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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09. 2015

고지전 (2011)

있어야 하는 것이 없는 전쟁 신파극

한국전쟁의 마무리 단계인 정전협정 중에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과 전투는 계속이다. 지도상 1mm의 땅을 더 얻기 위해 동부전선 애록고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는 고지전이 일상이다. 애록고지 탈환과 수성의 선봉에는 놀라운 전투력으로 미군에게 ‘악어부대’라 불리는 한국군 중대가 있다. 이 부대에서 중대장의 원인불명의 사망 보고와 더불어 북한군과 내통한다는 첩보가 전달되고, 방첩부대 장교인 강은표는 이와 같은 사건의 진상파악을 위해 동부전선으로 파견된다. 그곳에서 전쟁 초기 헤어 졌던 친구 수혁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예전의 눈물 많고 겁에 질린 친구 수혁이 더 이상 아니다. 놀라운 전투성과로 인해 2년 만에 이등병에서 중위가 된 그의 계급장이 함축적으로 말해 주듯이 그는 ‘누군가 죽기 위해 기도하는’ 전사가 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악어 중대에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과 알 수 없는 수상한 그늘이 있다.

진통제 없이는  하루하루 넘기기 어려운 독기 어린 소년의 얼굴 임시 중대장 신일영 대위, 정신분열적 증세에도 불구하고 부대에 계속 남아 있는 노병, 그리고 부대원들의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 과연 이 전쟁이 그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2011년 글입니다.)


영화 <고지전>은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으로 인한 휴전이 되기 전 7개월을 다룬 이야기다. 1951년 6월 이후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밀물 썰물이 드나들 듯 일 년 남짓한 남하와 북진의 일진 일퇴를 끝으로 전쟁은 한반도 허리에서 팽팽한 교전상황으로 2년 2개월을 보내게 된다. 영화는 이 교착상태의 전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시작하여 한국전쟁을 바라 본다는 점에서 이전의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와는 차별 점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차별 점은 여기까지다. 미시적 고지전 전투 관점으로 거시적인 전황,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의 무의미성을  이야기한다는 소재적 참신함만이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다.



1. 영화적 미학이 없다.


제작진은 <고지전>이 영화미학적 스타일을 최대한 멀리한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톤이나 편집의 진행, 전투신의 프레임은 잘되었다고 하는 전쟁영화에서 많이 가져 왔다. 남의 것을 가져와서 잘 사용하거나 변용의 힘으로 일보 진화시킨다면  박수받을 일이다. 하지만, 연출의 힘의 문제인지 제작진의 체력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영화가 가지는 미학적 탄탄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의 설명이 필요한 시기에 삽입되는 조악한 자막의 삽입도 눈에 거슬렸고, 모든 대사는 주고 받음의 2차원적 연극적 대사였으며, 인물에 대한 샷도 대사 칠 때는 바스트 샷 일변도이고 군중씬에서는 조감샷으로 밋밋한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다. 감독의 이야기로는 리얼리즘이 이 영화의 미학이라 최대한 건조하고 팍팍하게 찍었다고 하지만, 3년 넘게 전장에서 야생의 생활을 한 어린 중대장의 클로즈업에선 미백 치아와 관리 좀 받았을 법한 번질거리는 얼굴이 등장하고,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2초’ 차태경의 모습은 설정 화보를 찍으러 온 모델과 다르지 않았다.


감독의 변 대로 ‘영화적 미학’이라는 것을 멀리 했다고 하면, 결국 리얼리즘에 입각한 사실주의적 촘촘함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꼬장스러움이 유지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패했다. 왜냐하면 미학을 버리고 택해야 하는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2. 내러티브가 없다.


지난 10년 동안 흥행과 작품성의 두 마리 토끼 사냥을 위해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들이 스크린에  올려졌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이름으로 기억에 남는 <태극기 휘날리며>, 무거움 일변도인 전쟁 소재를 풍자적 판타지로 그린 <웰컴 투 동막골>, 그리고 똥꼬진 차승원의 하얀 인민군 장교복만 머리에 남는 <포화 속으로>가 그것이다. 실제 하는 역사 속의 전쟁, 그것도 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는 대의적 의미에서 일맥상통하기 십상이다. 역사적 관점이 유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미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심판과 반성이라는 잣대가 그 전쟁에 대하여 익히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전쟁영화의 유사성에 대하여는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전>에는 자신 스스로 이야기하는 내러티브, 즉 서사구조의 완결성 없다. 일부 매체의 평론가들의 극찬과는 정반대로, 이 영화가 가진 서사적 구조는 조잡하고 엉성하다. 형제애라는 멜로물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손발 오그라드는 신파를 우겨 넣어 리얼리즘의 틀을 스스로 벗어 버렸다. <웰컴 투 동막골>의 ‘소통’의 판타지 우화를 차용하여 전쟁의 무거움을 ‘따뜻한  배려’라는 동화적 이야기를 끼워 넣고 있다. 그뿐인가 어린 학생과 익명의 군인들의 무의미한 죽음의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포화 속으로>에서의 반전 메시지 일변도의 윽박지름이 묻어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둥 떠 있고, 배우들의 연기는 따로 논다. 마치  그동안  검증받은 한국전쟁 영화의 주요 키워드에 대한 오마쥬인 것처럼, 아니면 다중적으로 계산된 보험장치처럼 이야기는 짜 집어 있다.


시나리오를 집필한 박성연 작가의 전작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 DMZ>과도 상호 텍스팅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상호 텍스트적 의미라기 보다는 소재의 차용에 가까워 보인다. 더군다나 작가의 이야기 방식의 습관(DMZ, 선덕여왕)처럼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한 줄, 혹은 한 단어에 인물과 감정을 확장시키는 구조라 그 서사적 구조 안에서는 인물조차 찾아 내기 힘들다.


3. 인물이 없다.


영화 <고지전>의 캐릭터는 넘쳐 난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에서는 그들의 지난 필모그래피 덕으로 설렘과 기대감을 유발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인물도 배우도 머리와  가슴속에선 다 사라지고  없어진다. 시점 제공자이자 화자라고 할 수 있는 강은표(신하균)의 경우만 보더라도 설명이 어렵지 않다. 은표는 극히 평면적인 인물이다. 전쟁 이전에 모범적인 의대생이었을 것이고, 전쟁 중에도 본인의 사명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한다. 그와 같은 은표가 계속되는 고지전이 진행됨에 따라 가치적 판단의 기준이 갑자기 변화하고 친구 수혁의 일탈적 행동도 급작스럽게 이해하며 동감하게 된다. 과정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의 변화 뒤에도 평면적으로 남을 뿐이다. 아마  무의미하게 뺏고 빼앗기는 죽고 죽이는 전투의 장면을 보여 줌으로써 감정의 입체적 변화를 추론하라는 의도일터인데, 그러기에는 서사적 구조와 이야기의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


수혁(고수), 신영일 대위(이제훈)로 대변되는 전쟁이 만든 기형적 전사들의 모습도 그러하다. 영화 후반부의 그들의 변모할  수밖에 없었던 ‘포항탈출 사건’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그들의 하이드적인 변모를 설명하고 당위를 부여해 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또한 그 씬의 미학적인 탄탄함과 서사구조의 얼개적 완성도가 취약하여 희미한 고리를 당겨 붙이기 어렵다. 그래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잉된 에너지가 보이고, 억지 같은 공감대 형성을 요구하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안되며 그저 울고 또 운다. 후반부에 가서는 예비군 교육영화처럼 반전 메시지를 반복하고 도돌이표 질 하고 또 재생하고 있다. 물론 고지전의 주인공은 개별적인 인물들이 아니고 애록고지라는 상징적 공간일 수도 있고, 고지전이라는 상황적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을 찾아 내어 쫓아 가기엔 범인의 지식과 상상력의 다리는 너무나도 짧은 모양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힘은 중요한 것이다.


4. 작가적 치열함이 없다.


열심히 한 것과 잘 한 것은 매우 차이가 나는 이야기이다. 열심히 하는 일은 잘 못된 일이거나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장훈 감독의 촘촘한 작품 발표(영화는 영화다, 의형제)의 폐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작품의 중반부터는 답답함과 내려가지 않은 체증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뒷 힘이 없는 연출이고 중심을 잃은 편집이었다. 근본적인 이유가 감독의 역량에 대한 이야기라고 묻는 다면, 그렇다고는 확답하지 않겠다. 그는 이미 여러 영화 활동으로  인정받는 연출가이기에 그러한 평가는 무의미하다. 신인대열에 있는 감독에게 슬럼프라는 말도 가혹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문제는 이영화가 쇼박스라는 대형 제작배급사에서 기획한 130억 이상 투입된 ‘금전적 대작’ 즉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입장을 초기부터 포지션 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CJ에 밀려 그 힘이 미약해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배급과 스크린을 다수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쇼박스 배급사에서 주도한 기획물의 시작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필요한 시점에 납기 지키듯 걸어야 했을 것이고, 그들의 이전 흥행작의 마케팅적 레퍼런스라는 것을 그대로 리플 리케이션하라고 은연중에 아니면 대 놓고  주문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배급사가 보는 영화는 문화예술적  창작물이라기보다, 재화를 만들어 내는 상품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소수의 스크린에서, 작가적 치열함만을 가지고 정면 승부하는 사형-사제-사부의 영화들과 경쟁하여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도 대단했을지도 모른다. 혹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진실이 어떠하든 그 부담감은 장훈 감독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

요즘 영화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괜찮은 영화,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수도권 75%, 지방 포함 60%의 스크린을 독점하여 4개의 블록버스터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하지만, 그 정도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10여 년 동안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린 한 땀 한 땀 그린 한국형 장편 애니메이션들은 조조 아니면 심야상영만 하는 세상이고, 저예산으로 고군분투하던 영화들도 변신로봇, 마법사청년, 폭주족, 전쟁신파극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예술영화 전문관은 운영유지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고, 배급사 찾지 못한 재기 발랄한 독립작품들은 프린팅 하기도 전에 창고로 갈 운명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영화의 현실이고, 조금 부풀려 판단하자면 한국문화의 현실인 것이다. (풍산개는 105개 관에서 7개 관으로 줄었다는 오늘 자 기사)


영화에서 악어중대의 전쟁터이자 주인공인 애록고지는 주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곳이다. 그런 전투가 2년 넘게 교착상태로  주고받고 있으니, 상황 자체로 처절하고 비극적이다. 현실에서도 공과를 초월하여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고지를 위해 오늘도 달리고 달리는 인생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러한 고지의 점령에 대한 노력이 우리 영화계에서는 보다 생산적인 노력으로 승화되었으면 한다. 자본의 힘이라는 무시 무시한 대공포를 국내 스크린의 점유라는 고지전에 쓰지 말고, 보다 진일보한 문화적 자산의 형성과 이를 가로막는 제도와 권력이라는 보다 높은 고지를 위해 사용하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에 자리를 박차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데에 기억에 남을 영화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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