행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취미와 특기를 눈여겨보는 이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한 줄의 특기가 내 삶의 어떤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 글쓰기를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이어 올 수 있었던 배경이 거기에 숨어 있지 않을까.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아버지께 보내던 그림 같은 첫 편지가 내 작필의 시작이었다면,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이력서의 특기 칸에 서슴없이 적어 넣었던 그 글쓰기가 진정한 작문의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력서조차도 결국은 일종의 사회적 글쓰기가 아니던가. 지금 그 기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과거의 빈 칸 속에 내 삶을 길어 올린 작문의 첫 발자국을 다시금 확인하는 듯하다.



글쓰기의 목적은 뭐예요?


글쓰기에 목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목적은 글의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 속에서 문장의 무게와 질감이 달라진다. 이를 통칭하여 우리는 장르라 부르고, 종류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름으로 모든 것을 환원할 수 있을까. 나의 글쓰기는 어떤 형상을 띠고 있는가. 단순히 장르로 구분이 되는 것인가. 글쓰기에 정해진 방향 같은 것이 존재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글쓰기는 여전히 즐거움인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글쓰기를 통해 보상을 얻는다는 것은 조기 은퇴자에게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이야기였다. 사회적 글감을 나눌 수 있는 공론의 장이라니, 그 또한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선배의 SNS에 연일 떠오르던 광고 같은 게시물에 이끌려, 3년 전 한 글쓰기 플랫폼의 프로젝트가 막 시작되고 2주쯤 지나 올린 첫 글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은 폐업이 되어 자취를 감춰버린 곳. 반응은 미적지근했지만, 몇몇 사람의 진심 어린 공감을 받았고, ‘1만 원의 행복’이라 불릴 만한 작은 보상도 경험했다.


그 맛에 매일 글을 올렸다.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보상을 받았다. 그러다 욕심이 생겼다. 20만 원을 주는 ‘투데이 픽’은 왜 내게는 오지 않는가. 에디터들에게 구애하듯 글을 올리고, 답글을 열심히 달고, 칭찬과 찬사를 남발했다. 때로는 반응이 없으면 어린아이처럼 칭얼대기도 했다. 일종의 밀당이었고, 자칫 술에 기대었다면 필화로 번질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그나마 술을 끊은 것이 다행이었다 싶다.


결국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욕심도, 흔적도 덜어내자고 다짐했지만, 프로젝트의 말미에 20만 원의 ‘픽’을 받고는 모든 결기와 비워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꼼수의 계산기를 돌리며 ‘휴지기 동안 기반을 잘 다지면, 2기 프로젝트에서는 수월할 수 있겠지’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리고 실제로 2기에서는 대문에 글이 자주 소개되었고, 정산된 보상도 그럴듯했다. 성공일까. 아니다. 그 시기 내 글쓰기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히 괴로웠다.


즐겁지 않은 글쓰기의 시간도 있었다. AI Sora


되돌아보면, 외적 보상은 글쓰기의 즐거움과 반비례했고, 괴로움과 정비례했다. 원치 않는 뉴스거리가 이슈로 떠오르면 선점을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글을 썼다. 대문에 걸리는 글, 에디터들의 클리핑에 맞춰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작 중요한 것은 글의 본질, 문장의 품질, 글쓰기가 품은 사유의 깊이였는데, 나는 그것을 잠시 외면한 채 눈치와 반응에 매달렸다. 그 시절의 글쓰기를 돌아보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잊어버린 ‘즐거움’


2009년 전후, SNS라 불리던 사회 관계망 서비스가 세상을 휩쓸 때,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 또한 기이하게 증폭되었다. 140자로 축약되던 간단한 소회가 어느새 한 바닥의 포스팅이 되었고, 그것은 곧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아는 듯 뽐내는 글, 남보다 빨리 알아낸 듯한 정보를 서둘러 내놓는 글로 변해 갔다. 이해가 완전치 않아도 다 소화한 것처럼 꾸며 훈수를 두고, 지적질을 일삼았다.


어줍잖은 데이터 분석을 내세우고, 어설픈 그래프를 그려내며 전문 용어와 영어를 원어 그대로 써대곤 했다. 친절한 설명은 사치처럼 여겨졌고, 대신 남의 글에서 오탈자 같은 티끌을 찾아내 비난하고 트집 잡기 일쑤였다. 돌아오는 반박과 비판에는 정작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 미국의 최신 기사와 논문을 링크 걸어 얄밉게 대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2010년, 무리한 행보와 과도한 욕심으로 몇 차례 응급실에 실려 간 끝에야, 수차례의 예진과 검사 끝에 ‘난치 희귀 질환자’라는 확진을 받았다. 그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큰 변곡점이었다. 병가를 내고 치료에 전념하면서, 날 선 관계들을 무디게 만들고,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것들을 하늘이 준 시간의 선물로 삼아 보기로 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것은 다시 글쓰기를 배우는 일이었다.


당시 신생 매체였던 ‘프레시안’이 운영하던 ‘글쓰기 학교’에 등록했고, 내가 고른 과목은 <영화 보고 글쓰기>였다. 첫날 교실에 들어서니 본인을 포함해 고작 다섯 명. 존폐의 위기가 감돌던 그 강좌를 끝내 버텨 마무리했다. 십수 년 만에 숙제를 받아 정해진 기한에 글을 제출하고, 다시 빨간 펜으로 가득 채워진 첨삭을 받는 경험은 낯설고도 충격적이었다.


첫 글쓰기 교실. AI Sora


첫 과제물이 온통 붉게 물든 채 돌아왔을 때, 그것을 견뎌 내니 오히려 글쓰기의 재미가 되살아났다. 그 시절의 선생, 평론가 오동진의 지도와 글을 흉내 내며, 저널리스틱 글쓰기와 사회적 고민을 개인의 체험으로 길어내는 방식을 어렴풋이 배웠다. 그의 조언과 나의 취향을 겹겹이 쌓아가며, 나는 틈날 때마다 글을 써 내려갔다.


그 목적은 단 하나였다. 즐거움. 외부의 보상도, 남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도 아니었다. 글을 쓰는 순간에만 주어지는 내적 보상, 그 즐거움 하나였다. 그때 나는 참 즐거웠다.



글쓰기가 다시 즐거움이 되기를


한동안 치기 어린 지식인 놀이와 자의식의 잔치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계산으로만 가득한 방법을 목적이라 착각하며, 프로필의 직책과 이력서의 학력을 상대적 우월의 지표로 삼는 미숙한 경쟁 속에 다시 휘말리고 있었다. 뽐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어른이 되어버린 시간까지 저당 잡혀버린 사람들과 바보 같은 공기 시합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아내에게 고백하니,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다독여 주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마도 이곳의 온라인 글쓰기는 외적인 보상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글의 품질이 플랫폼 알고리즘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큐레이팅이라는 이름의 최신 트렌드는 눈길 잡기가 목적일 뿐, 얼마나 알차고 구성감 있는 내용을 전달하느냐에는 무심하다. 글쓰기 플랫폼임에도 글쓰기는 종종 실종되고, 오히려 이슈와 의제, 그리고 적절한 관계망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을 틀렸다 단언하기는 어렵다. 민간 기업의 사업장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얄팍한 주판알 위에 인생의 즐거움을 걸 수는 없는 법이다.


글쓰기는 즐거움이다. AI Sora


최근 있었던 플랫폼 10주년 기념 ‘100인 선발’은 일종의 구분짓기였다. 물론 당선된 이들의 수고는 찬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플랫폼은 그 열정마저 가벼운 마케팅 수단으로 전유했다. 고객 관리라기보다는 단기적 이벤트에 가깝다. 공모의 선발 기준은 무엇일까. 공지 어디에서도 명확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비즈니스의 생리는 오래된 사용자보다 새로운 사용자를 가치 있게 여기는 법이다. 운영자들을 탓할 수는 없다. 훈련도 채 받지 못한 채 에디터와 마케터의 역할을 동시에 떠안은 이들의 노동은 일종의 격무일 테니. 4050 세대가 다수인 이곳에서 여전히 2030 세대에 포커스를 두는 이유도 분명하다. 유저는 흘러가는 물과 같아 언제나 새로운 이들이 유입되어야 하고, 그로써 별도의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서비스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구분짓기에 이름이 누락되었다 하여 마음을 축 늘어뜨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가끔씩 숨을 헐떡이며 혼잣말로 ‘아이쿠, 삶이 정신없이 달리고 있군’이라며 투덜대지만 진실은 정반대이다. 삶은 조용한 것이다. 정신없이 달리는 건 우리뿐이다.”

― 『얀 마텔의 101통의 문학편지』


귓가에 맴돌다 가슴에 내려앉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도 있다. 비평가에 대한 대중의 전이는 이미 끝났으며, 비평가들은 약육강식과 생존 경쟁의 시대에 쓸모 있는 진리를 지니지 못한다는 냉혹한 자각.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 비평의 고유한 소명이 숨어 있다. 삶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간다고 믿는 순간, 진실은 언제나 반대로 서 있는 법이다. 삶은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주위를 정신없이 배회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뿐이다. 비평이란 그 고요의 정주성을 증명하려는 외로운 외침이다.


게으른 글은 삶을 납작하게 만든다. ChatGPT가 던져주는 그럴듯한 문장을 붙여 넣으며, 내 프롬프트라는 자위로 끝내는 일. 그렇게 만들어진 글은 더 이상 부풀지 않는 눅눅한 빵처럼 남아돈다. 글쓰기는 달리기 경주가 아닌데, 우리는 타성의 출발 총성에 맞춰 줄을 서고, 출발선의 위치를 다투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도 정작 삶은 저만치 뒤에 남겨진다. 경주로 치환되는 모든 욕망에 반대한다.


문학이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단순해 보이는 모든 것이 사실은 얼마나 복잡한지를 끝없이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그 중심에는 질문이 있다. 질문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행복이란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라는 희소성의 욕망이라면, 즐거움은 아무 조건 없이 내리는 하늘의 선물이다. 뜨거운 여름 끝자락에 불어오는 선한 바람처럼.


신형철의 말처럼, 글을 쓸 때는 말을 경계해야 한다. 글이 말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말이 글을 닮아 나오기를 바란다. 말은 언제나 마음이 넘칠 때 흘러나오지만, 그 넘침은 정수보다 부유하는 찌꺼기가 먼저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말을 글쓰기처럼 천천히 하고 싶다. 글쓰기는 말을 늦추는 일이고, 그 늦춤은 언제든 고치고 수정할 수 있는 여유를 남긴다. 그 덕에 글쓰기는 넘쳐 흘러나오는 찌꺼기에서 벗어나 즐거움이 앞서게 된다.


영화 <데드풀>의 한 장면. 디즈니플러스


나는 새롭게 글을 쓰고 싶다. 이슈와 트렌드를 큐레이션할 능력은 내게 없다. 그러나 세상의 고민과 삶의 이면, 일상의 버거움에 대해 이야기를 쓸 수는 있다. 내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상의 고민 한 귀퉁이에 닿는 글을 쓰고 싶다. 지식인 놀음으로 쌓아둔 정보와 지식을, 가능한 많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하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글쓰기란 굉장한 일이다. 사라질 기억을 보장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고, 2차원의 낡은 세계 위에 디지털과 4차원의 세상을 그려내는 설명서가 되기도 한다. 영화 <데드풀>의 대사처럼, 일상은 늘 ‘괴로운 연속극’이지만, 기록되는 행복의 찰나는 ‘화려한 광고’처럼 강렬하게 남아 다시 본편으로 돌아갈 힘이 된다. 외적 보상은 줄어들고 운영의 방향은 멀어질지라도, 글쓰기 플랫폼에서 글쓰기가 존중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다만, 나는 다시 즐거움으로서의 글쓰기를 희망하며 실천하려 한다.


부디 이곳에서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의 글쓰기가 행복과 즐거움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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