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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쉬었음' 에게 '쉴 틈이 없었음'이

자석요의 씁쓸한 추억과 노동의 시간

by 박 스테파노

가난의 입구에서, 혹은 첫 번째 배신의 계절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집이 무너졌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 입학 전 배치고사 시기부터 휘몰아친 폭풍이었다. 마지막 배치고사를 마친 날, 잠시 낮잠에 들었던 내게 모친이 울먹이며 현실을 전했다. 부친의 연대보증으로 사업체가 도산했고, 그 여파로 부동산과 예금이 줄줄이 압류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미성년이던 나로서는 사태의 정확한 이해가 어려웠지만, 언제나 낙담보다 해결을 앞세우던 모친이 그 자리에 주저앉은 모습에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자세한 내막은 어느 한쪽의 윤색된 서사일지 모른다. 그러나 부친의 공장 직원들이나 세입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부친이 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로 굳어졌다. 연대보증의 주체였던 상대는 해외로 도피했고, 십여 년이 지난 뒤 그 자녀들이 지방의 한 대학을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직접 확인하고자 찾아가 그 얼굴을 마주한 기억이 있다. 그때의 감정은 분노보다 허무에 가까웠다. 무너진 것은 집 한 채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에 대한 신뢰였다.


그 무렵부터 나의 청춘은 대학 입시와 함께 가난, 생계와의 싸움으로 던져졌다. 부친은 경제 사범으로 수배되었다가 몇 달 만에 체포되어 실형을 살았다. 모친은 가정주부의 틀 안에서 신기에 가까운 부동산 투자와 사채 운영으로 재산을 불리기도 했지만, 직업적 감각은 없었다. 차명이나 명의 이전 따위의 방편도 몰랐던 부모의 단순함은 생활의 위기로 직결되었다. 하나뿐인 형은 프란치스코회 수사로 서원하며 신학교에 진학했고, 세속의 경제와는 거리를 두었다.


연대보증이라는 족쇄. AI Sora


결국 생의 무게는 내 몫으로 돌아왔다. 대학 초반부터 학원 수학 강사로 일하며 과외를 빼곡히 채웠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계산이 돌아갔다. 군에 다녀와 졸업을 앞당기는 것이 가계를 안정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겼다. 군 복무 중에도 휴가마다 공사장에서 일품을 팔았고, 과외비를 이어가기 위해 편법 아닌 편법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제대 후 현실은 더욱 단단했다. 복학생은 과외 시장에서 외면받았고, 입시 제도는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며 학원가의 생태계도 뒤집혔다. 새로운 교습법, 새로운 언어,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게다가 일 년 뒤 교환학생 선발이 내정되어 있었기에 마음은 더 쫓겼다.


그때였다. 한 대학 동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청주 출신의 친구였다. 복학 후에도 잘 보이지 않던 녀석은 자신도 가세가 기울어져 여러 일을 전전 중이라 했다. 그러다 덧붙였다. “좋은 아르바이트가 있는데 청주로 내려오지 않겠냐”고. 일주일에 제법 되는 보수, 단순 잡무라며 가벼운 어조였다. 솔깃했다. 양재역 남단의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선배의 차를 타고 함께 가자 했다.


만나자마자 어딘가 이상했다. 아래위로 양복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친구와 낯선 몇 명이 나를 둘러쌌다. “괜찮아, 믿고 가자”는 말에 묘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내 가방을 챙기더니 서둘러 골목길로 이끌었다. 2층 건물의 문을 열자 하얀 칠판과 플래카드가 걸린 강의실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제야 알아챘다. 그곳이 바로, 악명 높은 다단계 사무실이었다.


당시 대학생, 특히 경제적 곤궁에 빠진 청춘들을 노린 ‘피라미드 판매 조직’이었다. ‘SM’, 숭민코리아라 불리던 곳. 자석요를 주력 상품으로 내세우며 해외의 네트워크 마케팅을 흉내 낸 폰지식 사기였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빠져나올 궁리를 했다. 다행히 나는 본래 의심이 많고 까칠한 성격이었다. 겉으로는 열심히 교육에 참여하며 합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축구 경기에서 MVP를 받으며 일부러 취한 척 연극까지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자금 마련을 이유로 집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그 길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쌍욕을 퍼부었다. 그건 내 청춘의 첫 번째 분노이자, 마지막 연민이었다.


다단계 회사 숭민. 유튜브 캡쳐


그 일들은 지금도 한 편의 영화처럼 기억된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내가 그런 곳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개탄스러웠다. IMF 구제금융 사태 직전의 시기였다. 사회는 연일 호황이었고, 선배들은 4학년 1학기에 이미 서너 곳의 취업처를 고르던 때였다. ‘갭이어’나 ‘쉬었음’ 같은 단어가 아직 낯선 시대였다. 모두가 앞으로만 달려갔고, 뒤를 본다는 건 곧 실패의 언어였다.


그러나 그 호황은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한 세대의 청춘이 바통을 건네받듯 절망으로 교체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때, 가난의 입구에서 비로소 세상의 얼굴을 보았다. 배신이란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시대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쉬었음’이라는 이름의 사회


2025년 8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만 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일하지 않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은’ 비경제활동인구는 1622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특별한 사유 없이 ‘그냥 쉬었음’으로 분류된 인구만 264만 1천 명.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03년 이후 최대치다. 숫자는 냉정하지만, 그 숫자가 가리키는 현실은 조금 다르다. ‘쉬었다’는 말이 과연 휴식의 언어일까. 아니면 포기의 다른 이름일까.


눈에 띄는 것은 연령별 분포다. 60대 이상이 95만 명(약 36%)으로 가장 많지만, 30대의 ‘쉬었음’ 인구가 32만 8천 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특히 이 연령대는 ‘몸이 좋지 않아서’(30.8%)와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27.3%)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이 통계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건강과 노동의 경계가 동시에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층(15~29세)에서도 ‘쉬었음’ 인구는 약 44만 7천 명(전체의 16.9%)으로 나타났다. 그중 가장 많은 이유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결국, ‘쉬었다’는 말은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퇴각의 표현이다.


통계청의 수치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역설이 보인다. 비경제활동인구는 소폭 늘었지만, 전체 인구 대비 비율은 35.4%로 조사 이래 가장 낮았다. 겉으로는 ‘더 많이 일하는 사회’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적했듯, 낮은 실업률이 곧 고용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직을 포기한 이들이 늘면서 통계상 실업률이 낮게 잡히는 ‘착시’가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쉬었음’ 인구의 증가는 고용지표의 착시 뒤편에서 조용히 진행 중인 구조적 피로를 드러낸다.


이 피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30대의 ‘쉬었음’ 증가는 사회적 정체감의 붕괴와 맞닿아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처럼 ‘노력하면 된다’는 신화를 신뢰하기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고, 청년이라 부르기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쉬었다’는 말은 그래서 종종 삶의 잠정적 유예를 의미한다. 질병, 번아웃, 부적응, 혹은 실패감. 각기 다른 이유들이 한 단어 안으로 밀집된다. 그 쉼은 휴식이 아니라 존재의 정지다.


'쉬었음' 청년 추이. 연합뉴스


사회는 여전히 ‘열심히 하는 사람’을 미덕으로 내세운다. 그 반대편에서 멈춘 사람들은 스스로의 정체를 해명해야 하는 불안을 겪는다. “왜 쉬는가?”, “언제 다시 일할 건가?”라는 질문이 쉼의 권리를 갉아먹는다. 결국 ‘쉬었음’은 통계의 항목이 아니라 죄의 문법이 된다. 우리가 그 단어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사회는 노동하지 않는 인간에게 낙인을 찍는다.


그럼에도 이 현상은 단순히 ‘일하기 싫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혁신이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플랫폼 노동이 불안정한 수입 구조를 만들어내는 오늘, 일의 형태 자체가 유예되고 있다. 이제 ‘쉬는 사람들’은 노동에서 이탈한 존재가 아니라, 노동의 방식이 변하는 전환기에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세대다. 그들은 노동시장의 구석에서 사회적 무기력과 싸우며, 때로는 생존을 위한 ‘자발적 실업’을 택한다. 그러나 이 ‘자발성’은 현실의 강제와 맞닿아 있다. 쉼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인 것이다.


‘쉬었음’이라는 단어는 언뜻 따뜻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적 구조의 냉기가 흐른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은 너무 오래 달려온 사회다. 과로와 경쟁, 자책과 모멸의 언어로 버텨온 세대가 이제 잠시 멈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멈춤이 개인의 나약함으로만 해석된다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노동을 신앙처럼 숭배하는 중일 것이다. 진정한 ‘쉬었음’이란, 일하지 않음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회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쉼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쉬는 사람들의 사회, 일할 수 없는 구조


취업이나 노동현황을 다룰 때 통계청은 ‘쉬었음(rested, 휴식 중)’이라는 항목을 사용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언어적 장식이 아니다. 노동 통계 체계 안에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와 심리적 상태를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적 용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통계 이상의 짙은 사회적 함의가 깃들어 있다.


‘쉬었음’은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의 비경제활동인구(non-economically active population) 세부 분류 가운데 하나다. 비경제활동인구란 만 15세 이상 인구 중 조사 기준 주간 동안 일하지 않았고, 일할 의사나 구직활동도 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다시 ‘가사’, ‘육아’, ‘학업’, ‘연로’, ‘심신장애’, ‘취업준비’, ‘진학준비’, 그리고 ‘그냥 쉬었음’으로 나뉜다. 그중 ‘그냥 쉬었음’은 위의 구체적 사유에 속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지도 일자리를 찾지도 않았다고 응답한 이들을 가리킨다. 즉, 명시적 이유가 없는 비활동 상태, 다시 말해 경제활동에서 일시적 혹은 구조적으로 이탈한 사람들의 범주다.


이 통계적 명칭은 표면상 ‘휴식’을 뜻하지만, 그 안에는 실직, 탈진, 질병, 돌봄 부담, 삶의 의욕 상실이 겹겹이 포개어 있다. 사회학적으로 ‘쉬었음’은 단순한 비활동이 아니라, 노동 체계 밖으로 밀려난 존재의 표식이다. 이들은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상태는 “일할 수 없음”이 아니라 “일할 여건이 없음”에서 비롯된다. 장시간 노동, 낮은 임금, 불안정한 고용, 돌봄의 책임, 건강 악화 등으로 인해 ‘쉬는 상태’가 선택이 아닌 강요가 된다. 그래서 ‘쉬었음’은 숨은 실업(hidden unemployment), 혹은 비자발적 비활동(involuntary inactivity)으로 읽힌다.


언어적으로 ‘쉬었다’는 말은 회복과 재생을 암시한다. 그러나 통계 속 ‘쉬었음’은 회복이 아니라 정지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들이 쉬는 이유는 피로를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압력에서 숨기 위해서다. 이 ‘쉬었음’에는 노동의 상실감뿐 아니라 존재의 유용성에 대한 의문, 나아가 삶의 동력 상실이 묻어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행정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현대인의 피로사회적 자화상이다. “그냥 쉬었음”이라는 응답은, 사실상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무언의 고백이다.


숫자로 기록된 통계 안에서도 그 얼굴들은 선명하다. 하루 종일 구직 사이트를 띄워놓고 마우스를 멈춘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청년, 육아와 돌봄의 이중 부담에 짓눌려 낮잠으로 버티는 중년 여성, 지병과 피로로 재취업을 포기한 노년의 노동자. 그들은 모두 통계 속에서 “쉬고 있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들의 쉼은 휴식의 평온함이 아니라 멈춤의 고독이다. ‘쉬었음’은 더 이상 노동의 대안이 아니라, 노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징후이자, 사회적 피로의 총합이다.


요컨대, ‘쉬었음’은 경제활동의 부재를 가리키지만, 현실적으로는 피로와 체념, 혹은 탈노동의 생태를 드러내는 은유적 단어다. 그 한 단어 안에는 오늘의 사회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쉬어야만 하는 존재’를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이 잠재되어 있다. 쉼은 더 이상 자율의 행위가 아니라,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불가항력의 간극이다.


고용의 질이 문제다. 서울신문 제공


이 ‘그냥 쉬었음’의 의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쿠팡 야간노동 논쟁과도 깊게 맞물린다. 쿠팡에 근무하는 이들은 자신을 ‘노동자’라기보다 ‘자율적 계약자’로 규정한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근로소득을 얻고, 시작과 중단이 자유로운 고용 형태에 큰 불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과연 자유인가.


플랫폼 노동이 제시하는 ‘자율’은 사실상 관리되지 않는 통제의 다른 얼굴이다. 노동 시간은 스스로 정하지만, 그 시간의 총량은 생계의 절박함이 결정한다. 업무를 거절할 권리가 있지만, 일정 기준 이하의 참여율은 ‘비활성 계정’으로 처리된다. 계약은 자유롭지만, 그 계약이 가능하기 위해선 플랫폼이 정한 알고리즘의 리듬에 따라야 한다. 야간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는다.


쿠팡의 야간배송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근로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노동의 의미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쉬었음’과 ‘야간노동’은 서로 반대의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구조의 다른 극에 있다. 한쪽은 과로로 인해 쉴 수 없고, 다른 한쪽은 피로로 인해 일할 수 없다. 결국 두 상태 모두 사회가 인간을 소모하는 방식의 변주다.


‘쉬었음’은 체념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멈추어야 할 자리를 가리킨다. 쿠팡의 야간노동 논쟁은 우리에게 묻는다.


“일하지 않는 이들은 게으른가,
혹은 너무 오래 일해 더는 일할 수 없는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사회는, 쉼을 죄로 만들고, 노동을 신앙으로 치환한다. 우리는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쉬는 것은 죄인가, 아니면 인간이 회복을 위해 부여받은 마지막 권리인가.



밤의 소유권, 자본의 리듬과 인간의 권리


이제 이 단어의 그림자는 쿠팡의 야간노동 논쟁으로 이어진다. 언뜻 보면 그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이해 대립처럼 보인다. “야간배송이 사라지면 생계가 막막하다”는 기사들의 호소와,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편리함을 누릴 수 없다”는 항의가 맞선다. 언론은 이를 ‘노노(勞勞) 갈등’으로 포장하며, 정작 결정권을 가진 사용자의 책임을 희미하게 만든다. 이 침묵이야말로 자본의 언어가 작동하는 교묘한 방식이다.


쿠팡은 자신을 ‘테크 기업’이라 부르지만, 그 기술은 효율의 이름으로 인간의 시간을 더 깊이 포획한다. 배송의 속도를 단축하는 기술은 곧 인간의 수면과 휴식을 단축시키는 기술이 되었고, ‘자율적 참여’라는 말은 사실상 구조적 강제를 은폐한다. 선택이 성립하려면 대안과 존엄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 둘이 부재한 사회에서 자율은 강제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야간노동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리듬을 해체하는 문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세계 내 존재’로서 낮과 밤의 호흡을 함께 살아간다. 그 리듬이 깨질 때, 인간은 더 이상 세계 속에서 존재하지 못하고 기능으로 전락한다. 쿠팡의 야간 배송은 그 존재 리듬의 붕괴를 드러낸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밤의 시간’을 누가 소유하느냐에 있다. 자본은 밤을 물류 효율의 단위로 환원하고, 인간의 어둠을 재고로 계산한다. 그러나 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은밀한 시간이다. 아렌트가 말한 ‘활동적 삶’의 균형에는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이 함께 놓이지만, 오늘의 플랫폼 노동은 그 셋 중 노동만을 무한히 반복하게 만든다. 인간은 사유와 행위를 잃고, 존재의 깊이를 잃는다.


이 모든 착시는 분할 통치의 전형이다. 노동자와 노동자가 서로를 향해 싸울 때, 자본은 ‘선택의 자유’라는 언어 뒤에 숨는다. 그러나 생존을 담보로 한 선택은 자유가 아니라 생존 본능의 반응에 가깝다. 야간노동 금지는 일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쉬어야 할 권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이며, 자본의 효율 논리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다. 칸트가 말한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윤리가 이 지점에서 다시 떠오른다.


결국 ‘그냥 쉬었음’과 ‘자발적 야간노동’의 결은 같다. 둘 다 선택이 줄어든 약자의 궁여지책이다. 건강과 삶의 질이라는 이유로 자발성을 포장한 채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선택지는 없다. 정부의 역할은 이들에게 ‘선택 가능한 조건’을 보장하는 일이다.


노동자 끼리의 갈등으로 프레임이 구축. 유튜브, 정의당 자료


일자리는 단기 소득이 아니라 생애 소득의 가능성, 곧 고용의 지속성(job security)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지금의 사회는 당장 300만 원의 소득에 안주하게 만들지만, 고용보장이 없는 일은 직업의 지속성이 0에 가깝다. 반면 200만 원이라도 안정된 일자리는 삶의 예측 가능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학교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다. 직업 세계의 기준은 부모와 선배, 친구의 경험에 의존하며, 그 경험의 세습은 결국 또 다른 불평등을 낳는다.


‘쉬었음’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피로를 드러내는 징후다. 그리고 쿠팡의 야간노동은 그 피로가 어떻게 제도화되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효율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잠들고 쉬고 사랑할 수 있는 밤이다. 그 밤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지금 이 사회가 아직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국, ‘노동’이라는 말은 우리를 생존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히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존엄을 가장 높이 끌어올리는 이름이다. 그것은 단지 임금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 나 자신을 매일 새로이 맞대는 행위다. 한 줌의 시간과 몸을 내어 세상을 작동하게 만드는 그 일에는, 이미 하나의 관계론적 윤리가 깃들어 있다. 야간의 어둠 속에서 배달을 이어가는 이의 손끝에도, 새벽의 청소부가 들고 있는 빗자루의 끝에도, 세계를 정화하고 재구성하려는 의지가 잠들어 있다. 그 의지는 보상 이전의 윤리이며,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존엄의 형식이다.


노동의 숭고함은 효율과 성과의 외피 속에서 쉽게 잊힌다. 그러나 진정한 숭고는 초월의 차원이 아니라, 일상 속 반복과 피로의 무게를 견디는 인간의 내면에서 깨어난다. ‘야간 노동 금지’라는 사회적 논의 역시 그 숭고의 장소를 되찾으려는 미약한 몸부림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 금지해야 할 것은 단순히 ‘밤의 노동’이 아니라, 타인의 피로를 자본의 이윤으로 환산하는 무감각의 체계일지도 모른다. 노동이 다시 숭고해지는 순간은, 인간의 시간과 생명이 이윤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의 의미를 다시 써 내려가는 손길로 회복될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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