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오래됨과 새로움의 그 어디 쯤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현지 시간 2026년 3월 15일 일요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린다. 거의 한 세기를 지나오며 이 행사는 영화 예술의 정전(正典)을 세우는 자리로 불려 왔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시선과 취향에 머문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SoWhite)’라는 구호가 세계를 돌던 순간, 화려한 조명 뒤의 균열 역시 분명히 드러났다.
이 권위가 언제나 영화적 탐구의 깊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때로는 정치적 올바름(PC)을 드러내는 상징처럼 보였고, 때로는 거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캠페인의 종착점처럼 읽혔다. 흥행작과 독립 영화 사이에서 뚜렷한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흔들리는 모습은 시청률 하락과 관객의 거리감을 낳았다. 그 결과, 세계 영화의 축제라기보다 미국 산업 내부의 질서를 재확인하는 행사라는 냉소가 뒤따른다. ‘미국 영화제’, ‘로컬(Local) 축제’라는 말은 그 인식을 압축한 표현에 가깝다.
영화의 본령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도 논란은 이어진다. 아카데미는 영화를 감각의 예술이라기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로 좁혀 이해한다는 평가를 자주 받는다. 투표 결과가 시각적 실험이나 형식적 모험보다 익숙한 서사와 정서에 기울어 있다는 지적도 반복된다. 이른바 ‘오스카용 영화(Oscar Bait)’는 거대한 제작비와 정교한 홍보 속에서 하나의 장르처럼 자리 잡았다. 카메라의 미세한 이동, 편집의 리듬, 소리의 결이 만드는 체험보다 당대의 메시지와 대중적 호소력이 앞에 놓이는 순간이 적지 않았다. 이로써 아카데미는 혁신의 전위라기보다 산업의 문지기라는 평가와 마주한다.
그럼에도 이 시상식은 해마다 같은 형식과 의례를 반복하면서 스스로의 의미를 갱신해 왔다. 제도는 관습의 축적 위에서 지속되고, 이야기는 재현의 누적 속에서 새로운 감정을 얻는다. 익숙함은 진부함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각 시대의 감각이 그 위에 덧입혀지며 다른 표정을 만든다.
오래된 시상식의 무대와 우리가 여러 번 보았다고 믿는 영화의 서사는 서로 다른 영역에 있으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시간 속에서 반복되고, 그 반복 속에서 새롭게 읽힌다. 우리가 다시 그 장면들을 바라보는 이유는 낯선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라진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축적된 상징성 또한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수상 결과와 별개로, 시상식 중간마다 펼쳐지는 공연은 영화가 음악과 몸짓의 예술과 만나는 순간을 또렷이 보여준다. 특히 2019년 제91회 시상식에서 레이디 가가와 브래들리 쿠퍼가 영화 <스타 이즈 본>의 주제가 <Shallow>를 함께 부르던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거대한 극장은 한 편의 서사에서 막 걸어 나온 인물들의 숨결로 채워졌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날의 노래가 남긴 울림은 상의 무게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예술의 떨림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조용히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늘 찬사와 의심 사이에 서 있다. 전통을 반복하면서도 영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되묻는 자리. 완결된 권위라기보다, 여전히 논쟁 속에서 의미를 새로 쓰는 긴 과정에 더 가까운 행사. 그 흔들림 속에서, 영화라는 예술 역시 자신의 좌표를 다시 그린다.
다시, 별이 지는 자리에서
잭슨 메인은 공연이 끝나면 늘 술집으로 향한다. 불빛이 번지는 거리를 지나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우연히 발을 들인 작은 바. 드렉 쇼가 열리고, 그는 술기운에 몸을 맡긴 채 시간을 흘려보내려 한다. 그러나 무대에서 흘러나온 한 목소리가 그를 붙든다. 흐릿하던 감각이 단번에 또렷해질 만큼 맑은 음색. 그 노래의 주인은 재능을 지녔지만 외모에 대한 평가에 가로막혀 무명으로 남아 있던 앨리, 곧 레이디 가가가 연기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알아본 이는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이 남자다.
그의 격려 속에서 앨리는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노래를 꺼낸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감각을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빠르게 무대의 중심으로 걸어간다. 그는 그 성공을 기뻐하며 사랑과 동행을 약속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상처와 점점 잃어가는 청력은 그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술과 약에 기대는 시간이 길어지고, 결국 그레미상 시상식장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남긴다. 새롭게 떠오른 별과 저물어가는 별은 같은 하늘에 머물 수 있을까. <스타 이즈 본>이 남기는 질문은 줄거리보다 오래 마음에 머문다.
이 작품을 보기까지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당시 극장가에는 음악을 앞세운 영화가 유난히 많았다. 뮤지컬, 뮤지션의 전기, 성장 서사. 흥행의 안전지대를 겨냥한 기획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선택이라는 계산이 먼저 떠올랐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이야기라는 점도 주저하게 만든 이유였다. 익숙한 구조, 할리우드가 오래 사랑해 온 변주. 그 기원은 조지 쿠커가 연출한 <할리우드의 가격은 얼마인가?>(1932)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윌리엄 웰먼은 재닛 게이너와 프레드릭 마치를 내세워, 떠오르는 여배우와 몰락해가는 스타의 사랑을 그렸다.
이 서사는 다시 이어진다. 주디 갈랜드와 제임스 메이슨이 참여한 1954년 작품은 이후 수많은 뮤지컬적 변주에 흔적을 남겼다. 1970년대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프랭크 피어슨의 연출 아래 같은 이야기를 다시 살았다. 이 작품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연하기를 바랐다는 일화도 여전히 회자된다. 몰락한 록스타를 연기한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모습은 오래된 텔레비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한때 스타였던 남자가 저물어가며 무명의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가 성공한 뒤 사랑이 비극으로 기우는 이야기. 지나치게 익숙하고, 어딘가 보수적인 남성 중심 서사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아티스트>나 <비긴 어게인> 역시 큰 틀에서는 이 궤도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익숙함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능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 그리고 그 빛 앞에서 기쁨과 상실을 동시에 느끼는 마음.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감정의 결은 더 또렷해진다. 누군가의 빛이 커질수록 자신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살아가며 한 번쯤 마주한다.
이런 이야기는 상처가 될 줄 알면서도 자꾸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미 아문 줄 알았던 기억의 딱지를 다시 건드리는 일처럼. 아픔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그 통증 속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진실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이 탄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별이 사라지는 시간을 함께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 그래서 이 오래된 서사는 계속 다시 만들어지고, 또다시 우리를 부른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무대
21세기의 관객 앞에 선 인물은 레이디 가가와 브래들리 쿠퍼다. 레이디 가가는 이 작품으로 첫 장편 영화의 주연을 맡았고, 브래들리 쿠퍼는 과감한 감독 데뷔를 이루었다. 그는 연출과 연기, 제작과 공동 각본, 음악 작업까지 직접 참여해 영화의 결을 스스로 빚어냈다. 투어의 피로와 팝스타의 급격한 부침을 화면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숨이 멎을 듯 사실적인 공연 장면과 인이어 모니터를 향한 세밀한 시선, "그냥 내 머릿속에 있는 거야; 난 여기에 있어야 해"라는 대사는 무대 뒤의 삶을 아프도록 또렷하게 드러낸다. 화려한 조명 뒤에 숨은 고독과 긴장이 이 영화의 온도를 만든다.
Maybe it's time to let the old ways die
- OST : <Maybe it's time> 중 -
<스타 이즈 본>은 대칭의 구조 위에 서 있다.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새로운 것(New something)과 오래된 것(Old ways)이 서로를 비추며 나아간다. 잭슨의 얼굴에는 세월의 결이 스며 있고, 앨리는 아직 빛나는 시간 속에 서 있다. 그는 거칠고 남성적인 록큰 롤, 낡고 오래된 웨스틴 록스타의 세계에 속한다. 앨리는 드렉바의 샹송에서 록과 댄스 음악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감각을 지녔다. 두 사람의 음악은 서로 다른 시대처럼 다른 울림을 낸다.
쿠퍼가 연기한 잭슨 메인은 기타 하나로 무대를 채우는 컨트리 록 가수다. 공연 뒤 술을 찾아 들어간 심야 드래그 바에서 그는 앨리가 <라 비 앙 로즈>를 부르는 장면을 만난다. "여기 술 있나? 그럼 내 스타일이지."라는 무심한 말과 달리, 그는 곧 노래에 사로잡힌다. 메인은 "할 말이 있고, 그 말을 표현하는 방법을 아는" 아티스트를 발견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앨리는 음악계가 "목소리는 훌륭한데, 외모는 별로야 " 라고 말하는 남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는다. 그 불신을 넘어, 그는 그녀를 관중 앞에 세운다. 희생처럼 보였던 선택은 동시에 구원의 행위가 되고, 무대는 폭발적인 환호로 응답한다.
황홀한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의 호흡은 깊이 맞물린다. 서로의 가능성에 불을 붙이며 잊고 있던 열정을 깨운다. 형 바비가 "형이 저렇게 연주한 건 정말 오랜만이야"라고 말하듯, 잭슨에게도 그 순간은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궤적은 나란히 걷지 못한다. 그는 스테로이드 주사와 술, 약에 기대어 스스로를 잠식해 간다. 그녀는 명성이 요구하는 새로운 얼굴을 떠안는다. 매니저 레즈를 연기한 라피 가브론은 댄서와 헤어스타일, 그리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는" 홍보 사진으로 앨리를 다시 만들어낸다. 성공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낯선 짐이 된다.
외모에 대한 농담과 평가를 지나, 레이디 가가의 연기에는 묘한 울림이 남는다. <퍼니 걸> 속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함과 함께, 쓰레기를 버리는 일상의 장면 같은 소박한 순간들이 더 깊이 스민다. 무대 위의 카리스마보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표정이 오래 기억된다.
잭슨의 전용기에서 샴페인 코르크를 따는 장면은 록스타의 세계가 그녀에게 얼마나 낯설고 눈부신지 보여준다. 그 경험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어린다. 앨리의 침실 벽에 걸린 캐롤 킹의 앨범 태피스트리는 우연한 소품이 아니다. 작곡가에서 스타 가수로 건너가는 여정을 암시하며, <그레이스 오브 마이 하트>의 기억을 은은히 불러낸다. 메인이 피아노 건반을 권하며 그녀의 자연스러운 보컬을 끌어내는 장면은, 한 사람의 음악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열어 보이는지 조용히 말해 준다.
이 영화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성공의 서사가 아니다. 서로 다른 시간이 스쳤다가 어긋나는 순간의 기록에 가깝다. 새로운 별이 떠오르는 동안 다른 별은 서서히 빛을 잃는다.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만 끝내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없었던 두 존재의 이야기. 그래서 남는 감정은 환호가 아니다. 무대의 불이 모두 꺼진 뒤에도 한동안 공기 속에 머무는, 작고도 긴 울림이다.
사라지는 자리, 남는 음계
잭슨은 앨리를 누구보다 강하게 밀어 올리면서도, 그녀가 스스로 서기 시작할 때 설명하기 어려운 흔들림을 느낀다. "왜 나는 항상 부족한 걸까?". 그 물음은 단순한 질투라기보다, 자신이 딛고 있던 자리가 천천히 지워지는 감각에 가깝다. 각진 안무를 익히며 점점 현실의 레이디 가가와 닮아가는 앨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길을 잃은 표정이 스친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차가운 푸른 조명이 대비되고, 그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에서 밀려나 타인의 서사 속에 서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시상식 장면의 논란은 다시 호출되듯 재현되고, 그 고통의 색조는 관객의 시선마저 잠시 멈추게 만든다.
잭슨은 앨리를 만난 직후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다. 그녀가 직접 만든 노래의 한 대목을 듣는 순간, 그것이 두 사람의 삶을 바꿀 곡임을 직감한다. <스타 이즈 본> 초반, 앨리가 처음 무대에 오르는 장면은 거의 기적처럼 펼쳐진다. 브래들리 쿠퍼와 레이디 가가의 호흡은 자연스럽고, 그 자연스러움이 두 인물을 믿게 한다. 재능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은 설명보다 빠르게 마음에 닿는다.
가가는 웨이트리스에서 슈퍼스타로 도약하는 과정을 몸으로 아는 배우다. 그래서 성공 앞의 떨림과 확신을 함께 보여준다. 앨리는 무대에 설 때마다 긴장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능성을 감지한다. 그녀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머무는 인물이 아니다. 잭슨은 다만, 그녀가 자기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등을 밀어주는 사람에 가깝다.
잭슨의 가족사는 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60대의 아버지와 18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아버지처럼 보이는 형과 음악 동반자로 살아온 시간. 앨리의 아버지가 프랭크 시나트라와의 일화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고, 리무진 운전사 동료들과 유튜브 조회수를 이야기하는 장면은 오래된 세계와 새 질서가 한 화면에서 부딪히는 풍경을 만든다. 록이 상징하던 시대는 기울고, EDM과 Midi Sound의 흐름이 빠르게 밀려온다. 이 서사가 중년의 마음을 건드리는 까닭은 단순한 사랑의 상실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됨'이 '새로움'에 밀려나는 장면을 자신의 삶에서 발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시간, 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던 날들은 서서히 뒤로 물러난다.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워질 때, 사람은 자신이 낡아가고 있음을 조용히 자각한다.
그러나 '새로움'은 '오래됨'을 대신할 수 있어도, '익숙함'을 지우지는 못한다. 잭슨의 형이 말하는 '좋은 음악에 대한 정의'는 그 단순한 사실을 일깨운다. 음악은 옥타브 안의 12개의 음을 반복하는 구조이며, 음악가의 일은 그 12개의 음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배열하는 일이라는 것.
세상에는 수많은 주파수가 있지만, 우리가 듣는 음악은 결국 12개의 '익숙한' 음 위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이 록이든 EDM이든 뽕짝 트롯이든 다르지 않다. 형식은 변해도 토대는 남는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은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같은 기반을 공유한다.
그래서 <스타 이즈 본>이 남기는 울림은 시대 교체의 선언이 아니다. 변해 가는 세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리듬에 대한 기억에 가깝다. 다른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우리는 결국 같은 음계 위에서 다시 삶을 연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의 탄생과 그림자의 시간
모든 버전의 <스타 이즈 본>은 한 별이 떠오를 때 다른 별이 기울어가는 이야기다. 빛은 늘 교차한다. 한쪽이 환해질수록, 다른 쪽의 그림자는 짙어진다.
잭슨은 처음부터 술과 약에 잠식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가볍다고 여기는 팝 음악으로 파트너가 거대한 명성을 얻는 과정을 지켜본다. 무대는 화려해지지만, 그의 내면은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다. 브래들리 쿠퍼는 끝없이 흔들리는 남자를 과장 없이 그려낸다. 재능과 자기 파괴가 같은 속도로 타오르는 얼굴. 데이브 채플이 연기한 친구는 언젠가 모든 남자가 머물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잭슨은 멈추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무너뜨릴 이유를 찾는 사람에 가깝다. 그럼에도 쿠퍼는 그를 낡은 중독 서사의 틀에 가두지 않는다. 그는 끝내 한 인간으로 남는다.
이 균열 위에서 앨리는 떠오른다. 레이디 가가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한쪽이 위스키와 오래된 공연 방식에 머무는 동안, 다른 한쪽은 새로운 무대의 언어를 배워간다. 거리는 분명 벌어지지만, 두 사람의 연기는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감각을 남긴다. 우리를 자라게 한 관계가 동시에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역설. 영화는 그것을 조용히 응시한다.
후반부, 앨리의 스타덤은 다소 산만하게 펼쳐진다. 특히 'SNL' 장면은 극 중 인물과 실제 레이디 가가의 궤적을 겹쳐 보이게 하며 어색한 인상을 남긴다. 팝 음악을 일회적인 것으로 보는 잭슨의 시선에 영화가 쉽게 기울어 보이기도 한다. 매니저와의 갈등 역시 익숙한 장치에 머문다. 그럼에도 결말은 중심을 되찾는다. 예견된 선택이지만, 울림은 깊다. 누군가의 말처럼 "화난 사람도 좋아할 수 있는 뮤지컬 영화야"라는 농담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배우 출신 감독인 브래들리 쿠퍼는 호흡을 세밀하게 조율한다. 레이디 가가, 샘 엘리엇, 앤드류 다이스 클레이의 연기는 절제되어 있다. 중심에는 언제나 음악이 놓인다. 가가에게 완곡을 부르게 한 선택, 그리고 스스로 들려주는 쿠퍼의 거친 목소리는 그 진심을 증명한다. 관객은 줄거리보다 인물을 따라 극장에 들어간다. 오래 남는 것도 결국 두 사람의 얼굴과 노래다.
세월은 누구도 비켜가지 않는다. 흐름을 거스르는 요령도 없다. 그렇다면 자기 파멸은 순리일까. 상실 속으로 미끄러지는 중년의 초상으로 이 영화는 끝나는가.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술과 약은 줄이고 끊으면 된다. 시간의 무게는 자각하며 견디면 된다. 열패감은 도움을 받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사람은 자주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숨는다.
바닥을 경험한 이는 안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감각을. 모래처럼 무너지는 절망을. 그럼에도 빠져나오지 않으면 결국 삼켜진다. 문제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선택도, 다짐도, 다시 일어서는 힘도 결국 자신에게 있다.
I'm falling in all the good times
I find myself longin for change.
-OST <Shallow> 중-
영화는 해답을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몇 차례의 장면으로 힌트를 건넨다. 잭슨은 결핍 속에서 자랐고, 형 바비와도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다. 반면 앨리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리무진 기사인 아버지와 동료들 사이에서 단단한 유대를 경험한다. 두 사람은 결혼으로 서로의 빈자리를 메우려 한다. 첫 레코딩에서 무너진 앨리를 잭슨은 익숙한 피아노 앞으로 이끈다. 그 선택은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해결의 실마리는 멀리 있지 않다. 대개는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것을 찾기 전에 포기하는 일이 더 큰 비극일 뿐이다. 잭슨을 잃고 괴로워하는 앨리에게 바비는 말한다.
"문제는 앨리 너도 나도 아니야, 네가 잘 못한 것이 아니야. 문제는 잭슨이야. 잭슨의 잘못이야."
오랜만에 다시 만난 신파조의 음악 이야기. 오늘날 ‘신파조’는 진부함의 다른 이름처럼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지된 사랑의 서사에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 숨어 있다. 세련됨과 속도를 숭배하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이야기 앞에서 웃고 운다.
완전히 새롭지 않지만, 완전히 낡지도 않은 사랑. 브래들리 쿠퍼의 뜻밖의 노래와 레이디 가가의 꾸밈없는 얼굴이 만나는 순간. 그 소박한 진심이 <스타 이즈 본>을 오래 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