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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힌 그늘 위의 얼굴들

캄보디아 컴파운드 범죄에 얽힌 청년들

by 박 스테파노

그들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말이 무심하게 흘러나올 때, 우리는 먼저 그 말의 그림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불빛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감금된 공간, 채무의 올가미, 통제된 일상 속에서 생존을 위한 말과 행동을 수행한 자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쉽게 그들을 ‘공범’이라 부른다.


최근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나는 누군가의 재산이었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캄보디아 내 이른바 ‘스캠 컴파운드’라 불리는 범죄 단지들의 실상을 폭로했다(Amnesty International, 2025). 보고서에 따르면 최소 50여 곳 이상에서 인신매매, 강제노동, 폭행, 구금이 자행되고 있으며, 피해자 대부분은 채용 사기나 빚의 강요로 현장에 끌려온 이들이다. 그들은 감시와 폭력 속에서 사기 전화를 걸고, 가짜 메시지를 보내며,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야만 하루를 버틴다. 이 끔찍한 역설 앞에서 우리는 질문한다. 그들은 피해자인가, 아니면 범죄자인가.


국제연합 인신매매 방지 사무국은 ‘불처벌 원칙’(Non-Punishment Principle)을 명시하고 있다. 인신매매 피해자가 강압이나 기만, 폭력으로 인해 범죄행위를 강요당했을 경우, 그 행위에 대한 형사 처벌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유엔 마약범죄사무소·ICAT 공동문서, 2019). 인간의 행위 책임은 ‘선택 가능성’을 전제로 하지만, 폭력 아래의 선택은 더 이상 선택이라 부를 수 없다.


국제이주기구 또한 이 원칙을 재확인하며, 강제된 범죄행위로부터 생존한 이들을 체포나 기소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증언자이자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은 인도주의의 원칙을 법의 언어로 되살리는 최소한의 윤리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피해자인가 피의자인가. 문화일보 캡쳐


그러나 현실의 경계는 늘 흐릿하다. 일부 사례에서는 감금이나 폭력의 직접적인 증거 없이 자발적으로 가담한 인물들도 확인된다. 로이터 통신은 한 한국인 선교사의 증언을 인용하며 “캄보디아 사기 단지에 억류된 한국인 중 일부는 완전히 무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전했다(Reuters, 2025.10.17). 이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정이 아니라 ‘맥락의 해석’이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구조적 강제와 생존의 필요 속에서 발생한다. 범죄에 ‘가담’한 손이 실제로는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없는 채찍 아래에 있었다면, 그 손을 향한 비난은 윤리의 잣대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 된다.



얽힘의 윤리 ― 피해자와 세대의 경계에서


캄보디아에서 드러난 인신매매형 복합범죄는 단순한 범죄 구조를 넘어선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엉켜 있는 이 사건은, ‘억류’와 ‘가담’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대칭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일자리나 기회를 찾아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었으나, 도착한 그곳은 시스템화된 착취의 공간이었다. 구금과 폭력이 일상화된 집단 컴파운드 내부에서,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범죄의 말단을 수행하는 손이 되었다.


이 모순된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그들이 범죄를 인지했음에도 탈출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한 공포 때문만이 아니다. 경제적 절박함, 사회적 단절, 그리고 ‘기회’라 불리는 유혹의 언어가 이미 그들의 선택을 포획해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피해자이자 피의자라는 이중적 정체성은 도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강요받는 구조의 문제다.


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근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등지의 온라인 사기 조직에는 한국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심지어 현지 청년까지 동원되고 있다. 이들은 “높은 급여의 IT 직종”이라는 미끼 광고에 속아 채용되지만, 곧 감금되어 온라인 사기 행위를 강요당한다. 이중 일부는 다시 ‘채용자’로 돌아서 타인을 포섭하는 역할을 맡는다. 구조적 폭력이 개인의 생존 본능과 교묘히 결탁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가진 윤리의 경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목도한다. 폭력의 피해자는 언제든 가해의 손이 될 수 있으며, 가해의 손 또한 불가항력의 피해 아래 놓여 있다. 이러한 ‘얽힘의 윤리’는 근대적 도덕 판단의 이분법을 무너뜨린다. 누가 선이며 악인가, 누가 구제받을 자이며 단죄받을 자인가를 구분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남는 질문은 단 하나 ― 우리는 이 얽힘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민해야 하는가.


영화 <보이스>의 한 장면. 수필름 제공



구조의 전이 ― 청년과 일자리의 문제로


이 문제는 멀리 있는 타국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한국 사회 안에서도 비슷한 구조적 억류의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이름만 다를 뿐, 그 본질은 동일한 착취의 체계다. 청년의 노동 현실이 그렇다.


최근 논평들 가운데는 캄보디아식 강제노동의 구조를 청년 일자리 문제와 접목해 읽는 시도가 보인다. 양자는 전혀 다른 맥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동일한 동인 ― 경제적 생존을 강요하는 시스템의 폭력 ― 아래 놓여 있다. 청년들은 더 이상 노동을 통해 생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존을 위해 의미 없는 노동을 감내한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신화가 되어 가고, 시스템의 고도화는 오히려 인간의 자리를 축소시킨다.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효율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효율의 언어는 언제나 인간의 잉여를 전제한다. 인공지능, 자동화, 플랫폼 경제가 확장될수록, 노동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알고리즘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청년 세대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재편된다. 창의성, 감수성, 판단력 같은 인간적 능력조차 생산성의 단위로 환산된다. 그 결과, 노동의 존엄이 아니라 ‘고용 가능성’이 청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 비극을 단순히 기성세대의 ‘탓’으로 환원하는 세대론적 논의는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일부 담론은 기성세대가 모든 부를 독점하고, 청년은 구조적으로 배제되었다는 피해서사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조는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다. 지금의 기술 사회, 지금의 자본 구조, 지금의 소비 질서는 기성세대가 의도적으로 만든 폭력이 아니라, 근대 이후 세계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기술적 숙명이다.


영화 <시민덕희>의 한 장면. 씨제스 제공


기성세대가 구축한 사회 인프라와 제도, 문화적 자본을 ‘독점의 흔적’으로만 읽는 것은 반쪽짜리 서사다. 그 안에는 근대의 불안과 싸우며 생을 꾸려온 누군가의 땀과 상처, 시간의 축적이 있다. 그것을 단순히 ‘기득권의 성벽’으로 환원하는 일은, 결국 역사의 복잡성을 무화시키는 폭력이다.


청년 세대의 분노와 박탈감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 감정이 ‘본전심리’로 변할 때, 즉 잃은 것도 빼앗긴 것도 아닌데 이미 박탈된 자로서 자신을 규정할 때, 그 시선은 역으로 스스로를 무력화시킨다. 사회의 변화를 ‘기성의 과실’로만 읽는다면, 결국 청년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기술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세대의 전환과 감정의 정치학


세대론이 과열되는 이유는 감정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구조적 불평등을 ‘정치적 박탈’보다 ‘존재적 모멸’로 느낀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사회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감각이 더 깊은 상처로 남는다. 그래서 세대 담론은 언제나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정동의 언어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 감정의 정치학이 지속될수록, 사회는 구조의 문제를 감정의 영역으로 밀어넣는다. ‘청년이 분노한다’는 서사는 곧 ‘청년이 미숙하다’는 역서사로 전환되기 쉽다. 그리하여 본질적인 제도 개혁 대신, 세대 간의 감정적 갈등만이 남는다.


오늘의 청년 일자리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의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 구조의 변환, 기술 시스템의 고도화, 자본의 초집중화가 만들어낸 구조적 변동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세대의 탓’이 아니라 ‘시대의 조건’ 속에서 읽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청년이 힘들다”, “기성세대가 나빴다”라는 낡은 이분법의 틀 안에서만 사고한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구조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데서 시작된다.


구조의 문제다. 조선일보 캡쳐



다시, 피해자성의 자리로


결국 이 모든 논의는 다시 피해자성의 문제로 되돌아간다.

캄보디아의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그럼에도 타인을 착취해야만 했던 것처럼, 오늘의 청년도 생존을 위해 타인의 경쟁력을 밀어내야 한다. 시스템 속 인간은 언제나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윤리를 요청받는다. 그것은 ‘누가 피해자인가’를 묻는 윤리가 아니라, ‘피해가 재생산되는 구조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를 묻는 윤리다. 청년과 기성세대의 대립을 넘어, 인간이 기술과 자본의 속도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의 생을 감각할 수 있는 사회적 감응의 언어가 필요하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사람들, 분노하면서도 무력한 청년들, 생존하면서도 죄책을 느끼는 세대들. 그들의 이야기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서로 다른 이름들이다.


가장 깊은 어둠은 타인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때 비로소 온다


‘컴파운드형 범죄’에서 드러난 인간적 얽힘을 세대 담론으로 확장하여, 피해자성과 책임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의 윤리적 위치를 성찰하려는 비평적 시도가 필요하다. 즉, 누가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얽히게 만들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컴파운드의 억류자들과 청년 세대의 불안은 같은 질문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선택할 수 있었는가.”


폭력의 구조 속에서 선택이 봉쇄된 자와, 기술의 속도 속에서 방향을 잃은 자는 본질적으로 같은 실존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 생존의 한계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함을 윤리의 눈으로 감싸 안을 때, 우리는 사회의 새로운 중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유의 끝에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피해자이자 생존자, 타락자이자 증언자, 그리고 또 다른 시대의 노동자들. 그들의 이야기는 어둠의 언어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을 향해 묻고 있는 존재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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