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5 부동산 대책에 붙인 여러모로 짧은 생각
‘초미의 관심사’라는 말을 붙이기에 이보다 더 적확한 단어가 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단연 ‘집값’이다. 정치권은 ‘주거 안정’, ‘부동산 경기’, ‘시장 활성화’라는 그럴듯한 언어를 내세우지만, 대다수 시민의 귀에는 이 말들이 모두 ‘집값’으로 들린다. 생존과 욕망, 불안과 희망이 한 단어에 교차하는 지점.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집값’이 갖는 의미다.
‘초미(焦眉)’라는 말이 본디 ‘눈썹에 불이 붙은 듯 다급한 모양’을 뜻하듯, 사람들의 관심은 절박하게 타오르지만, 역설적으로 시장은 언제나 반대로 움직인다. 기대가 커질수록 거래는 멈추고, 희망의 언어가 나올수록 곧 절망의 곡선이 따라붙는다. 정책은 시장의 뒤를 쫓기 일쑤이고, 언론은 DSR, LTV, 상한제, 종부세 같은 낯선 약어와 숫자들의 미로 속에서 사람들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집값’은 모두의 화제이지만, 정작 ‘부동산 경제 이야기’는 아무도 온전히 듣지 않는다. 너무 어렵고, 너무 멀고, 어쩐지 말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거의 모든 층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정책 실패를 수치로 증명하려 들었고, 시민들은 그 체감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결과는 냉혹했다. 촛불의 정당성이 부동산 앞에서 흔들렸고,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위기조차 정치적 방패가 되지 못했다. 결국 ‘집값’은 정권 교체의 결정적 동인이 되었다.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 역시 ‘집값’을 다루되 그것을 다시 ‘부동산 정책’으로 제시했다. 규제 완화, 세금 인하, 대출 확대 ― 모두 경기 부양의 전형적 조합이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마치 불황기에 쓸 카드를 호황기에 꺼내 든 듯한 모순이 있었다. 그 정책들은 일시적 반등을 유도할 순 있었으나, 시장의 구조를 바꾸지 못했다. 정책의 효과가 아니라, 시장의 관성에 기대는 양상이었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 곧 ‘집값’은 이미 ‘경제’의 언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문화적 현상이자 집단 심리의 거울이며, 세대 간 불평등 구조와 도시의 욕망 구조가 복합적으로 얽힌 사회문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여전히 통계와 지표의 문법에 갇혀 있다. ‘집값’을 오직 경제의 프레임으로만 읽는 한, 문제의 근원에는 닿지 못한다. 이 영역은 심리학, 사회학, 인문학적 사유가 함께 개입해야 하는, 복합적 진단의 대상이다.
'집값'은 욕망과 절망 사이의 현실
‘집값’은 결국 욕망과 절망 사이의 현실이다.
누군가에겐 생애의 꿈이자 자존의 상징이고, 다른 이에게는 불평등의 증표이자 생존의 압박이다. 시장의 수치는 그 욕망의 온도를 감히 측정하지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집값’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 그것은 풍족함 때문이 아니다.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고, 자식들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라 믿는다. 주거의 지출을 ‘비용’으로 볼 것인가, ‘자산’으로 볼 것인가의 논쟁 속에서 나는 그것을 일종의 ‘기회비용’으로 여긴다. 삶은 결국, 소유가 아니라 거주하는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33849
"미친 듯이 오르던 주택 가격이 주춤하고 있다. 가격 상승률이 둔화하고 가격이 하락하는 지역도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집값이 진짜 떨어지나요?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답을 들어도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향이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집을 가지고 있다면 집값은 절대 떨어질 수 없다. 내 집이 없는 사람들은 집값이 떨어질 수 있다고, 아니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속 답이 정해진 상황에서 집값을 전망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기사 본문 중-
이광수 애널리스트는 이런 이야기도 다른 칼럼에서 곁들었다.
"주택 가격이 폭등하자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정책을 발표했다. 분명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정책 탓에 집값이 급등했다는 이야기는 아이스크림이 잘 팔려서 에어컨도 잘 팔린다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대로 박근혜 정부에서는 스물한 번에 걸친 정책을 발표하면서 부동산 규제를 풀고 대출 규제를 완화해 줬다. 심지어 빚을 내 집을 사라면서 적극적인 부동산 부양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주택 가격은 하향 안정됐다. 그렇다면 빚내서 집을 사라는 정책이 집값을 안정시켰던 정책이었을까?"
이처럼 '집값'은 경제의 이론, 시장의 법칙, 기타 연구로도 쉽게 전망, 분석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왜 그런지 아주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정말 집값이 떨어지기를 원할까?"
"누구의 집값이 떨어지기를 원할까?"
흔히 주택시장을 ‘되먹임(feedback)’ 시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무엇의 되먹임인가. 부동산 시장을 범주로 묶는다면 그것은 ‘투자시장’이다. 그렇기에 투자시장의 본질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투자시장은 피드백으로 움직인다. 투자화된 시장의 참여자들은 되먹임 현상을 통해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한다.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근거로 판단하기 때문에, 정책이 의도한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컨대 매물을 늘리기 위해 보유세를 강화했지만, 오히려 시장의 매물이 감소하는 현실이 그렇다.
투자시장에서의 피드백은 대부분 바람과 욕망에 의해 각색된다. 부동산, 특히 주택시장은 그 현상이 두드러진다. ‘내가 팔 집은 오르고, 내가 사고 싶은 집은 내렸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욕망이 수요자와 공급자의 피드백을 윤색한다. 이미 마음속에 결론을 정해 둔 채 시장을 바라보니,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설계된 정책이 예측과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이 되먹임의 굴레 속에서 무엇을 조정할 수 있을까.
내 집만 오르면 좋을 저마다의 ‘집값’
지난 정부는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하려 했다. 거래가 활발해지면 ‘정상’에 수렴한다는 고전적 시장 균형론을 신뢰한 듯했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에서 피드백을 기반으로 한 의사결정 구조, 정치 과정에서의 이해관계, 시장 종사자들의 도덕적 해이 등으로 인해 정책의 실제 영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부동산은 경제가 아니다’라는 단언이 무리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라면 피드백을 조정하거나 유도할 장치가 존재하고, 정치적 견제와 도덕적 해이에 대한 규제가 구조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은 그렇지 않다. 거래의 대부분이 국가 거시지표에 포착되지 않는 ‘중고거래’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가의 골동품처럼 욕망과 기대가 거래를 지배하는 시장이다.
GDP에 영향을 미치는 주택 관련 활동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주거용 고정 투자(Residential Fixed Investment, RFI). 주택 건축, 다세대 건물 개발, 리모델링 등이 이에 해당하며, 중개 비용 또한 포함된다. 둘째는 주택 서비스(Housing Services). 세입자가 지급하는 임차료와 자가 주택의 전가된 임차료, 그리고 관리비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나머지 거래, 곧 시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주택 매매는 ‘고가 중고품’의 거래에 가깝다. 국가 경쟁력과 무관해 보이는 탓에 제도적 개선의 동력도 미약하다. 미국처럼 임대와 리모델링이 일반화된 경우 GDP의 17%를 차지하지만, 한국은 천조 원에 육박하는 주택 거래 시장이 국민총생산에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동산 시장은 거시 지표인 ‘가계 부채율’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집값 안정’이나 ‘경기 활성화’보다는 국가의 금융 건전성이 우선 고려되는 까닭이다. 오늘, 2025년 10월 15일 발표된 대책 또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욕망의 제어를 국가의 경기 지표로만 판단하는 시도. 시장의 반응이 냉담할 수밖에 없다. 상승세를 꺾겠다는 의도만 보일 뿐, 그 이면의 구조적 질문은 부재하다.
진보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저평가받은 이유도 여기 있다. 현상의 본질에서 핀트가 빗나간 것이다. 경제학자의 분석보다 ‘한국에서 자가 주택이 의미하는 사회심리적 상징’을 탐구하는 접근이 더 설득력을 갖는 까닭이다. 욕망과 피드백을 다스리는 방법은 경제정책이 아니라, ‘주거 소유와 비용’에 대한 사회학적, 소비심리학적 고찰 속에서 찾아야 한다.
뉴스가 떠들면, 새로운 정책의 기대감으로 매물이 줄고 가격이 다시 얼어붙는다. 그러나 바람과 대세에 기대는 투자의 습속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집은 주식이나 코인처럼 사고팔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집을 소유할 것인가, 사용할 것인가에서부터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박탈감을 느낀다’는 2030 세대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세대적 감정으로 포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이전 세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 주체였고, 지금의 세대가 더 많은 자본과 기회를 필요로 한다는 분석은 현상의 진단일 뿐이다. 그 세대가 바로 윗세대가 만들어낸 부동산 부가가치로 양육되고 교육받았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세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다.
욕망을 제어하기보다 부추기는 세대론의 담론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의 장래희망을 들었다. 스타트업을 해 조 단위의 돈을 벌고, 롯데월드타워에 사무실과 집을 갖는 것이 목표라 했다. 솔직하다 못해 애처로운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부추긴 욕망의 설계도를 만든 건 기성세대다.
그래서, 통렬한 반성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