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남은 목소리, 사랑을 다시 부르다
지난 글에서 김현식을 되돌아보며, 한동안 요절한 뮤지션을 글에 담지 말자는 생각이 스쳤다. 회고는 예상보다 수월하지 않았고, 마음은 오래 묵은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그들이 나와 같은 속도로 늙어, 지금의 낡아 버린 나와 어딘가에서 조응해 주었다면 위로가 되었을까. 그러나 요절은 그들을 늘 그때의 모습으로만 남겨 둔다. 시간은 흐르는데, 그들은 멈춰 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의 내가 유난히도 안쓰럽고, 또 사무치게 그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 이름을 떠올렸다. “유재하.” 이 이어쓰기를 처음 생각할 때 마음속에 세웠던 다짐, ‘가장 강한 인연, 우연 같은 만남’의 흐름을 따르겠다는 약속 때문이다. 김현식의 음악과 생애를 곱씹고 추모하는 생각의 끝자락에, 자연스럽게 유재하의 이름이 겹쳐 있었다. 망설임 끝에, 처음의 다짐대로 쓰기로 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진부하다. 너무 많이 쓰였고, 너무 쉽게 소비되었다. 그럼에도 이 말만큼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는 드물다. 사랑이 낡은 이야기라 해도, 세상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랑이 흐른다. 우리는 하루에 한두 번쯤, 의도와 무관하게 그 말을 듣거나 떠올리며 살아간다. 사랑에 값의 차별이 있을 리 없건만, 넘쳐나는 사랑타령 속에서 ‘진정성’이라는 값은 오래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랑을 앞세운 거짓이 횡행하고, 밀란 쿤데라의 문장처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세상을 채운 지 오래다. 그래서 사랑을 떠올릴 때면, 아직 디지털로 환원되지 않은 낡은 책장 속 사진앨범이 먼저 스친다. 빛이 바래 형체는 흐릿하지만, 다시는 복제할 수 없는 색으로만 남아 있는 기억들 말이다.
유재하(柳在夏, 1962~1987)의 첫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1987)는 사랑 노래의 옴니버스라 부를 만하다. 흔히 “한국 대중음악은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따라붙지만, 또 하나의 사랑 이야기라니, 어쩌면 자기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재하의 노래는 분명 ‘사랑 노래’다. 황홀한 감정의 순간과 쓰리게 아픈 이별, 그리고 환희에 가까운 재회의 예감까지, 그는 이를 지나치게 꾸미지 않은 언어로, 그러나 놀라울 만큼 영롱하게 노래했다.
유재하를 다시 기억하자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의미를 다시 묻자는 제안에 가깝다. 세상에 넘쳐나는 가짜 사랑의 소음 속에서 가려져 버린, 빛바랜 나의 사랑을 다시 꺼내 조심스럽게 채색하는 일. 유재하의 하나뿐인 이 앨범을 통해, 우리가 오래 잊고 지냈던 사랑의 결을 다시 더듬어 보는 시간. 그 시간이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조용히 닿기를 바란다.
짧은 여름, 너무 이른 노래
1987년 11월 1일 새벽이었다. 강변도로를 달리던 포니 2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 차에 타고 있던, 꿈 많던 젊은 뮤지션은 온몸이 부서진 채 그 자리에서 생을 마쳤다. 고작 스물다섯. 그렇게 유재하라는 이름의 시간은 멈췄고, 요절한 천재의 전설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죽음이 지난 연재의 주인공 김현식과 겹쳐 보이는 이유는 단지 인연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술”이라는 존재와 운명을 맞바꾸었다는 점에서, 그 닮은 그림자는 더욱 짙다. 그날 역시 평소와 달랐다. 잘 나가지 않던 동창회에 참석했고, 술을 마신 친구의 차에 올랐다. 유독 술을 좋아하던 그는, 술 취한 친구의 운전에 몸을 맡긴 채 돌아오지 못할 길로 들어섰다.
어린 시절부터 유재하는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아이였다.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자랐다. 조선시대 명정승 류성룡의 14대손으로, 안동 하회마을의 유복한 집안에서 다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유창물산’이라는 탄광 광산을 크게 일구던 부친을 따라 강원도 황지, 지금의 태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상경해 서울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연유로 태백시에서는 한때 ‘유재하 고향 마을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음악은 여전히 유산계급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환경 덕분에 그는 음악을 ‘접하는’ 차원을 넘어 ‘누릴’ 수 있었다. 빽판 LP와 전축이 일상에 있었고, 일렉트릭 기타와 건반 악기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손에 익었다. 훗날 그는 중학교 시절 브레드(Bread), 퀸(Queen), 비틀스(Beatles), 피터 프램프톤(Peter Frampton)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회고했다. 스쿨밴드를 만들고 음악에 대한 애정을 쌓아가던 그는 결국 전업 음악가의 길을 택한다. 진로를 클래식으로 정해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진학한 선택 역시, 당시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통로였다.
그 시절, 음악을 전문적으로 탐구할 제도권 교육의 폭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실용음악’이 정식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대중음악에 대한 인식이 편협하던 시대, 음악을 택한 이들에게 클래식 음대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러나 학교에 몸을 두고서도 그의 마음은 대중음악을 향해 있었다.
1982년, 대학 4학년이던 그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키보디스트로 합류한다. 당대 최고의 밴드였지만, 그의 활동은 고작 두 달로 끝났다. 클래식 전공자가 대중음악 활동을 하다 적발되면 퇴학까지 각오해야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 7집에 남겼다. 이미 그의 음악은 그때부터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또 하나의 제안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김종진이 자신이 속한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에 키보디스트가 필요하다고 전했고, 유재하는 망설임 없이 합류했다. 1986년의 일이다. 이 팀에서도 활동 기간은 6개월 남짓에 불과했지만, <가리워진 길>을 김현식의 디스코그래피에 남겼다. 그는 김현식이 가장 아끼던 후배이자 뮤지션으로 기억된다. 김현식을 파멸로 이끈 “술”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 역시, 유재하의 갑작스러운 비보 이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현식은 이후 유재하를 추모하며 <그대 내 품에>를 자신의 4집에 수록했다.)
음악적 방향의 차이로 그룹을 나온 뒤, 그는 마침내 솔로 앨범을 향한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한다.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이자 훗날 매니지먼트를 맡게 되는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했고, 그 만남 이후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작사와 작곡은 물론 편곡의 밑그림까지 이미 머릿속에 완성되어 있었고, 주요 악기 세션 역시 직접 소화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다. 다만 오케스트라 세션이 필요해, 한양대 동문들에게 대중음악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녹음해야 했던 일이 가장 큰 고비였을 뿐이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 《사랑하기 때문에》는 1987년 3월, 봄날의 꽃처럼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환대는 즉각적이지 않았다.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당시 라디오와 TV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PD들의 사전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는데, 이 ‘품질 평가’에서 그는 번번이 탈락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평론가들 역시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틀이 없는 이상한 노래”라는 냉소적인 반응도 뒤따랐다. 앨범에 대한 미지근한 반응은 그의 자신감을 서서히 잠식했고, 일본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지난날’마저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길게만 느껴지던 무명의 시간은, 그의 이름처럼(在夏) 여름이 오며 끝을 맺는 듯 보였다.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했고, 호소하지 않고 다독이듯 건네는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위안이 되었다. 그 목소리는 흐름을 바꾸었고, 음반 판매 역시 반등했다. 특히 라디오를 통한 반향은 컸다. 당시 라디오는 지금의 뉴미디어를 능가할 만큼 젊은 세대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반영했다. 이문세가 진행하던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 차트’에서는, 노래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해 순위를 매겼는데, ‘지난날’은 기록적으로 오랜 기간 1위를 지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주행의 인기조차 운명을 비켜 가지는 못했다. 평소 잘 나가지 않던 동창회에 참석한 그날, 유재하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팬들의 사랑을 온전히 체감하기도 전에, 그의 삶은 빛바랜 사진처럼 멈춰 서 버렸다. 앞으로 세상에 나왔을 수많은 걸작들은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그대로 묻혔다. 콘서트나 활발한 대중 활동이 거의 없었던 그를, 세상은 오히려 더 오래 추모하고 기억해 왔다.
땅속에서 3년을 애벌레로 견디며 자유로운 비행을 꿈꾸는 존재가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으로 나와 벅찬 비상을 하지만, 그 시간이 고작 하루에 불과한 생명. 하루살이다. 스물다섯 해라는 시간은 인생의 길이로 보자면 반의 반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십수 년의 음악적 갈망 끝에 ‘가수’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머문 시간은 채 백일 남짓. 그의 생이 유독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짧음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빛났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은 짧았고, 노래는 남았다
1년 뒤 열린 추모공연에는 조동진, 이광조, 김수철 등 당대를 대표하던 음악인들이 함께했다. 그 수익금과 더불어 발족된 유재하 음악 장학회는 조규찬, 유희열, 이규호, 박인영 등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결을 바꿔 놓을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사후 10주년에는 김현철을 중심으로 신해철, 이적, 이소라를 비롯한 백여 명의 음악인들이 뜻을 모아 추모 앨범을 만들었다. 한 사람의 부재가 이렇게 많은 목소리를 불러 모았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이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룹 '어떤 날'이 음악인들의 세계에서 하나의 이정표라면, 유재하는 음악을 듣고 살아가는 대중에게 분기점이 된 존재다. 그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은 지금도 계속 등장한다. 그가 남긴 발라드의 문법은 이문세를 거쳐 변진섭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댄스 음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축으로 기능했다.
유재하에 관한 비평과 리뷰, 추모와 헌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제는 새로운 말을 덧붙이기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그의 음악은 오래도록 반복해 듣고 이야기되어 왔다. 상대적으로 짧은 삶, 절대적으로 짧은 음악 경력 속에서 그가 남긴 것은 단 한 장의 앨범뿐이기 때문이다. 내 청춘에서 깊은 중년에 이르기까지, 지난 38년 동안 우리는 그 음반을 되풀이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하의 음악은 늘 ‘새로 고침’처럼 다가온다. 세대가 바뀌어도, 그의 노래는 여전히 새로운 귀와 마음을 붙잡는다.
유재하의 음악을 이해하는 이들 사이에서 “한국 대중음악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라는 말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생전 방송에서의 ‘푸대접’은 이제 후일담으로만 남아 있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손에 꼽히는 뮤지션, 진정한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평가의 그래프는 생전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재하가 대중음악의 신화로 비상한 순간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가 아니라,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바로 그날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를 음악적 레퍼런스이자 롤모델로 삼은 뮤지션들은 부지기수다. 데뷔한 날이 유재하의 사망일과 겹친다는 사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신승훈 역시 예외는 아니다.
비평가 척 클로스터먼은 현대 대중음악의 가치는 본디 ‘작가의 의도’보다 ‘관객의 반응’에서 규정된다고 말했다. 유작이 된 첫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는, 작가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35년 전에 산화되었음에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대중으로부터 계속해서 새로운 반응을 얻고 있다. 어쩌면 이 앨범은 요절한 창작자를 대신해 나이를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요절한 작가들의 당시 나이를 떠올리면 그 작은 숫자에 놀라면서도, 그들을 늘 ‘형님’처럼 느끼게 되는 이유는.
러시아의 민중 록 가수 빅토르 최(Виктор Чой)의 노래 가운데 <레토(Лето)>가 있다. 얼마 전에는 동명의 영화로도 극장과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레토’는 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한다. 빅토르 최가 활동하던 시대, 소련에서는 관제 음악이 아니면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 어려웠다. 공연을 하든, 해적판 리코딩을 하든, 행사 무대를 전전하든 정식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록 음악인들의 삶은 늘 궁핍했다.
화생방 훈련실처럼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크게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시간은 음악을 하는 순간, 그리고 그 음악을 함께 듣는 순간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반문화 운동의 모임을 ‘뚜소브나(get-together)’라 부르며, 자신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카메라 플래시처럼 짧게 번쩍이는 그 행복의 시간은, 길고 긴 겨울왕국 러시아에서 잠시 스쳐 가는 여름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젊음이자 상록의 시절, 간절히 꿈꾸는 행복의 다른 이름이었다.
유재하라는 이름, ‘재하(在夏)’는 문자 그대로 ‘여름이 있다’, ‘여름에 있다’로 읽힌다. 그의 인생의 여름, 음악 경력의 여름은 분명 존재했다. 다만 러시아의 여름처럼 너무 짧았을 뿐이다. 그를 떠올리면 애잔한 선율과 회고적인 가사로 마음은 멜랑콜리에 잠기지만, 묘하게도 여름의 풍경이 겹쳐진다. 그의 모든 이야기는 지나간 지난날이 되었지만, 그날은 언제나 여름이었을 것만 같고, 처음 그대의 모습을 보던 순간 역시 여름이었을 것만 같은 이유. 아마도 그것은, 그의 생애가 한 계절의 길이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장의 여름, 기준이 되다
칼럼이나 기사에서 음악사의 거장들을 호명할 때면 으레 따라붙는 문구가 있다. “대한민국 100대 명반.” 그 목록의 가장 앞자리에 놓인 이름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데뷔 앨범이 곧 유작이 되어버린 요절의 천재, 유재하다. 2018년에 선정된 이 순위는 지금도 유효하다. 멜론, 한겨레, 그리고 음악 전문 출판사 태림스코어가 기획을 총괄했고, 평론가 47인이 참여해 치열한 논의를 거쳐 결론에 이르렀다. 그 결과의 맨 앞에 놓인 한 장의 음반은, 여전히 기준으로 남아 있다.
유재하의 음악적 특징을 말하려 들면, 책 한 권이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대중가요의 일반적인 작법은 코드로 틀을 짜고 그 위에 멜로디를 얹는다. 반면 클래식 작법은 먼저 멜로디를 떠올리고, 그것이 마치 운명처럼 코드의 문법과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추구한다. 영화 속에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오선지에 음표를 옮겨 적던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유재하의 음악은 분명 후자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
그는 당시로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던 변조와 독특한 코드 진행을 과감히 사용해, 가요의 지평을 팝 이상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쉽게 섞이기 어려운 메이저 코드와 마이너 코드를 교차시키고, 메이저 코드 안에서도 애절한 선율을 길어 올렸다. 탁월한 작곡 감각은 자칫 낯설게 들릴 수 있는 진행을 대중에게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이전의 사랑 노래에 필수처럼 따라붙던 ‘뽕끼’와, 그는 조용히 작별했다.
데뷔 앨범 제작 과정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은 집요했다. 작사와 작곡은 물론, 편곡과 프로듀싱까지 스스로 책임졌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현악 세션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반복해서 들어도 품위가 유지되는 편곡은 지금 다시 들어도 놀랍다. 가요의 틀 안으로 클래식 악기를 끌어들여,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현악기뿐 아니라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등의 관악기까지 유기적으로 배치했다. 오케스트라적 편곡의 완성도는,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쉽게 견줄 대상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력의 결실은 LP 산업의 하향세와 맞물려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다. 우리는 유재하의 음악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사운드를 완전한 형태로 경험하지 못해 왔다. 바이닐 레코드, 즉 LP의 가장 큰 미덕은 단순한 보관성이나 생산 방식에 있지 않다. 핵심은 사운드의 질감에 있다. 오늘날의 디지털 음원은 위아래를 대패질한 듯 매끈하다. 하지만 실제 음악은 음역마다 미세한 노이즈가 배음으로 섞이며 울림을 완성한다.
피아노 역시 현악기이자 타악기에 가까운 악기다. 파장으로 흔들리는 음을 평균으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노이즈 배음이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영국에서 녹음할 당시, 벽 아래에 보조 마이크를 설치해 벽을 타고 내려오는 배음을 수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CD 이후의 디지털 음원 환경에서는 이러한 노이즈 배음이 말끔히 제거되고 말았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LP나 마그네틱 테이프로 그의 음악을 들어 보기를 권한다. 실제 악기들이 만들어 내는 불확실한 파장들이 어떻게 서로를 보듬으며 하나의 평균 음가를 이루는지 귀 기울여 듣는 순간, 음악은 다시 다르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유재하의 음악은 그렇게, 아직도 새롭게 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젠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는 앨범의 제호이자 타이틀곡이다. 초고의 제목이 <다시 만날 너를 위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노래는 이미 끝나 버린 관계가 아니라 ‘재회’를 은근히 꿈꾸는 이별자의 고백에 가깝다. 돌아설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바보처럼 ‘그대’를 잊지 못하고 추억마저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그러다 문득,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자신이 여전히 ‘그대’의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때, 사랑하고 있던 ‘내 모습’ 역시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사랑은 떠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아프고, 그 아픔만큼이나 눈부시다. 슬픔을 품고서도 끝내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사랑을 사랑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지난날
가슴 깊이 남은 건 때늦은 후회
덧없는 듯 쓴웃음으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네
예전처럼 돌이킬 순 없다고 하면서도
문득문득 흐뭇함에 젖는 건 왜일까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세상사람 얘기하듯이
옛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
<지난날>은 ‘체념’의 노래다. 그러나 체념은 포기나 절망과 같은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건너온 뒤에 도착하는 체념은, 오히려 희망을 향해 몸을 돌리는 태도에 가깝다. 잊지 못할 추억을 밀어내는 대신, 그 안에 우리의 미래를 비춰보는 일. 그것은 다음을 준비하는 조용한 결심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돈하며, 그대와 나의 지난날을 언젠가 더 새롭게 맞이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이 노래 <지난날>의 백 코러스에서 들려오는 이문세의 목소리는, 그 다짐에 은근한 온기를 덧입힌다. 체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음을, 노래는 그렇게 낮게 속삭인다.
우울한 편지
한 줄 한 줄 또 한 줄 새기면서
나의 거짓 없는 맘을 띄웠네
나를 바라볼 때 눈물짓나요
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
그럼 아무 말도 필요 없이 서로를 믿어요
<우울한 편지>는 분명한 이중 구조를 지닌 노래다. ‘그대’를 만난 뒤, 화자가 그대의 편지를 받아 읽는 장면이 먼저 놓이고, 이어 그 편지에 응답하는 ‘나’의 답장이 시작된다. 위의 가사부터가 바로 그 답장의 자리다. 읽는 마음에서 쓰는 마음으로, 수동에서 능동으로 옮겨 가는 순간이다.
사랑은 늘 찌질함의 연속이다. 마음은 사소한 일에도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좁아지고, 편지 한 장과 메모 한 줄에까지 의미를 덧붙이며 수없이 해석을 반복한다. 말 한마디, 쉼표 하나에도 마음은 쉽게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은 어쩐지 이쁘다. 초라해 보이는 마음의 동요가 곧 사랑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훗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삽입되며 또 다른 시간과 만났다. 그 뿌리는 김광림의 연극 <날 보러 와요>에 닿아 있다. 개인의 내밀한 감정에서 출발한 편지는, 그렇게 시대의 기억과 서사의 한 장면으로 확장된다. 우울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우울을 건네는 방식만큼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대 내 품에
별 헤는 밤이면 들려오는 그대의 음성
하얗게 부서지는 꽃가루 되어
그대 꽃 위에 안고 싶어라
밤하늘 보면서 느껴보는 그대의 숨결
두둥실 떠가는 쪽배를 타고
그대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
<그대 내 품에>는 첫 소절에서 이미 마음을 풀어놓게 만든다. “별 헤는 밤이면”이라는 문장이 흐르는 순간, 가슴은 자연스럽게 무장해제된다. 이 노래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야말로 ‘시와 가장 닮은 노랫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도 자주 흥얼거리게 되는 레퍼토리로 남아 있다.
이 노래를 듣고 마음이 몽글해지는 경험이 비단 나만의 일일 리 없다. 별을 하나하나 헤아리듯 그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잠 못 이루던 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지나왔던가.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는, 너무나 진부한 말이 이 노래 안에서는 조금도 세속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바람을 순결한 빛으로 바꾸어 버리는, 묘한 마법이 이 노래에는 깃들어 있다.
가리워진 길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싸여진잡힐 듯 말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 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네
사람은 살아가며 얼마나 자주 길을 잃는가. 특히 사랑의 한가운데에서 맞닥뜨리는 방향 상실은, 준비되지 않은 만큼 더 깊은 당혹으로 다가온다.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골프장에서, 멀리서 깜박이는 라이트 하나가 그토록 반가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저곳이 방향이라는 사실만으로 마음은 잠시 놓인다.
우리는 늘 길을 잃은 뒤에야 이정표를 기다린다. 가려진 길 위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표식은, 어쩌면 언제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다시 걸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존재, 그 어둠 속에서 나를 부르는 이름. 결국 우리가 찾는 이정표는, 풍경이 아니라 사람, 바로 ‘그대’가 아닐까.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앨범 발매를 앞두고 가요심의기구는 가사 속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내 마음에 비친 네 모습’으로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유재하는 그 수정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노래에서 반드시 남아야 할 말은 ‘네 모습’이 아니라 ‘내 모습’이라고,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별 앞에서 흔히 분노하고, 상대를 원망하며, 책임을 바깥으로 돌린다. 상처의 원인을 ‘그대’에게서 찾는 일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정반대의 자리를 가리킨다. 그대를 탓하는 대신, 그 사랑을 통과한 뒤의 나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사랑이 남기고 간 흔적이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내 마음에 비친 나의 얼굴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발 디딜 곳을 잃은 듯한 그 시간은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하지만 바로 그 방황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도 찾아온다.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변명으로 가려지지 않은 나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는 시간. 유재하가 끝내 지키려 했던 ‘내 모습’은, 이별 이후에야 가능해지는 가장 깊은 자기 성찰의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https://youtu.be/yPdUVGhmXWA?si=LzVz3YXomIE7wzgF
그대와 영원히
따스한 손길 쓸쓸한 내 어깨 위에
포근한 안식을 주네
저 붉은 바다 해 끝까지 그대와 함께 가리
이 세상이 변한다 해도
나의 사랑 그대와 영원히
지금은 불순(不純)의 시대다. 불손(不遜)과는 다른 말이다. 너도 나도, 이 세계 전체가 순수함을 잃어버린 채 불순 속을 살아간다. 한때는 미덕이었으나 이제는 시쳇말처럼 닳아 버린 순수라는 가치가, 아이러니하게도 때가 묻을수록 더 간절해진다. 유재하가 떠난 지 38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다시 그의 노래를 찾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유재하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무심해진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듣기에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메마른 눈동자에 다시 촉촉한 감성을 담아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배경이 되기를 거부하고, 듣는 이를 조용히 호출한다.
여러 버전이 존재하지만, 이 노래의 감성은 이문세의 목소리로 들어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1985년, 3집에 수록된 그 음성은 유재하의 순수를 가장 투명하게 통과시킨 울림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