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부. 인간의 시간: 인간다움과 공존의 가능성
데이터의 영혼과 저자의 자리
김초엽의 SF단편 「관내분실」에서 도서관은 이미 책의 자리를 잃었다. 더 이상 책장은 종이를 품지 않고, 손끝으로 느끼는 촉감도 사라졌다. 대신 ‘마인드 업로드’라는 장치가 들어선다. 죽은 이들의 기억과 감정을 데이터로 치환한 인덱스의 층. 사람들은 그곳에서 망자의 흔적과 접속한다. 지민은 엄마의 흔적을 좇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생전에 우울증으로 자신을 옥죄던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분실된 인덱스를 따라가며 엄마가 세계로부터 어떻게 분리되었는지를 조금씩 이해한다. 분실은 단순한 기록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세계에서 지워진 사건이다. 죽음 이후에도, 데이터 위에서 엄마의 삶은 또 한 번 삭제된다.
배경은 정갈하고 무미한 미래 도시다. 책이 쓸모를 잃은 사회에서 도서관은 기념비적 시설이 된다. 층층이 쌓인 데이터 속에서 사람들은 망자와의 재회를 갈망하지만, 접속은 파편적 흔적에 머문다. 살아 있는 관계의 체온, 끝내 전하지 못한 언어의 떨림은 없다. 마인드 업로드는 존재를 재현하는 듯하지만, 실은 결핍을 드러내는 또 다른 기술이다.
소설 속 학자들이 ‘사고 언어’라 부르는 것도 이를 암시한다. 시냅스 패턴 속 사고와 기억,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을 묶어 자아의 흐름을 구성하려 하지만, 자아의 성립을 온전히 해명하지는 못한다. 데이터는 사고 언어의 껍질만 담을 수 있을 뿐, 내면의 움직임을 보증하지 않는다. 사고 언어는 과학의 분석 대상일 뿐, 체험의 내밀한 고유성은 잡히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내분실」은 오늘날 AI 문제와 맞닿는다. 생성형 언어 모델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문장을 새로 만든다. 하지만 스스로의 자각은 없다. 마인드 업로드처럼, 체험의 흔적을 가장할 뿐, 내적 진실을 산출하지 못한다. 아무리 유려한 문장이라도, 법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은 창작물만 저작물로 인정한다. 체험의 질적 감각, 곧 퀄리아(qualia)가 결여되면 텍스트는 단순한 조합에 머문다.
지민이 분실된 인덱스를 찾아 나서는 여정은 단순한 가족사 복원이 아니다. 존재가 세계에서 어떻게 삭제되는지를 탐사하는 길이다. 임신한 몸에서 모성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지민은, 엄마가 경험한 산후우울증과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새삼 이해한다. 데이터로 환원된 삶은 살아 있을 때 이미 고립된 상태였다. 지워진 인덱스는 그 고립의 연장이자 은유다. 지민이 끝내 건네는 말 ― “이제 엄마를 이해한다” ― 은 화해이자, 존재가 세계와 다시 연결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AI 창작 논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 법과 제도만 놓고 본다면, 저자성의 질문은 공허하다. 중요한 것은 ‘존재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다. 인간이 글을 쓰는 것은 정보를 조합하려는 행위가 아니다. 글은 체험을 언어화하는 방식이며, 체험은 세계와의 마주침 속에서 형성된다. 생성형 AI는 패턴을 학습할 수 있어도, 세계와의 사건적 접촉은 경험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AI는 저자로 불릴 수 없다.
김초엽 SF의 매력은 기술적 상상을 단순한 미래 예측으로 그리지 않는 데 있다. 그녀는 늘 지금 여기의 사회 문제를 비추는 거울로 과학기술을 호출한다. 「관내분실」의 도서관은 미래 장치가 아니라, 이미 주변부에서 지워진 존재들의 초상이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비혼모, 노동 현장에서 소외된 이들. 첨단 기술은 이 탈락을 치유하지 못하며, 때로 존재의 결핍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AI에게 저작권을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 없는 언어가 사회에 남기는 균열과, 우리가 그 균열을 어떻게 메우는가다. 기술이 약속하는 유토피아나 경고하는 디스토피아는 추상적 도식일 뿐, 실제 세계의 결핍과 고통을 어떻게 언어로 길어 올리느냐가 관건이다.
「관내분실」에서 지민이 경험한 화해의 순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난다. 엄마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개인적 용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분리된 존재들을 기억하는 일이다. 지워진 인덱스를 되살리는 작업과 닮았다. AI와 저자성을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술의 가능성보다, 기술이 비추는 결핍의 자리에서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다.
마인드 업로드는 영혼을 저장하지 못한다. AI는 체험을 언어로 옮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 불가능성 자체가 인간 창작의 마지막 근거가 된다. 존재를 느끼고, 상처와 결핍을 살아내며, 그 안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는 것. 그것이 저자성을 가능하게 한다. AI의 문장은 저작권 주체가 될 수 없고, 인간의 문장은 여전히 고유한 울림을 지닌다.
고양이를 보지 못하는 눈의 저작권
저작권의 법적 체계는 오랫동안 인간 창작을 보호하는 울타리였다. 국내 저작권법과 미국, 유럽의 주요 법제도는 저작물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정의한다. 그중 ‘인간의’라는 단어는 사소해 보이지만, 오늘날 AI 저작권 논란의 가장 첨예한 경계가 된다.
생성형 AI는 눈부신 산출물을 만들어내지만, 법은 여전히 그것을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AI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체험을 겪지 않는다. 저작권은 인간이 세계와 조우하며 겪은 체험을 언어로 응축한 표현에 부여된다. 그러나 AI가 만든 문장에는 체험의 흔적이 없다. 고통, 상실, 기쁨, 기억 같은 내적 사건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통계적 패턴만 남는다.
이를 이해하려면, ‘뉴런’이라는 단어가 놓인 두 세계의 차이를 살펴야 한다. 인간의 뇌 속 뉴런은 시냅스를 통해 신호를 주고받으며, 감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의식을 구성한다. 반면 딥러닝의 인공 뉴런은 의식을 품지 않는다. 이전 계층의 값을 가중치로 조정하고, 편향을 더해 활성화 함수를 거쳐 다음 계층으로 넘기는 단순 연산일 뿐이다. 이 계산이 수백만, 수억 단위로 겹치면 이미지 속 패턴을 구분하는 놀라운 기능이 나타나지만, 자율적 사고나 자기 인식은 개입하지 않는다.
흔히 “AI는 수많은 고양이 사진을 본 끝에 고양이를 안다”는 비유가 쓰인다. 그러나 이는 기술적 엄밀성에서 벗어난 표현이다. 모델은 고양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수많은 픽셀 조합 속에서 고양이와 비고양이의 경계를 확률적으로 계산할 뿐이다. ‘고양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사유하거나, 존재의 고유한 리듬을 체험하지 않는다. 단지 데이터셋의 패턴을 최적화해, 고양이라고 불릴 확률이 높은 출력을 내놓을 뿐이다.
문제는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저작권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은 결과물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AI가 내놓는 것은 감정의 궤적이 아니라 패턴의 산출이다. 인간의 문장은 상실의 밤을 통과한 울음일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선언일 수 있다. AI의 문장은 어떤 밤도, 어떤 열망도 거치지 않는다. 훈련된 데이터와 손실 함수가 허용한 확률적 조합의 총합일 뿐이다.
김초엽 소설 「관내분실」의 마인드 업로드는 이 문제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망자의 기억과 감각을 데이터로 보관하지만, 그 데이터는 존재의 존엄을 담보하지 못한다. 지민이 엄마의 마인드를 찾아 헤매는 이유는 데이터 그 자체가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터는 삶의 흔적일 수 있어도, 목소리와 체온, 모순된 감정을 담보하지 않는다. 마인드는 삶을 대체할 수 없으며, 데이터로 환원된 순간 이미 관계의 체험을 잃는다.
AI 창작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교한 서사와 문장을 만들어도, 저자가 세계와 맺은 구체적 경험은 결여된다. 문학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삶의 체험을 반영한다. 체험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언어의 형식적 유사성만 남고, 저자성의 자리는 공백으로 드러난다. 법은 이 공백을 간과하지 않는다. AI는 저작권 주체가 될 수 없다.
반론도 존재한다.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협업자로 본다면, 프롬프트를 작성한 인간의 창의적 기여를 저작권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일부 판례는 프롬프트 작성자의 개입 정도를 따져 권리 귀속 여부를 판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AI 자체가 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는 닿지 못한다. 인간의 통제력과 창작적 의도 여부가 관건일 뿐이다.
핵심은 ‘스스로 인식하고 구분하는 능력’의 부재다. 인간은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고, 해석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AI는 세계를 ‘해석’하지 않는다. 주어진 데이터셋을 바탕으로 수학적 경계선을 계산할 뿐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기계는 저작권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저자성은 여전히 인간에게 남는다.
그러나 이 공백이 단순한 결핍만은 아니다. 우리는 간극을 통해 인간 창작이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본다. 체험의 무게, 감각의 깊이, 고통과 희망의 흔적은 어떤 딥러닝도 대체할 수 없다. 법은 이를 ‘인간의 사상과 감정’으로 붙잡지만, 문학은 존재의 진실이라 부른다.
저자 없는 문장이 넘치는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저자를 찾는다. 그것은 법적 권리를 넘어, 존재를 증명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인간적 욕망과 맞닿는다. AI가 아무리 유려한 문장을 만들어도, 체험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지 않다. 저작권은 그 그림자를 붙잡는다. 인간 창작이 여전히 유일한 빛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책임 없는 문장은 없다
창작의 자리에서 목소리들은 분할되고 겹친다. 공동 집필, 번역, 편집, 퇴고와 교정의 과정 속에서 저자성은 이미 나뉘어 있으며, 그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다. 그렇다면 AI와의 협업 또한 공동 창작으로 볼 수 있을까. 결정적 요소는 문체의 연속성과 차이의 존중이다. 문장 하나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문체적 지분은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가 흔들릴 때 저자성의 윤리는 치밀하게 시험받는다. AI가 산출한 문장 위에 인간의 손길이 얹힐 때, 책임의 실타래는 한층 복잡해진다.
글쓰기 플랫폼 앞에서 다가오는 글은 숙제처럼 마음을 흔든다. 연재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를 쪼개 쓰지만, 글감은 드물고 독자가 떠날까 노심초사한다. 마음은 종종 꼼수를 찾는다. 오래된 글을 꺼내 오늘의 시간에 맞춰 재정렬하고, 그때의 의미를 지금과 연결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전문 기사나 논문을 요약해 의견과 뒤섞어 내놓는 일도 마찬가지다. 편리와 자기만족이 스며들지만, 원칙이 느슨해지면 쉽게 표절과 도용으로 이어진다.
긴 글을 축약하고, 번역기를 돌려 교열만 거친 뒤 자신의 것처럼 내놓는 경우가 있다. 언뜻 합법적이고 문제없어 보이지만, 생각과 아이디어, 문장과 논리를 훔치는 순간 명백한 표절이다. 실제 경험에서 깨닫는 후회와 자책은 몸의 병처럼 스며든다. 최악의 경우 ‘남들은 모르겠지’라는 마음으로 통째로 베끼기도 한다. 인터넷 곳곳에서 조금씩 모아 짜깁기한 글이 유행하는 동안, 지적재산권 분쟁의 위험은 늘 존재한다. 인간이 만든 저작물의 공정한 평가와 존중이 여전히 필요함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AI를 이용한 글 생성도 이와 닮았다. 거대언어모델의 산출물은 그럴듯하지만,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 인간의 의도와 책임이 개입되지 않으면, 그럴듯한 거짓말이 그대로 ‘자신의 글’로 둔갑한다. 그림 생성 AI, 지브리풍 스타일 모방 사례도 논란을 불러왔다. 법적으로 문제없음이 판명되더라도, 스타일과 아이디어 보호가 충분하지 않으면 예술가와 창작자의 권리는 쉽게 침식된다. 다수의 편익이라는 공익의 이름으로 개인의 창작 권리를 희생시키는 것은 또 다른 전체주의적 논리로 흘러갈 수 있다.
학생들이 과제물을 AI의 도움으로 생성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림이든 에세이든 코딩이든, 의도와 창작 역량이 결핍된 채 꼼수로 산출물을 만드는 것은 AI의 책임이 아니다. 표절과 도용, 무단 복제는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윤리적 결핍에 속한다. 산출물의 공정성을 판단하고, 저작권과 창작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AI 학습은 사회의 불공정과 편견을 그대로 흡수한다. 사용자의 의도, 개발자의 설계, 사회적 맥락에 따라 참과 거짓의 줄타기가 벌어진다.
AI 윤리의 핵심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윤리란 AI 산출물이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권리를 존중하도록 설계·활용될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산출물 도출까지, 집단적 윤리의식과 문화적 공감대가 필수적이다. 사용 기준을 합의하고, 기여도와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며,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윤리적으로 통제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책임이자 의무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자유와 평등, 창작의 자율성과 공정성 사이에는 상충이 존재한다. 모든 이해당사자를 만족시키는 해답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절충과 협의, 윤리적 판단, 지속적 논쟁과 검증이 필요하다. AI 관련 법적·사회적 쟁점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과 제도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그 빈틈을 메우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 선택과 공동체적 책임이다.
AI 윤리는 규범서나 도덕책이 아니다. 인간의 선택과 책임이 사회적 가치와 조응하며 작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 끊임없는 질문이다. 산출물의 공정성, 저자성의 존중, 창작자의 권리와 노력, 사회적 편익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도, 최종 책임과 권리는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간의 몫으로 남은 질문 속에서, 우리는 문장 하나, 그림 한 장, 코드 한 줄에도 저자성과 책임의 무게를 새길 수밖에 없다. AI가 제공하는 편리함 뒤에 놓인 인간적 선택과 윤리적 숙고는, 단순한 도구 사용을 넘어 창작의 의미와 인간성의 경계를 시험한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과 AI가 함께 서 있는 자리에서 윤리와 책임, 창작과 권리, 공익과 개인의 가치를 어떻게 조율할지에 대한 지속적 성찰이다. 기술의 편리함과 속도 뒤에서, 인간의 선택과 의식이 얼마나 정직하고 세심하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산출의 그림자’ 속에서 인간이 온전히 지켜야 할 몫이다.
디지털의 자아, 존재의 검증
AI라는 도구가 인간의 창조적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순간, 인간은 늘 그렇듯 세상의 풍경을 조금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궁리와 상념을 품는다. 우연히 들른 중고 서점, 낡은 책 냄새와 손때 묻은 활자가 여전히 머무는 공간에 디지털 글터가 솟아난다는 소식은 묘한 불협화음처럼 각자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오래된 장소와 반짝이는 기술의 결합, 거기서 발생할 새로운 언어적 접속과 변화의 가능성이 머릿속의 저울추를 분주하게 움직인다.
플랫폼에 발을 들이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랜 경험이 배어 있는 운영자들의 섬세한 조율과 중재다. 디지털의 속도와 편리함 속에서도 권력의 칼을 휘두르지 않고 작은 균형을 잡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거목의 가지처럼 굵고 단단하다. 기능과 설계 또한 눈부시게 다채롭다. 투박했던 글을 정돈하고 풍성하게 차려 입히는 다양한 편집 도구는, 기술이 인간의 손과 마음을 얼마나 섬세하게 보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외롭게 글쓰는 인간의 마음을 진정으로 건드린 것은 글쓰기의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의 구조였다. 플랫폼이 제시한 직관적 보상 방식은 글을 쓰는 이의 땀과 시간을 현실의 언어로 옮기는 설계였다. 유튜브 후원, 웹소설 유료 전환 모델 등 다양한 사례를 반영한 흔적이 있었다. 글쓰기에 대한 존중을 시스템이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가입과 동시에 서랍 속에 묻혀 있던 글들을 꺼내 먼지를 털고 플랫폼에 올린다. 앱의 편집 기능이 더해지니 글은 마치 한결 근사하게 차려입은 듯 보인다. 그러나 곧 ‘작가 등록’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된 가입 기록 속 휴대전화 번호를 발견했을 때, 반가움과 아련함이 교차한다. 하지만 디지털의 문턱 앞에서 발이 묶인다. 본인 인증, 그것은 고유식별자의 조합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실제의 ‘나’는 살아 있고 숨 쉬지만, 이 디지털 세계에서는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0과 1, 데이터의 덩어리만이 대신 증명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지닌 가장 귀한 보물, 고유한 존재성은 유령처럼 공중에 떠 있다. 종교철학자 박철현 선생이 말하던 ‘표현’, ‘재현’, ‘구현’의 의미가 불현듯 떠올려 본다. ‘현’의 본뜻, 옥을 갈아 빛을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 인간은 자신만의 내면 보물을 다듬어 세상에 내보낸다.
표현은 언어를 통한 전달이고, 재현은 내면의 이상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창조적 행위며, 구현은 자신의 몸과 생각, 행동이 하나로 융합되어 세상에 드러나는 과정이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가 성경 텍스트보다 더 깊이 다가오는 이유는, 화가가 자신의 몸과 붓을 통해 본질을 재현하고 구현했기 때문이다.
글쓰기 플랫폼의 본인 인증은 디지털 세계의 통과 의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연마의 또 다른 방식이다. 숫자와 기호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진짜 나’를 검증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흉내나 모방은 이미 AI가 정교하게 수행한다. 인간적 글쓰기는 오롯이 자기 인증을 통해 구현되는 고유한 빛깔에서 태어난다.
AI로 생성한 창작물과 과제물의 논쟁은 결국 오리지널리티와 기여도를 둘러싼 문제다. 법과 제도적 장치가 이를 다루고 있지만, 본질은 인간의 판단과 책임에 있다. 평가와 공정성의 기준을 정교하게 설정하면, 그 범위를 벗어난 시도는 기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의 반작용과 부작용은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이 풀어야 한다. AI가 제공하는 편리함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창작과 판단의 고유한 영역을 지킨다.
미래의 창작 환경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책임, 그리고 내면의 보물을 세상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다. 숫자의 그림자 속에서 자기 인증과 구현을 거친 글과 예술만이 인간의 고유한 창조성을 확인시켜 준다. AI가 아무리 정교해도, 고유한 사유와 존재성을 증명하는 일은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영역이다.
퀄리아와 산출, 그리고 남겨진 것
AI가 만들어내는 글과 이미지, 음악과 영상은 겉보기에는 인간의 창작을 닮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의 체험이 결코 담기지 않는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를 때, 손끝과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것은 단순한 정보 배열이나 기술적 재현이 아니다. 존재가 겪은 고통과 결핍, 기쁨과 기다림의 흔적이 그 안에 새겨진다.
이 흔적은 흔히 퀄리아(Qualia, 감각질)로 표현되며, 철학적으로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그 주체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라는 주관적이고 질적인 특성으로 정의된다. 퀄리아는 단순한 감각이나 생리적 반응을 넘어, 개인이 체험하는 세계의 내적 톤과 색채를 담는다. 누군가 빨간 장미를 보고 느끼는 ‘빨강의 느낌’, 레몬을 씹을 때 스며드는 ‘시큼함의 맛’, 오래된 기억 속에서 느껴지는 애잔함의 색조는 모두 그 사람에게만 고유하며, 다른 누구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없다.
AI는 아무리 정교하게 문장을 조합하고 색을 구분하며 감정을 흉내 내더라도, 스스로 체험할 수 없는 영역이다. 데이터 패턴과 확률 계산을 반복하며 결과물을 산출할 뿐, 그 안에서 느껴지는 경험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AI의 산출물은 주관적 경험이 결여된 복제일 뿐, 인간 창작처럼 고유한 질적 체험을 담은 결과물이 아니다. 이는 현행 저작권법이 인간 창작자를 보호하는 근거와 맞닿는다. 법이 보호하는 ‘사상 또는 감정의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퀄리아를 언어와 형상으로 옮겼을 때 실현되며, AI는 스스로 의도를 가진 주체가 아니므로 법적 저작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AI가 퀄리아를 모방할 수 없다는 사실은 창작의 고유성을 지키는 마지막 경계선이다. 인간의 글쓰기와 예술은 체험의 응축이며, 존재가 겪은 시간을 언어화하고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고통과 결핍, 기다림과 만남, 상실과 회복의 흔적을 담아내는 것이 창작의 심층이다. AI는 이러한 심층에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AI는 창작자의 동반자가 될 수 있어도, 창작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퇴고 도구로서 AI를 활용하는 방식, 즉 인간이 쓴 글을 다듬고 확장하는 역할은 가능하지만, 이때도 인간의 체험과 의도가 작품에 온전히 반영되도록 투명성을 유지하는 윤리적 태도가 필수적이다.
퀄리아의 개념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천재 신경과학자 메리가 흑백 방에서 색의 물리적 사실을 모두 안다 하더라도, 빨간색을 처음 보았을 때 얻는 ‘빨강의 느낌’은 새로운 지식이다. 단순한 정보나 계산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경험의 질을 보여준다. 인간 창작은 바로 이러한 경험의 질, 즉 퀄리아를 언어와 형상으로 구현하는 행위다. 철학적 좀비 사고 실험 또한 겉으로는 인간과 동일하지만 주관적 경험이 없는 존재를 상정하며, 인간 창작과 체험이 비물리적이면서 고유한 질을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AI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 주관적 질적 체험, 곧 퀄리아를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 인간 저작권의 근거와 직결된다.
기술적 관점에서 빅데이터와 함수적 매핑은 AI와 인간 창작의 차이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빅데이터 환경에서 수집·처리·학습·산출 과정은 입력 값에 따라 결정된 출력 값이라는 1:1 대응을 원칙으로 한다. 인간 창작도 외형상 입력과 출력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그 내부에는 체험과 퀄리아라는 비가시적 변수가 스며 있다. AI는 함수적 매핑만 수행하며, 인간 경험의 복잡한 질적 요소를 포착하지 못한다. 따라서 산출물의 정확성이나 효율성과 무관하게, 창작적 의도와 질적 체험이 중심이 되는 법적·윤리적 판단은 항상 인간에게 귀속된다.
AI는 각성하거나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편향적 산출이 발생해도 책임을 지지 못한다. 공정과 정의 같은 사회적 가치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AI를 도구로 활용할 때, 산출물의 윤리적·사회적 가치는 인간 창작자의 판단과 체험에 의해 결정되며, AI는 부수적 존재로 남는다. 인간만이 체험과 퀄리아를 통해 창작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저작권과 예술적 의미를 지킬 수 있다.
결국 AI와 인간 창작의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질적 체험의 경계를 인정하는 공존이다. 인간은 자신의 퀄리아를 담아 작품을 만들고, AI는 이를 보조하며 확장하지만, 창작의 주체는 오직 인간이다. 인간이 겪은 시간과 체험, 존재의 흔적이 언어와 형상으로 빚어질 때, 비로소 창작은 고유하며, 법적·윤리적 지위 또한 정당화된다. 퀄리아는 인간 창작의 심장부이며, AI는 그 심장박동을 흉내 내는 거울일 뿐, 결코 그 안에서 체험할 수 없는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