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와 기억의 계절
작고 여린 병아리, 알에서 투쟁해 세상으로
난 그의 머릿결 사이에 숨어든 뱀 문신이 좋았다. 짧은 키, 엉성한 가창력, 천재라 불릴 만큼의 재능 대신 꾸역꾸역 만들어낸 둔재의 음악. 그것은 내게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청춘의 동반자가 ‘공일오비-015B’였다면, 그는 중년까지 걸어온 거리석 같은 존재였다. 혈기 왕성한 시절, 광기에 가까운 저항의 분노를 내뿜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꺾이지 않는 심지를 고추 세웠다. 그의 외침 “Here I stand for you”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로 다가왔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마왕 신해철’이다.
소년 시절 나는 예비 신학생이었다.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하는 소년들이 미리 준비하는 성소 모임에 속해 있었다. 그때 나를 유난히 아꼈던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모친보다 연배가 높던 그분은 늘 말했다. “스테파노, 넌 좋은 신부님이 될 거야. 널 위해 기도할게.” 그분의 아들도 사제를 꿈꾸었으나,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또 마귀 음악에 빠져 그 길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훗날 군 복무를 마친 뒤에서야, 그분이 신해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해철은 방송에서 “어릴 적 꿈이 신부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돌려 보던 잡지 속 선정적 이미지를 본 자신을 보고, ‘이런 인간이 신학교에 갈 수는 없겠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약사 출신 사업가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랐다. 잠실의 8학군 끝자락에서 살았지만, 강남 중학교를 다니며 ‘in강남’ 문화를 흡수했고, 보성고로 진학하며 음악적 인연을 쌓았다. 그 시절 친구들이 훗날 ‘무한궤도’와 ‘015B’의 원천이 된다.
스스로 수포자라 했듯 수학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서강대 철학과에 진학했고, 학사경고를 거듭하다 스스로 자퇴했다. 이후 서강대 측에서 명예졸업을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이미 뮤지션으로서의 길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강대가 명문대의 스파르타라 불릴 만큼 엄격한 학풍을 자랑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가 선택한 탈주는 일종의 자존의 선언이었다.
그의 대학 생활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잠시 활동했던 프로젝트 밴드의 이름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리고 DJ 시절 남긴 어록과 노랫말 곳곳에는 철학적 사유의 흔적이 스며 있다. 그는 한 권의 철학책처럼 생각했고, 음악은 그 사유의 확장선이었다. 신해철은 또한 사회적 발언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100분 토론>에서 날 선 논리로 논객들을 압도했고, 이라크 파병 반대 1인 시위, 노무현 대통령 노제, FTA 반대 집회 등에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 이는 대학 시절 인연을 맺었던 급진적 운동조직 CA(Constituent Assembly Group)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고 박종철 열사 또한 그 조직에 속해 있었고, 그들은 제도권 운동의 피상성을 비판하며 직접행동을 주창했다.
그가 대중에게 가장 친숙했던 시절은 <음악도시>와 <고스트 스테이션> DJ로 활동하던 때였다. 그의 전파는 단순한 방송이 아니라, 청춘의 밤을 열어젖히는 사유의 통로였다. 수험생들뿐 아니라 2030 청년들까지 그에게 귀 기울였다. 한 교사가 “학생들이 신해철 방송 듣느라 수업에 졸린다”고 하소연한 사연이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40분짜리 <삼태기 메들리>를 틀었고,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으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딨냐”며 한 곡을 일곱 번 연속 틀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를 세 번 내보내며 그 가사를 철학적으로 해부하기도 했다. 그는 라디오를 ‘사유의 실험실’로 만들었다.
신해철은 인디음악의 대부이자 후원자였다. 그가 큰돈을 모으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유행가를 틀지 않고, 주로 해외 뮤지션과 인디밴드 음악을 소개했다. 그는 ‘인디차트’를 직접 만들어 발표했고, 무명 밴드들은 그 차트에 오르는 것을 꿈으로 삼았다. ‘무붕 콘서트’ 같은 립싱크 반대 행사, 그리고 ‘밤차 끊기고 첫차 다닐 때까지’ 이어지는 홍대 번개 콘서트도 그의 발상이었다. 그는 자본보다 진정성을, 방송보다 현장을 택했다. 그 진심이 음악계의 하위 생태계를 지탱했다.
또한 그는 뉴미디어의 개척자였다. 단지 음악의 영역을 넘어, 기술과 표현의 경계를 실험했다. ‘신해철 닷컴’이라는 개인 미디어 포털을 만들어 스스로 방송을 송출했다. 한 달에 한 번 있었던 라디오 전파 점검 시간에는 청취자들을 자신의 인터넷 방송으로 끌어들였고, 다른 개인 방송의 녹음 파일을 라디오에 내보내기도 했다. 훗날 팟캐스트와 유튜브로 이어질 개인 미디어 혁명의 예고편이었다. 그는 말했다. “방송국은 장비와 자본만 믿다 결국 개인에게 밀릴 거야.” 오늘날 유튜브와 OTT, 팟캐스트의 세상을 보면, 그 예언은 거의 예언서에 가깝다.
신해철은 단순한 록커가 아니었다. 그는 시대와 싸운 지성인이었고, 상처 입은 자들의 형제였다. ‘마왕’이라 불린 이유는 단순히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어둠을 통과한 자만이 내는 빛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Here I stand for you.”
그 문장은 노래가 아니라 선언이었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아직도 불타는 심지처럼 타오르고 있다.
신해철, 공감의 인간
신해철의 가장 큰 인간으로서의 장점은 ‘공감과 수긍’이다. 그는 반대 의견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실책과 예측 실패를 인정하곤 했다. 대마초 사범으로 사법 집행을 받은 뒤에도 그는 “대마초는 언젠가 합법화될 수는 있겠지만, 나는 다시 하지 않을 것이고, 주위에도 권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창작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경험상 거짓이며, 술 취한 사람이 주변에 끼치는 해로움이 존재하기에 그것이 싫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신해철 닷컴 폐쇄 사건’이 있다. 2011년 5월 15일, 신해철 닷컴에 한 회원이 다수의 여성 사진을 올려 외모를 비하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해철은 즉각 그 회원의 행동을 “강간범이나 다름없는 짓을 저질렀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 범죄의 장소가 다름 아닌 내 집이라는 것에 슬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가 된 여덟 명의 소녀와 가족에게 사과의 뜻을 담아 48시간 후 신해철 닷컴을 자진 폐쇄했다.
2009년, 그는 모 방송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계기로 몇 년 뒤 사고가 일어날 서울스카이병원에서 위밴드 시술을 받았다. 2014년 10월 17일, 신해철은 위밴드에 문제가 생겨 장협착증 수술을 받았고, 이후 혼수상태에 빠져 10월 26일 사망했다. 당시 주치의는 환자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 없이 위축소 수술을 병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과수 부검 결과, 심낭에 0.3cm의 천공과 위 외벽 15cm 봉합 흔적이 발견되었다. 검찰은 “신해철의 사인은 의료 과실”이라며 집도의를 기소했다.
긴 법정 공방 끝에 집도의는 징역 1년의 실형과 의사면허 취소 처분을 받았으며, 11억 8,700만 원의 민사 배상 책임도 확정되었다. 신해철의 의료사고를 계기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의료사고전담수사팀’을 설치했다. 결과가 중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을 직접 수사하는 한편,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의료법 위반 등 추가 불법 행위를 추적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편성 이후 검시조사관이 옆에서 수시로 자문하고, 보건복지부·의학회·의대 교수들과 연계한 체계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후 각 지방청에도 의료수사팀이 신설되었고, 집도의의 여죄를 파악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사망 사건 등 여러 의료사고 수사에도 투입되어 피해자의 한을 풀어 주었다. 현재는 강력범죄수사대로 개편되어 존속 중이다. 대부분의 의료사고가 전문성을 이유로 과실치사로 덮이던 현실에서, 그는 죽어서도 사회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신해철은 죽음 이후에도 사회에 의미를 선물처럼 던져 주었다.
신해철의 음악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46년 인생을 되짚어 보는 일은 유의미하다. 그렇게 그의 생을 통과한 뒤 음악을 들으면,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곡들이 새삼 귀에 닿는다. 그는 뮤지션이자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진정한 인플루언서였다. 실수도 있었고, 방황도 있었으며, 아집과 답답한 면도 있었지만, 그처럼 사회와 진심으로 소통한 셀럽은 아직도 찾기 어렵다.
천재가 아닌 둔재의 잡화상
신해철의 음악을 굳이 분류하자면 록이다. 밴드로 출발한 뮤지션들이 그러하듯, 그의 음악적 기반에는 록 스피릿의 불꽃이 묻어 있다. 그러나 그 불꽃은 단일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일렉트로니카와 테크노, 재즈, 심지어 국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을 감행하며, 그는 스스로의 음악 언어를 끝없이 변주했다. 유학 이후 선보인 원 맨 밴드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컴퓨터 음악, 이른바 ‘미디 음악’의 선구적 장면으로 기록된다. 이승환, 싸이, 서태지, 이현도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그에게서 샘플러 사용법과 미디 장비 운용을 배웠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대학을 중퇴했지만 그의 가사에는 늘 철학적 문장이 스며 있었다. 사랑과 이별 같은 통속적 주제를 넘어, 그는 자신과 세계를 향한 냉철한 성찰과 염세적 비판을 가감 없이 노래했다. 작사, 작곡, 편곡, 연주, 프로듀싱, 엔지니어링, 심지어 음악 프로그램 개발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중적 인기와 평단의 찬사가 동시에 그를 향했지만, 그 찬사는 결코 천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때의 기억이 있다. 이문세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던 밤에>의 연례행사 ‘잼 콘서트’. 여러 가수가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해 무대에 서는 자리였다. 그해 신해철은 ‘퍼스트 기타’를 자청했다. 밴드의 중심이자 리더의 상징과 같은 자리였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가 있었다. 기타 실력이 아직 연주자 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 했다. 그리고 약속한 날, 비틀스의 〈Hey Jude〉의 리프와 후주를 완벽히 연주해냈다. 선배들이 놀라 비결을 묻자, 그는 “수험생 공부하듯 악보를 외우고 또 외웠다”고 말했다. 천재라 불린 이름 뒤에는, 스스로의 한계를 물어뜯는 혹독한 노력이 있었다.
015B의 정석원이 본능적인 천재형이었다면, 신해철은 집요한 투쟁형이었다. 그의 초창기 음악은 정석원의 세련됨과는 다른, 다소 엉성한 아마추어리즘이 남아 있었다. 그는 아이돌의 외피를 두르고 데뷔해야 했다. 〈슬픈 표정 짓지 말아요〉와 〈재즈카페〉의 히트로 청소년 팬덤을 거느리며 스타가 되었지만, 스스로는 그 시절을 흑역사라 불렀다.
그는 본래 밴드 음악을 꿈꿨다. 그러나 당시 연예 매니지먼트의 구조와 수익 배분의 관행은 솔로 체제를 강요했다. 모든 곡을 직접 작곡·편곡·연주한 2집 「Myself」를 통해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증명한 뒤에야, 비로소 밴드 결성의 허락을 얻었다. 그렇게 탄생한 밴드가 바로, 전설로 남은 ‘N.EX.T’였다.
90년대 록의 선장 - New EXperiment Team
N.EX.T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실험’이었다. 신해철을 주축으로 1991년에 결성되어 1997년 해체했고, 다시 2002년 재결성되어 2019년까지 이어졌다. 특히 2014년 이후에는 N.EX.T United라는 이름으로 중견급 음악창작 집단으로 활동했다. 힙합 레이블처럼 특정 멤버 중심이 아닌 창작자 네트워크로서의 구성을 취했다는 점이 독특했다. 음악 산업이 점점 개인 브랜드화되어가던 시기에, 그는 끝내 공동 창작이라는 예술적 윤리를 실험하고자 했다.
그의 밴드는 밀레니엄을 넘어온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오늘날까지도 YB와 함께 한국 록의 두 축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런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신해철과 N.EX.T는 흥행이나 영향력 면에서 서태지와 ‘서태지와 아이들’에 견줄 만큼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다. 두 밴드가 해체하던 1996년과 1997년, 대중은 “형들은 N.EX.T에, 동생들은 서태지에 열광했다”라고 회상한다.
방송 중심의 대중음악계를 장악한 서태지와 달리, N.EX.T는 콘서트와 라이브 무대에서 압도적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공연은 단순한 록 콘서트가 아니라, 사회적 감수성과 철학적 메시지를 전면화한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이후 두 프런트맨이 6촌 관계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의 공존은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상징적 대조가 되었다.
밴드의 휴지기 동안 신해철은 영국으로 건너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후 프로듀서 크리스 상그리디와 함께 ‘모노크롬(Monochrome)’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새로운 사운드 실험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예상치 못한 국제적 논란을 낳았다. 모노크롬의 곡 〈Machine Messiah〉를 전설적인 밴드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가 표절해 〈Metal Messiah〉라는 곡을 발표한 것이다. 역으로 신해철의 음악이 세계적 밴드의 모방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이에 상그리디의 조작이 있었다는 점은 그의 예술 여정이 단지 국내적 성공담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신해철은 ‘신해철과 N.EX.T’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몹시 꺼렸다. 유명 프런트맨 중심의 홍보 구조가 밴드 구성원들을 단순 세션맨으로 취급하는 문화 때문이었다. 그는 ‘나’의 이름보다 ‘우리’의 실험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2014년, 음악적 동지들과 함께 ‘N.EX.T United’를 결성한다. 약 20명의 뮤지션이 프로젝트마다 팀을 새로 구성해 창작과 공연을 병행하는 방식이었다. 음악은 특정한 스타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의 실험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남겨진 것은 구조만 있고, 숨결이 사라진 공동체의 빈 무대였다. 그럼에도 그의 시도는 음악이 곧 사유의 행위였음을 증언한다. 미완으로 남은 그의 실험은, 어쩌면 그가 평생 추구해온 예술의 방식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완결이 아닌 진행으로 존재하는 실험, 그것이 곧 신해철이었다.
마왕이여, Save Us!
신해철의 솔로 시절은 발라드와 하우스 댄스의 결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밴드 초기, 곧 1집에서 3집에 이르는 시기에는 일렉트로니카와 테크노, 국악의 접목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해체 직전의 4집에서는 바로크 팝과 심포닉 메탈을 실험했고, 재결성 이후에도 오케스트라 세션 샘플링과 극단적 음향 효과를 활용한 인트로 피크로 새로운 음향의 지평을 탐색했다.
보통의 뮤지션이라면 한 앨범 안에서 장르를 무리하게 섞는 것을 꺼리지만, 신해철은 그 경계를 의식적으로 허물었다. 한 앨범 안에서 록, 재즈, 일렉트로니카, 국악이 한데 얽혀 있었고, 그는 그것을 혼종의 미학으로 완성해냈다. 이런 구성을 ‘백화점식’ 혹은 ‘잡화점식’이라 부르며 비판하던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그 혼재는 무모함이 아니라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에게 장르는 탐구의 문법이자 실험의 형식이었다. ‘015B’나 ‘어떤날’이 남긴 음악적 유산과 맞닿은, 용기 있는 미학적 모험이었다. 평단이 중구난방이라 폄하했지만, 신해철은 그들의 비판을 조적지혈로 일축했다. 고지식한 일관성보다 불안정한 진보를 택한 것이다.
90년대로 들어서며 록음악계는 얼터너티브라는 이름 아래 아마추어리즘의 열광에 빠져 있었다. 개러지 밴드, 펑크 밴드라 자칭하며, 스케일도 토닉도 모른 채 고함과 왜곡된 음향으로 무장한 음악들이 범람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흠모하던 본고장 미국의 밴드들은 실험 이전에 기본기를 완벽히 체득한 연주자들이었다. 익스트림, 라디오헤드, 너바나—이들의 실험은 탄탄한 블루스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의 따라쟁이들은 그것을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록은 기술보다 자세를 흉내 내는 문화가 되었고, 그때부터 한국 록의 긴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 록을 사랑한 한 청년으로서 일본의 음악 장면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X Japan’ 같은 대형 밴드의 스케일은 놀라웠고, 비주얼 록이나 글램 록을 가볍게 치부하던 시선 속에서도 그들의 기본기는 탄탄했다. 그 유산이 이어져 일본의 밴드 음악은 지금도 주류의 한 축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넥스트가 그런 역할을 하리라 믿었으나, 신해철의 실험이 미완으로 끝나자 실용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록은 실질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방송 속 아이돌 밴드들은 소리도 없는 에어 기타, 에어 드럼으로 립싱크에 바빴고, 인디 밴드들은 ‘힙하다’는 표피적 태도만 좇았다. 록 스피릿—세상에 고함치며 나를 외치는 그 정신은 그렇게 실종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축제 시즌이면 근처 학교를 돌며 공연을 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1~2곡이었으나, 우리는 최대한 긴 곡을 준비했다. 호응이 좋으면 즉석에서 앙코르를 외쳤다. 그 앙코르의 단골 레퍼토리는, 신해철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멜로디언으로 작곡했다는 마성의 전주로 시작하는 〈그대에게〉였다. 그 전주와 리프가 흐르면 십 대들의 환호는 폭발했다. 공연은 ‘The show must go on’이 되었다. 끝나고 다른 밴드들과 뒤에서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두르던 그 풍경조차, 지금은 젊은 날의 순수한 광기로 남았다.
오늘날 한국 대중음악은 ‘K-pop’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무대에 올랐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돌 산업의 상품화가 성공한 결과일 뿐, 음악적 다양성의 승리는 아니다. 음악의 기둥을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미디와 프로그래밍으로 대량 생산된 음향은 창작이 아니라 조립에 가깝다. 기계의 조력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결과물을 창작물이라 부르며,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상.
그럴수록 나는 팝의 본고장에서 벌어지는 다른 장면들을 떠올린다. 레이디 가가가 토니 베넷과 함께 블루스 재즈를 노래하는 무대—그 다양성과 뿌리에 대한 예의가 부럽다. 음악이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바뀌더라도, 그 기초 위에서만 진화한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한국에는 그런 세대의 계보가 끊겼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마왕’의 정신을 잇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음악을 기술이 아닌 사유의 언어로 되돌릴 수 있는 제2의 신해철을 기다리며, 그의 구원이 여전히 가능하리라 믿는다.
영원한 인생의 질문, 답을 찾아 떠나는 여행
신해철은 내 지금 나이보다도 어린 마흔여섯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내게 어른으로 다가온다. 그는 세월의 저편에서 여전히 내게 말을 건네며, 때로는 다정히 어루만지고, 때로는 단호히 꾸짖는다. 흐린 창문 너머로 별빛이 스며들던 그 교실, 그때의 나는 아직 미완의 꿈으로 반짝였고, 신해철의 노래는 그 꿈의 언어였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나 또한 그에 닮아갔다. 그 변화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문득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서툰 변명으로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사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며, 어쩔 수 없는 성숙의 모양으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물음이 내게 남겨진 이유를 생각한다. 혹시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나는 이 오랜 길을 홀로 걸어온 것은 아닐까. 언젠가 세월의 끝에서, 누군가 내게 다가와 조용히 묻는다면 — “후회하지 않느냐”고 — 나는 과연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진심으로 답하기 위해 살아내야 하는 것이 오늘이다. 그래서 신해철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의 음악은 끝나지 않은 문장처럼 내 안에서 이어지고,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하는 불씨로 남아 있다. 오늘, 그의 수많은 노래들 가운데 일곱 곡을 고른다. 그가 남긴 언어의 잔향 속에서, 나는 다시 묻고 또 대답한다 —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그대에게’ 가는 길이라고.
01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고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회 없노라고
신해철의 ‘유지’는 마치 그의 일성 같다. 시간이 흘러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는 자신에게 “후회 없니?”라고 묻는 그 질문에, 과연 우리는 답할 수 있을까. 이 곡은 그가 스물한두 살이었던 시절, 「무한궤도 1집」에 수록된 노래다.
그 어린 나이에 그는 먼 미래의 닳고 닳은 자신에게 보내는 타임캡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유지’는 이후 그의 수많은 디스코그래피 속 곳곳에서 원형 그대로 리메이크되어 다시 등장한다.
02 날아라 병아리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굿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는지
신해철과 나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유독 병아리 장사들이 많았던 그 단지에서는, 병아리 한 마리 키워 본 적 없는 아이를 찾기 어려웠다.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거나, 이내 벼슬이 나고 무서운 존재가 될 때까지 애지중지하곤 했다. 그런 기억을 담은 노래가 바로 “생애 첫 죽음 목격”이다.
그러나 동기는 동심을 비껴간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오는 노래가 이승환의 <프랜다스의 개>였는데, ‘무슨 개로 노래를 만들까’라는 생각 끝에, 자신도 동물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있던 패스트푸드점은 ‘KFC’였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나에게 마왕을 보내는 송별가로 들린다. 하늘에서 마음껏 노래하는 그의 무덤가에도, 올해도 어김없이 꽃은 피겠지.
03 아버지와 나 Part 1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정신을 놓았다. 015B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연애에 대한 가볍고 무겁지 않은 세태 풍자라면, 이 곡은 묵직한 진혼곡과 같았다. 아버지를 참 많이 미워했다. 내 나이 열아홉에 쓰러져 고스란히 가정의 무게를 짊어진 그를 미워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다.
모친에게 들은 푸념의 필터를 통해 전해 들은 그의 사랑은 이미 퇴색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일찍 돌아선 유학 귀국길, 아파트 입구에서 보이는 2층 베란다에는 울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날 보고 첫눈물을 보이신 아버지는, 결국 추락의 몸이 된 나를 요양병원에서 기다리다 세상에 복귀해 찾아뵌 다음 날 소천하셨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Part 1은 피아노 반주와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이어지는 Part 2에는 가슴을 후벼 파는 기타 솔로가 하늘의 아버지 영혼을 달랜다. 참고로 기타 솔로는 ‘정기송 버전’을 추천한다.
04 Friends
오늘 하루는 그 모든 근심들을 버리자
추억의 향기로 취하기 전에 그 술잔을 들어라
‘비트겐슈타인’은 넥스트 해체 휴지기 동안,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머무르던 시절 신해철이 만든 그룹이다. 알바를 뛰던 기타리스트 데빈 리의 기타 연주를 발견하고 그를 트레이닝한 뒤, 키보디스트 임형빈과 드러머 남궁연을 미국으로 불러 함께 앨범을 완성했다.
이 시절의 음악적 정수가 <일상으로의 초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로를 받쳐 주는 형제 같은 곡이다. 임형빈과 함께 부른 이 노래는 과장되지 않은 우정찬가이자, 영원한 친구란 없겠지만 지금 가장 소중한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떠나간 친구든, 지금 옆에 있는 절친이든, 그들을 위해 잔을 들어야 할 순간이다.
05 일상으로의 초대
해가 저물면 둘이 나란히
지친 몸을 서로에 기대며
그날의 일과 주변일들을 얘기하다
조용히 잠들고 싶어
1998년 발표된 「Crom's Techno Works」의 수록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다. 일렉트로니카·테크노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전하는 힘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일상에서 벗어나, 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내 소중한 일상 속으로 너를 초대하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전한다.
"사랑해"라는 단 한마디는 없지만, 그 진솔함만으로 충분히 사랑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 고백은 ‘너’를 향한 것일 수도, 아직 내면 깊이 잠든 ‘자아’를 깨우는 호출일 수도 있다. 일상주의자로서의 주제가, 그리하여 노래 속에서 미묘하게 살아 숨쉰다.
06 민물장어의 꿈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신해철이 장례식장에서 틀어 달라고 주문한 곡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 장례 노제에서 부른 노래로, 가사에는 신해철 정신의 덩어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자신을 작게 깎아 작은 문으로 들어가야 성숙된 자아가 된다는 성찰이 담겨 있다.
민물장어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에서도 한 번쯤 다다르길 꿈꾸듯,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숨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노래이기도 하다. <거위의 꿈>, <흰 수염 고래>, <거꾸로… 연어들처럼>과 서로 교차하며 상호텍스트를 이루는 가사가 가슴에 남는다.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라는 마지막 구절 앞에서, 신해철은 하늘에서 과연 어떤 답을 하고 있을까.
07 Here I stand for you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그저 지쳐서 필요로 만나고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어
하지만 익숙해진 이 고독과
똑같은 일상도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
등불을 들고 여기 서 있을께
먼 곳에서라도 나를 찾아와
인파 속에 날 지나칠 때
단 한 번만 내 눈을 바라봐
난 너를 알아볼 수 있어 단 한순간에
Cause Here, I stand for you
난 나를 지켜가겠어 언젠간 만날 너를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며 너의 자릴 마련하겠어
하지만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
어서 나타나줘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
신해철의 장례식 내내 울려 퍼진 곡은 <민물장어의 꿈>이 아니라 이 곡이었다. 유족의 뜻이었다. 앞서 들었던 곡이 신해철이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라면, 이 노래는 우리가 다짐하는 노래가 된다. 그의 음악과 정신을 결코 잊지 않고, 그의 곁에 서 있겠노라는 마음의 선언. 웅장하게 펼쳐지는 심포닉 메탈의 대곡은 가슴 깊이 자부심과 경외를 동시에 전해주었다.
언젠가 무대 위에 다시 설 날이 온다면, 반드시 마지막 엔딩 레퍼토리에 이 노래를 올리고 싶다.
※ 참고:
• <신해철의 쾌변독설> , 부엔리브로
• <마왕 신해철>, 문학동네
• 권유리야 外 다수 <인간 신해철과 넥스트 시티>, 문화다북스
• 고종석 外 다수 <신해철 다시 읽기>
• 강헌 < 신해철(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 >, 돌베개
• 지승호 <아, 신해철!>
• 그리고, 나무위키
* 이 글은 2023년의 글을 윤문 재 퇴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