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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Feb 06. 2016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복수의 플롯으로 영화 말하기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1.

복수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눈뜨면 복수로 인한 개인과 집단의 뉴스로부터 시작해서, 눈감는 깊은 밤 복수를 소재로 한 막장 드라마까지 복수로 꽉 채워진 일상이다.


복수가 만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복수에 대해 왜 그토록 우리는 정서적으로 공감하는가? 


명확한 답변을 하기 힘든 의문과 질문들이다. 복수의 부작용과 그 병폐를 거론하며 해답을 찾기도 전에 우리는 일상에서 소소한 복수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복수와 용서에 관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그저 관념에 머물 뿐이다.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책 [복수의 심리학]에서, 복수심은 인간에게 잔혹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질병’이나 ‘독’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오히려 복수심은 인간이 진화하면서 겪은 사회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복수는 인류를 뜻밖의 위험에서 구해준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복수심과 그 행동의 시비에 대하여 고심하게 된다.


2.

최근 극장에 걸린 한국영화들에서도 복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꼭 복수가 주제가 아니더라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복수와 관련한 이야기를 담아내곤 한다. 2010년 하반기 이후 개봉작을 보더라도, 복수를 전면으로 내세운 영화는 <용서는 없다>, <파괴된 사나이>, <해결사>, <죽이고 싶은>, <이끼>, <황해>, <혈투> 등 노력들이지 않고 열거할 수 있다. 직접 소재는 아니더라도, 사건중심의 영화들은 대부분 모두 작고 큰 복수의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많은 영화들이 이처럼 복수와 관련된 이야기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작품적 상업적 목적에 대한 동시만족의 욕구 때문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영화, 문학작품, 혹은 다른 영역의 문화생산물이든지 대중에게 공개하는 순간 평가에 노출된다. 잘 되었다고 평가 받기 위해서는 작품성과 상업성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평가의 프레임을 거쳐야 한다. 영화의 경우 흥행의 성적과 영화제나 평단의 평가를 동시에 얻을 경우 소위 <잘된 영화>라 평가 받게 된다. 잘된 영화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잘된 콘텐츠>를 이야기한다.


<잘된 콘텐츠>는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공감되어 회자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또한 작품적인 완성을 위해 검증된 플롯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복수극의 플롯’은 <잘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검증된 장치라 여기게 된다.


이와 같은 ‘복수극의 플롯’을 대표 하는 영화 속에서 나타난 복수와 그 이야기의 양상을 살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와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악바를 보았다', '달콤한 인생'


3.

프란시스 베이컨은 복수를 ‘야생의 정의’라고 말했다. 복수심은 개인이 받은 감당하기 힘든 분노와 고통에서 시작한다.이러한 개인의 분노의 표출의 역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법과 규제라는 장치로 개인의 복수를 사회화 한다. 그러나 법과 규제가 정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당한 만큼의 피해를 되갚아 주려고 하는데, 이러한 정서가 바로 ‘복수극의 플롯’이다.


로날드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20가지 플롯]에서 복수극의 플롯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범죄, 끔직한 사건의 발생 – 복수계획과 추적 – 대결>


대표적인 복수극의 플롯에서는 전반부 ‘끔찍한 사건’ 부분에 많은 공을 들인다. 주인공이 범죄나 뜻밖의 사건으로 겪은 상처가 얼마나 끔직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표현하는 데에 많은 설명을 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또 하나의 복수극의 플롯은 후반부 ‘복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왜 끔직한 사건에 연루되었는지를 설명하기 보다 주인공이 복수를 계획하고 적대자를 찾아 나서고 맞서게 되는 일련의 복수행위에 중심을 둔다. 더 나아가 두 가지의 관점이 혼합, 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수극의 플롯에 따라 영화가 이야기 하는 복수에 대한 관점과 그 의미가 다르게 표현된다.


4.

대부분의 경우 복수극의 플롯은 등장인물의 의미 있는 탐색보다는 복수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기관이나 법/규제의 도구들이 적절하게 나서지 못하게 될 때, 개인 스스로가 나서서 복수를 실현한다. 곧 공공화된 복수의 해결은 다시 개인에게 되돌아 오게 된다. 복수를 행하는 자의 정서는 야생적이고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혼자 집행하는 정의이다. 그러한 복수극의 플롯은 독자나 관객의 정서를 자극하게 된다.


복수극의 대표작 중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는 복수의 당위성을 찾아 가는 이야기이다. 복수심이 왜 발생했으며, 그 복수심은 도덕적으로 얼마나 정당한가를 이야기 하는데 힘을 쏟는다. ‘복수심은 건강에 해롭다’라는 말을 뒤집 듯이 감독은 복수야 말로 개인의 정서적 건강에 이로울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정서적인 관객의 동조를 위해 감독은 신화나 고전의 원형을 차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영화 <올드보이>에서 쉽게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몬테크리스토백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미도가 인터넷에서 가끔 채팅을 하는 대화명 ‘에버그린’이 미도와 함께 있는 오대수에게 ‘몬테크리스토 백작, 더 넓은 감옥에서의 삶은 안녕하신지’라고 말을 거는 장면을 보아도 이 영화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의 모함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복수를 준비한 뒤, 자신을 파멸시킨 자들에 대해 응징을 가하는 이 소설의 기본 틀은 영화 <올드보이>의 전반부와 유사하다. 영화 <올드보이>는 그러한 복수이야기 고전의 틀에서 현대적인 상황의 설정과 이야기의 변용으로 관객들의 정서에 다가 선다.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어느 날 갑자기 납치돼 지독한 외로움에 환각까지 보면서 15년을 갇혀 있게 된다. 오대수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를 가둔 자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과 오대수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갖게 만든다. 특히,오대수가 감금되기 전의 모습이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의 일상의 모습과 닮아있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더 많이 오대수에게 공감하게 된다. 그런 감금의 세월이 끔찍했던 만큼 관객들은 오대수가 행할 앞으로의 복수에 동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개인적인 복수의 정당함에 대하여 한층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노동자 류와 애인 영미의 유괴계획은 그 자체로 이미 복수였던 것이다. 그들이 행하고자 했던 것은 다소 비약일 수 있지만 '사회에 대한 개인의 복수'라고 한다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개인에 대한 개인의 복수'였다. 사회에 대한 복수가 개인에게 가고, 개인은 사회에 대한 복수를 개인의 복수로 갚는다. 사회적인 복수와 개인의 복수의 엇갈리고 결국 복수라는 것은 개인의 것으로 돌아 온다. 그래서 복수는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객은 개인의 복수가 도덕적 정당성을 지닌다고 동조하게 된다. 현실에서 힘없는 개인에게 사회적인 복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의 문제는 사회적인 것으로 확대되기 마련이지만, 문제의 해결은 공론화 되지 못할 만큼 미미한 존재감으로 인해 개인의 것으로 돌아 온다. 결국 처절한 고통만이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가장 큰 고통과 분노가 사회적인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인은 그만한 힘이 없다. 복수하고 싶지만 개인의 힘으로서는 복수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복수는 방향을 잃고 다른 개인에게로 향한다.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개인간의 복수는 아이러니하게 사회적 동조를 받곤 한다.


이렇게 두영화는 복수극의 플롯 전반부인 ‘끔직한 사건’의 발생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인공들이 행하게 되는 복수의 계획과 추적, 그리고 대치적 상황에서의 해결노력의 구체적 방법이 중요함으로 다가 오지 않는다. 그들의 복수가 신체의 훼손이 되었든 가족이나 소중한 가치의 상실을 통한 정신적인 충격이 되었든지 그 방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5.

또 다른 복수극의 플롯은 ‘복수의 계획과 추적’에 초점을 맞춘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복수야 말로 얻을 것이나 남는 것이 없는 가장 소모적인 해로움이라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에서 복수의 정당성을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는다. 참혹하고 처절한 복수의 계획과 실행이 있을 뿐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 선우는 철두철미하고 깨끗한 일 처리로 보스에게 인정을 받는다. 적어도 조직 내에서 그의 입지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보스의 어린애인과 관련한 일들로 인해 보스의 미움을 받게 되고, 한 순간 제거의 대상이 된다. 혹독한 린치와 자신을 버린 보스에 대한 선우의 복수가 시작된다. 영화는 그런 선우의 복수에 대한 설명에 많은 공을 들이지 않는다. 참혹하고 공포스러운 복수의 과정이 화면을 꽉 채우게 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복수의 정당성에 관한 설명이 더욱 짧아진다. 국정원 요원 수현이 약혼자의 처참한 죽음을 접하고, 연쇄살인마인 장경철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저 복수의 계획이 시작되고 온통 벌건 핏빛으로 일관된 복수와 그 반대급부만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쩌면 이 두영화에서 복수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젊음을 바쳐 충성한 조직에서 중대사가 아닌 실수로 인한 버림받음(달콤한 인생)과 영문도 이유도 없는 살인마의 난도질로 인한 약혼자의 죽음(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분노와 고통은 긴 설명이 필요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의 공포와 박탈감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하면서 구차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들에는 고전이나 신화의 복수에 대한 원형적 대비가 없어도 그 정당성을 미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러한 ‘끔직한 사건’의 발생과 그것에 대한 복수의 정당성에 대하여 구구절절이 설명하기 보다는 크게 건너 뛰어 사실적인 행위의 묘사로 고통과 박탈감에 대하여 설명을 대신하고 있다.


이 영화들에서 왜 끔직한 사건이 일어 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하더라도 그 이유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누군가로부터 크게 상처를 받았다는 결과이며, 이에 대하여 고스란히 되 갚아 주겠다는 단순한 의지인 것이다. 그러나 받은 고통만큼 갚아 준다는 것이 자로 재듯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 잔혹한 복수의 끝은 언제나 허망하거나 개운하지 않다. 끔직한 복수의 행위 뒤에 남는 것은 또 다른 희생(악마를 보았다 에서 애인 아버지의 죽음)이거나 자신의 파멸(달콤한 인생에서 수현의 죽음)인 것이다.


6.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의 ‘복수극의 플롯’은 전반부인 ‘끔직한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중점을 맞추고 있다. 처음 이야기는 주인공의 일상적인 삶을 언급한다. 그러다가 적대자가 끔직한 사건을 저질러 주인공의 생활을 파괴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주인공이 당하는 사건의 영향을 충분히 깨닫게 한다. 사건이 끼친 신체적, 정신적 피해는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영화 진행 내내 ‘왜 복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쫓아 가게 한다. 결국 영화 속 주인공은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는 만족을 얻지 못하고 범죄에 대하여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나서야 함을 결심한다.


박찬욱 감독의 두 영화에서 복수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당위성을 지닌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행복해 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누군가 그 행복을 빼앗아 간다면, 응당한 보복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빼앗아 간 것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느끼면 혼란에 서 있게 된다. 비극적인 운명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받아 들일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결국 개인간의 복수이든 운명에 대한 저항이든지 복수의 가르침은 용서라는 구원의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인간의 욕심과 실수 속에서 반복되는 불행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용서뿐이다. 이런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왜 복수를 하려 드는가?’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의 주요 ‘복수극의 플롯’은 후반부의 것이다.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에 대하여 준비하고 추적하고 대치하는 일들이다. 복수의 계획을 수립하고 적대자를 찾아 나서는 일이다. 적대자는 주인공의 복수를 무산시킨다. 대립하는 두 힘은 대등하게 맞서기도 한다.


자극적인 복수의 행위를 펼쳐 보여 주고 관객의 공포감과 불편함을 유발한다. 왜 복수를 해야 하는지 설명하거나 혹은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복수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묻기 보다, 복수 행위의 허망한 결말을 우리에게 던져 줄 뿐이다.그 허망함으로 복수란 결국 부질없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플롯에서도 영화는 ‘왜 복수하려 하는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복수 콘텐츠>인가?


모든 복수 영화에서의 마지막 단계는 주인공과 적대자의 대결을 담고 있다. 가끔 주인공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더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기도 한다. 복수의 행위는 관객에게 정서적 공감을 구하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잘된 콘텐츠라는 사실은 한 두 가지의 측면에서만 논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특히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끊임없이 흡입력을 발휘하는 복수극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만하다. 복수에 대한 이야기들의 부침 없는 유행은 비단 우리영화에서뿐만 아니다. 이러한‘복수’의 테마는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이나 희곡뿐 아니라 현대의 영화, 드라마 등에서 매우 자주 쓰이는 소재가 돼왔다. 박찬욱 감독에게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상을 안겨주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알려진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부터가 ‘복수’에 관한 영화이며, 시대를 불문하고 <리벤지>, <하이눈>, <요람을 흔드는 손>, <케이프 피어>, <돌이킬 수 없는>, <타임 투 킬>, 영화<몬테크리스토>,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러쎌웨폰>, <써든 임팩트>, <매드맥스>, <메멘토>, <갱스 오브 뉴욕>, <트로이>, <소나티네>, <자토이치>, <22블렛>, <다크니스앳더엣지>, <아메리칸>, <본시리즈> 등의 외국 영화나 앞에서 언급한 최근 한국영화 외의 <H>, <복수는 나의 것>, <지구를 지켜라>, <실미도>, <가위>, <살인의 추억>, <범죄의 재구성>, <하녀>, <방자전> 등의 한국 영화에서도 성격 및 비중의 차이는 있으나 복수의 ‘모티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모든 이야기 예술은 ‘만약에 ~이라면’이라는 상황의 가정에서 시작된다. 스타니슬랍스끼가 “Magic If(매직이프)”라고 명명한 서사창작 방법이 거의 모든 극적 상황을 만들어 준다. 서사에 있어서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던져 주면서 동시에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서사창작 방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수에 대한 이야기는 Magic If(매직이프) 서사창법에 매우 적합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복수극은 돌이키고 싶은 사건에서 시작하고 결국 돌이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하며 매듭지어 지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견디기 힘든 사건들에 대해 ‘만약에 되돌릴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판타지나 SF의 서사가 아닌 이상, 시간을 되돌리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대한 가장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행위가 복수인 것이다. 다시 말해 가장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좋은 설정이 ‘복수’인 것이다. 이러한 용이한 장치인 ‘복수극이 플롯’을 창작자가 멀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8.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복수심은 지극히 ‘사적인 마음’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화 되면 즉시 사회화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공공화 되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사회적인 단절의 도구는 ‘법과 규제’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 속 세계나 현실은 법과 규제의 테두리에서 만족할만한 결론을 얻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복수는 매번 ‘개인의 것’으로 돌아 오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인간은 가장 추악한 면을 드러내고,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개인의 복수건, 사회의 복수이건 간에 잔혹함 그대로 드러낸다. 바라보는 관객에게 불편하고 공포스러운 감정을 던져 준다. 정서적으로 복수심에 공감하지만 그 복수의 행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영상과 이야기를 보여 준다. 결국 영화는 추악한 인간들은 악순환 되는 복수의 고리를 끊고, 사랑과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이나, <악마를 보았다>의 마지막 수현의 눈물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사랑과 용서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갖 추악함과 잔인함을 쏟아 내고 난 후 얻어 낸 사랑과 용서 인 것이다.


복수가 개인의 것이라면 사랑과 용서의 간구도 개인의 몫인 것이다. 누가 나를 위해 했는가를 밝혀 내고 되 값아 주는 것은 그저 또 하나의 복수심 생산에 불가하다. 앞선 네 영화는 플롯의 상이함과 유사함을 떠나 복수가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이 아니라고 함께 이야기 한다. 그러한 복수는 또 하나의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복수의 잔혹한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모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적어도 복수의 부질없음에 대해서는 각인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요즘 사람들은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생활 속의 사소한 일들에 분노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가슴을 가졌다. 그래서 복수보다 용서와 사랑을 먼저 떠올리기에는 너무도 각박한 일상이다. 이런 일상에서는 나지막이 조근대며 이야기하는 것보다 조금은 세게 소리치는 것이 확실한 화법인 것이다.


#복수 #복수는 나의것 #올드보이 #악마를 보았다 #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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