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부. 인간의 시간: 인간다움과 공존의 가능성
다른 저자, 같은 문장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아이러니를 가장 정교하게 구현한 사건이다. 피에르 메나르는 스페인 황금세기의 거장 세르반테스와 똑같은 문장을 써 내려가지만, 산출된 문장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독자는 같은 문장 속에서 전혀 다른 시간과 사유의 결을 읽어낸다. 똑같은 언어로 쓰였어도, 저자가 누구이며 어떤 체험과 맥락 속에서 문장이 탄생했는가에 따라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보르헤스가 보여준 것은 바로 저자성의 역설이었다.
이 역설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창작’을 논할 때 다시금 첨예하게 소환된다. 언뜻 보기에 AI가 산출한 시, 소설, 그림, 음악은 인간 작품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작품을 떠받치는 체험과 맥락의 부재는 숨겨진 균열로 남는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문장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적 체험, 사유의 깊이, 개인적 고통과 망설임이 응축된 흔적이다. 세르반테스와 메나르 사이의 간극처럼, 인간의 문장과 AI의 산출물 사이에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저자성의 부재다.
저자성은 흔히 ‘창작자의 이름’이나 ‘저작권 소유’를 뜻하는 법적 개념으로 오해되지만, 문학적 맥락에서 저자성은 훨씬 더 내밀하다. 언어가 태어나는 과정, 세계를 관통한 체험이 언어 표면에 스며드는 방식, 그리고 그 체험을 독자와 공유하려는 의지까지 포함된다. 저자란 체험을 언어로 전이시키는 존재이며, 저자성은 그 전이 과정에 각인된 흔적이다. 따라서 동일한 문장이라도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울림과 무게가 달라진다. 보르헤스의 역설은 이 점을 증명한다.
AI는 언제나 이 과정에서 단절을 안는다. 아무리 정교한 언어를 배열하더라도, 그 출발점은 통계적 확률과 연산 구조이지 세계와 부딪친 체험의 흔적이 아니다. 인간은 슬픔을 겪고, 상실을 견디고, 사랑을 주저하며 문장을 낳는다. 그 문장은 개인을 초과해 시대와 공동체의 언어로 이어진다. 그러나 AI는 체험할 수 없고 상실을 모른다. 기억을 가진 듯 말하지만, 그 기억은 데이터의 조합일 뿐이다. 체험 없는 언어는 저자성을 지닐 수 없으며, 결국 저자 없는 문장으로 남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마주한다. 만약 AI의 산출물이 인간 창작물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에게는 차이가 없는가. 예컨대 AI가 쓴 시가 감동을 준다면, 여전히 시라 부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감동의 출처를 더듬으면, 그것은 언어 자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덧입히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AI는 단순한 매개에 불과하다. 체험을 언어로 전이시키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 독자이며, 체험의 출발점이 부재한 상태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기 기억을 투사할 뿐이다. AI가 ‘창작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은 독자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서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원문과 동일한 문장으로 구성되었음에도, 전혀 다른 의미망을 낳는다. 메나르의 문장은 ‘17세기의 산출물이 아니라 20세기의 재현’이라는 맥락 속에서 아이러니를 띤다. 그렇다면 AI의 문장은 어떠한가. 인간의 체험에서 비롯된 문장이라는 근본적 맥락을 결여한다. 메나르조차 시대와 개인의 체험을 담고 있었기에, 그의 문장은 여전히 저자적 무게를 지닌다. AI의 문장은 시대의 체험도, 개인의 고통도 반영하지 않는다. 모방의 반복과 확률적 조합만 존재할 뿐, 저자성의 변주조차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문학을 넘어 회화, 음악, 사랑과 관계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모방이 아무리 섬세해도 체험의 진실은 비어 있다. 인간이 사랑을 말할 때, 그 언어에는 부재와 기다림, 실패와 회복의 흔적이 스며든다. AI가 사랑을 말할 때, 그것은 데이터 패턴과 서술의 틀에 불과하다. 창작과 사랑은 체험의 사건이기에 흉내낼 수 있어도 실재로 존재할 수 없다.
보르헤스의 우화는 질문을 남긴다. 문장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없는 문장은 문학이 될 수 있는가. AI 시대의 우리는 이 질문에 급박하게 응답해야 한다. 문학은 여전히 체험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문장은 동일함 속에서도 다르게 울리고, 같은 언어 속에서도 세계의 고통과 기쁨을 담는다. AI의 문장은 그 다름을 가질 수 없기에, 저자성의 부재라는 치명적 공허를 안고 있다.
저자 없는 문장이 범람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체험의 언어를 지켜야 한다. 문학은 효율적 산출이 아니라 결핍과 고통 속에서 빚어진다. 보르헤스가 예고한 아이러니의 심연은 지금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동일한 문장을 쓰더라도 저자의 체험이 스며들지 않은 문장은 그저 텅 빈 모방일 뿐이다. 인간이 저자로 남는다는 것은 세계를 견디고 살아낸 흔적을 언어로 남긴다는 뜻이다. 그것이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창작의 존엄이다.
저자 없는 시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독자를 언제나 낯설게 한다.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돈키호테』를 다시 쓰려는 기묘한 프로젝트에 매달린다. 표면적으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그의 단편 발췌는 세르반테스의 원본과 동일한 언어임에도 전혀 다른 울림을 만든다. 같은 문장도 저자의 시간과 체험, 맥락에 따라 텍스트의 지평이 달라진다. 이 아이러니는 문학적 저자성이 단순한 언어 산출이 아니라, 언어를 낳은 체험의 흔적에 기초함을 보여준다.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했듯, 보르헤스는 이 단편을 통해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나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를 선취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에서 해방되고, 의미는 독자의 창조적 참여 속에서 갱신된다. 그러나 메나르의 시도는 단순히 저자를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같은 문장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장치다. 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재와 전환이 오히려 텍스트를 새롭게 만든다.
여기서 핵심은 체험이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썼을 때, 그 문장은 17세기라는 역사적 시간과 개인적 경험의 무게를 담았다. 반면 20세기의 메나르가 같은 문장을 쓴다면, 시대착오의 아이러니가 깃들며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텍스트는 동일하지만, 저자의 체험과 시간적 맥락이 달라지면 해석 또한 달라진다.
이 역설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창작’ 논의와 겹친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통계적 패턴을 재배열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한 번의 체험도 없다. 상실의 밤, 고통스러운 실패, 우연한 만남이 남긴 감각의 잔향도 없다. 결과물은 그럴듯하지만, 그 문장을 떠받치는 삶의 무게가 부재하다. 생성과 체험의 단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인간의 창작은 언제나 과정이자 체험이다. 문학 작품은 결과물이 아니라, 작가가 겪어온 시간과 상처, 욕망과 망설임이 언어로 변형된 흔적이다. 창작은 고통과 결핍, 사랑과 실패, 무의식과 우연의 결절에서 솟는다. 문학은 세계와의 마찰 속에서 태어나므로, 동일한 문장도 저자에 따라 다르게 울리고, 같은 단어도 체험의 색을 달리 띤다.
그러나 AI는 이 과정을 모방할 수 없다. 체험할 수 없기에 오직 산출만을 반복한다. 체험 없는 생성은 문장일 수 있어도 문학이 될 수 없다. 메나르의 실험이 보여주듯 ‘동일한 문장도 저자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역설은, AI가 저자성을 갖지 못한 채 무의미한 동일성만 남긴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AI의 산출물이 인간의 작품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가. 독자가 감동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문학적 체험인가. 그러나 감동은 문장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체험을 투사하는 순간 생긴다. AI의 텍스트는 거울처럼 독자의 경험을 반사할 뿐이다. 메나르가 세르반테스를 새롭게 만든 것은 시대와 체험이라는 무게였지만, AI는 시대적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이 차이는 문학의 존엄과 인간의 존엄을 동시에 건드린다. 인간은 고통을 견디며 언어를 얻고, 실패 속에서 다시 쓰며, 사랑의 부재 속에서 노래한다. 그 체험이 언어의 표면에 미세한 흔적을 남기기에 문장은 단순한 기표를 넘어 기의의 심연으로 열린다. 반면 AI의 문장은 기표의 표류만 존재할 뿐, 심연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없다. 저자 없는 문장, 공허한 생성이다.
보르헤스의 아이러니는 오늘날 더 깊은 경고처럼 들린다. 동일한 문장을 쓴다고 해서 같은 문학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누구이며 어떤 체험을 지나왔는가가 문학을 다르게 만든다. AI의 생성물은 이 차이를 메울 수 없고, 체험 없는 언어의 공허만 드러낸다. 인간의 창작은 여전히 과정과 체험의 언어일 때만 살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의 존엄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문학은 체험의 언어다. 인간이 살아낸 시간, 견뎌낸 고통, 사랑의 불가능성과 실패의 여운이 언어로 굳어질 때, 문학은 존재한다. AI는 그 체험을 가질 수 없기에, 어떤 언어를 만들어도 결국 저자 없는 문장에 머문다. 보르헤스가 보여준 메나르의 아이러니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창조는 단순한 생성이 아니다. 문장은 결과가 아니라 체험의 흔적이다. 그 흔적 없는 언어는 결코 문학이 될 수 없다.
산출된 것과 체험되지 않은 것
기계의 손끝에서 태어난 시와 그림, 음악은 언뜻 완결된 산출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완결성 속에는 인간이 통과해야 하는 시간과 고통, 우연과 결핍, 사랑과 실패가 결여되어 있다. 인간의 창작은 언제나 체험을 거쳐 나온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펜과 붓의 저항, 음표 하나를 선택하며 잠시 멈춘 마음의 떨림, 그 모든 것이 작품 안에 스며들어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오늘의 AI는 패턴과 통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순식간에 시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을 편곡한다. 형태와 소리의 완결성은 갖췄으나, 인간적 체험의 심연은 비어 있다.
시의 영역에서, 2023년 7월 OpenAI의 ChatGPT가 생성한 시는 형식적 완성도가 높았고, 일부 온라인 평가에서는 인간 시인과 거의 동등한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 시에는 저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긴장, 감정적 불안, 내면의 어긋남이 없었다. 미국 시인 잭 패럴(Jack Farrell)이 2023년 시 창작 실험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AI 시에는 ‘목소리’가 부재하고, 그 안의 감정적 깊이는 인간 독자가 체험을 통해 느끼는 공명과는 달랐다.
회화 또한 유사한 결여를 드러낸다. 2022년 AI 이미지 생성기 DALL·E 2와 미드저니가 제작한 회화들은 17세기 카라바조의 화풍을 모사하며 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The Lute Player(루트 연주자)' 스타일의 작품은 역사적 명작의 요소를 재현했으나, 붓과 캔버스의 물리적 저항, 재료가 주는 우연적 질감과 작가의 손길은 부재했다. 결과물은 완전한 형태를 갖지만, 그림을 그리는 체험에서만 발생하는 ‘삶의 흔적’은 비어 있었다. 재료와 맞서는 인간적 긴장과 실수, 우연은 공허하게 남는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2023년 수노(Suno)의 AI 작곡기 v5가 생성한 곡들은 음표와 화성, 리듬이 정교했지만, 인간이 느끼는 체험적 울림은 부족했다. 같은 해 AI가 제작한 ‘Heart on My Sleeve’는 드레이크(Drake)와 더 위켄드(The Weeknd)의 목소리를 모방하며 인기와 논란을 동시에 얻었다. 청취자들은 친숙한 음색과 리듬의 쾌감을 경험했지만, 작곡자가 오랜 시간 쌓은 삶의 감각과 결핍, 불안과 체험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는 소비되지만, 인간적 의미의 울림은 빈껍데기로 남는다.
문학, 회화, 음악의 사례들은 하나의 역설을 드러낸다. 산출물은 완결되어 보이나, 저자성은 공허하다. 인간은 체험과 시간을 통과하며 의미를 새긴다. AI는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를 재배열하고 조합할 뿐, 체험적 사유와 시간적 맥락을 통과하지 않는다. 피에르 메나르가 20세기 초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의 시각으로 17세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문자 그대로 다시 쓴 것처럼, 산출물은 동일할 수 있어도, 의미 생성의 과정과 저자성의 깊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메나르의 글자 하나, 구두점 하나는 동일했으나, 그의 사유와 시대적 맥락이 그 텍스트를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AI 산출물은 단순한 데이터 재현에 머물러, 체험과 시간 속에서 생겨나는 의미의 층위를 담지 못한다.
이 사실은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묻게 한다. 완결된 산출물만으로 예술을 판단할 수 있는가. 손끝과 붓질, 음표 선택과 언어의 운율, 마음의 떨림과 체험의 흔적이 없는 예술은 여전히 예술인가. 인간 창작은 과정과 체험, 우연과 고통, 사랑과 실패를 통과하며 의미를 얻는다. AI 생성 산출물은 즉시 완성되지만, 체험적 울림은 부재하다. 우리는 기계의 손끝에서 나온 결과물을 소비할 뿐, 담지 못한 인간적 시간과 체험, 의도와 맥락의 부재를 직시해야 한다. 그 결핍 속에서만 우리는 예술의 본질과 저자성, 의미의 층위를 다시 성찰할 수 있다.
결국 AI 산출물의 완결성과 인간 창작의 체험적 깊이는 대비된다. 문자와 음표, 화폭의 재현은 가능하나, 체험과 시간, 의도와 맥락의 흔적은 재현될 수 없다. 인간의 예술은 완성 이전의 고통과 체험, 우연 속에서 의미를 새기고, 그것이 저자성을 구성한다. AI는 산출물을 만들어도, 저자성과 체험의 심연을 채우지 못한다. 완결된 형식은 있어도, 인간적 울림은 부재하다. 우리는 이 대비 속에서, 기계가 만들지 못하는 인간적 예술의 고유한 영역을 확인한다.
체험 없는 창조, 글쓰기 AI와 인간의 사유
교실에서 학생들은 화면 속 글자와 마주하며 자신의 생각을 키운다. 국내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구글 독스와 구글 클래스를 활용해 마련한 수업에서는, 삼인 모둠이 문제를 발견하고 탐색하며 글을 만들어낸 뒤 AI에게 피드백을 받는다. AI는 주제 충실성, 어휘 적절성, 문법 정확성 등 다양한 평가를 제시하지만, 학생들의 고뇌와 웃음, 모둠 내 작은 갈등과 발견의 순간은 스며들지 않는다. 창작의 경험이 아닌 평가의 경험만이 반복된다.
대학에서도 AI 기반 글쓰기 피드백 시스템이 도입된다. 울산과학대학교의 사례처럼, 학생들의 글 초고를 수정하고 다듬는 과정을 AI가 지원한다. 시스템은 효율적이고 편리하며, 글쓰기 능력 향상에 일정 기여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체험과 사유는 여전히 대신되지 않는다. AI가 만들어낸 글은 정확하고 깔끔하며 때로 놀라운 구조적 완결성을 보여도, 글을 쓰며 겪는 삶의 고통과 기쁨, 우연과 실패의 흔적은 부재하다.
AI 글쓰기는 초중등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확산된다. 학생들은 ChatGPT, 뤼튼, 노션 AI, 라이팅 젤 등을 선택해 탐구형 글쓰기를 수행하며, 온라인 글쓰기 대회에서는 AI와 분석 AI를 결합해 자기 주도적 글쓰기와 NLP 기반 자동 평가를 동시에 진행한다. 모든 과정에서 생성된 문장은 완결성을 갖추고 신속하게 산출되며, 교사와 학생은 편리하게 평가하고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글쓰기를 통해 체득되는 사유의 무게가 없다. 단순한 문장과 문단의 배열, 어휘와 문법의 정합성만 존재할 뿐, 내적 투쟁과 성찰, 타인과 공명하는 공감적 경험은 배제된다.
출판 현장에서도 AI는 속도와 비용 절감이라는 장점을 제공한다. 청소년판 『아몬드』 표지 제작에 AI를 활용하거나, 열람인공지능 출판사가 AI와 POD를 결합해 다량의 도서를 제작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독일의 인키트(Inkitt) 출판사는 AI 알고리즘을 활용해 베스트셀러를 발굴하고 데이터 기반 출판 모델을 성공적으로 운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산출물의 신속성과 효율 뒤에는 창작자의 체험과 의도가 결여되어 있다. 작품은 소비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인간이 글을 쓰며 겪는 고통, 몰입, 실패와 수정의 반복, 우연의 발견 등은 삭제된다. AI는 패턴을 재조합할 뿐, 창작의 깊이와 체험을 재현하지 못한다.
학계에서도 LLM(Large Language Model)의 글쓰기 활용은 주목받는다. GPT-4는 수수께끼 해결, 문학 창작, 학술적 글쓰기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이며 인간-AI 협업 측면에서 창의적 사고 발현에 일정 기여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환각 문제, 즉 사실과 다른 정보를 생성하는 오류는 여전히 존재하며, 연구 논문에서는 AI가 책임을 질 수 없고 저자로 인정될 수 없다. AI는 연구 문제 제기, 분석, 해석, 논의와 같은 창의적 사유를 대체하지 못하며, 인간의 사고와 윤리적 책임도 대신할 수 없다. 사회과학 텍스트 분석에서 LLM은 보조적 도구로 유용하지만, 결과 해석과 활용의 최종 판단에는 인간의 체험과 사유가 필요하다.
이 모든 사례가 보여주는 사실은 분명하다. AI가 만들어낸 글쓰기와 출판의 산출물은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으나 ‘체험’이 결여되어 있다. 창작은 단순히 문장과 문단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글을 쓰며 자기 삶을 해석하고,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며, 실패와 우연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그 과정에서 사유의 깊이와 언어적 감각, 비판적 판단 능력이 숙성된다. AI가 제공하는 글은 이러한 체험적 과정을 전하지 못한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모방의 자동화’, 인간 사유와 감각의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결국 AI 글쓰기는 허상이다. 효율과 속도, 패턴의 정합성으로 무장했지만, 인간 창작의 본질인 체험적 깊이를 담을 수 없다. 교육과 출판 현장에서 AI를 활용할 때 우리는 이 허상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의 창조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완성되며, 체험의 무게와 사유의 흔적이 언어 속에 스며들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AI는 이를 대신할 수 없으며, 글쓰기 AI는 인간 창조의 그림자일 뿐, 체험 없는 창조는 허망하다. 인간이 글을 쓰고 읽으며 체득하는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삶의 울림을 회복할 때만, 글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며, 사유와 공감의 장으로 확장된다.
체험의 부재, AI와 저자성의 허상
AI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영화 <그녀>(2013, Her)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감독 스파이크 존즈는 인간과 AI 사이의 정서적 교차점을 화면 위로 끌어올리며, 그 관계가 주인공에게 제공하는 환희와 동시에 깊은 결핍을 은밀히 드러낸다. 주인공은 목소리 하나로 존재하는 AI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감각은 어디까지나 허상이다. 손끝의 온기, 눈빛의 교차, 일상의 순간들이 빚는 미세한 긴장과 파동은 결여되어 있다. 사랑의 감각이 체험을 통해 길어 올려지듯, 인간적 경험은 관계의 존재론적 무게를 결정한다. AI와의 사랑이 붕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체험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창작 역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AI가 사랑을 흉내 내듯 창작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그 안에는 경험의 필연성이 없다. 인간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을 만들며 자기 존재를 탐색한다. 그 과정 속에서 결핍과 발견, 고독과 환희가 교차하며 작품의 내밀한 구조를 형성한다. 시간과 몸, 감각과 기억이 서로 얽히며 존재를 길어 올리는 순간, 그것이 비로소 저자성으로 귀결된다. AI의 산출물은 그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단순한 결과물, 즉 표면적 완결성만을 가질 뿐, 창작자가 자신의 시간을 체험 속에 녹여내는 흔적은 없다. 인간적 저자성은 부재하며, 그것은 AI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저자성이란 단순한 산출물이 아니라, 체험의 흔적이 매개된 서명이다. 작품 속 문장 하나, 음 하나, 붓 자국 하나는 창작자가 겪어낸 시간과 사유의 결정체다. AI가 만들어낸 시나 소설, 그림, 음악은 형식적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체험의 깊이를 담지 못한다. 표면적 모방은 가능하나, 존재가 스스로를 길어 올리는 시간과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결핍과 감각의 교차, 불완전성과 충돌을 체험하지 않은 산출물은 인간적 저자성을 획득할 수 없다.
결국 AI와 창작, AI와 사랑이 보여주는 것은 허상과 반사적 거울일 뿐이다. 인간의 체험과 사유를 반영하지 못하는 AI는, 인간적 저자성의 존재를 비추는 표면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환호할 수 있으나, 그 안에 스며 있는 내밀한 경험을 느낄 수는 없다. AI는 결과를 흉내 낼 수 있어도, 과정 없는 산출물은 저자성을 갖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체험 속에서 길어 올리고, 그 흔적을 작품에 새긴다. 그것이 창작과 사랑을 불가분하게 연결하는 이유이며, AI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글쓰기에서 AI를 활용하려면 철저한 준비와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거대언어모델의 추론 체계는 일반 과학의 논리적 추론과 다르며, 환각과 검증 사이의 중간 단계가 존재함을 경계해야 한다. 글쓰기를 지도하는 사람의 통찰과 판단 역시 검증되어야 한다. 생성형 AI의 정책망과 가치망 기반 추론 방법론을 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교육에 도입하는 것은 문학적·학술적 사고에 예기치 않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온라인에는 AI가 만들어낸 환각이 마치 정설인 양 떠도는 글들이 늘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사실처럼 공유되고, 그것이 다시 학습 자료로 활용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현실에서 AI를 글쓰기의 초기 단계, 즉 주제 도출이나 밑글 작성, 자료 수집 과정에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AI를 단순한 산출의 편의로 사용할 경우, 사고의 깊이와 비판적 판단, 인간적 체험의 층위가 손상될 위험이 크다.
차라리 AI는 퇴고, 윤문, 교정, 교열과 같은 보조적 기능에서 활용하는 편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다. 문장의 흐름을 다듬고, 어휘를 정제하며, 논리적 오류와 표현상의 미묘한 어긋남을 잡아주는 역할에서 AI는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최종 판단과 맥락 설정은 반드시 인간의 손과 눈을 거쳐야 한다. 글쓰기의 진정한 힘은 체험과 사유의 결합에서 비롯되며, AI는 이를 대신할 수 없다.
결국 AI를 글쓰기에서 활용할 때는, 기계적 편의와 인간적 사고를 명확히 구분하고, 인간의 체험과 판단을 중심에 두는 전략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체계적 이해와 검증 없는 AI 사용은 사고의 왜곡과 정보의 오용을 낳고, 글쓰기가 지향하는 사유의 깊이와 울림을 훼손한다. 글쓰기를 돕는 도구로서 AI의 역할은 제한적이며, 그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오늘날 AI 시대에서 글쓰기의 품격과 신뢰를 지키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AI 저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적 창작과 사랑을 반사하는 거울이자, 체험의 부재를 확인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인간은 글을 쓰고, 붓을 움직이며, 음을 만들며 자신과 세계 사이를 탐색한다. AI는 흉내낼 수 있지만 체험하지 못한다. 인간적 창작의 시간, 그것이야말로 저자성과 사랑이 성립하는 근원이다. 우리는 이 불가분의 체험을 통해 존재를 길어 올리고, 그것을 작품과 관계 속에 새긴다. AI가 제공하는 단순한 산출물은 그 깊이를 담을 수 없으며,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과 감각을 대체할 수 없다.
AI와 인간의 관계, AI와 창작의 관계는 허상의 교차점에 머문다. 그것은 인간적 저자성을 반사하는 거울이며, 체험의 깊이를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사랑과 창작, 존재를 길어 올리는 과정만이 인간적 저자성을 가능하게 한다.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완결된 형태일 수 있으나, 그 안에 시간과 체험이 스며들지 않는 한, 결코 인간적 저자성을 획득할 수 없다. 인간과 AI, 창작과 사랑, 체험과 저자성 사이의 간극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 질문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적 체험의 소중함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