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없이 모든 꿈을 찾아 헤매었던
누구나 마음속에 오래도록 부른 노래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 조회 시간 내내 반복되던 애국가와 교가를 제외한다면, 그 노래는 노래방에서의 ‘18번’일 수도 있고, 신앙인의 삶을 따라 성당과 교회에서 자연스레 되뇌던 찬송이며 성가일 수도 있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자주 부른 노래는 일종의 축복 송이었다. 음표가 크게 치닫지도 않고, 물결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며 숨결에 가까운 속도로 읊조렸던 그 선율을 반복해 불렀다. 환영을 위해, 환송을 위해, 생일과 기념일, 그리고 이별과 만남의 끝자락마다 우리는 그 노래를 건넸다. 코드 진행 또한 단출해서인지 잊히지 않는 레퍼토리가 되었던 곡, 바로 ‘들국화’의 <축복합니다>였다.
‘들국화’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사자 머리를 한 전인권의 강렬한 이미지가 먼저 스친다. 아마 그 때문인지 우리는 그들을 ‘록 밴드’로 규정해왔다. 실제로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사랑한 후에> 같은 대표곡들은 풍성한 사운드를 지닌 프로그레시브 록의 계보에 서 있고, 기타 리프와 후주의 솔로는 공간을 가득 채우는 록의 기개를 온전히 드러낸다.
그럼에도 내게 들국화는 근본적으로 ‘포크 음악’을 들려준 밴드에 더 가깝다. 굳이 서양의 그룹에 견주자면 조심스레 ‘비틀스’를 떠올리고 싶다. 비틀스의 음악적 뼈대를 이루는 감수성의 깊은 곳에는 언제나 포크의 정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들국화의 음악 또한 그 비슷한 결을 지니며, 한국 대중음악사 안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처럼 자리한다.
오늘의 이 글은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는 작은 헌정이며, 오래된 축복의 멜로디가 남긴 잔향에 대한 사적이고도 음악적인 기록이다.
들국화라는 이름이 피어오르기까지
‘들국화’의 탄생을 둘러싼 기록들은 말하는 이의 시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 어느 팀이나 겪는 애증과 갈등이 기억을 비틀어놓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셋이 의기투합해 만든 팀이라고 말하지만, 그 시작을 엄밀히 더듬어 보면 ‘2+1의 합심’에 가까웠다. 전인권과 허성욱, 그리고 훗날 합류하게 되는 최성원은 당시 각자 다른 자리에 서 있던 무명 음악가들이었다.
들국화의 발원지를 놓고도 다른 서사가 따라붙는다. 1982년 8월 이촌동 ‘까스등’에서 전인권과 허성욱이 함께 무대에 오른 데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양병집이 만든 신촌 ‘모노’에서 태동했다는 기억 또한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그 무렵 전인권은 이주원이 주도한 《따로 또 같이 1집》(1979)에 참여한 뒤 홀로 서 있었고, 1979년과 1980년에 비공식 솔로 앨범 두 장을 발표한 상태였다. 그는 ‘까스등’ 공연 이전에도 듀엣 ‘조·이’로 활동하던 조덕환, 경력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던 허성욱과 함께 강릉의 나이트클럽에서 팝송을 부르며 생계를 이어갔다. 최성원은 이 과거 이력을 두고 밤일을 해오던 음악가들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고려대 물리학과 73학번이라는 학력과, 부친 최영섭(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에 대한 자부심이 그를 기존의 딴따라 이미지와 거리를 두게 만든 듯하다. 이 감정의 간극은 밴드의 긴장으로 오래 남았다.
최성원은 1980년 이영재, 이승희와 함께 트리오 앨범을 낸 뒤 1982년 말에서야 들국화의 흐름과 마주한다. 1983년 4월 이태원 ‘뮤직라보’ 공연부터 그는 합류해 팀은 3인조 체제로 굳어졌다. 당시 어쿠스틱 기타를 맡던 전인권과 건반의 허성욱 곁에서 그는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던 베이스를 잡아야 했다. 초기 합주가 다소 투박했던 이유이고, 결국 녹음 과정에서 세션을 불러 도움을 받아야 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드럼이 없었던 편성이 생계의 밤일을 병행하던 이들에게 오히려 편의였다는 사실은 이 팀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팀명 후보로 거론된 ‘코스모스’ ‘들장미’ ‘들국화’ 중에서 최성원이 ‘들국화’를 밀어붙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다. 이름만 바뀌었어도 그들의 노래가 오늘 우리의 감각에 어떻게 다가왔을지 선뜻 상상하기가 어렵다.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첫 무대에 오른 시점은 1983년 11월,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옆 ‘에스엠’ 공연이었다. 이후 조덕환이 합세하며 비로소 완성형 라인업이 만들어졌고, 1985년 9월, 마침내 역사적인 데뷔 앨범이 세상에 내놓아졌다.
그러나 그 앨범은 고요한 순산이 아니라 잦은 충돌과 엇갈림 끝에 나온 난산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팝 카피를 연주하며 생활하던 어느 주말, 한 독지가가 800만 원을 지원하겠다며 앨범 제작을 제안했다. 작은 연습실을 얻어 합숙하듯 준비에 들어갔으나, 전인권과 최성원이 크게 다투며 다시 흩어졌다. 전인권은 조덕환을 불러 허성욱과 3인조로 따로 활동을 이어가고, 최성원은 ‘우리 노래 전시회’라는 포크 옴니버스 프로젝트를 구상하며 독자 노선을 택했다. 그러다 ‘에스엠’ 콘서트에 갑작스레 합류하게 되면서 이들은 다시 하나의 팀으로 묶였고, 들국화의 진짜 시작이 그때 비로소 열렸다.
팀명에 관한 논쟁도 있었다. ‘들국화’는 당시 껌 브랜드 이름이기도 했고, 조동진은 이 이름이 다소 ‘오카마(おかま)- 유니 섹슈얼’한 인상을 준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최성원은 명칭을 굳게 밀어붙였다. 그는 한동안 이 이름의 기원을 밝히지 않았지만, 훗날 그 이유가 전인권에게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전인권이 ‘스카이라크(Skylark)’의 곡을 너무도 인상적으로 부르던 날들, 그의 목소리와 맞닿은 들꽃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들국화’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의 작명 감각은 이후에도 빛을 발했다. 조동익, 이병우의 ‘어떤 날’, <가시나무새>로 널리 알려진 ‘시인과 촌장’ 역시 최성원이 건넨 이름이었다.
긴 시간 엇갈림과 화해를 반복하던 가운데 전인권은 다시 팀으로 돌아와 <그것만이 내 세상>을 녹음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조덕환은 두 사람 사이의 오작교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고, 그의 기타 실력이 앨범 녹음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밴드 ‘믿음 소망 사랑’의 최구희(기타)와 주찬권(드럼)이 합류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전설로 불리는 《들국화 1집》이 녹음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이름 하나가 피어오르기까지 견뎌야 했던 시간의 결이었다. 서로의 결핍이 스며들고, 다툼이 곡의 심지에 흔적처럼 남았으며, 결국 그 긴장과 날카로움이 들국화 음악의 첫 숨결을 이루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류로, 들국화가 건넌 빛의 문턱
들국화는 흔히 언더그라운드가 음악의 주류로 진입한 상징적 사례로 기억된다. 포크에서 출발해 록의 질감을 서서히 더해 간 그들의 변모는 영미 밴드의 전형적 생애주기를 떠올리게 하며,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여전히 귀중한 참고선이 된다. 전인권이라는 연습이 만든 신의 경지에 이른 보컬, 최성원이라는 고집 어린 내부 프로듀서가 있었기에 음악의 깊이가 생겨났지만, 결국 모든 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준 결정적 계기는 ‘동아 기획’ 김영 사장과의 만남이었다. 기묘하고도 영화적인 인연이었다.
앨범을 준비하며 새로운 레코드사를 찾아 나선 어느 날, 이들은 전인권 솔로 1집을 내준 벽제의 지구 레코드로 가던 중 뜻밖의 장면과 마주한다. 음반 소매점인 줄 알고 들어간 동네 가게에서 머리숱이 성긴 작은 체구의 남성이 그들의 행선지를 물었고, 앨범을 내고 싶다는 말을 듣자 느닷없이 “내가 하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다. 어차피 어려울 성싶어 멤버들은 당시 시세의 두 배에 달하는 2천만 원, 그리고 활동용 봉고차를 요구했으나 그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먼 벽제로 이동할 필요도 없고, 예상보다 높은 계약금까지 얻게 된 이 우연은 결국 하나의 전설을 열었다. 그 남자가 바로 ‘동아 기획 사단’을 이끈 김영 사장이었다. 최성원은 훗날 그 순간을 두고 신의 노릇이라 회상했다.
그때 그들의 성공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뚜렷한 대답이 없었다. 당시 계약 구조는 앨범 한 장당 선인세를 지급하는 방식이었고, 지금처럼 저작권·저작인접권·가창권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앨범이 천 장 팔리든 백만 장 팔리든 음악가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동아 기획은 예외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뮤지션이 창작과 연주에만 마음을 쏟을 수 있도록 녹음실과 연습실을 자유롭게 개방했고, 음악가들은 사랑방에 출근하듯 모여 서로의 작업을 품앗이하며 새로운 음악 세계를 일궜다. 80년대 이후 이어진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는 그 중심에 동아 기획이라는 터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들국화 1집》은 숱한 우여곡절을 지나 왔지만, 그 완성도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밴드 특유의 합동 작업 방식 덕분에 별도의 편곡자가 필요 없었고, 과정 자체가 음악이 되었다. 전인권이 흥얼거리며 멜로디의 뼈대를 가져오면 허성욱과 최성원이 코드와 구조를 덧입히는 방식이었다. 전인권의 작곡 역량이 아직 단단히 자리 잡기 전 만들어진 <행진>이 그 전형적 예다. 이 노래의 가사에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같은 다른 곡 제목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것은 친구들의 노래를 홍보한다는 초기의 장난과 기쁨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다투고 격렬히 충돌하던 이들이, 음악 앞에서는 언제나 하나가 되는, 들국화만의 결속이 있었다.
이렇듯 들국화가 남긴 음악의 궤적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서로의 서툼과 고집, 갈등과 화해가 엮여 하나의 생동하는 서사로 피어난 결과에 가깝다. 그들의 언더그라운드적 질감은 주류의 문턱을 건너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고, 그 빛은 지금도 시대의 귀를 오래 잡아당긴다.
스러짐과 기적 사이, 들국화가 남긴 긴 호흡
1986년에 발표된 2집은 완성도와 흥행에서 어정쩡한 성적을 거두었다. 1집에 쏟아부었던 시간과 집중을 재현하지 못했고, 멤버들이 들고 나기를 반복하며 하나의 흐름을 끝내 만들지 못한 탓이 컸다. 당시 평단과 대중의 평가는 대체로 별로에 가까웠고, 음악은 포크의 말랑함도 록의 강렬함도 아닌 중간 지점에 머물렀다. 오래 머문 그 어정쩡함 끝에서 1987년, 들국화는 공식 해산을 맞는다. 해산 직후 전인권은 김현식 등과 함께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고, 다른 멤버들은 흩어져 각자의 음악적 길을 모색했다. 이 무렵 최성원은 솔로 앨범을 발표했고, 여기에 리메이크 단골이 된 명곡 <제주도 푸른 밤>이 담겼다. 지금 들어도 세련된 사운드와 깊은 서정이 살아 있는 최성원 1집은 고요한 밤의 파도처럼 오래 남는다.
1988년 전인권은 솔로 <사랑한 후에>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콘서트 중심의 활동을 이어갔다. 90년대에는 미사리에 자신의 전용 음악 카페를 만들어 상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97년 허성욱이 토론토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멤버들은 그들을 기억하는 후배들, 특히 신해철의 주도로 무대에 잠정 결합해 오르곤 했다. 전인권은 2003년과 2004년 다시 솔로 앨범을 성공시키며 <걱정말아요 그대> 같은 곡들로 사랑받았지만, 재결합이 언급되던 시기인 2007년 또다시 대마초로 입건된다. 다섯 번째 사건이었다. 이 일로 재결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그러나 2012년, 그 가능성이 기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재결합 기자회견이 열렸고, ‘불후의 명곡’, ‘윤도현의 MUST’ 같은 방송에서 단독 특집이 진행되었으며, 콘서트도 이어졌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전인권의 목소리였다. 한때 완전히 무너졌다는 평가를 받던 음색이 기적에 가까운 회복을 이뤘다. 사람들은 그를 즉흥적인 가수로 인식했지만, 최성원은 “전인권은 철저히 계획적인 가수”라고 말한 바 있다. 수없이 반복된 연습과 연습 끝에 즉흥처럼 들리는 변주를 몸에 새겨 넣은 결과였다. 이렇게 들국화는 재결합과 함께 4집의 녹음을 시작했다. 데뷔 30년을 앞두고 겨우 네 번째 앨범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 그들의 길은 늘 순탄하기보다 사연으로 가득했다.
그 사연의 절정은 2013년에 찾아왔다. 10월, 드러머 주찬권이 자택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멤버들은 물론 팬과 음악계 모두가 충격에 잠겼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2월 3일, 신곡 <걷고, 걷고>가 선공개되었고 12월 9일, 정규 4집 《들국화》가 발매되었다. 다행히 주찬권은 생전에 드럼 파트 녹음을 마쳐 두었고, 하찌, 함춘호, 한상원, 정원영, 김광민 등 굵직한 국내 뮤지션들이 세션으로 참여했다.
4집 발매 후 전국 투어와 방송 활동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주찬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계획은 모두 백지화되었다. 결국 앨범 발매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활동 없이 다시 해체 상태로 돌아갔다. 이후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인권 밴드’로 활동을 이어갔고, 최성원은 제주도로 돌아가 2016년 9월까지 라디오 ‘제주도의 푸른 밤 최성원입니다’의 DJ를 맡았다. 성시경과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제주도의 푸른 밤>은 그의 노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한다.
전인권은 한 뉴스 프로그램에서 들국화의 재결합은 없다고 단언했다. 아마도 최성원과의 음악적 견해 차이가 여전히 깊게 가라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3인조 시절에는 허성욱이, 재결합 이후에는 주찬권이 두 사람의 거친 대립을 완충해 주곤 했는데, 그 둘이 모두 떠난 지금, 두 사람의 간극은 스스로 좁혀지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인권은 언젠가 무대에 함께 오를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다시 함께 연주할 날이 온다면, 그때는 최성원이 꼭 베이스를 연주해주길 바란다고. 그 말은 멀어진 거리 너머에도 여전히 지켜지는 어떤 약속처럼 들린다.
포크의 심장, 증폭된 서정의 얼굴
들국화를 비틀스에 견주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다. 포크의 서정과 비판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증폭된 사운드의 영역까지 밀고 나간 여정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성원과 전인권은 비틀스를 깊이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인권은 존 레넌을, 최성원은 폴 매카트니를 특히 사랑했고, 1집 앨범 커버를 비틀스의 <Let It Be>처럼 구성한 발상도 전인권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음악적 결을 넘어 두 핵심 뮤지션 사이의 반복된 충돌과 화해 역시 비틀스 내부의 그것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최성원은 훗날 여러 인터뷰와 방송, 그리고 팬들과 소통하던 다음 카페에서 당시의 마음을 자주 회고했다. 그는 미국 음악을 그대로 베끼는 풍조에 깊은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마치 한국 대중문화가 미국의 52번째 주처럼 흡수되고 모방되는 현실이 버겁게 느껴졌고, 김민기와 양병집의 영향을 받아 우리만의 것을 만들고자 했던 신념이 전인권과의 충돌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전인권은 해외 명곡을 그대로 가져와 우리 방식으로 바꿔 부르는 것도 유효한 창작의 길이라 여겼고, 실제로 레드 제플린이나 스카이락 등의 곡을 카피해 부르곤 했다. 그의 솔로 명곡 <사랑한 후에> 역시 번안곡이다.
그래서일까, 최성원에게 들국화의 음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포크’라고 답한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단 한 번도 록이라 부르지 않았고, 당시의 록밴드였던 송골매나 산울림, 그리고 미군 부대 클럽에서 활동하던 ‘사랑과 평화’ 같은 팀과 자신들의 음악을 같은 범주로 묶는 것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들국화의 사운드는 강하게 증폭되고 베이스는 배음을 넘어 튕기는 순간까지 들릴 만큼 선명했다. 이것은 하나의 기법일 수도, 혹은 최성원 내면의 과도한 결의가 무심히 드러난 흔적일 수도 있다. 그런 강도에도 그는 들국화의 음악을 포크를 세게 연주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들국화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갖는 의미는 사운드의 완성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기존의 문법을 비껴가며 음악적 자주의 윤리를 실천했다. 거대한 자본이나 외부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길을 냈으며, 공연의 호흡을 신뢰하며 언더그라운드적 감각으로 대중과 만났다. 후배들에게는 이 방식으로도 음악은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의 선례가 되었고, 그런 점에서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은 단순한 과찬이 아니라 그들의 궤적에 마땅하게 붙는 이름처럼 보인다.
임진모 평론가는 재결합 당시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들국화는 서정성의 허울 아래 유약하고 나른해지는 근래 대중음악의 행태를 꾸짖으며 씩씩한 아우성을 원하는 음악수요자들이 엄존하고 있음을 실증했다."
— 임진모, 경향신문 칼럼 중 —
들국화는 결국 장르를 넘어선 어떤 정서의 이름에 가깝다. 그들이 남긴 궤적은 포크의 뿌리를 단단히 쥐되, 그 뿌리가 울리는 증폭된 서정의 울림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음악적 진술의 기록처럼 남아 있다.
따로 흐르지만, 끝내 함께 닿는 노래
‘따로 또 같이’는 1979년 강인권, 전인권 등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 프로젝트 그룹이었다.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활동하며 앨범과 공연을 이어갔고, 그 흐름은 들국화의 전사(前史)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성원 역시 ‘우리 노래 전시회’라는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어떤날, 함춘호, 김현철, 장필순 같은 걸출한 후배들을 길러냈다. 테리우스 신성우와 함께 1990년대 꽃미남 록커 양대산맥 이덕진의 <내가 아는 한가지>를 작곡하고, <달팽이>로 널리 알려진 패닉 또한 최성원이 제작한 그룹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모르는 뒷면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전인권과 최성원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음악을 붙들고 있다. 전인권은 ‘전인권 밴드’를 후배 뮤지션들과 오랫동안 이끌고 있고, 허성욱은 ‘우리노래 전시회’의 앨범을 리부트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어쩌면 허성욱과 주찬권, 너무 일찍 떠나간 두 사람의 몫까지 품에 안고 노래를 이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두 사람은 언제나 따로 걸었으나, 결국 같은 강을 향해 흘러온 음악의 여정을 살아온 셈이다. 서로의 인격을 인정하면서도 음악 앞에서는 끝내 양보하지 않고 치열하게 부딪치던 그 모습은 지금 돌아보아도 깊은 존중을 자아낸다.
언젠가 그 두 사람이 같은 무대 위에 다시 서는 날이 오길 바라게 된다.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그것만이 내 세상을 밝혀 주었던 노래들이 다시금 하나의 호흡으로 울려 퍼지는 순간을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매일 그대와
매일 그대와 아침 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매일 그대와 도란도란 둘이서
매일 그대와 얘기하고파
새벽비가 얇게 내리던 거리와 저녁놀로 붉게 물들던 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루가 서서히 저물고, 작별을 말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마음 한쪽이 덜컥 비어 버리곤 했다. 매일이 이렇게 아쉬울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생각을 더듬다 보면, 아침의 첫 빛이 스며들 때 그대와 함께 눈을 뜨고 싶다는 바람이 자연스레 피어오른다.
그 마음이 겹겹이 쌓여 노래가 되듯, <매일 그대와>의 도입부에서 들리는 새벽 새소리는 사랑의 시작이 지닌 가벼운 떨림을 떠올리게 한다. 설레는 음표들이 잔잔하게 번지고, 그 안에서 함께 걷는 하루의 가능성이 조용히 열리기도 한다. 그렇게 노래는 감정의 과장 없이,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진심의 결로 다가와 오래 머문다.
https://www.youtube.com/watch?v=11BxN-yaPT0
행진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과거를 품고 미래를 견뎌낼 마음만 있다면, 젊다는 사실 하나로 다시 걸어 보자고 속삭이는 노래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만난 순간은 전영록과 이상아가 주연한 하이틴 영화 <말괄량이 대행진> 속이었다. 화면 위를 경쾌하게 스쳐 지나가던 그 멜로디는 단순한 삽입곡이 아니라, 어딘가로 향해야 한다는 막연한 열망을 부추기는 신호처럼 들렸다.
점층적으로 고조되는 전개는 들을수록 내면의 걸음을 재촉한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멈춰 있던 시간들을 다시 움직이게 하려는 듯한 힘이 있다. ‘행진’이라는 단어는 군대라는 맥락 속에서 종종 지겨운 명령처럼 들리지만, 이 노래에서의 행진은 억지로 끌려가는 발걸음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생을 감당해 보겠다는 의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 번 더 발을 내딛는 용기, 아직 닳지 않은 젊음의 잔광을 믿어 보려는 몸짓에 가깝다.
그래서 이 노래의 행진은 외부의 구령이 아니라 내면에서 울리는 작은 북소리다. 과거의 흔들림과 상처를 끌어안고, 그래도 나아갈 미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어깨를 펴 보게 하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마법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G1RKge8Sg8
제발
난 네가 바라듯 완전하진 못해
한낱 외로운 사람일 뿐이야
제발 숨 막혀 인형이 되긴
제발 목말라 마음 열어 사랑을 해줘
저평가된 2집에 숨어 있던 한 곡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노래가 아니라, 어느 순간 느지막하게 ‘발견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다. 중년의 문턱을 넘으며 하나둘 곁이 비어 가던 시절, 뜻하지 않은 어느 밤 혼자 노래방에 들어가 이 노래를 불러댔다. 그날의 공기는 숨이 턱 막히는 듯했고, 말로 풀 수 없던 체온과 고독이 가슴 안쪽에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그 답답함을 한순간에 터뜨려 주는 구멍처럼 다가왔다. 애써 삼켜 온 마음의 비명을 대신 외쳐 주는 듯했고, 오래 눌러 두었던 고백이 음표 사이로 흘러나왔다. 전인권의 허스키한 절규가 절정으로 치닫는 대목은 듣는 이를 단숨에 끌어당긴다. 그 목소리는 거칠지만 진실했고, 무너진 마음 깊은 곳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단순한 수록곡이 아니라, 어둡게 가라앉던 어느 계절을 통과하게 만든 작은 탈출구이자, 혼자였던 날의 침묵을 뚫고 나온 숨 같은 순간으로 오래 기억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mbSIdHFjjWE
사랑한 후에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 밤에 수많은 별의
기억들이 내 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들국화의 노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 곡은 외국 가수 앨 스튜어트(Al Stewart)의 노래를 우리말로 번안한 작품이다. 전인권의 솔로 앨범에 실리며 비로소 대중적 주목을 받았고, 그의 독보적인 창법이 가사와 선율에 스며들어 원곡보다 매혹적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거친 숨결과 날 선 떨림이 깊은 여운을 남기며, 노래의 서사를 전혀 다른 결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원곡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윌리엄 버드가 만든 <The Earl of Salisbury>의 선율을 차용해 탄생한 곡이라 한다. 고전의 숨결 위에 얹힌 현대적 감수성, 그리고 앨 스튜어트 특유의 서사적 음악성이 어우러지며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을 응축한 노래가 되었다. 시간의 층위를 가로지르며 이어지는 이 계보는, 음악이 어떻게 시대를 넘어 서로를 잇는지 보여 주는 한 사례처럼 느껴진다.
그 위에 다시 전인권의 목소리가 놓였다. 누군가는 그를 통해 원곡의 숨은 결이 드러난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번안곡이 오히려 새로운 원형을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쪽이든 이 노래는 고전의 선율, 서구의 역사, 한국 대중음악의 음색이 한 점에서 만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가 한 곡에 응축되어, 듣는 이의 마음에 오래도록 잔향을 남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kLAcFvj58
이별이란 없는 거야
이별이란 생각으로 울지마
그건 너의 작은 착각일뿐이야
가면 어딜가니
좁은 이 하늘 아래 한동안 둘이 서로
멀리 있는 걸 텐데
웃으며 나를 보내줘
언젠가 만나겠지 새로운 모습으로
이별이란 말은 없는 거야
이 좁은 하늘 아래
안녕이란 말은 없는 거야
이 세상 떠나기 전에
최성원 솔로 1집의 문을 여는 대표곡이다. 지금은 <제주도 푸른 밤>이 여러 번의 리메이크를 거치며 더 널리 회자되지만, 발매 당시 청중의 귀를 가장 먼저 사로잡은 노래는 이 곡이었다. 최성원은 훗날 이 앨범으로 지난 음악 인생 동안의 총수입보다 세 배는 넉넉히 벌었다고 회고했다. 단순한 흥행의 에피소드라기보다, 한 시대의 감수성이 그에게 기울어졌던 순간의 증명처럼 다가온다.
제주도로 삶의 자리를 옮긴 뒤 쓰인 노래라서인지, 가사와 선율 곳곳에 바람 냄새와 바닷빛이 배어드는 듯한 기척이 있다. 그것이 실재의 풍경이 전해준 잔향인지, 혹은 음악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지형인지 분간하기 어려워도,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는 자연스레 섬의 질감이 피어난다. 삶의 무게를 잠시 벗어나고 싶던 누군가에게 이 노래는 은근히 스며드는 은신처처럼 작용하며, 바람 따라 흩어지는 마음의 방향을 부드럽게 가리킨다.
그것만이 내 세상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 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들국화를 대표하는 전설적 명곡으로 기억되는 곡이다. 삶의 바닥을 응시하듯 실존의 골짜기를 더듬는 노래라서인지, 가사 한 줄 한 줄이 묵직한 철학의 결을 품는다. 최성원이 군 제대 무렵 써 내려갔다고 알려져 있는데, 러닝타임이 길고 구조가 비정형적이라 당시 제작사들이 쉽게 선택하기 어려웠을 법하다. 그럼에도 동아기획이라는 그릇에 담기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긴 호흡을 견뎌낼 만한 완성도를 가진 음악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더 실감된다.
전인권의 보컬은 곡의 전면을 휘어잡는 힘을 지녔지만, 후반부를 장악하는 최구희의 기타 솔로는 한 시대의 감정 지형을 새겨 넣는 조각도구처럼 작용한다. 특히 허성욱의 건반이 깔아놓는 몽환적이면서도 단단한 울림은 노래의 내부에서 또 하나의 우주를 열어 보이며, 듣는 이를 천천히 끌어당긴다. 이상하게도 이 노래는 전두환 정권 시절 금지곡으로 묶였다. 운동권 집회에서 자주 울려 퍼졌다는 이유였는데, 그 사실조차 시대의 어둠이 음악의 빛을 두려워했음을 말해주는 일종의 반증처럼 느껴진다.
한때 노래를 자주 부르고 다니던 시절, 나는 이 곡을 늘 마지막에 두었다. 다 부르고 나면 다른 노래를 이어서 부를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에너지를 쏟게 되는 곡이었고, 어쩐지 삶의 한 귀퉁이를 통째로 건네는 의식을 치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 존재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잠시나마 던져 넣게 만드는 노래, 지금도 그런 노래로 남아 있다.
※참고:
• 최성원; 들국화의 브레인, 드디어 입을 열다 - weiv 2003년 인터뷰
• 가수를 말하다 - 임진모
• 들국화 다음 카페 (https://cafe.daum.net/march)
• 그리고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