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살아 간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사람들은 그러한 믿음을 신념이라 이야기하기도 하고 절대적인 신앙이라고 하기도 하며 때로는 가치관이고 세계관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사실이나 진실을 매번 담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그 믿음이라는 현상적 표현이라는 것은 때론 드세고 무섭기 까지 하다.
기초의원선거일 이었던 1991년 3월 26일, 도롱뇽을 잡으러 집을 나선 다섯 명의 초등학생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이들의 행방불명에 경군 합동 30만이나 동원되어 실종 추정지역 주변을 수색하지만, 아이들도 주검도 흔적도 찾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간다. 잊히는 미결 사건으로 덮어질 무렵, 특종에 모든 것을 건 다큐멘터리 피디 강지승이 지방발령으로 실종지역으로 오게 되고, 자신의 의견대로 개구리소년의 범인을 주장하는 범죄심리학 교수 황우혁, 아이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형사 박경식의 의기가 투합되어 다시 수사에 활기를 찾는다. 각각의 방식으로 사건에 다가서던 중 아이를 잃은 부모가 범인으로 지목되는데……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모태로 만든 영화 ‘아이들’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였고, 미제사건이며 공소시효가 만료된 일이라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의 흔적을 염두에 두고 보게 되었다. 촘촘한 사건 해결의 어려움과 인간적인 번민을 예상하고 시작한 영화는 한 인물의 등장각인으로 보다 무거운 사회 정치적인 내용으로 바라 보게 되었다.
영화 초반 범죄심리학 교수 황우혁은 '인지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 이론'에 대하여 강의하며 등장한다. 인지부조화 이론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 존재나 사실에 대한 과신으로 인하여 부조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흡연자들이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고 인지하지만 계속 피게 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건강에 좋지 않지만 스트레스 해소에는 좋다는 개인적 판단기준의 믿음이 부정적인 생각을 누르게 된다. 이러한 인지 작용의 부조화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확장되어 집단화될 때 더욱 부조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도 그 예로 1950년대의 종말 이론을 내세운 유사종교집단의 이야기를 내세운다. 교주는 특정일에 세상의 종말이 오니 그때를 대비하여 종교에 귀의하여 헌신하라고 신자들을 독려한다. 그런데 그 특정일이 되자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신도들의 반응이었다. 종말이 오지 않아 교주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현실을 인지하여 일상으로 복귀한 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미약하여 종말의 그날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헌금과 시간을 교주에게 내주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이러한 성향으로 서로 부딪히고 상처 주고받는다. 특종제일주의에 사로 잡힌 방송사 PD는 조작된 이전 다큐멘터리 작품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자극적인 특종을 찾게 되고, 아이를 포기 못하는 부모는 장난전화를 아이의 전화라 믿게 끔 만들어 수사상황을 유지한다. 아이들의 유해를 찾은 후 경찰 간부는 다가올 복잡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아이들을 자연사라고 기정 하고 수사하자고 부하직원을 다그친다. 바로 이러한 '본인들이 믿고 싶은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인지의 부조리를 낳고 사실과 망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이는 다시 사회적인 현상으로 '확증편향 - confirmation bias', '편향확증'이라는 믿음의 오류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많은 '확증편향'에 대한 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일부 유사종교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믿음으로 인한 일탈과 범죄도 보았고, 특정 과학 이론을 인류 구원의 매개라 선동하는 과학자에 대한 절대적인 추종도 보았다. 예쁜 아니라 정치적 선동에 실질적인 효과나 현상적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전쟁을 이야기하는 보수적 정치집단을 만나고, 계층 간의 대치를 조장하는 각종 '연합', '연맹'에서 활동하시는 어르신들도 볼 수 있고, 아이들 점심을 제공하자는 근본적 의무교육에 대한 입법을 포퓰리즘이라는 절대적 믿음으로 반대하시는 시장님도 볼 수 있다. 이뿐인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오도하며 남들의 믿음에 대하여 폄하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다수의 교회 사람들이 그러하며, 하느님의 뜻이라 멀쩡한 성당을 개 보수하는 일에 매달려 주일강론 준비가 어려운 불쌍한 가톨릭 신부도 그러하다. 물론 알라를 알기 이전의 사회는 모두 ‘성전’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도 그것과 닮아 있다.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근거 미약한 '믿음'의 드셈과 무서움을 접할 수 있다. 학예회 수준의 댄스와 노래를 립싱크하는 소년소녀들이 문화의 선봉대인양 부추기는 팬덤과 미디어들도 마찬가지이고, 군대의 폭력과 폭행의 방지를 군기기강의 재확립으로 정의하는 전투불능의 이 나라 군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비겁한 껍데기들을 생산하는 이 나라 교육도 그러하다. 그뿐인가 인성교육 한탄하며 교육제도 힐난해도 아들 녀석 시험지 결과를 옆집 아이와 비교하는 알량한 아비의 마음은 어떠한가?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믿고 싶은 유일한 것이 될 때, 거기에 약간의 권력과 약간의 재물과 약간의 잔머리가 더해질 때,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더러워지며 무서워진다. 우리는 역사의 기억과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와 세력의 무서움을 이미 경험해 보았다. 그런데 요즘 무서운 사람들이 자주 등장해서 불안하다. 안 해 본일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확신하는 정치 지도자의 신념 있는(?) 행보가 두렵고, 가난해 본 적이 없어서 더불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재벌들의 개똥 경제관이 그렇다. 그리고 자신에게 걸린 옷이 마치 자신 인양 우쭐 거리는 옷걸이처럼, 나불대기 바쁜 언론의 무한한 자기 믿음이 그러하다. 무서운 세상이 너무나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신념은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옳은 일이 아니고 진짜가 아니며 모두에게 위해가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그것은 신념이 아니다. 아집이다. 착각이다. 그리고 무시 무시한 준비된 폭거이다. 서로의 믿음이 충돌할 때 우리가 참고해야 할 것은 생각 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라는 안으로부터의 두드림이고, '상식'이라는 밖으로부터의 타이름이다.
(이분에 대한 믿음이 차라리 덜 위험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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