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함께 오르던 봉우리들 - 김민기 대하여

통기타의 뿌리, 말 없는 노래

by 박 스테파노

한국 대중음악의 근원을 묻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주 말을 잃는다. 음악에는 언제나 ‘장르’라는 까다로운 문제가 따라붙고, 한국 대중음악의 장르적 유산은 분명한 듯 보이면서도 한 문장으로는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은 트로트를 잠시 뒤로 미뤄 두면, 비교적 넓고 느슨한 이름 하나가 남는다. 바로 ‘포크 음악’이다. 흔히 통기타로 상징되는 이 장르는 정의부터 유연하고, 경계 역시 열려 있다. 전통 음악에서 록, 힙합에 이르기까지 포크는 다양한 형식으로 이식되고 변주되며 살아남아 왔다.


한국에서 포크 음악을 떠올리면 늘 두 단어가 함께 따라온다. ‘통기타’와 ‘청년’. 포크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한복판에 있었고, 1970~80년대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히피 문화와 결합하며 자연스럽게 ‘저항 문화’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의 시점에서 포크의 계보를 다시 더듬는 일은 필연적으로 논쟁을 동반한다. 트윈폴리오, 조영남, 이장희로 대표되는 쎄시봉의 시대를 전면 부정한 후배들도 있었고, 이를 미국의 52번째 주를 흉내 낸 ‘유사 청년 문화’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 반작용으로 ‘우리만의 것’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한대수와 양병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포크의 계보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나’의 고백에 머무는 자기 성찰의 한계를 드러냈고, 음악은 다시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 갈림길의 중심에 김민기가 있었다.


활짝 웃는 '뒷것' 김민기. 연합뉴스 제공


김민기는 내게 이웃사촌이었다. 말수가 적고, 늘 쑥스러움이 배어 있던 아저씨. 군 복무 중 보증 부도로 가족이 흩어져 살다, 겨우 남은 자금으로 일산 신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 서북부에 조성된 위성 신도시 일산은 도시라기보다 섬에 가까웠다. 출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대로변에서 운전 연습을 해도 될 만큼 풍경은 텅 비어 있었다. 모두가 외지인일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이웃과 관계를 맺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와 시간을 요구했다.


그 시절,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나서는 길에서 마주치던 아저씨가 김민기였다. 한눈에 그 김민기라는 걸 알아보았지만, 어린 마음에 먼저 인사를 건넬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른 어느 날, 그가 어깨를 툭 치며 내민 작은 종이 한 장. 학전 소극장에서 공연하던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초대권이었다. 그 인연으로 학전에서의 아르바이트가 이어졌고, 말 없던 그 아저씨의 깊은 속을 조금씩 들여다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그 아저씨, 김민기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 보려 한다.



들판에서 무대로, 노래가 살아남은 방식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의사였으나 6·25 한국전쟁 피난길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고, 산파였던 모친이 홀로 생계를 꾸려 가족을 지탱했다. 휴전 이후 삶의 터전을 찾아 서울로 옮겼고, 김민기는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미술적 재능도 분명했지만, 누나들의 영향으로 음악을 일찍 접하며 자연스럽게 노래와 가까워졌다. 친구와 듀엣을 만들어 무대에 올랐던 기억도 그 무렵의 일이다.


음악에 깊이 빠져들수록 학교는 점점 멀어졌다. 수업을 빠지는 날이 잦아 1학기부터 학사경고를 받았고, 결국 2학기에는 휴학을 택해 음악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이미 <아침 이슬>, <가을 편지> 같은 노래들이 태어났다. YMCA 음악 동아리 무대인 ‘청개구리 홀’에서 자작곡을 발표하며 양희은 등 동료 음악인들과 교류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민중가요를 후배들에게 가르치다 경찰에 연행되었고, 그가 만든 노래들은 곧바로 금지곡이 되었다. 음반 활동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민기의 ‘사회적인 음악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고 선명해졌다. 1973년 초, 김지하의 문제작 희곡 <금관의 예수>를 음악극으로 작곡하며 무대를 향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작업은 이후 그의 무대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썼으나,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제재로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긴급 체포의 위협을 감수하며 재공연을 강행했고, 김민기는 단숨에 ‘저항 문화’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1970년 6월 29일 싱어송라이터 김민기가 ‘청개구리의 집’에서 열린 창작 포크송 페스티벌에서 노래하고 있다. 문화일보, 최규성 씨 제공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학업 성취도 뛰어났던 그는 1974년 카투사로 입대해 군 복무로 숨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관심 문제 사병’으로 분류되어 보안대 조사를 받았고, 군 밖에서는 <아침 이슬>이 공식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으며 솔로 1집마저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 이 제약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이어졌다. 1993년에 이르러서야 독집 CD 4장을 발표하며 비로소 2집에 해당하는 음반을 내기 전까지, 그는 스스로도 남들도 인정하는 ‘1집 가수’로 머물렀다. 보안대 조사 이후 영창을 살았고,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다. 전역 후에도 음악 창작가로서의 공적 활동은 제한되었으나, 서울대 미대 학장의 도움으로 학사 학위를 마치고 중등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단에 서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졸업 후 막노동과 공장 취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 시기에 탄생한 노래가 <상록수>로 더 잘 알려진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이다. 이 곡은 양희은의 동명 앨범에 수록되었지만, 김민기는 노래 사용을 허락한 적이 없어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졌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그는 가명으로 노래를 발표했지만, 음악에 담긴 저항의 정신만큼은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부와 장교들의 심기를 건드리며 다시금 금지곡과 판매 금지 조치를 불러왔다. 이 시기의 막노동과 공장 생활은 김민기 음악의 중심에 자리한 사실주의적 포크 문화를 형성했고, 훗날 <공장의 불빛> 같은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불빛을 숨긴 노래, 삶으로 이어진 반란


<공장의 불빛>은 한국 문화사와 사회사 모두에서 각별한 무게를 지닌 프로젝트다. 제도도 자본의 승인도 없이, 오직 의지와 신념만으로 진행된 비밀 작업이었다. 한국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사실상 첫 번째 얼터너티브였던 김민기에게 이 시간은 좌절이 아니라, 두 번째 반란을 준비하는 침묵의 축적에 가까웠다. 1978년, 그는 마침내 두 번째 문제작 <공장의 불빛>을 완성한다. 1970년대 대표적 노조 탄압 사례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한 노래극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교회 사회 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았으나, 공식 경로를 벗어난 불법 제작물로 남았다. 카세트테이프에 담겨 은밀히 보급되었고, 여담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되어 대학가 점조직을 통해 퍼져 나갔다고 한다. 트윈폴리오나 조영남과 달리 송창식은 김민기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송창식 역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겪은 뒤, 더 단단한 결기로 김민기의 조력자가 되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름을 숨기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잡아가라’는 태도로 진행되었다. 이상하게도 경찰은 조사만 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당시 김민기는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받던 인물이었고, 구속 대신 제도적 제재로 숨통을 조이려 했다는 후문이 따른다. 대학 소강당 공연은 파급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고, 음반과 방송을 차단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작동했다. 결국 김민기는 도시를 떠나 귀촌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신고와 보고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다. 그 떠도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천리길>이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되자 김민기는 다시 음악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부 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 외부 활동을 최소화한 채 농사에 전념했다. 전두환 정권이 ‘국풍81’을 기획하며 김민기를 회유한 일도 있었다. 이른바 ‘3허’ 중 한 명이었던 허문도가 백지수표를 내밀었지만, 김민기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전라북도 각지의 연극패와 노래패를 묶어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만들고, 한국 근현대사 세미나와 결합한 공연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열었다.


<금관의 예수> 한 장면. 숭대극회


김민기의 ‘청년적 저항’은 구호와 노래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삶으로 실천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문화적 실천으로 구체적인 사회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경기도 연천에서 참깨 농사를 지으며 비료회사가 규정량을 속여 판매한 사실을 밝혀 직접 소송을 제기했고, 배상금을 받아냈다.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청년들과 벼농사를 지으며 농산물 직거래라는 새로운 유통 방식도 실험했다. 그의 사회운동은 늘 생활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렵까지도 그는 농사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을 겪는다.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함께했던 김석만이 그를 찾아와 공연 활동 재개를 설득했고, 김민기는 결국 농부의 삶을 접고 서울로 돌아왔다.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준비했으나, 공연윤리심의위원회는 김민기의 참여 사실을 이유로 이를 무산시켰다. 대신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이 ‘노찾사 기획’은 이후 ‘다음 기획’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협동조합 형태로 존속하며 YB, 김제동, 강산에, 정태춘, 박은옥 등이 함께하고 있다.


1987년, 마침내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김민기는 광부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탄광촌 아이들을 그린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고, 노래일기 <엄마, 우리 엄마>를 발표했다. 훗날 록 오페라로 재탄생한 노래극 <개똥이> 역시 이 시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 또한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과 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89년, 귀농 경험을 토대로 생태운동이자 생활형 협동조합의 출발점인 ‘한살림 모임’을 창립해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 조직은 오늘날 40여만 명의 회원을 둔 ‘한살림 생협’으로 성장했다.


이어 한겨레신문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겨레의 노래 사업단’을 통해 금지곡과 탄압곡,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발표하고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김민기가 가사를 쓰고 송창식이 곡을 붙여 부른 노래가 <내 나라 내 겨레>다. 숨겨졌던 불빛은 그렇게, 다시 노래가 되어 사람들 앞에 돌아왔다.



학전의 무대, 노래의 윤리


1991년, 김민기는 독일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의 각본과 비르거 하이만의 음악으로 만들어진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한국어로 번안해 직접 연출했다. 그는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학전 극장을 열고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은 한국 공연사에서 분명한 이정표로 남았다. 1991년 초연 이후 2008년까지 18년간 상설 공연되었고, 2001년에는 독일·중국·일본 순회공연도 성사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2007년 독일문화원이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윤이상과 백남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1994년에는 극단 ‘학전’을 창단했다. 그는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작곡·연출·제작을 맡았고, 뮤지컬 <모스키토>, <의형제>의 번안과 연출도 담당했다. 그러나 청년층을 주 관객으로 삼은 극장 운영은 늘 재정난과 맞닿아 있었다. 김민기는 이를 메우기 위해 간간이 음반을 발표해 극단 운영비로 충당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학전은 청년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의 문화 활동은 단 한 번도 돈벌이가 된 적이 없었고, 학전 운영 역시 그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 공간을 거쳐 간 한국의 문예인들은 헤아리기 어렵다. 김광석이 상징처럼 중심에 있었고, 동물원, 장필순, 여행스케치 등이 이곳을 공연 아지트로 삼았다. 학전은 명실상부한 청년 문화의 산실이었다. 더불어 브로드웨이식 대형 뮤지컬 대신 사회 비판과 세태 비평을 담은 유럽 소품들을 소개하며, 무명 배우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이종혁 등은 이곳에서 무명 시절을 견뎠고, 윤도현 역시 밴드 활동 전과 중간의 고비마다 노래패와 뮤지컬 무대를 통해 음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민기를 음악적으로 설명할 때 화려한 기교를 늘어놓기는 어렵다. 그의 노래는 무엇보다 노랫말의 힘으로 전해졌다. <아침 이슬>이나 <상록수>는 그 일부에 불과하다. 김민기의 메시지야말로 한국 포크 음악의 정의를 새로 쓰고, 그 방향을 끈질기게 제시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얼터너티브’, 곧 대안의 문화 혁명이었다. <공장의 불빛> 같은 노래극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최초의 시도였고, 1980년대 노래 운동에서 독자적인 생산과 분배 체계를 낳는 원형이 되었다. 이는 곧 인디 뮤직의 출발점으로 이어졌다.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 선 김민기 학전 대표. 오른쪽엔 김광석 노래비가 보인다. 한겨레 신문 제공


1집을 발표하던 시절, 그는 대학생이자 지식인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득권적 위치에 서 있었다. 음악 역시 공식 음반이라는 제도적 틀 안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모든 기득권을 박탈했다. 막다른 골목에서의 마지막 몸부림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절박함은 음악과 공연, 사회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풀어 놓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 도약은 음악적 형식에도 반영되었다. 3분짜리 서정의 틀을 넘어, 사건들이 엮인 40분 분량의 서사로 확장되었다. 그 안에 클래식과 국악, 구전 잡가 등 전통적인 우리 것이 결합하며 진정한 포크의 대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활동은 1975년 ‘대마초 사건’ 이후 황폐해진 대중음악계의 관제적 토착화를 되묻게 했다. 권력의 폭압 속에서 대중음악은 국적과 근본을 잃은 채 대학가요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한편에는 팝 트로트와 유사 포크만이 넘쳐났다. 그 와중에 김민기의 존재와 실천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 대중음악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대중음악은 가사라는 문학과 음악이 결합한 유기체다. 특히 통기타나 어쿠스틱 반주만 남은 단순한 음악일수록, 가사의 밀도는 결정적이다. 서구 음악의 유입으로 시작된 포크 음악 역시 한때 암흑기를 겪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번안곡이 주를 이루며 한국어 가사가 음악에 충분히 스며들지 못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드러난 것은 그로부터 20~30년 뒤의 일이다. 김민기는 이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는 한국어를 적절한 선율과 화성 속에 정확히 배치해 냈다. 지금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적 이정표는 여전히 중요하다.


또 하나의 이정표는 ‘기타리스트 김민기’다. 이전까지 기타 연주는 포크 음악에서 단순한 반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코드를 넘어 분명한 프레이즈를 지닌 연주로 나아갔다. 1집의 <친구>가 대표적이다. 외국 음악에 대한 비판을 받던 그에게 평론가 이백천이 “그럼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오라”고 말하자, 김민기는 하루 만에 이 곡을 완성했다. 그 안의 기타 연주는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피아노의 대선율을 동시에 연주하는 듯한 밀도를 보여 주며, 코드를 잡고 리듬을 쪼개던 시대와 결별했다. <아침 이슬>의 연주 역시 지금의 기준으로 들어도 놀라울 만큼 단단하다. 그 소리는 여전히, 말보다 오래 남는다.



대안으로서의 청년,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한국에서 ‘청년 문화’가 하나의 공식 담론으로 호명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이 새로운 문화의 주체는 주로 대학생들이었고, 저널리즘은 이들의 움직임에 ‘청년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용어의 기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도전하던 젊은 세대의 문화적 흐름, 곧 인권운동과 평화운동, 신좌파 운동과 결합해 강력한 사회적 파급력을 지녔던 1960년대 미국의 ‘저항 문화(counter-culture)’가 그 원형이었다.


1970년대 초 한국의 새로운 세대 문화가 ‘청년 문화’로 불렸다는 사실은, 동시에 미국 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전쟁 이전 세대와 전후 세대, 일본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와 미국 문화를 받아들인 새로운 세대 사이의 충돌이자 간극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흔히 ‘차이의 문화’로 불린다. 청년 문화는 바로 이 차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수정하고 변형하며 시대 전반에 적지 않은 파문을 남겼다. 정치·사회적 발언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젊은이들에게, 이는 거의 유일한 자기 표현의 통로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김민기의 음악과 행보는 각별한 의미를 획득한다.


“그는 음악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할 경우, 내용적으로는 획일성·순수성·건전성이라는 이름의 검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산업적으로는 결국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더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의 자아가 서구 대중음악에 잠식되어 있음을 자각했고, 그로부터 벗어나면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한 길로 전통음악을 응시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을 모색했다.”

-김형찬(대중음악평론가)-


대중가수의 숙명이자 역할은 노래를 통해 주목을 받는 일, 다시 말해 인기를 얻는 데 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김민기를 대중가수, 혹은 인기가수라 부르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 그의 이름과 노래가 즉각 떠오르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 발표한 정규 앨범은 단 한 장뿐이다. <아침 이슬>이나 <상록수>처럼 ‘국민가요’로 불리는 노래들조차 김민기의 목소리가 아니라 양희은의 노래로 대중의 기억에 새겨졌다. 그는 대중적 무대와 방송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세대가 바뀔수록 그의 이름은 기억의 전면에서 멀어지기 쉬웠다. 그럼에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음악과 대중문화에 남긴 흔적, 그리고 삶으로 증명한 사회적인 삶은 여전히 현재형의 영향력을 지닌다.


1970년대 초 기독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민기(왼쪽)와 양희은. 조선일보


오늘날 ‘청년’은 더 이상 침묵 속에 방치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호출된다. 특히 정치권의 러브콜은 집요하고 다채롭다. 그러나 호출된다고 해서 존중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때로는 이 반복된 호출이 당사자들에게 더 큰 박탈감을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청년 문화’라는 말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청년 정치’는 넘쳐나지만, 정작 ‘문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이 오늘의 청년 세대가 마주한 곤경을 드러낸다. 청년 문화의 핵심은 ‘대안적 사고’다. 새로운 삶과 사회를 인식하고 추구하려는 태도이며, 언제나 ‘지금 여기’를 향한 비판적 사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런 사유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1970~80년대의 가치가 ‘우리’로의 과도한 수렴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 반작용으로 1990년대 이후 ‘우리’에서 ‘나’로의 이동은 집요하게 시도되었고, 일정한 성취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나’를 다시 연대의 ‘우리’로 엮어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지치고 상처 입은 사람들,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의 감정을 대변하던 리얼리즘의 미학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 청년들은 힘들다고 말한다. 그 말은 분명 사실일 수 있다. 고통은 언제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호소 속에는 여전히 ‘나’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 ‘우리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다시 사유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이전 시대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자각에서 다시 출발해 보는 일, 바로 그 지점이 요청된다.


지금은 ‘정치’라는 이름보다 ‘문화’라는 가치가 더 절실한 시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세대가 세워 온 가치와 새로운 세대의 창조적 기획이 조화롭게 만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김민기의 음악과 삶은 여전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질문으로 남아 있다.



노래를 짓는 몸, 차이를 만드는 시작


음악가가 스스로 음악을 완성해 간다는 것은, 그 안에 언제나 새로운 정신이 깃든다는 뜻이다. 굳이 ‘자주(自主)정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렇다. 김민기는 자신이 부르고 연주할 노래를 스스로 만들었다. 작사·작곡·편곡 가운데 적어도 하나에는 반드시 참여했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한국 대중음악 안에 진정한 의미의 ‘싱어송라이터’ 문화가 움트기 시작했다.


그의 등장은 이전 세대와의 분명한 결별을 의미했다. 흔히 말하는 ‘차이의 문화’가 추상적 담론을 넘어 실제 음악적 실천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남이 만들어 준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서 벗어나, 자신이 쓴 곡으로 자신의 앨범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확산되었고, 이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음악사적 연표를 거꾸로 읽지 않기 위해서라도 분명히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이장희, 김정호, 사월과 오월로 대표되는 인기 포크 싱어송라이터들보다 앞선 자리에 김민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외적 조건과 시대의 제약 속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이름은 늘 한 박자 늦게 불린다. 그러나 노래의 방향을 먼저 제시한 사람은 언제나 가장 늦게 호명된다. 이제 그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그 노래들 속에는, 한국 포크 음악이 선택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길이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남아 있다.


청춘의 김민기. 한겨레신문 제공

친구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1집에 수록된 곡이다. <아침 이슬>과 함께 투쟁의 현장에서 자주 불렸지만, 김민기가 이 노래를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었다. 고3 시절 동해시로 야영을 갔던 때, 함께했던 후배 한 명이 불미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비보를 부모님께 전하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그는 즉석에서 이 노래를 써 내려갔다고 전해진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이 노래는 1980년대 시위의 현장에서 스러져간 열사들과 투옥된 동지들을 기억하는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 개인의 슬픔에서 시작된 노래가 시대의 기억을 품게 된 셈이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묻은 친구 하나쯤은 있다. 특히 아직도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멀어져 버린 친구. 그 얼굴을 떠올리며 김민기의 극 저음을 듣고 있으면, 노래는 설명보다 먼저 가슴을 울린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렇게 남겨진 슬픔의 음색이다.

https://youtu.be/2tYBUyyPdvE?si=hfJTJl6wZmQAGs8a



주여, 이제는 여기에 (금관의 예수)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가톨릭에서 ‘금관의 예수’는 공식적인 표현이다. ‘그리스도 왕’과 함께 예수에게 부여되는 가장 높은 영광의 호칭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 김민기는 그 표현을 정면이 아니라 반어로 사용했다.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금관의 예수’는 찬미의 대상이 아니라, ‘얼어붙은 벌판’과 ‘가난의 거리’에 서 있는 ‘우리’가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이다. 세상에 예수는 없다는, 혹은 있어도 닿지 않는다는 비관의 탄식에 가깝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로 <아침 이슬>을 비롯한 김민기의 모든 음반과 노래는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다. 노래가 막힌 자리에서 김지하가 나타났고,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희곡 ‘금관의 예수’에 노랫말을 붙였다. (그런데 지금의 김지하는… 에휴.) 억압의 시대에 탄생한 이 노래는 신앙의 언어를 빌려 사회의 부재를 고발하는, 날 선 질문이 되었다.


나는 이 노래를 중학교 시절 주일학교에서 처음 배웠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생이었고, 성당에서 활동하던 대학생들 중 상당수는 운동권이었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세상에 대해 아주 조금 눈을 뜨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끔 이 노래를 가스펠이나 CCM으로 오해해 목록에 올려 둔 모습을 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믿음만큼이나 사회에 대한 성찰도 함께 깊어지기를 바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오늘은 양희은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다시 꺼내 본다.


https://youtu.be/2N9qGRl0s1g?si=_-ya_P7TgHy8-FCD



늙은 군인의 노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만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김민기는 카투사 복무 중, 이른바 높으신 분들의 지시로 강원도 원통의 12사단 51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로 전출된다. 그곳에서 그는 한 사람을 만난다. 전역을 앞둔 병기 선임하사였다. 30년을 군에 몸담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남겨 달라며 막걸리 두 말을 건넸다. 그렇게 해서 1976년 겨울, ‘늙은 군인의 노래’가 태어났다.


이 노래에는 젊은 날을 푸른 군복에 바친 한 부사관의 회한과 아쉬움, 그리고 과장되지 않은 나라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화려한 영웅담 대신, 묵묵히 견뎌 온 시간의 무게가 노랫말 곳곳에 스며 있다. 노래는 곧 병사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불리기 시작했다. 심의는 통과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곡 판정을 받았다. 약하고 패배주의적인 정서가 군인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이 노래는 유신 시절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된다.


그러나 노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생명을 이어 간 곳은 독재에 저항하던 대학가와 노동 현장이었다. 원래 가사 속의 ‘군인’은 상황에 따라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로 바뀌어 불렸다. 그렇게 이 노래는 특정 직업의 회한을 넘어, 시대에 짓눌린 사람들의 노래로 확장되었다. 대표적인 저항가요로 자리 잡은 이 노래는 세월을 건너 오늘날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2018년 현충일, 이 노래가 기념곡으로 다시 울려 퍼졌을 때, 노래는 비로소 제 자리로 돌아온 듯 보였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노래는 끝내 살아남았다.


https://youtu.be/xahy5ZApOnc?si=SoCqd7dSBN_fqEZx



작은 연못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 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한 편의 동요처럼 시작되다가, 중간의 변조에서 청자를 단번에 흔들어 놓는 노래다. 단순하고 순한 얼굴로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전혀 다른 표정으로 돌아서는 순간이 있다. 그 반전이 이 노래의 핵심이다.


중학교 시절, 교지 편집을 맡고 있던 때였다. 담당 지도교사였던 음악 선생님과 함께 MT를 갔고, 기타를 치던 나에게 반주를 해 보라며 건네준 악보가 바로 이 노래였다. 그 자리에서 내가 반주를 하고, 당시 마음에 두고 있던 여학생이 마치 외운 노래처럼 자연스럽게 따라 불렀다. 그 장면이 아직도 또렷하다. 언니들이 이미 대학생이었던 덕에, 또래보다 조금 빠른 사회화를 겪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경쾌한 장조에서 갑작스럽게 단조로 꺾이는 순간, 지금 다시 들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음악적으로도 그렇지만, 이 노래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이유는 결국 가사에 있었다. 연못 속에서 평화롭게 살던 붕어들이 서로 싸우다 끝내 공멸한다는 이야기. 이 단순한 우화는 남과 북, 사용자와 노동자, 영남과 호남, 권력자와 민중의 대치를 은유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너무 쉽게 현실을 비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이후 또 다른 경로로 되살아났다. 미군의 양민 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의 제목으로 다시 불리며, 시대의 기억 속에 남았다. 순진한 동요의 형식을 빌려 가장 잔혹한 진실을 말하는 방식. 그래서 이 노래는 지금도, 듣는 이를 방심하게 만든 뒤 가장 깊은 곳을 찌른다.


https://youtu.be/W0LpbShfjrA?si=ZWVyWP1V-llgDUyC



백구


내가 아주 어릴 때 만나
우리 집에 살던 백~구
해마다 봄가을이면 귀여운 강아지 낳았지.
어느 해의 가을엔가 강아지를 낳다가
가엾은 우리 백구는 앓아누워 버렸지.


이 노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려견’을 노래한다. 양희은의 동생(양희경은 아니고)이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개인의 기록에서 출발했지만, 그 정서는 곧 보편으로 확장된다.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을 견디게 해 주는 존재에 대한, 조용하고 단단한 애정의 노래다.


김민기는 아동극과 동요에 유난히 많은 공을 들였다.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자 자원이라는 믿음이 그의 내면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음악가로서의 창작 욕구를 이어 가면서도, 시대의 검열을 비켜 설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어린이는, 그리고 여성은, 여전히 인류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약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한 문화는커녕 제대로 된 놀잇거리조차 드물던 시절, 동요와 아동극을 만든다는 선택은 단순한 장르의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약한 존재들의 삶을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오려는 시도였고, 일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회를 다시 사유하려는 태도였다. 이 노래가 품고 있는 온기는 그래서 오래 남는다. 김민기의 아동극과 동요는 아이들을 위한 노래이면서 동시에, 이 사회가 잃지 말아야 할 윤리에 대한 조용한 호소였다.


https://youtu.be/Z--qzGwSbeU?si=DulMNMvA31IeMG_J



가을 편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 노래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다. 멜로디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작곡이 김민기라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거의 초창기 작품에 속한다. 대표적인 혁신 아이디어 디자이너 김영세와 함께했던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시절에 만들어진 노래로, 가사는 고은 시인이 썼다.


말은 짧고 선율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계절의 결이 촘촘히 스며 있다. 화려한 수식 없이도, 노래는 어느새 가을을 데려온다. 바람의 온도와 빛의 기울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감이 소박한 멜로디를 타고 번진다. 그래서 이 노래는 오래 남는다. 쉽고 가벼운 얼굴로 다가와, 듣는 이의 마음 한쪽에 조용히 가을을 내려놓는다. 김민기의 음악이 늘 그랬듯, 적은 말로 많은 계절을 건네는 방식이다.


https://youtu.be/Pz9fnk4S9Y0?si=J2PdosX2gxHdeXVJ



봉우리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1985년, 김민기가 작사·작곡해 양희은이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노래다. 이후 1993년, 김민기가 자신의 대표곡들을 다시 녹음해 묶은 컴필레이션을 내면서 제목을 <봉우리>로 줄여 수록했다. 개인적으로는 김민기의 목소리로 부른 버전을 더 오래 듣게 된다.


양희은의 말에 따르면, 이 노래는 다큐멘터리 OST로 만들어졌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수촌에 남지도 못한 채 곧바로 귀가 조처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였고, <봉우리>는 그 화면 위에 놓인 주제곡이었다고 전해진다. 환호와 기록의 이면에서 조용히 밀려난 사람들, 끝까지 완주했음에도 박수받지 못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삶은 ‘등산’이 아니라 ‘등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해진 길과 안내판이 있는 산행이 아니라, 손을 뻗어 바위를 붙잡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시간들. <봉우리>는 정상의 환희보다 그 과정의 숨과 땀을 기억하는 노래다. 앞서 걷는 이의 등을 보며, 혹은 나란히 서서 서로의 호흡을 확인하며 오르는 그 길에, 조용히 힘을 보태는 노래다. 그래서 이 노래는 늘 곁에 둔다. 오르막이 길어질수록, 함께 오르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할 때마다.


https://youtu.be/PuieRjQ9kzA?si=0_pAMtSpHVBbSygR


※ 참고 자료:
• 김민기 론 - 최경식 - LP1집 자켓 수록 (1971년)
• 평전 <김민기> - 김창남 - 한울 출판 (2020년)
• [레전드 100人] 김민기, 청년 문화를 노래한 포크 뮤지션 - 임진모 - 지니뮤직
• 그리고, 나무위키
• 2년 전 글을 보완,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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