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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고백

세상 가장 단단한 무너짐의 노래

by 박 스테파노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무언가를 이루어 본 기억이 얼마나 될까. 모든 일이 노랫말처럼 흘러가는 듯해도 결국 전부 노랫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있다. 그날의 기억을 새겨 넣을 틈은 좁디좁아, 어느새 어디론가 미끄러져 버린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랑은 또 어떠한가. 그 마음은 말처럼 쉽게 만져지지 않으니, 산다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인생의 수렁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크게 넘어졌을 때 처음으로 심리 상담을 받았다. 이런저런 면담과 설문 끝에 상담자는 내게 말했다. “회복 탄력성이 최상위 수준이에요. 우리 기준으로는 거의 초인, 위버멘쉬 수준이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한 번 깨지면 산산조각이 납니다. 숨구멍을 만들어 바람이 드나들게 해야 해요.”


그 말을 마음 한구석에 묻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히 켠 TV에서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출연자 누구도 관심 없던 이름, 잊힌 얼굴. 그런데 첫 기타 선율이 흐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머리끝이 서며 오래전의 기억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나는 그 음표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이영훈, 〈일종의 고백〉, 그리고 뜨겁게 아픈 가슴.


<일종의 고백>은 2022년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OST로 씌였다. JTBC 제공



사랑이라는 말과 마음의 실패


싱어송라이터 이영훈은 조용히, 그러나 가장 단단하게 ‘무너짐’을 노래한 사람이다. 그의 노래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은 사랑 이후의 인간, 혹은 사랑 이전의 인간을 노래한다. 말하자면, 사랑을 수행해 본 사람에게서 남은 잔향 같은 노래다. ‘일종의~’라는 제법 낯선 제목은 ‘말하자면~’이라는 말의 고답적이고 주저앉은 변주처럼 들린다. 특히 이 노래의 마지막 문장은 노래 전체의 고백을 압축한 문장이자 되돌이표처럼 기능한다.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이 구절은 문법적으로는 회한의 문장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자기 인식의 문장이다. 사랑의 실패란 곧 사랑의 종결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깨닫는 일이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랑, 그 마음은 말처럼 쉽게 닿지 않는다. 말이 더 이상 닿지 않는 자리에서, 인간은 침묵과 체념으로 진심을 남긴다.


이 노래에서 사랑은 결코 굳센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한다’는 말이 두 번씩 반복될 때마다, 그 말은 점점 비워진다. 이영훈의 목소리는 그 공허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다. 사랑은 그렇게 사라져버릴 말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말이 사라지는 동안, 인간은 비로소 자신에게 남는다. 그러나 그 잔존의 자신을 가두어 둔 채로, 인간은 외로움에 지쳐간다.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이 한 줄은 노래의 정조를 결정짓는다. 사랑이 아니라 ‘계절’에 취한다는 표현은 감정의 주체가 이미 자신에게 몰두해 있음을 드러낸다. 외로움 속의 나는 타인을 향해 사랑을 건네기보다, 순간의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속인다. 이 자기기만의 자각이 곧 고백의 형식이 된다. ‘계절’과 ‘사라짐’은 모두 시간의 은유이고, 사랑은 그 흐름 속에서 붙잡히지 않는 감정의 파편으로 남는다.


사랑은 지속되지 않기에, 그 순간만큼은 진실하다.

이영훈의 ‘순간의 진심’은 그래서 허위이자 진실이다.

그는 사라져버리는 말의 자리에 남은 인간의 침묵을, 가장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JTBC 싱어게인4에 나온 55호 가수 이영훈. JTBC 제공



고백이 나를 다시 만든다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 나는 너를”


이 노래는 겉으로는 ‘너’에게 바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나’에게로 되돌아가는 독백이다. 그 독백의 여파 속에서 문법은 미묘하게 흔들린다. ‘나는 너를’에서 문장은 완결되지 않는다. ‘너’를 부르며 결국 ‘나’를 고백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주어와 목적어가 뒤엉킨 이 문장의 어색함은, 오히려 사랑이 지닌 근원적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이 고백은 타인을 향한 언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되새김의 말이 된다. “사랑한다고”라는 반복은 감정의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함의 반복이며, 그 불확실함이 곧 인간의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 이영훈의 <일종의 고백>은 그래서 사랑의 선언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허무를 통과하며 자신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수행의 노래다. 그의 노래 속에서 고백은 구원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끝내 놓아주는 순간에 가깝다.


그런 날이 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서글픈 날. 휘날리는 깃발만 보아도, 달리는 기차 소리만 들어도 슬픔이 밀려오는 날. 철인 28호처럼 늘 굳센 다리로 버텨온 회복 탄력성도 어느 날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늘거리고 싶은 날. 그런 날은 예고도, 전조도 없이, 습격처럼 찾아온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분을 토하던 기억, 컴컴한 골목에 홀로 남겨진 늙은 남자의 굽은 어깨처럼 꺼져가던 날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게는 ‘일종의 고백’이었다. 계절에 취해보고, 사라져버릴 누구라도 내 등을 쓸어내리며 안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의 고백. 말처럼 쉽지 않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의 고백이었다.


그 고백은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나 자신’이라 함은, ‘그럴듯해 보이고 싶은 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처음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고, 지기 싫고, 괜찮아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가득 차오른다. 그러다 결국 자신을 기만한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도 아닌 일들이 버킷리스트에 난데없이 들어앉는다. 번지점프처럼,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욕망들. 그런 나로부터 벗어나, 내 허무와 슬픔을 고백하는 일. 그 일은 애처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다.


한때 나는 인생을 ‘승부’로 여겼다. 그 생각이 이제는 불편하다. 산다는 것은 가위바위보처럼 무언가를 따내는 연속이라 믿었던 그 시절. 하지만 결국 지지 않으려다 실패하는 삶만 남는다. 지금은 하루에 단 5분이라도, 오롯이 설레는 일상의 작은 떨림을 추앙한다. 인생은 승패가 있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버겁지만 소중한 일상의 총합이니까.


https://youtu.be/8QSshvsJzAc?si=JRFTPGbbNz9uVY6G



<일종의 고백>
- 이영훈 노래, 곡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또 어떤 날에는
누구라도 상관 없으니
나를 좀 안아 줬으면
다 사라져 버릴 말이라도
사랑한다고 날 사랑한다고
서로 다른 마음은 어디로든 다시 흘러갈테니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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