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인문, 사회과학 서점의 의미
연세대 앞의 유일한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오늘의 책은 1985년 개점해 신촌 대학가의 문화공간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그곳은 단순히 책을 고르는 장소가 아니었다. 세미나의 커리큘럼이 만들어지고, 시위 중에는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이 가방을 맡기던 은신처였다. 한 시대의 젊음이 스쳐 지나가며, 그들의 생각과 숨결이 뒤섞였던 작은 공간이었다.
오늘의 책은 서점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름이지만, 내게는 여전히 인생 책방으로 남아 있다. 보통 서점이라 하면 교과 전공서나 자기계발서, 혹은 베스트셀러의 인기 작가 책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아니면 사회과학·인문 전문도서를 찾는 책벌레들의 아지트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책은 1980~90년대 신촌의 청춘들에게 조금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별다방과 콩다방은 고사하고 커피 전문점이라 해봤자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그때 신촌에는 독수리다방이 있었고, 주문과 동시에 짜장이 나왔던 전설의 초원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곳과 함께 신촌의 3대 핫플레이스라 불리던 곳, 꼭 알아야만 했던 필수 장소가 바로 오늘의 책이었다.
휴대전화는커녕 삐삐조차 없던 시절, 중요한 약속이나 급한 공지, 혹은 시간을 메우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오늘의 책을 향했다. 공책이나 수첩, 리포트 용지를 부욱 찢어 벽에 다닥다닥 붙여놓고 당일의 만남을 도모하던 그 시절, 오늘의 책은 약속의 메모와 전갈이 모이는 공중의 사서함이 되었다. 중요한 약속의 변경, 연인과의 알콩달콩한 교신, 공강 시간의 쉼터, 복학생에게 전해지는 정보, 외로움을 피하려는 친구들의 흔적이 그 벽에 가득 남아 있었다. 신촌역 앞의 홍익문고가 계획된 접선지였다면, 오늘의 책은 소위 번개의 랑데부 포인트였다.
오늘의 책이 처음부터 골목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의 오늘의 책은 연세대 앞 신촌로터리로 향하는 도로변에 있었다. 뒷문의 약속판에는 매일 밤 수백 건의 메모가 붙었다. 하지만 삐삐가 보편화되고,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약속 쪽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SK텔레콤으로 넘어갔다. 훗 날 찾아간 그곳에는 T브로드밴드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여전히 건재했지만, 그 이름 아래에는 오늘의 책이 남긴 기억의 잔향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뉴밀레니엄 시대가 열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학교 안에 남아 있었다면, 학번이 00, 01로 바뀐 것, 그리고 대학에 외부 자본이 투입되어 생협 공간에 케이터링 업체가 들어오고, 주차비를 받는 게이트가 생긴 것을 보며 변화의 방향을 감지했을 것이다. 교문 밖의 풍경은 더욱 급격히 바뀌었다. 대부분의 대학 앞은 본래 주거지구였으나, 개발의 논리로 상업지구로 변경되면서 건물들이 솟아오르고, 프랜차이즈 요식업체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그림자 아래, 작은 서점과 다방들이 하나씩 문을 닫았다.
그 후폭풍은 대학 앞 작은 가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독다방이 독숍으로 바뀌고, 작고 이야기들 가득하던 공간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의 표징이 되었다. 그 속에서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또한 버티지 못했다. 한때 140여 개가 넘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손에 꼽을 만큼만 남았다. 오늘의 책, 장백서점, 논장, 새날서점—이 이름들은 이제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 서점의 김동운 대표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하는 인문사회과학은 물질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힘을 만드는 것이다. 변화를 위해 필요한 이론과 지식, 실천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경제경영서 분야에서 흔히 말하는 ‘인문학’은 결과적으로 지금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장식물이다. 자본 중심의 잘못된 사회질서에서 오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한, 그런데 필요한 인문학이라고 할까.”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서점은 내게 언제나 ‘공간의 인문학’이었다.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생각과 세상을 잇는 통로였다. 새 책의 콩기름 냄새는 내게 일종의 의식이었다. 전자책과 온라인 주문이 일상화된 시대에도, 나는 여전히 서점에 간다. 그곳에는 시간이 묻어 있고, 생각이 켜켜이 쌓여 있다. 김조한의 노래처럼 운동을 하고, 일상을 보내고, 넷플릭스를 보다가도, 주말이면 서점에 가고 싶어진다. 낯선 세상을 보여주는 설렘의 공간이 바로 서점이다.
지금 서점의 모습은 양극의 모습으로 쏠려 있다. 대형서점이 점유한 광역의 위용의 모습과 독립서점이라 일컫는 다양한 주체들의 숨결로 말이다. 물론 정보통신기술과 소매습관의 변화로 온라인에서 도서를 구매하는 비율이 높기에 오프라인 상점으로서의 서점은 점점 귀한 곳이 되어 간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특수성에 대한 고집들도 많이 꺾여 있는 모습에서 책과 출판의 미래도 답답함을 느낀다. 자기계발서와 참고서가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기형적 출판 시장에서의 서점은 어떻게 자리잡아야 할까.
요즘, 정치나 사회적 실천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냉소가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믿는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 또한, 이름 남기지 않은 누군가의 작은 실천과 고민, 그리고 일상의 결심이 쌓여 만들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한 장식으로서의 인문학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저항과 사유의 사회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을 지지한다. 그것이 오늘의 책이 내게 남긴 가장 오래된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