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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대하여

주간 단상 -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by 박 스테파노

1.

가을이 마지막 힘을 다하듯, 냉기와 햇살이 번갈아 낯을 바꾸는 날들이 이어진다. 계절마다 이름이 있지만, 유독 가을 앞에서는 ‘독서의 계절’이라는 수식이 가장 자연스럽다. 최근 들어 그 말에 다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을이 독서에 좋다는 해석 가운데는 의외로 생리학적 근거가 있다. 세로토닌, 이른바 ‘행복 호르몬’의 감소 때문이다.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행복을 줄이는 물질의 감소가 어째서 독서의 계절을 만든다는 말인가.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니 세로토닌은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곧 흥분과 침잠의 축을 조율하는 물질이었다. 그것이 줄어들면 감정의 진폭이 커지고, 마음은 미세한 떨림에 더욱 민감해진다.


세로토닌이 혈소판에 대거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렇다면 혈소판이 부족한 나 같은 이들에게 가을은 더 깊고 넓은 감정의 파문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그 진폭이 마음을 열고, 책장을 향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가을엔 독서를. AI Sora


2.

세로토닌이 줄어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해석은 어딘가 모순된, 게으른 단순화처럼 느껴진다. 감정의 미묘한 진폭을 생리학의 한 줄 정의로 덮어버리려는, 서둘러 닫힌 해석 같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에 농경사적 이유를 덧붙여, 수확을 끝낸 농한기의 여유 때문이라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계절과 노동의 리듬으로만 인간의 내면을 환원하기엔 그 설명이 너무 평면적이다. 일제강점기 독서운동의 계몽적 유산을 가을에 끌어다 놓는 주장 역시 마음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매년 이 시기, 책을 손에 쥐게 되는가. 아마 가을의 ‘독서’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감각의 리듬이 바뀌는 현상일 것이다. 빛이 짧아지고 공기가 깊어질수록 인간의 시간은 내면으로 응축된다. 외부의 자극이 줄어드는 만큼 사유의 공간이 넓어지고, 그 속에서 문장은 조용히 제 자리를 찾는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그래서 낭만적 관습이나 광고 문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리듬이 가장 읽기 좋은 상태로 수렴되는 계절적 진실에 가깝다. 가을의 냉기와 빛의 기울기는 단지 풍경이 아니라, 읽는 인간의 몸과 마음이 가장 느리게, 가장 깊이 작동하는 시간의 구조다.



3.

가을은 생명의 리듬이 ‘수확’에서 ‘침잠’으로 기울어가는 시간이다. 여름의 과열된 감각이 식어가고, 겨울의 무채색 고요가 오기 전, 세계는 가장 섬세한 빛을 머금는다. 햇살은 낮고 부드러우며, 공기는 투명하게 식어 있고, 바람은 스쳐 지나기보다 머물려 한다. 자연이 자신을 정리하듯 인간의 내면 또한 같은 방향으로 이동한다. 외향의 에너지에서 내향의 사유로, 분주한 소음에서 응시와 회상의 깊은 층으로. 책을 읽는다는 일은 결국 이 계절의 내적 흐름에 조용히 동참하는 행위일 것이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간의 질감’에 있다. 여름의 시간은 확장되고 분산된다. 움직임은 외부로 향하고, 감각은 번쩍이며 흩어진다. 그러나 가을의 시간은 서서히 수축한다. 낮은 짧아지고 그림자는 길어지며, 그 길어진 그림자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비추어 본다.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그림자를 응시하는 일이다.


책장은 단순한 종이의 연속이 아니라, 내면으로 향하는 문의 연쇄다. 가을의 시간은 그 문 앞에서 발을 멈추게 한다. 멈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읽고, 세계의 잔향을 더듬는다.


시간의 질감은 독서를 부른다. AI Sora



4.

지난주, 브런치에 천 번째 글을 발행했다. 발행 취소와 재등록이 섞여 있겠지만, 그 수를 넘어섰다는 감각에는 여전히 묘한 뿌듯함이 깃든다. 천이라는 숫자는 오래전부터 ‘완성’의 상징으로 불려왔다. 어린 시절 고운 손끝으로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으며 누군가의 안녕을 빌던 마음, 혹은 아라비아의 공주가 죽음을 면하려 밤마다 이어가던 천일의 이야기. 중국 전설에선 황하가 천 년에 한 번 맑아진다고 했다. 천 번의 되풀이에는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끝내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이 서려 있다.


나는 그 의미를 ‘꾸준함’이라는 말로 받아들인다. 진정한 나태의 반대말은 근면이 아니라 지속이다. 성급한 속력이 아니라 방향에 대한 신뢰, 그것이 나를 이 천 번째 자리까지 이끌어왔다. 요인영 작가님이 말한 것처럼, 정지된 요가의 한 자세도 결국 꾸준한 방향의 사유 위에 서는 법이다. 글쓰기 또한 그렇다. 매일의 문장들이 쌓여 어느새 하나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이 나를 다시 다음 문장 앞으로 이끈다.



5.

독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어느 시절 후배의 고민이 떠올랐다. 『총ㆍ균ㆍ쇠』를 유행처럼 사 놓았는데,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50쪽을 넘기지 못한 채 책이 점점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건넨 말은 단순했다. “일단 접어. 서문과 해설만 봐. 그래도 힘들면, 그냥 책장에 꽂아 둬.”


독서는 분명 해야 하는 일이지만, 세상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책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출판사는 구입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고마워할 것이다. 책장은 그런 책들로 가득 차 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책들이 주는 ‘압력’이다. 그 무게감이 우리로 하여금 언젠가 다시 읽고 싶다는 욕망을 되살린다.


요즘은 SNS에 책을 올리는 일이 일종의 자랑처럼 여겨지지만, ‘다 읽었어?’라는 물음이 버겁다면 그냥 솔직히 말해도 된다. 취향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다음부터는 다 읽은 뒤에 올리면 된다. 독서는 완독의 성취보다 ‘읽을 마음’을 다시 세우는 일에 더 가깝다. 때로는 그 마음이 책장 속에서 조용히 숙성되기도 한다.



6.

글을 읽는 일은 운동과 닮았다. 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막상 시작하려 하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 어렵게 시작해도 지속하기엔 백만 가지 핑계가 기다리고 있고, 하는 척으로는 오래 버티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독서를 ‘몰래’ 하라고 권한다. ‘자랑’의 반대편, 은밀한 실천으로서의 독서. 누가 묻더라도 “비밀이야” 하고 웃어넘기면 된다. 다 읽은 뒤에, 그때 밝히면 된다. 서평으로든 추천으로든. 그렇게 하면 자존감은 지켜지고, 타인의 시선 대신 자신만의 루틴과 리듬에 집중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도 그렇다. 금연과 금주를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들을 ‘나만의 비밀 프로젝트’로 삼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만 엄격하면 된다. 그 외의 관객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책을 생업으로 다루는 이들에게 이런 방식이 어울린다는 뜻은 아니다.


최근 SNS에서 다독이냐, 정독이냐, 혹은 병행독서냐를 두고 벌어진 논란을 보며 마음이 씁쓸했다.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기보다, 인신공격성 비아냥으로 끝나는 풍경이었다. 엘리트 교육 환경에서 체득한 독서법을 절대적 정답처럼 말하는 것도 무리이지만, 그 발화자가 주류적 직업군에 속한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일 또한 온당치 않다.


책 읽기의 방식은 곧 삶의 리듬이다. 타인의 속도를 재단하는 순간, 독서는 이미 타인의 시선 안에 갇힌다. 자신의 착장이나 서재를 드러낼 때 불필요한 논쟁이 따라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책 읽기조차 버거운 세상에서, 굳이 변명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조용히, 자신만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7.

갑자기 독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지난주 브런치에서 우연히 마주한 한 글 때문이었다.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를 읽었다는 아주 짧은 서평이었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감상이라 여겼다. 그러나 “성해나가 일본에 거주하는 번역가이자 여행가”라는 소개에서부터 고개가 갸웃해졌다. 이어진 문장은 더 황당했다. 『혼모노』를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처세의 자기계발서”라 정의한 것이다. 혹시 독특한 메타비평이거나 인상비평의 새로운 방식인가 싶어 여러 번 읽어보았지만, 아니었다. 그 글의 작성자는 책을 읽기는커녕 서점 사이트의 책소개조차 보지 않은 듯했다.


아마 생성형 인공지능, GPT 같은 모델에 요약을 부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이런 도구들은 본질적으로 ‘진실을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태생적으로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특히 최근 출간된 도서에 대해선 텍스트를 직접 학습할 수 없기에, 사람들의 리뷰나 기사, 온라인 단편 정보들을 조합해 ‘유추적 창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듯하지만 실체 없는 문장, 바로 그것이 함정이다.


물론, 이런 오류를 단순한 부주의로만 돌릴 순 없다. 누구나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독서와 사유의 본질은 결코 ‘요약’이나 ‘단축’의 기술에 있지 않다. 문장을 직접 부딪치고, 세계와 씨름하며, 사유의 속도를 자기 호흡에 맞추는 데 있다.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읽은 척’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안쓰러운 방식이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수천 권의 독서가’라 부르면서도 정작 특정 책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고, 한 줄의 자기 문장조차 남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그보다 더 심했다. 읽지 않은 책으로 쓴 서평은, 글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내용이 비어 있다. 그것은 비평이 아니라 모방된 언어의 빈껍질일 뿐이다.


김현태 동화 『가짜 독서왕』. 아이앤북 제공



8.

독서의 진도가 멈출 때는 이유가 단 두 가지다. 이해가 안 되거나, 지독히 재미가 없거나. 전자의 경우는 ‘방법’으로 풀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오히려 ‘뻔뻔함’으로 극복해야 한다. 남들이 다 좋다, 다 재미있다 말하는 책이라도 그것이 ‘대부분’에게 그럴 수는 있어도 ‘모두’에게 그럴 수는 없다. 지인들의 평가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나만의 독서가 시작된다.


‘방법’은 단순하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책”부터 읽는 것이다. 어떤 책이냐고? 만화책? 맞다, 딩동댕. 나 역시 만화책으로 한글을 배웠다. 대식구 막내였던 시절, 살아 있는지만 확인되면 충분하던 때라, 한글 공부는 사치였다. 다행히 아래층에 만화가게가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글자를 배웠다. 지금도 만화책을 여전히 좋아한다.


그다음 단계는 ‘글자가 좀 많아 보이는 책’으로 넘어가는 일이다. 나는 역사책을 권하고 싶다. 그렇다고 토인비나 카, 채은식 같은 거장들의 난해한 서술을 말하는 건 아니다. tvN에서 방영한 시리즈를 엮은 『벌거벗은 세계사』나, 최근 개정판이 나온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추천한다. 흡입력 있고, 어렵지 않으며, 짧은 챕터 구성 덕분에 나누어 읽기에도 좋다. 제목처럼 ‘거꾸로 읽어도’ 무방한 책들이다.


그다음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연습’이다. 여기엔 소설이 제격이다. 다만 짧다고 단편부터 집어 들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요즘 단편들은 서사의 완결성보다 문체의 개성이나 장르적 실험에 집중하므로, 오히려 진입 장벽이 높다. 그렇다고 고전으로 바로 건너뛰기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니 나는 ‘추리소설’이나 ‘로맨스소설’을 권한다. 인간의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르이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재미에서 시작해 이해로 나아가면 된다. 결국 독서의 문은 지루함이 아니라, 작은 흥미 하나로 열린다.



9.

이 정도 읽었다면, 다음 단계는 ‘관심사’, ‘추천작’, ‘트렌드’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다만 장르에 따라 읽는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 좋다. 앞서의 쉬운 역사서는 틈날 때마다, 언제 어디서든 읽는 방식이 적절하고, 소설은 ‘한 번에 주욱’ 읽는 계획이 효과적이다. 주말 하루를 정해 TV와 인터넷을 잠시 밀쳐두고, 책과 씨름하듯 맞붙는 시간. 책의 종류마다 다르게 읽는 방식은 운동과 비슷하다. 키우고 싶은 능력에 따라 유산소, 근력, 원포인트, 스트레칭을 달리하듯, 독서의 근육도 다양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다 읽은 책에는 ‘흔적’을 남기자. 읽은 책의 보관 위치를 바꾸거나, 독서 완료 리스트를 업데이트하거나, 간단한 기록과 서평을 남기는 식으로 ‘읽은 티’를 자신에게 내는 것이다. 서평은 처음부터 잘 쓰려 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남은 구절과 페이지를 적고, 다음은 줄거리나 내용 요약, 그다음 감상으로 확장하면 충분하다. 어렵지 않다. 단숨에 하려니 마음만 급해질 뿐이다. 다섯 해의 계획으로 차근히 이어가면, 지금 마흔이라면 쉰 즈음에는 ‘책 박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흔이야말로, 책 읽기를 시작하기에 참 좋은 나이이기도 하다.



10.

솔직히 ‘활자 중독’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할 순 없지만, 있다면 나도 그 범주에 들지 않을까 싶다. 성장 배경과 사회 환경이 겹치며, 나는 무엇이든 읽어대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1년에 수백 권을 읽는 누군가처럼 폭발적 능력은 없지만, 활자의 종류와 형식은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모든 제품의 매뉴얼까지 꼼꼼히 읽었고, 패션 잡지 속 작은 활자마저 찾아내듯 눈으로 훑었다. 그 습관은 부작용도 남겼다. 화장실에 읽을 거리가 없으면 배변 활동이 어렵다는, 어쩌면 귀엽게 들릴 강박 같은 것이 생겼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며 『전쟁과 평화』를 사흘 만에 읽고, 등장인물 관계도를 그리는 리포트를 제출하기도 했다. 검색과 타이핑이 없던 시절의 독서는 막무가내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경험은 속도와 분량을 동시에 길러주었고, 글쓰기 속도 또한 남달리 키워 주었다. 덕분에 IT와 비즈니스가 맞물린 컨설팅과 사업 계획에서 수많은 레퍼런스를 빠르게 소화할 힘을 얻었고, 그 힘으로 밥을 먹고 살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반 백 살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넘치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고, ‘다 읽어낼 필요’도 없다. 교과서도 다 읽으면 좋을 뿐,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점수와 성취는 각자의 용기에 맡기면 된다.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란 없다. AI Sora



11.

‘서평가’라는 타이틀도 ‘브런치 작가’만큼이나 오해가 깊다. 자격의 기준이 모호하고, 읽는 활자보다 쓰는 활자가 더 많아지는 시대적 흐름이 그 이유다. 그럼에도 좋은 서평가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 여기, 서평의 중심을 잡아온 김성신 작가의 이야기를 빌려본다.


“사회의 공공재인 책을 평가하는 일인 만큼, 서평은 공공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 점을 잊으면 서평가 자격은 없다. 서평가의 기준을 정하거나 서평을 평가하는 이는 없을지 몰라도, 결국 독자는 안다. 독자는 집단 지성이다. 일부를 잠시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두를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서평 역시 현란한 수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책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 공공성에 대한 엄격한 자기 검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인가 되고 싶다면 그 일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서평의 본질은 바로 사랑과 공공성이다.”

— 『서평가 되는 법』, 김성신


이 말은 서평이라는 장르가 단순한 감상 기록이나 홍보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독자와 사회를 향한 책임, 그리고 책에 대한 진정한 애정 없이는 서평가의 이름을 갖는 것조차 부적절하다. 화려한 표현이나 속도만을 좇는 시대일수록, 서평의 공공성과 진정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12.

가을은 ‘침묵의 언어’가 가장 선명히 들리는 계절이다. 바람의 속삭임, 낙엽의 마찰, 인간의 호흡조차 여름보다 뚜렷이 감지된다. 독서는 이 침묵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글자는 눈으로 읽히지만, 의미는 오직 침묵 속에서 열린다. 가을의 정적이 바로 이 ‘읽는 침묵’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단순히 날씨가 선선해서도, 학교의 개학과 연관된 문화적 습관 때문도 아니다. 삶의 속도가 잠시 느려지고, 감각이 사유로 전환되는 시기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전환의 리듬을 감지하고, 그 안에서 책을 찾는다.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세계의 끝에서 자신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가을의 독서는 시간의 잔향 속에서 자신을 되읽는 행위다. 흩어지는 낙엽처럼 기억과 감정을 모아 한 권의 책처럼 묶어두려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의 계절이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가을은 ‘존재의 현상학’이 가장 선명해지는 시기다. 봄의 탄생과 여름의 충만을 지나, 가을은 소멸과 쇠퇴의 징후를 받아들인다. 낙엽이 지는 나무는 죽음을 예행하며, 그러나 그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질서로의 귀의다. 인간은 그 광경 앞에서 필연적으로 사유를 시작한다. 문학은 바로 이 사유의 언어화다. 따라서 가을에 책을 펼친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향한 계절적 응답에 가깝다.

그리기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내 사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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