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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ough, 흩어진 마음과 만족 사이

주간 단상 - 팔리는 글에 대하여

by 박 스테파노

1.

연말을 앞두고 주변의 출간 소식이 잇달아 들린다. 오래 품어 온 사유가 언어의 옷을 갈아입고 세상에 나오는 일은, 인간과 문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잠시 반짝이는 하나의 작은 총체처럼 느껴진다. 응원해 온 이들의 성과에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면서도 마음 한편에 묵직한 헛헛함이 남는다.


갑자기 스레드에서 본 어떤 평이 떠오른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두고 ‘추리물일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는 말, 그리고 작가 이름을 보고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며 머쓱해하는 고백. 어쩌면 그 또한 시대의 요구가 빚어낸 어떤 감각일지 모른다. 요즘처럼 ‘팔리는 책’이 선별되듯 소비되는 풍경 앞에서, 팔리기 어려운 원고를 쓰는 사람은 실패자인가 하는 쓸쓸함이 문득 스며든다. 밀려나는 글들의 마음이 내게도 흩어져 와 오래 머문다.


그 마음의 깊은 곳에는 부러움이라는 근원적 감정이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함도 사실이다. 부럽고 또 부럽다. 나도 한 번쯤은 조금 더 가볍고, 읽히기 쉬운 글을 써 볼까 하는 충동이 스며올라 습작을 시작하다가도, 끝내 다시 내 글의 결로 돌아오는 회귀의 본능을 여러 번 겪는다. 이는 아마도 내 안의 가장 심연을 끝까지 응시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처지의 징표일지 모른다. 팔리기 어려운 무거운 글은 결국 내 근심의 무게와 닮아 있고, 나는 그 무게를 외면하지 못한 채 다시 그 자리에 서 보려 한다.


그래픽=Gemini·이진영. 조선일보 제공


2.

지난주 기사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리포트가 있었다. ‘AI 출판’이라 이름 붙은 새로운 조류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출판계의 오래된 상식을 단숨에 뒤흔드는 이른바 ‘슈퍼 출판사’들의 등장과 함께 거대한 변곡점이 도래하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인간 편집자의 손보다 더 빠른 속도로 문장을 생성해내는 인공지능이 자리하고 있었다.


교보문고 온라인 서점에 등록된 한 출판사는 불과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9,000권이 넘는 책을 쏟아냈다고 한다. 대형 출판사가 한 달에 스무 권 남짓을 내는 현실을 고려하면, 거의 상상에 닿지 않는 속도다. 그들의 비결은 정교하게 짜인 자동화 시스템에 있었다. AI가 책의 소재를 찾아내고, 스토리의 기본 구조를 짜고, 시장에 맞춘 문체를 조율하며, 검색에 최적화된 제목을 조립하듯 만들어낸다.


어떤 ‘슈퍼 저자’는 철학과 의학, 공학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4개월 만에 130권을 집필했고, 하루에 12권을 출간한 기록까지 남겼다고 한다.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고, 글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우리의 오랜 감각은 이 앞에서 잠시 말을 잃는다.


이처럼 AI가 생성한 텍스트는 이미 전자책 시장뿐 아니라 실물 도서 시장까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가장 첨예한 문제는 AI 사용 여부를 독자가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서점의 책 소개에도, 작가 소개에도, 어느 곳에도 이 책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 관한 고백은 없다.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급격히 커지는 이유다.


국내 대형 서점들조차 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진위를 검증할 수단조차 갖지 못한 채 ‘깜깜이 AI 출판’이라는 이름의 혼란이 생태계를 뒤흔든다. 출판이 더 이상 시간의 정밀한 여과를 거쳐 나오는 문화적 생산물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분주한 조립 라인 위에서 대량 생산되는 상품처럼 보이는 순간—우리의 질문은 자연스레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3.

AI가 만들어낸 책들의 품질은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스펙트럼을 이룬다. 어떤 책은 기존 교양서의 문장들을 얇게 비벼 붙여놓은 수준에 머무는가 하면, 어떤 책은 특정 분야 교수들의 연구를 한데 묶어 압축해낸 것처럼 놀라운 정밀함과 폭을 보여준다.


실제로 한 토목공학 용어집을 검토한 명예교수는 방대한 지식량과 여러 세부 전공을 종합한 조직력에 감탄하며 “50대 이상 학식이 깊은 교수 열 명이 모여 쓴 책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찬탄이 가능한 순간만큼이나 AI의 본질적 결함이 드러나는 장면도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체는 그 결함의 가장 선명한 자리였다. 위 명예교수는 책의 문장 구조가 챕터마다 놀라울 만큼 동일해 “사람의 숨결이 지워진 건조한 인상”을 준다고 했다. 정보는 풍부했지만, 누군가의 손길이나 감각이 개입된 흔적이 사라진 글은 오래 들여다볼수록 생기가 떨어졌다. 연극 연출 교양서를 검토한 또 다른 명예교수는 연극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가 반복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이보 반 호브’를 ‘이노 반 호브’로 적는 식의 고유명사 오류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AI는 서양 포털에서 검색이 잘되는 정보만을 끌어와 비슷한 문장 구조로 되풀이하는 습성을 드러냈다. 지식의 양은 충만했지만, 지식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 필요한 맥락과 감각은 어딘가 빠져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말한다. AI는 지식을 축적하고 재조립하는 데서 탁월하지만, 그 지식에 철학적 결을 입히고 인간적 통찰을 스며들게 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 저자의 몫이라고. 지금 출판계가 맞닥뜨린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AI 출판사들은 저비용·고효율을 앞세워, 권당 판매량이 적어도 종류를 극단적으로 넓혀 이익을 확보하는 ‘와이드 셀러’ 전략으로 시장의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서점들은 AI 저자 표기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지만, 출판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 앞에서 판매 자체를 제한하는 강한 제재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과도기적 풍경 속에서 우리의 오래된 질문—책이란 무엇인가, 저자란 누구인가—는 더 깊고 조용한 울림을 남긴 채 다시 돌아온다.


AI출판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 AI Sora



4.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스스로 ‘브런치로 돈벌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플랫폼 곳곳에 소정의 금전을 받고 작성했다는 광고 홍보 글이 아무렇지 않게 게시되는 현실을 떠올리면, 이런 구호는 오히려 순한 편에 속한다.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돈을 위해 글을 쓴다면 차라리 다른 방식의 수익 모델을 고민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씁쓸한 생각이 요즘 부쩍 잦아졌다.


최근에는 각종 문학단체들이 ‘등단비’라는 이름으로 돈을 받고 등단을 알선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적게는 십만 원, 많게는 백만 원이 넘는 비용을 요구하면서, 등단이라는 희소한 기회를 미끼로 삼는 새로운 수익 구조가 생겨난 셈이었다. 등단 작가의 숫자는 끝없이 늘어가는데 정작 문학의 지대와 토양은 오히려 척박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때 커피 열풍 속에서 우후죽순 생겨났던 바리스타 자격증의 과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글은 결국 글쓴이 스스로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품평해야 하는 작업이라 믿는다. 그 문턱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지키려는 마음—주저하고 머뭇거리며 밤을 새우는 무수한 이들의 시간—이 쌓여 문학의 어둠을 조금씩 밝혀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였다. 그 느린 밝음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리라, 나는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5.

에세이에 관한 짧은 소고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SNS에서 떠도는 ‘에세이 출판 열풍’이 서로 전혀 다른 좌표를 가리키는 듯해 그 모순의 실체를 곰곰이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느 패기 어린 편집자가 올린 〈에세이로 성공하기 위한 냉정한 현실 분석〉이라는 글이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에세이 시장은 투고가 넘쳐나지만, 실제로 독자의 손에 닿는 글은 극히 일부에 머문다며, 지금 선택받는 서사에는 분명한 조건이 작동한다고 했다. 그 조건은 다음의 여섯 갈래로 요약되었다.


1) 외국계 본사 경력처럼 강력한 상징 자본을 지닌 성공담

2) 난치병이나 장애를 예술적 언어로 승화한 재능형 서사

3) 이미 포화된 주제를 넘어서야 하는 기묘한 심리·증상, 혹은 그 주변인의 돌봄을 다룬 고백

4) 육체노동이나 비가시적 직업, 혹은 해외에서 수행한 노동 경험을 사회학적으로 성찰한 기록

5) 사이비 종교 탈출, 채무 극복 등 낙인이 깃든 경험을 깊은 자기분석으로 건너 올린 통찰

6) 기존 다른 장르에서 이미 이름을 얻은 창작자의 브랜드형 에세이


편집자의 결론은 날카로웠다. 출판 시장은 더 이상 ‘누구나의 일상’을 원하지 않으며, 사회적 위치로 이미 증명된 서사만을 호출한다고. 결국 “내 삶이 왜 타인의 시간을 빌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에세이의 성패를 가르는 분기점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그의 언어는 요즘 세대의 말투로 더 직설적이고 거칠었지만, 나는 내 서정의 호흡으로 조금 완만하게 빚어 표현해 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의 기준에 나 또한 제법 해당되는 항목이 많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이야기의 가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삶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서만 ‘특이한 이야기’이며, 그 고유함은 세상 앞에서 곧바로 교환 가능한 상품이 되지 않는다.


출판계가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여기에 있다. 글을 책으로 만들기 위한 기준이 어느새 삶의 계급도를 따라 정렬되고, 그 관점을 당연한 듯 제시하는 편집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 에세이스트란 이름으로 호명되는 이야기들의 숨결이 좁아지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이러한 인식이 먼저의 원인인지 모른다.


에세이는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AI Sora



6.

에세이가 잘 팔리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극장가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소동극 같은 소품들이 흥행하는 이유와 묘하게 닮아 있는 듯하다. 복수, 성장, 후회, 공포 같은 익숙한 플롯만이 살아남는 현상 뒤에는, 관객이 감당할 수 있는 심리적 위험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 시대적 정서가 숨어 있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시간 대비 심리적 이득’은 계속 줄어들고, 값어치 있는 감정적 보상을 빠르게 원하게 되는 흐름이 지배한다. 이른바 ‘가심비’의 시대다. 여기서 비용은 돈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공포—즉, 헛된 시간의 두려움이다.


그래서일까. 힙한 문학 텍스트라 들어 펼쳤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 더 흔해졌다. 앞서 말했듯,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미스터리 추리물이라 기대했다가 낭패를 보았다는 어느 독자의 고백은 상징적이다. 작가 이름을 뒤늦게 확인하고 그제야 이해했다는 말 뒤에는, 이미 어려운 독서에 시간을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자기합리화가 은근히 깔려 있다. 책을 여러 권 동시에 펼쳐두는 일을 ‘병렬 독서’라 부르며 정당화하고, 500쪽 남짓한 장편 하나에 한 달여를 들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집중력이 사라진 시대의 독서법은 어느새 그 자체로 변명이 된다.


읽는 힘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가장 명확하게 표징하는 현상 같다. 그래서 논쟁이 본질에서 멀어지고, 말하는 사람의 자격 여부로 흘러가는 장면이 점점 잦아진다. 지난 시절 책 조금 쓰고 방송 몇 번 나왔다고 타인의 삶을 거침없이 재단하려는 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들의 얄팍한 경험 사이에서 누군가는 죽을 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건너왔을 텐데, 정작 겸손의 기미조차 찾아보기 힘든 요즘이다. 이런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인문학’을 입에 올릴 때, 어딘가 서늘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 말이 담아야 할 깊이와 책임의 무게를 너무 쉽게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오는 소름일 것이다.



7.

십여 년 전, 모교 문과대학 건립 100주년 기념사업 설명회에 초대되어 앉아 있던 장면이 문득 되살아났다. 1947년에 입학하신 노교수님부터 막 입학한 재학생들까지 한자리에 모인 자리였고, 지금 돌이켜도 어딘가 따스한 울림이 남는다. 그중에서도 학술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단단한 연설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인문학 열풍이라는 이름으로 번지던 수많은 ‘인문학 특강’이야말로, 사실은 인문학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드러내는 반증이라는 말. 천년을 두고도 다 헤아릴 수 없는 학문을 두 시간 남짓한 강연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래 미뤄두었던 메모를 다시 펼쳐 보게 되었고, 그제야 조용한 반성에 잠겼다.


오랜만에 뵌 은사님들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를 제자가 아닌 말벗처럼 대하시며, 언젠가의 젊은 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나만 나이를 먹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점점 절어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서늘함이 스쳤다.


설명회가 끝난 뒤, 동주시비 앞에서 차 한 잔을 나누던 그 늦은 오후의 공기가 아직도 희미하게 손에 잡히는 듯하다. 그 시간은 어쩌면, 인문학이라는 오래된 집의 문턱에서 다시금 나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 조용한 이정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레이스 바이어스 동화책 「I am enough」. 교보문고


8.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은 날들의 고백이다. 누군가의 성공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또 누군가의 비평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듬성듬성 여유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번 주에는 여섯 번째 골수검사가 예정되어 있다. 최근 수치가 좋아지고 있는 터라, 이번 검사로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따른다. 골반뼈에 구멍을 내고 골수와 조직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비교적 잘 견디는 편이어서 두려움은 거의 없지만, 검사 후 이어지는 두세 시간가량의 지혈 과정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혈소판이 아직 정상 수치의 2/3 수준에 머물러 있어 그 시간 동안 지혈이 늦어질 가능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지난번 검사에서는 혈소판이 거의 바닥이어서 지혈이 되지 않았고, 아내가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을 오가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 몸이 조금 살아나자, 그간 소홀히 여겼던 불편이 다시 크게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법이다.


며칠 전 넷플릭스 드라마 〈내 안의 괴물 (The Beast in Me)〉를 보다 한 장면이 깊이 남았다. 부동산 재벌 부자의 뒷일을 담당하는 부친의 의붓형제에게 조카 며느리가 묻는다. ‘차고나 위층 숙소에서 지내며 가족의 일을 도맡는데 마음 불편하지 않냐’고. 이에 그는 조용히 대답한다.


"아니. 내가 내 형과 조카 녀석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아니? 바로 'enough'. 난 만족할 줄 알거든."


그 말은 처지에 감사하라는, 살아있는 지혜처럼 들렸다. 무엇이든 눈여겨 집중하면 반드시 한두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그 깨달음 자체가 이미 만족이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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