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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눗셈과 권력의 속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고

by 박 스테파노
오늘자로 업로드한 기고입니다. 기고 내용 전문을 옮깁니다. 링크에 들어가셔서 무료회원만 가입하셔도 양질의 기사, 비평들을 접할 수 있으니 참조하세요. 저도 독자로 시작한 인연입니다.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45

최근 담벼락에는 책 이야기가 유난히 자주 걸린다. 출판의 조바심이 내 안에서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때라, 알고리즘이라는 녀석이 그 욕망을 부추기고 되먹이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은 신간을 소개하거나 출판인들의 고군분투를 기록한 일상들이다. 사는 모습과 내는 책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그 속내는 대체로 같다. 출판 시장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다른 문화 산업을 떠올려 보자. 야구 관중은 천만을 훌쩍 넘어섰고, 뮤지컬은 제2의 흥행기를 맞았다는 말이 돌고, 영화는 극장이 울상이지만 OTT라는 공룡이 버티고 있으니 산업적 외형은 여전히 성장세다. 그런데 책을 내겠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해마다 날 수의 몇 배에 달하는 수백 권의 책을 읽는 독서가들 역시 여전히 가득한데, 왜 출판사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짙을까.


궁금증을 풀고자 여러 리포트를 찾아보았다. 그중 산업적 관점에서 볼 만한 것은 한국출판산업진흥원의 산업 동향 보고서였다. 그러나 정직히 말해, 시장 분석 자료라기보다는 물동 중심의 20세기형 보고서에 가깝다. 소비자 행태를 읽어내는 분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지금 출판 시장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총체적 분석을 다시 시도해 보려 하지만, 우선 얻은 인사이트 몇 가지를 적어 둔다. 첫째, 공급자의 시그먼트가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의미 없는 지표가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2024년 상반기 신간 도서 발행 종수는 총 41,497종이다. 이 기간 출판 실적이 있는 출판사는 6,389개였고, 그중 단 1종만 출판한 출판사는 2,741개사로 전체의 42.9%를 차지했다. 이 통계는 출판업계의 영세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독립출판과 자가출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현장의 한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문화체육관광부만이 아니라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부 같은 부처가 출판산업 관리에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문광부 관료들이 이 산업의 속살을 단기간에 이해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둘째, 출판계가 집중하는 시장은 어린이와 2030 세대다. 그러나 어린이 시장은 본질적으로 유아용품 시장과 연동해야 한다. 독서의 compelling reason보다는 부모의 돌봄 욕구가 작동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급자들은 여전히 이 시장을 ‘독자’로만 상정한다. 더구나 인구 급감이 분명한 현실에서, 분유처럼 단가 인상으로 대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은 생존 필수재가 아니기에, 대여나 구독 모델을 접목하는 것이 시급하다.


셋째, 2030 마케팅의 맹점이다. 진흥원의 리포트는 공급자 판매 데이터에 불과하다. 즉 구매자를 가늠하는 자료일 뿐, 구매자가 곧바로 독서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특히 한국처럼 현금 외 결제가 주류인 곳에서는 한계가 더욱 크다. 오프라인 POS 데이터는 카드사 식별 정보를 직접 연결하지 못한다. 온라인은 회원 정보, 오프라인은 캐셔의 추정 입력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구조 속에서 소비자 분석을 정밀하게 시도하기란 애초에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터들은 ‘확신’을 얻었다고 믿을 것이다. 국민 독서실태조사에서 성별 독서율은 여성(50.4%)이 남성(44.2%)보다 높고, 연령별 독서율은 20대(77.0%)가 가장 높다. 30대(64.1%), 40대(51.6%), 50대(43.9%), 60대 이상(21.4%)이 그 뒤를 잇는다. 마케터들이 2030을 선택하는 것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서 나눗셈의 함정, 특히 백분율의 함정을 직시해야 한다. 책을 팔려는 것이 백분율 그 자체라면 모르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실제 ‘가망 고객 수’를 구해 보아야 한다. 주민등록 인구 통계에 독서율을 대입해 계산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20대: 인구 6,197,486명 × 독서율 77.0% = 약 477만 명

• 30대: 인구 6,432,159명 × 독서율 64.1% = 약 412만 명

• 40대: 인구 8,054,772명 × 독서율 51.6% = 약 416만 명

• 50대: 인구 8,695,699명 × 독서율 43.9% = 약 382만 명

• 60대 이상: 인구 11,887,609명 × 독서율 21.4% = 약 254만 명


따라서 2030 독서 인구 추정치는 약 889만 명(20대 477만 + 30대 412만)이고, 40·50·60대 독서 인구는 약 1,052만 명(40대 416만 + 50대 382만 + 60대 254만)이다. 이 밖에도 대여 독서 인구가 높은 50대 이상은 별도로 고려해야 한다. 이 숫자들이야말로 ‘가망 고객’의 실제 규모다. 여기에 구매력을 더하면, 출판시장이 어떤 고객층을 겨냥해야 할지가 자명해진다.


그럼에도 출판계는 여전히 관성에 머물러 있다. 미래의 고객을 말하는 것은 배부른 부자의 여유라는 핑계로 여기어 진다. 당장의 생존을 위한 매출에 쫓기는 사업에서 10년, 20년 뒤의 마켓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최근 X세대 문화를 조명하는 어느 출판사의 시도가 유난히 반가웠다. 686에게는 철부지 취급을 받고, MZ들에겐 똥차로 불리지만, X세대야말로 지금 이 나라의 최대 납세자이자 구매력 있는 세대다.


카카오 브런치의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12회 동안 지켜보니, 주인공은 언제나 젊은 2030이었지만, 꾸준히 글을 쓰며 플랫폼에 정주하는 충성도 고객은 4050이었다. 물론 플랫폼의 생리는 로열티보다는 신규 유입이 효율적이기에, 고인물의 요구는 묵살되고 신참자의 환호로 채워지는 편이 쉽다. 그러나 출판은, 과연 같은 길을 걸어야 할까.


이런 생각의 여운 속에서 다시 나눗셈의 문제를 불러낸다. 백분율의 표면 아래에 실제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독자들이 숨어 있다. 그들을 보지 못하면 출판은 방향을 잃는다. 누군가 출판 시장을 정밀하게 분석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무슨 소용일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분석은 가능하되, 실행의 의지가 없다면 말짱 헛일이니까.


어쨌든,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출판의 길을 타진해 보려 한다. 계산의 함정을 넘어, 책을 둘러싼 살아 있는 얼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질문일지 모른다.


3600년 전 이집트에서 사용된 방정식.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나눗셈, 권력의 기호와 분할의 시학


나눗셈은 언제부터 인간이 사용했을까. 이 단순한 물음은 숫자와 기호의 기원만을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질서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분할하고, 나누어진 몫을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관계에 배치하는가 하는 문제를 묻는다. 다시 말해 나눗셈은 단순한 연산 기호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형식이자 권력의 언어로 기능해 왔다. 그것은 삶을 유지하는 분배의 원리에서 출발해, 곧 사회를 조직하고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통치의 기술로까지 확장되어 왔다.


인류의 선사적 기억을 불러오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냥에 성공했을 때, 고기의 분배는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는 의례였다. 고기를 어떻게 나누는가는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 누구를 존중하는지, 또 누가 주변부로 밀려나는지를 드러냈다. ‘나눔’은 평등의 형식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였다. 물론 그 안에는 협동과 공생의 윤리가 깃들어 있었지만, 동시에 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지가 은밀히 새겨졌다. 이처럼 나눗셈은 맨 처음부터 사회적 기호로 작동했으며, 공동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시간을 훌쩍 건너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문명으로 가보자. 기원전 2천 년 무렵의 점토판에는 곱셈과 나눗셈의 표가 남아 있다. 그들은 역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나눗셈을 수행했다. 나눔은 이미 계산 가능한 질서 속에 편입되었고, 농경과 세금, 토지의 분할과 밀접히 연결되었다. 이집트의 『아흐메스 파피루스』에는 몫을 단위 분수로 환산하는 방식이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수학의 발전이라기보다 곡물과 세금을 정확히 분배하기 위한 행정적 필요와 맞닿아 있었다. 곡식 한 톨도 어긋나지 않게 관리해야 하는 왕조의 통치 기술, 곧 권력의 언어로서의 나눗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수학은 이 흐름을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끌어올렸다. 에우클레이데스는 『원론』에서 나눗셈을 수론적 질서 속에 편입하고, 최대공약수와 서로소의 개념을 통해 체계화했다. 여기서 나눗셈은 단순한 분배의 도구를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질서의 원리로 정식화되었다. “어떤 수가 다른 수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단순한 연산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형식이 되었다. 수학은 세계를 나누고, 그 몫들을 새로운 질서 속에 배열하는 사유의 언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나눗셈이 권력의 기호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였다. 국가가 ‘인구’라는 집합을 관리 대상으로 삼으면서, 나눗셈은 사회를 수치화하는 기술로 편입되었다. 확률과 통계는 사람들을 하나의 분모와 분자로 환원시켰다. ‘실업률 5%’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얼굴들을 지우고, 통치 가능한 수치로 전환시킨다. 경제 활동인구 3000만 명 중 150만 명의 고통은, 단지 ‘5%’라는 얇은 기호로 응축된다. 이때 나눗셈은 현실을 단순화하고, 고통을 축소하며, 권력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장치가 된다.


퍼센트와 확률은 겉보기에는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시를 동반한다. 100명 중 10명과 1000명 중 50명이라는 두 집단을 백분율로 표기하면, 10%와 5%라는 수치만 남는다. 이때 ‘50명과 10명’이라는 절대적 규모의 차이는 사라지고, 5%와 10%라는 작은 기호로 의미가 희석된다. 숫자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읽는 방식이 사실을 변형한다. 백분율은 그 자체로 권력의 서사다. 무엇을 분모로 삼고, 무엇을 분자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풍경은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 나눗셈은 이렇게 현실을 재구성하는 권력의 시학으로 기능한다.


미셸 푸코는 이를 ‘통치성(governmentality)’의 문제로 읽었다. 근대 국가가 인구를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숫자로 나누어 보고, 평균과 백분율로 분할했기 때문이다. 개인은 더 이상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통계적 단위가 되었다. 나눗셈은 이 과정을 가능하게 한 기술적 장치였다. 개인의 삶과 죽음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엄한 사건이 아니라, 확률과 비율 속에 배치되는 기호로 환원된다. 권력은 바로 이 순간, 수학적 연산을 정치적 도구로 전유했다.


오늘날의 상황은 이 나눗셈의 권력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 준다. 알고리즘은 세계를 끊임없이 분할한다. 클릭 수와 조회 수, 체류 시간과 이탈률이라는 수치는 인간의 관심과 욕망을 미세하게 잘라내고,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속에 저장한다. 추천 시스템은 이 나눗셈을 기반으로 작동하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분할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알고리즘은 단순한 기계적 연산을 넘어, 인간의 감각과 선택을 조직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되었다. 나눗셈은 이제 단순히 몫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를 다시 배열하고, 인간을 통제 가능한 단위로 쪼개는 기술의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물음이 남는다. 나눗셈은 오로지 권력의 기호일 뿐일까. 아니면 다른 가능성도 품고 있을까. 분할은 불평등의 기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분배 없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나눔의 형식이 평등을 향하느냐, 권력의 착시를 강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숫자의 객관성을 넘어, 그 배후에 숨은 윤리를 직시할 수 있을 때만, 나눗셈은 권력의 도구를 넘어 공존의 기술이 될 수 있다.


결국 나눗셈은 두 얼굴을 지닌다. 하나는 생존의 원초적 윤리를 담은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은밀한 기호로서의 얼굴이다. 오늘날 확률과 백분율이 만들어내는 착시, 알고리즘이 수행하는 분할의 정치학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이중성을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언제나 숫자의 표면 너머를 읽어야 한다. 5%라는 기호의 뒤에 숨은 수백만의 고통, 평균치의 이면에 가려진 개별의 생애. 그것을 복원할 수 있을 때, 나눗셈은 단순한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윤리의 언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나눗셈의 기원은 단순한 계산의 역사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나누어 인식하고, 그 분할을 통해 권력과 윤리를 어떻게 조직해왔는가의 역사다. 그것은 곧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수학과 정치, 통계와 윤리가 얽혀 있는 장대한 이야기의 일부다. 나눗셈은 숫자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은유다. 그리고 그 은유를 해독하는 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여전히 절실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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