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로 남은 별자리, 외로운 영혼의 보컬리스트
가객(歌客)이라는 말은 한때 시조나 창을 능숙하게 부르던 이들을 가리키던 호칭이었다. 이들은 뜻이 맞는 동호를 이루어 서울 근교의 승지를 찾아다니며 노래했고, 때로는 사대부나 부호가 베푼 연회에 초대받아 가창을 펼쳤다. 노래를 들고 길 위를 떠도는 손님, 혹은 여행자라는 의미에서 가객이라 불렸을 법하다. 후원을 받으며 풍류의 자리에 서던 이들은 단순한 흥행인이 아니라, 예술적 교양과 기량을 갖춘 예인으로 존중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가객의 모습에는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들은 점차 유흥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존재가 되었고, 삶 또한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그 결과 ‘딴따라’라는 폄하적 언어 속에 직업과 인생이 함께 밀려나기도 했다. 이처럼 ‘가객’이라는 말에는 양가성이 스며 있다. 어디를 가든 초청받을 만큼의 재능에 대한 찬사이자, 동시에 유흥과 향락을 업으로 삼는다는 비난이 함께 얽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노래하는 이를 흔히 “가수”라 부른다. 대중음악의 현장에서는 또 다른 이름, “보컬리스트”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어미 ‘-ist’가 말해 주듯, 이는 목소리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뜻한다. 기타를 연주하는 기타리스트, 베이스를 연주하는 베이시스트처럼, 본래는 밴드 안에서의 역할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실용 예술의 언어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말 역시 점차 의미의 경계를 넓혀 왔다.
보컬리스트는 노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영어 ‘singer’와의 구분은 점점 흐려졌고, 이제는 밴드의 목소리라는 본래 의미보다도 솔로로 활동하는 가수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목소리 하나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들, 곧 ‘가수’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 된 셈이다. 그렇기에 “한국 최고의 보컬리스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단지 가수라는 이유만으로 ‘최고의 보컬리스트’라는 수식을 붙이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 질문은 결국 본래의 의미로 되돌아간다. 목소리가 하나의 악기가 되는 사람, 그 조건을 묻는 질문으로.
한국의 보컬리스트를 그렇게 좁혀 본다면, 평가야 제각각일지라도 몇몇 이름은 자연스레 떠오른다. 임재범, 이승철, 그리고 ‘영원한 가객’ 김현식. 이 셋 가운데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김현식이다. 오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목소리로 삶을 연주했던 한 사람, 영원한 가객이자 외로운 블루지 록커였던 김현식의 음악 인생이다.
겨울; 목소리가 길을 찾기까지
어린 시절의 김현식은 외로운 아이였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잦은 이사를 거듭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소 엄격한 가풍 속에서 그는 보성 중학교에 전교 4등으로 입학했다. 성적만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아이스하키와 기타까지, 재능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처음 품었던 꿈은 아이스하키 선수였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이 기울며 다시 공부로 방향을 틀었고, 여러 분야에 마음을 나누어 둔 탓에 최고 명문으로 꼽히던 경기고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좌절의 시간, 기타를 붙들고 스스로를 달래던 그는 명지고에 입학한다.
당시 명지고는 밴드부로 이름이 높았다. 입학하자마자 밴드부 문을 두드렸지만, 학교 스쿨밴드의 현실은 늘 한계가 분명했다. 로버트 플랜트처럼 노래하고 지미 페이지처럼 기타를 쳐도, 1학년의 몫은 잔심부름과 집합이었다. 트럼펫을 몰래 불다 들킨 사건은 폭력과 주먹다짐으로 번졌고, 그는 결국 밴드부에서 쫓겨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음악을 택한 그는 집에 알리지 않은 채 고교를 중퇴했다. 학교에 갈 시간,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무명 통기타 가수들과 어울렸다. 종로에서 경험을 쌓아 명동으로 무대를 옮겼고, 이장희의 동생 이승희와 듀엣을 하며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승희와 헤어진 뒤에는 김동환이 찾아와 듀엣을 제안했다. “진짜 음악”을 하자는 말이었다. 둘의 이름은 곧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퍼졌다.
사촌 형의 소개로 한 DJ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찾아왔다. 개그맨의 시조새로 불리던 전유성이었다. 그는 음악다방에만 머물기엔 아깝다며 전업 가수의 길을 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현식은 밤무대와 여러 현장을 전전하며 가수로서의 길을 닦았다. 이미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전인권, 한영애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이 무렵 이장희가 진행하던 <0시의 다이얼>에 초대가수로 출연하며 점차 이름을 알렸다.
1978년, 정식 데뷔를 준비하던 순간 시련이 닥쳤다.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 것이다. 8개월의 옥살이를 지나 그는 다시 무대에 서며 더욱 치열하게 노래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때부터 작곡에 몰두했다. 매일 밤 곡을 다듬고 정리하며 음악 속에 잠겼다. 그의 작곡 소문을 들은 이장희가 서라벌레코드사와의 연결고리를 놓아 주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막힌 이장희 역시 후진 양성에 힘쓰던 시기였다.
녹음을 마치고도 앨범은 쉽게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음반사는 사건의 여파를 염려해 발매를 미뤘고,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마침내 세상에 나온 음반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당신의 모습>을 타이틀로 한 《김현식 1집》이다. 그러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의욕은 넘쳤으되 완성도가 이를 따라주지 못한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는 영일레븐 등 방송에 출연하고, 서라벌 소속 가수들과 군위문공연과 해변공연을 다니며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야간통행금지로 무대가 줄어들며 그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80년 12월에 발매된(정식 발매는 81년 5월) 1집에는 김현식을 상징하는 곡이 담겼다. <봄여름가을겨울>이다. 이 노래는 한 뮤지션의 대표곡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남는다. 70년대 ‘사랑과 평화’의 디스코 펑키를 잇되, 80~90년대 팝 스타일 가요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
지금 들어도 <봄여름가을겨울>의 스케일과 전개는 낡지 않았다. 다만 연주 난도가 높아, 당시 이 곡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었던 팀은 최고의 세션이 모인 ‘사랑과 평화’뿐이었다. 녹음에 이들이 참여했지만, 스무 살을 갓 넘긴 김현식은 그 기세에 눌려 본래의 매력을 다 펼치지 못했다. 그렇게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미완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미완은 그를 앞으로 밀어냈다. 밴드 음악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2집을 준비하며 밴드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라이브 무대의 하이라이트에 이 곡을 올리며 스스로 완성에 이르렀다. 이 노래는 그의 음악을 알리는 거대한 팡파르가 되었고, 결성한 빅밴드의 이름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었다. 그 밴드의 기타 세션이던 김종진이 훗날 분가해 만든 팀, <브라보 마이 라이프>로 기억되는 김종진·고 전태관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역시 이 노래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식 작사, 작곡)
봄이 오면 강산에 꽃이 피고
여름이면 꽃들이 만발하네
가을이면 강산에 단풍 들고
겨울 오면 아이들의 눈 장난
https://youtu.be/DdfhsL5egNs?si=pMqm2I0XFGy_ZQN-
봄; 노래로 다시 서다
김현식은 1집의 실패 이후 깊은 허탈과 외로움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던 1982년, 신촌의 한 옷가게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얻으며 삶의 균형을 되찾는다.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생계를 꿈꾸며 피자가게를 열었고,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누렸다. 그러나 프랜차이즈의 공세 앞에서 투자금조차 건지지 못한 채 문을 닫아야 했다. 그는 다시 밤무대를 전전하는 뺑뺑이 가수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 시절이 헛된 시간만은 아니었다. 피자가게를 운영하던 때는 가족과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고, 세종호텔과 하얏트호텔 나이트 무대에 서며 그는 점점 그룹사운드, 곧 밴드 음악을 갈망하게 된다. 하나의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유기체로서의 밴드. 음악을 해 본 이라면 누구나 빠져드는 그 마성의 매력을 그는 다시금 절감했다. 호흡이 맞을 때 음악과 노래는 한층 더 깊어지고 완성에 가까워진다는 확신도 이때 굳어졌다.
삶은 여전히 팍팍했지만, 음악은 성숙해 가던 시기였다. 이 무렵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이 그를 영입한다. 1984년 10월, 기획사의 전폭적 지원 속에서 그는 자신의 음악을 온전히 펼치겠다는 각오로 2집 《사랑했어요》를 발표했다. 초반 반응은 미미했다. 그러나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번지며 타이틀곡 <사랑했어요>가 서서히 대중의 귀에 닿기 시작했다. 발매 후 약 1년이 지난 뒤였다. 이른바 역주행이 시작되었고, 앨범 판매로도 이어졌다.
1985년,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 무대에 초대되며 <사랑했어요>, <바람인 줄 알았는데> 같은 곡들이 전파를 탔다. 이종환은 그를 “가장 실력 있는, 특히 라이브에 강한 가수”라며 극찬했다. 당시 라디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후 김현식의 이름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대중은 그의 음악과 목소리를 찾아 듣고 기억하기 시작했다.
“1집이 가수로서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데 의미를 뒀다면, 2집은 한 명의 가수로서 이제 자신의 음악을 펼쳐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무척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음반은 그때까지도 별반 방송에는 관심이 없었던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팬과 만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 1990.7—
그의 말처럼 2집은 여러모로 중대한 고비였다. 가정에서는 사업에 실패한 가장이었고, 음악에서는 1집의 좌절과 4년이 넘는 공백을 넘어야 했다. ‘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이식되며 방송 출연의 중요성이 커지던 시기였지만, 그는 방송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남은 길은 앨범의 성공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한 곡을 제외한 전곡을 직접 작곡했고, 장르와 스타일을 가리지 않았다. 벌판다방의 무명 통기타 가수 시절부터 축적된 경험과 영감을 남김없이 담아냈다.
2집은 말 그대로 장르의 ‘백화점’이었다. 트로트, 블루스, 이장희식 발라드, 소울, 팝, 펑키까지, 당시 음악 시장에서 통용되던 거의 모든 양식이 담겼다. 트로트 스타일의 <사랑했어요>, <회상>은 분명한 흥행 카드였다. 팝 스타일의 <너를 기다리며>, 블루스·소울 계열의 <바람인 줄 알았는데>, <어둠 그 별빛>, 통기타 포크의 <당신의 모습>, <떠나기 전에>, 정통 블루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요>, 펑키한 <변덕쟁이>, 그리고 80년대 초 가요댄스풍의 <그대 외로워지면>까지. 지금 들어도 어느 한 곡을 덜어내기 어려울 만큼, 앨범 전체가 단단하다.
이 음반의 기념비성은 ‘편곡’에서도 드러난다. 편곡은 김명곤이 맡았다. 그는 김현식의 머릿속에 떠도는 영감과 사운드를 가장 현실적으로 구현해 낸 최적의 선택이었다. 다양한 장르 위에 김현식이 추구하던 근본 깊은 음악 세계를 매끄럽게 얹어 대중의 귀에 안착시켰다. 당시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김명곤은, 이듬해 나미의 <빙글빙글>, 정수라의 <도시의 거리>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가장 바쁘고 몸값 높은 편곡자로 자리매김한다.
2집의 타이틀곡 <사랑했어요>는 뽕짝, 곧 트로트다. 작법과 코드 진행, 가사의 서정까지 한국 전통가요의 문법을 따른다. 당시 트로트는 여전히 한국 대중가요의 중심축이었다. 김현식은 분명 ‘흥행’을 고민했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노래하는 보컬리스트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묘수는 트로트를 부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곡은 묘하게 빛났다. 트로트이되 블루지했다. 그 덕분에 그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이 노래는 유작이 된 미완의 6집에도 다시 실린다. 미성과 탁성을 오가는 그의 목소리를 나란히 들어보는 일 또한 의미가 있다. 그의 삶이, 그 굴곡이, 고스란히 목소리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사랑했어요 (김현식 작사, 작곡)
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여름; 블루스의 중심에서, 밴드는 흩어지고
1985년 <사랑했어요>의 성공은 결정적이었다. 음악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때부터 김현식의 시선은 분명해졌다. 본격적인 ‘그룹사운드’를 실현하고 싶었다. 밤무대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음악적 진화와 완성을 위해서는 밴드가 필요하다는 확신이 깊어졌다. 다만 1집 당시 기성 그룹 ‘사랑과 평화’와의 경험은 그에게 또 다른 기준을 남겼다. 젊고 새로운 인적 구성, 스스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86년, 그는 자신의 1집 노래 제목을 그대로 따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 이름을 먼저 지었다. 멤버보다 이름이 앞선 선택은 그의 염원을 웅변한다. 숨은 실력자들을 찾기 시작했고,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그의 방향성을 존중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소속 뮤지션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들의 음악을 펼칠 수 있었다.
2집의 성공은 언더그라운드에 빠르게 퍼졌다. 김현식 주변으로 젊은 연주자들이 모여들었다. 방배동 카페거리에서 연주하던 고려대 재학생 김종진을 영입했고, 그의 추천으로 전태관이 합류했다. 여기에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 유재하, 3집 리코딩을 염두에 두고 접촉한 베이시스트 장기호까지 가세했다. 그렇게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 유재하(건반), 장기호(베이스)로 구성된 ‘봄여름가을겨울’이 모습을 갖췄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3집을 목표로 함께 호흡을 맞췄다. 특히 유재하에 대한 김현식의 애정은 각별했다. 시대를 타지 않는 섬세한 감각,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순도 높은 열정. 그는 유재하에게서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결성된 지 오래지 않아 유재하는 팀을 떠났다. 음악의 방향성이 끝내 간극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하는 어느 날 우리 팀을 떠났다. ‘형, 미안해요. 하지만 형에게 암만 혼나더라도 이 그룹을 떠나야만 하겠어요’라고 말하고 그는 악기를 챙겨서 연습장을 나갔다. 지금도 그때 그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 1990.7—
이별 이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졌다. 유재하의 솔로 앨범에 실린 명곡 <가리어진 길>은 김현식 3집에 먼저 수록되어 그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왔다. 3집 발매 뒤 홍대 앞 라이브 공연에서는 유재하가 ‘환절기 멤버’, 즉 객원 연주자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후 유재하의 자리를 대신한 건반 연주자 박성식의 합류는 뜻밖의 전환점이 된다. 3집의 대표곡 <비처럼 음악처럼>의 작사·작곡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박성식은 훗날 장기호와 함께 ‘빛과 소금’을 결성한다.
1986년 12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을 발표했다. 2집이 삶의 마지막인 양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음반이었다면, 3집은 결이 달랐다. 젊은 멤버들과 함께 세련미를 더했고, 당시 세계 음악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김현식의 팝 발라드는 이후 한국 가요계의 주류가 되는 ‘발라드’의 형식을 정착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를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지점은 블루스의 감수성이었다. 그의 노래에는 슬픔과 외로움, 허망과 애절이 응축되어 있었고, 그것은 흉내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이 밴드는 태생적으로 시한부였다. 당시 세계 음악계, 특히 미국에서는 퓨전재즈가 대세였다. 후배들은 펑키하고 팝적인 사운드 위에 퓨전재즈를 얹고 싶어 했지만, 김현식의 음악적 본성은 끝내 블루스에 머물렀다. 유재하가 가장 먼저 팀을 떠났고, 나머지 멤버들도 차례로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3집에서 이들은 접점을 찾으려 애썼다. 퓨전재즈적 연주 위에 블루스의 정서를 남겨두는 절충이었다. 김종진의 <쓸쓸한 오후>, 장기호의 <그대와 둘이서>가 그 예다. 사운드 엔지니어링 차원에서는 김현식이 꿈꾸던 소리가 구현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통 블루스 스케일이 버거웠던 김종진 역시 <비처럼 음악처럼>에서 블루지한 기타 솔로로 응답하며 선배에 대한 존중을 드러냈다. 3집은 타협의 산물이었지만, 완성도만큼은 정점에 이르렀다. 지금 들어도 연주와 사운드 메이킹은 여전히 견고하다.
한국 대중음악은 외래 장르를 흡수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정통 블루스만큼은 불모지에 가까웠다. 1985년, 조용필과 들국화가 팝 스타일의 록으로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대변하며 대성공을 거둔 것과 달리, 김현식의 3집은 정반대의 길에 서 있었다.
1986년 12월에 나온 3집은 80년대 감수성의 정수를 담았다. 주제는 사랑, 그러나 그 바닥에는 깊은 블루스의 서정이 흐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옛날 노래’였다. 그럼에도 반응은 놀라웠다. 격정을 절제한 친밀한 목소리, 이를 떠받치는 세련된 연주와 사운드가 청자의 본능을 건드렸다. 사랑 노래의 귀환이었다. 방송 출연 없이 30만 장을 넘기며 김현식은 공연과 창작에 몰두하는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웠다. 음반이 성공하고 활동이 늘어날수록 외로움은 더 짙어졌다. 뜻을 모았던 후배들은 음악을 이유로 떠났고, 어머니와 누이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아내 역시 아들을 데리고 별거에 들어갔다. 그는 다시 대마초에 손을 댔고, 1987년 재차 처벌을 받는다. 1년여 뒤인 1988년 2월, 63빌딩에서 사죄의 ‘삭발 콘서트’를 열며 재기를 다짐했다. 이어 발표한 4집은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사랑할 수 없어> 같은 팝 발라드로 채워진 숨은 명반이었다. 그러나 세련됨보다 짙은 고독의 그림자가 음악을 덮고 있었다.
같은 해 6월, 김종진과 전태관의 ‘봄여름가을겨울’은 1집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로 큰 반향을 일으킨다. 김현식의 사운드를 유산 삼아 퓨전재즈라는 시대의 옷을 입혔고, 그의 팬층까지 흡수했다. 이어 변진섭, 이승철이 발라드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 과정에서 김현식의 음악은 세련됨보다는 ‘우울’로 기억되기 시작했고, 이후 세대에게 그는 호소력 짙은 가수로 단순화되었다.
3집의 대표곡 <비처럼 음악처럼>은 박성식의 작품이다. 군악대 복무 시절에 쓰인 이 곡은 분명한 기승전결을 지닌다. 후반부의 블루지한 하울링 스캣과 이를 받는 기타 솔로가 절정이다. 김종진이 느꼈던 부담은 기술이 아니라 블루스 토닉 스케일이 지닌 무게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비 오는 날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여전히 그 무게는 조용히 가슴을 두드린다.
비처럼 음악처럼 (박성식 작사, 작곡)
아름다운 음악 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가을; 블루스로 돌아간 노래, 김현식의 둥지
대한민국 음악사에서 포크 뮤직, 통기타 음악은 언제나 아픈 손가락처럼 남아 있다. 대학가요제의 무대 위에서는 늘 포크 음악이 수상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1970년대 말로 접어들며 그 힘은 서서히 빠져나갔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포크 뮤직=저항 음악”이라는 인식이 굳어지며 가해진 정권의 노골적인 억압은 결정적이었다. 노래는 노래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고, 목소리는 늘 의심과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포크 음악인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포크 록, 그룹사운드와의 결합이라는 우회로였다. 들국화는 포크에서 출발해 팝적인 그룹 사운드로 변주했고, 또 다른 흐름은 오히려 더 깊은 뿌리로 돌아갔다. 블루스였다. 한영애와 이정선이 그 선두에 섰고, 그렇게 ‘신촌블루스’가 태어났다.
‘신촌블루스’는 블루스의 감각을 사랑하던 통기타 계열 음악인들이 이정선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모여 만든 집단이었다. 엄인호, 한영애, 정서용 등이 연대 앞 ‘Led Zeppelin’이라는 공간에 모여 즉흥 연주, 잼 형식의 공연을 이어가며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이는 치밀하게 기획된 밴드라기보다, 블루스를 매개로 한 자유로운 만남에 가까웠다. 입소문이 번지자 동아기획은 1988년 1월 《신촌 BLUES》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내놓는다. 옴니버스 형식의 이 앨범에는 기존에 불리던 곡들이 새롭게 편곡되어 실렸고, 박인수의 <봄비>, 정서용의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곡으로 남았다.
이정선과 한영애는 1986년 말, 김현식의 3집 발매 직후 홍대 앞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한다. 이후 김현식은 이정선, 한영애, 엄인호와 더 많은 시간을 나누며 본격적으로 블루스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에게 이 만남은 마치 오래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감각이었을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들이 흩어지고, 가족들마저 곁을 떠난 상황에서 ‘신촌블루스’는 김현식에게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수 있는 둥지에 가까웠다. 이 무렵부터 그는 ‘신촌블루스’의 김현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김현식은 4집 이후 이들과 라이브 무대를 함께했고, 결국 음반 작업에도 참여한다. 1989년 1월 발표된 《신촌 BLUES》 2집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옴니버스 형식을 취했다. 훗날 015B로 대표될 객원 가수 시스템을 앞서 보여준 셈이다. <골목길>, <황혼>, <빗속에 서있는 여자> 같은 블루스 명곡들이 새롭게 해석되었고, 대중은 이 음반을 통해 ‘신촌블루스’를 하나의 밴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느슨하게 연결된 음악적 연대였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한국 블루스의 거의 유일한 집대성으로 남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정통 블루스의 흥행, 그리고 송병준, 이영훈 같은 대작곡가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절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택했고, ‘신촌블루스’는 해체된다. 이후 엄인호의 사단으로 재편되며 프로젝트의 자유로운 결은 희미해졌다. 김현식은 다시 혼자가 된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신촌블루스’가 김현식을 중심으로 조금 더 지속되었다면, 그는 지금 “히든싱어”의 무대에 직접 서 있는 레전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골목길>은 결국 김현식의 외로운 고백처럼 들린다. 함께하자는 말조차 건네지 못한 채, 말없이 등을 돌리는 뒷모습. 블루스는 그렇게, 그에게서 삶의 언어가 되었고, 돌아갈 수 없는 집의 기억이 되었다.
골목길 (엄인호 작곡, 김현식 노래)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다시 겨울; 절규가 된 노래, 마지막 가객
김현식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음악”뿐이었다. 그는 다시 ‘재기’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것은 단지 세속적 성공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삶 전체를 잠식해 온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음악은 그에게 필수였다. 그러나 문제는 술이었다. 주변의 걱정과 충고에도 그는 술과 음악 속으로 더 깊이 가라앉았다. 건강이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에서도, 1989년 신형원·권인하·강인원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앨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발표한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오래 기억되는, 드문 경험이었다.
술과 병,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며 그는 끝내 5집 《넋두리》를 내놓는다. 제목 그대로 이 앨범은 그의 음악이자 인생을 되돌아보는 자전적 고백이었다. 당시 그의 얼굴에는 병색이 짙었고, 복수가 차 오른 몸은 살이 쪘다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 간 기능은 이미 10퍼센트 남짓만 유지되고 있었다. 주치의는 “술을 한 방울만 더 마셔도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그는 약보다 술에 의지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6집을 준비했다. 병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다가 항의를 받는 일이 잦았고, 데모와 가이드 녹음, 연습을 위해 링거를 뽑고 병원을 빠져나온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앨범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1990년 11월 1일, 서른넷의 나이에 그는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6집은 미완의 유작으로 남았다. 한때 이 시기의 가이드 테이프가 음악 동호인들 사이에서 은밀히 돌았다고 전해진다. 한 곡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스톱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노래라기보다 절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늙고 외롭게 죽어가는 맹수의 하울링처럼, 병마와 고독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기려 한 소리는 비명과 아우성이었다.
그날에도 그는 퇴원해 녹음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아들 완제를 걱정했다고 한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남긴 그의 마지막 말들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깊은 이정표로 남았다. 그 유작이 바로 <내 사랑 내 곁에>를 타이틀로 담은 《김현식 6집》이다. 이 앨범은 1991년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을 수상했다. 평가와 의미만이 아니라 흥행에서도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캐럴보다 더 많이 울려 퍼진 노래였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곧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팝과 포크, 록의 익숙한 문법 위에 놓인 곡이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친숙한 멜로디 위에 얹힌 그의 마지막 호소 같은 목소리는 다시 한 번 “가객 김현식”을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불러냈다. 그의 음악은 재조명되었고, 숨겨졌던 곡들 또한 다시 세상에 울려 퍼졌다. 이 앨범은 그가 몸담았던 동아기획의 마지막 히트작이기도 했다. 다양한 팝 스타일로 가요계를 주도하던 동아기획은 이 음반을 끝으로 서서히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듬해, 1992년 서태지가 등장했다. 가요계의 흐름은 완전히 뒤집혔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1980년대 음악과 장인정신의 마침표처럼 남아 있다. 대중가요는 이제 ‘작품’보다 ‘상품’이 우선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된다면, 그의 6집 전체를 함께 들어보길 권하고 싶다. 끊어지는 숨마다, 이 긴 이야기가 고스란히 스며 있으므로.
내 사랑 내 곁에(오태호 작사, 작곡. 6집)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곳은 어디에
날개를 잃은 목소리
하늘에는 신을 보필하는 존재들이 있다.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오직 섬김과 합창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 주품·좌품·우품의 천사들, 케루빔과 세라핌은 신을 향해 끝없이 노래한다. 그러나 뜻을 거스르거나 눈밖에 난 존재는 날개를 잃고 추락한다. 만약 그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있다면, 어쩌면 예술가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신을 대신해 노래하되, 그 대가로 외로움을 짊어진 존재로.
김현식은 타고난 재능이었는지, 혹독한 연습의 산물이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가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음역의 폭이나 열창의 기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의 우주를 품어내는 진정성, 그리고 그 우주를 미세하게 흔드는 섬세한 감각이 있었다. 그의 음악 이력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재기”다. 그는 쓰러지면 다시 일어섰고, 다시 노래했다. 그러나 외로움과 고뇌는 늘 그를 다시 넘어뜨렸다. 날개를 잃은 천사의 비애처럼, 아무리 애써도 그 고독 위로는 끝내 날아오르지 못했다.
김현식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갈래로 전해 들었다. 하얀 목폴라 니트를 입고 무대에 선 그의 부푼 배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숨은 자주 끊어졌고, 한때 미성이었던 목소리는 이미 탁성의 끝자락에 와 있었다. 언제라도 피를 토하고 쓰러질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에는 이상하리만치 웃음이 걸려 있었다. 검붉게 변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그는 빛나고 있었다. 171cm,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무대 위의 그는 늘 거인이었다.
곡을 하나하나 소개하기조차 버거울 만큼, 그의 음악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중 몇 곡만 더 거들어 보며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짧았던 그의 생애와 달리, 그의 음악은 길게 남아 우리 곁을 배회한다. 날개를 잃고 추락했으나, 목소리만은 끝내 땅에 닿지 못한 채. 노래는 그렇게, 아직도 허공을 떠돈다.
그의 노래들은 김현식의 연대기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 남은 별자리다. 각각의 곡이 다른 방향을 가리키지만, 끝내 같은 밤하늘로 되돌아온다.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어도, 노래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길을 묻는다.
어둠 그 별빛
(정성주 작사, 김현식 작곡 2집)
김현식의 콘서트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던 노래다. 그의 음악적 우주가 가장 또렷하게 응축된 곡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둠 속에서 별빛을 더듬듯, 그는 늘 자신보다 오래 산 것 같은 감각으로 노래했다. 자신의 우주를 감당하는 이는 언제나 나보다 어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노래는 조용히 증언한다.
떠나가 버렸네
(김현식 작사·작곡 1집, 3집)
1집에 실렸던 미완의 노래를 3집에서 다시 다듬어 올렸다. 후반부 후렴은 묘하게 중독적이다. 서사를 길게 쌓기보다 본론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지금의 작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완이었기에 오히려 김현식다운 여백이 살아 있다.
언제나 그대 내 곁에
(김현식, 송병준 작사 / 송병준 작곡 4집)
훗날 영화음악의 거장이 되는 송병준이 무명 시절 남긴 노래다. 이 곡에 서사가 깃든 이유는 전적으로 김현식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도 각별하다. 한때 『이정선의 기타 교실』에 수록되어 스쿨밴드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던 기억까지 겹친다. 노래는 그렇게 세대를 건너 떠돌았다.
여름밤의 꿈
(윤상 작곡·작사 4집)
“윤상이 거기서 왜 나와?”라는 반문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윤상은 한때 그룹 밴드에 들어가기를 무던히 꿈꿨다고 전해진다. 막상 문 앞에 서면 두려워 물러서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이 곡에는 그 시절의 망설임과 청춘의 불안이 은근히 스며 있다.
넋두리
(김현식 작사·작곡 5집)
김현식의 유서와도 같은 노래다. 외로움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토해 낸다. 극도의 슬픔은 결국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노래는 드물다. 설명보다 먼저 귀가 이해한다. 그냥 들으면, 알게 된다.
한국 사람
(연주곡, 하모니카 4집, 6집)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마 습작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하모니카는 제약이 많은 악기다. 음역은 좁고, 키와 장·단조에 따라 악기 자체가 달라진다. 그 제한 속에서 조합을 만들어 내는 선율이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이 곡은 김현식의 다재다능함을 조용히 증명한다.
이별의 종착역
(손석우 작사·작곡 '신촌블루스')
1960년 동영 영화의 주제곡으로, 유성기 녹음으로 남았던 노래다. 전통 트롯의 문법을 벗어나 블루스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다. 1990년 발매된 '신촌블루스' 3집에 김현식의 목소리로 다시 실렸다.
녹음 당시 그는 독한 양주 반 병을 마시고 1절을 불렀다고 한다. 기력이 달려 30분가량 쉬었다가 남은 술을 비우고 노래를 끝냈다. 그래서일까, 2절에는 술기운이 배어 있다. 그와 술, 그리고 외로움. 이 노래는 그 삼각형의 가장 어두운 꼭짓점에 서 있다.
※ 참고:
• 94년 여성동아 5월호 - 가수 '대장' 김영이 알고 있는 김현식 http://www.idongamusic.com/Star_Site/Kimhs/
•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