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아버지를 깨우는 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세대의 균열과 혁명의 잔불 속에서

by 박 스테파노

작년에 평단에서 크게 호명된 영화 가운데, 아직 글로 풀어내지 못한 작품이 하나 있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였다. 몇 번이나 초고를 시작했다가 멈췄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쩌면 유치할 만큼 얄팍한 감정, 이른바 ‘PTA팬덤’에 대한 막연한 반감. 폴 토마스 앤더슨(PTA)의 신작이 도착할 때마다 시네필의 세계는 거대한 제의 장소처럼 들끓는다.


최근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를 둘러싼 찬사와 열광 역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환호의 뒤편에는 어딘가 미묘한 게으름이 스며 있다. 스스로를 ‘시네필’이라 부르는 이들이, 이미 박제된 고전의 문법을 무리하게 호출하며 영화를 해석하려 드는 태도다. 미장센이라는 화려한 기표 아래 작품의 실제 호흡을 가두어 버리는 습관도 낯설지 않다. 여기에 더해, PTA 팬덤이 보여주는 비교 강박과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라는 제도적 권위에 대한 묘한 집착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공개되자 평단은 기다렸다는 듯 로버트 알트먼의 산만한 활기나 토마스 핀천의 편집증적 서사를 불러왔다. 이 영화는 곧장 어떤 ‘위대한 전통’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작품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전적 맥락을 알고 있는지 드러내려는 시네필적 허영에 가까워 보인다. 미장센을 둘러싼 상찬도 크게 다르지 않다. 70mm 필름의 질감이나 롱테이크의 정교함을 찬미하는 동안, 영화가 발화하는 동시대의 불안과 실존의 질문은 기술적 성취라는 장식 뒤로 물러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해독해야 할 각주처럼 취급된다. 시네필의 취향을 증명하는 장치가 되는 셈이다. 앤더슨이 구축한 영상미가 압도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의 전부인 듯 숭배되는 순간, 영화는 생명력을 잃고 박물관의 유물이 된다.


더 흥미로운 장면은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예술적 순수성을 강조하던 이들이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트 여부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예술 영화’라는 배타적 영역을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주류 권력의 승인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망. 그 이중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노미네이트를 둘러싼 소음은 영화의 가치를 트로피의 가능성으로 환원한다. 결국 시네필적 열광이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 제도적 인정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비평은 그보다 다른 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미장센의 도식적인 해설이나 과거와의 억지스러운 연결이 아니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지금 여기의 관객에게 던지는 불편한 이미지를 직면하는 일. 팬덤의 폐쇄적인 언어가 영화와 대중 사이의 거리를 넓히는 동안, 정작 영화가 말하려 했던 전투는 스크린 밖에서 공허한 수사로 반복될 뿐이다.


그렇다고 PTA를 둘러싼 논의를 단순히 시네필의 허영을 폭로하는 데서 멈출 수는 없다.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는 닫힌 회로에 머무는 순간, 영화가 건네는 실존의 긴장 역시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야 한다.


70년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유령에서 잠시 벗어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2020년대의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어떤 불안을 드러내는지 묻는 일. 그 질문 앞에서 영화는 단순한 스타일의 성취를 넘어선다. 붕괴된 가치와 흩어진 인간의 삶이, 한 편의 이미지 속에서 다시 배열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전투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화려한 미장센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인간의 불안 속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알제리 전투, 지나간 혁명의 화면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대마초 연기 속에서 <알제리 전투>(질로 폰테코르보, 1966)를 바라본다. 폰테코르보의 거친 흑백 화면. 식민지 저항의 문법이 스크린 위에 흐른다. 그러나 밥은 그것을 전략으로 보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바라볼 뿐이다. 이 장면 하나가 폴 토마스 앤더슨이 영화에서 시도하는 세계를 압축한다. 저항은 늘 지나간 이미지로 남는다. 혁명가는 과거의 영웅과 자신을 겹쳐 보며 현재의 패배를 잠시 미룬다. 밥 역시 그런 인물이다.


그는 한때 ‘프렌치 75’의 일원이었다. 미-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수용소를 폭파하고, 은행을 털며 국가 폭력에 맞섰던 게릴라 조직. 이름은 1차 세계대전의 야포에서 왔다. 빠르고 강렬하며 금세 사라지는 포성. 그 이름에는 이미 짧은 운명이 새겨져 있었다.


1966년의 영화 <알제리 전투>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알제리 독립투쟁을 다룬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맞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무장 저항과 프랑스군의 정치적 폭력이 함께 기록된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섞어 만든 이 영화는 독립 후 불과 3년 만에 제작되었다. 현실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다. 회상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학살과 탄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30년 넘게 상영되지 못했다. 한국에 소개된 것도 2009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프랑스는 그 역사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1966년의 영화 <알제리 전투>. 마그나 제공


폴 토마스 앤더슨이 <알제리 전투>를 불러온 이유는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보여준 정교한 통제의 미학에서 한 걸음 물러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통제된 구도 대신, 통제되지 않는 역사의 현장으로 시선을 옮기겠다는 의지. <알제리 전투>가 지닌 뉴스레일(Newsreel)의 거친 질감과 핸드헬드의 불안한 움직임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다른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파편화된 개인을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 장치로 작동한다.


시네필들이 극장 의자에 몸을 맡긴 채 70mm 필름의 우아함을 음미할 때, 앤더슨은 폰테코르보의 거친 시선을 끌어온다. 그 시선은 탐미의 평온을 깨뜨린다. 영화는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목격의 장면이 된다. 관객은 스크린 속 전투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인간의 투쟁임을 느끼게 된다. 이 소환은 동시에 다른 의미를 품는다. 시네필 담론이 덧씌운 ‘박제된 거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앤더슨의 몸짓. 그는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매끄러운 서사와 정교한 미장센을 일부러 비껴간다. 대신 화면에 남겨진 것은 혼돈과 열기, 그리고 미완의 혁명이다. 그렇게 그는 제도권이 규정한 ‘좋은 영화’의 범주를 흔든다.


<알제리 전투>가 식민 권력에 맞선 집단적 저항의 기록이었다면, 앤더슨의 호출은 다른 전선을 향한다. 영화 산업을 둘러싼 자본, 권위,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비평의 허영을 겨냥한 시각적 게릴라전이다. 이 맥락에서 <알제리 전투>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도달하려는 진정성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시네필의 굳은 담론을 깨뜨리는 도구로 작동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도입부 40분은 하나의 독립된 단편처럼 움직인다. 중심에는 퍼피디아 비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가 서 있다. 이민자 수용소 사령관을 무장 해제하는 장면에서 인종과 성별, 권력의 균형이 단숨에 뒤집힌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마림바와 피아노 사이에서 떨리듯 울린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정치적 선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폴 토마스 앤더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16년을 건너뛴다. 시간의 도약 이후, 밥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집 안을 허둥대는 중년의 남자. 한때의 혁명가는 이제 딸의 역사 선생님에게 항의하러 학교로 찾아가는 평범한 아버지가 된다.


세대의 교체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플롯이 아니다. 하나의 체제처럼 작동한다. 저항의 언어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그 사이에서 끊어지는가. 결국 이 영화가 끝내 묻고 있는 질문도 그 지점에 닿아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깨어 있는 자들의 암구호


프렌치 75에는 암구호가 있다. 구성원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짧은 문장을 공유한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식별하는 언어. 그것은 1970년대 간첩 영화의 오래된 문법이기도 하고, 성경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마태오 복음 25장. 기름을 준비한 신부와 그렇지 못한 신부의 비유. 신랑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혁명 조직의 원리와도 닮아 있다. 습격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준비된 자만이 살아남는다. 영화에서 ICE를 닮은 군사 조직 MKU가 들이닥칠 때, 프렌치 75의 일부는 잠들어 있었다. 경계는 한순간 느슨해졌고, 그 틈으로 폭력이 스며든다.


악당 스티븐 J. 록죠 대령(숀 펜)이 이끄는 조직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과 연결된다. 그들은 서로를 “헤일 세인트 닉”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묘한 농담 뒤에는 더 어두운 모델이 숨어 있다. KKK가 지녔던 초법적 신념의 체계. 테디 루즈벨트가 필리핀을 점령하며 내세운 ‘문명화 사명’의 언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뒤집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던 역사.


영화는 이 악을 코믹하게 그린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공포를 덮지 못한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나치즘 역시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비극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숀 펜이 연기한 록죠는 2025년 영화 속에서 가장 음산한 악당 가운데 하나다. 그는 단순한 폭력의 인물이 아니다. 믿음의 장비를 갖춘 사람이다. 신념은 멜로디처럼 반복된다. 위협을 탐지하는 편집증은 스캐너처럼 작동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언제나 도덕적 논리로 정당화된다. 그는 자신을 구원자라고 믿는다. 바로 그 확신이 이 영화의 가장 섬뜩한 장면을 만든다.


“헤일 세인트 닉”이라는 구호는 겉으로 보면 유치한 장난에 가깝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20세기 암흑기를 관통한 초법적 폭력의 그림자가 남는다. 우리가 목격했던 MAGA의 광기나 ICE의 비인간적 행정도 처음에는 시대착오적인 소동처럼 보였다.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투정이 전쟁의 포성을 울리고 국가 시스템을 흔드는 순간, 희극은 곧장 참극으로 바뀐다.


록죠 대령의 집무실에는 낡은 성경과 최첨단 스캐닝 장비가 함께 놓여 있다. 기묘한 병치다. 그는 마태복음을 인용하며 자신을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신부”로 상상한다. 그러나 그가 준비한 기름은 등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불순한 자들을 태우기 위한 가솔린에 가깝다.


MKU의 습격 장면에서 록죠는 무전기를 통해 한 구절을 읊조린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테오 복음 7:23)”. 이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타자를 ‘문명화의 대상’조차 아닌 ‘말살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냉혹한 선언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숀 펜의 연기는 이 장면에서 특히 기이하다. 그는 광기 어린 포효 대신, 잠든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사를 내뱉는다. 그 순간 악은 평범함을 넘어선다. 일종의 신성한 확신을 입는다. 스캐너의 기계음은 단순한 전자음이 아니다. 불신자를 가려내는 신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 리듬 속에서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믿는다.


이 인물의 내면 논리는 2020년대 우익 포퓰리즘의 정신 구조와도 닮아 있다. 그들은 배타적 신념을 ‘상식’이나 ‘사명’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그 논리 안에서 폭력은 치료나 수술처럼 정당화된다. 영화에서 록죠가 프렌치 75의 거점을 초토화하며 보여주는 평온한 표정은, 확신에 찬 근본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앤더슨은 록죠의 편집증을 스캐너의 시각적 인터페이스로 드러낸다. 관객은 그의 폭력을 멀리서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세상을 해체하는 차가운 논리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 순간 영화는 정치 스릴러의 경계를 넘는다. 신념이 무기가 되는 순간 인간성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기록한 잔혹한 보고서가 된다.


록죠가 보여주는 ‘믿음의 장비’는 결국 우리 시대의 음산한 거울이다. 그는 악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뒤틀린 성서적 정의와 식민지적 사명을 수행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래서 죄책감이 없다. 나치즘이 떠오르던 시기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과장된 제복과 몸짓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이 위협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프렌치 75의 암구호는 단순한 식별 언어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윤리다. 마태오 복음의 비유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MKU의 습격—혹은 역사의 퇴행—을 견딜 수 있다.


세대가 교체되는 시대에 과거를 무조건 밀어내려는 충동도 있다. 그러나 위험한 망령을 다시 부르는 일은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땅을 허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대를 가르는 벽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하나의 언어다. 그것은 십 년 전 광장을 밝히던 촛불일 수도 있다. 계엄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했던 응원봉의 불빛일 수도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바로 그 암구호를 잊은 채 잠든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신랑이 오기 전, 등불을 다시 살피라고.



조립식 가족의 문법


밥 주변에는 기묘한 이름들이 모여든다. 그링고 코요테. 빌리 고트. 로켓맨. 게토 펫. 혈연으로 묶인 사람들이 아니다. 이념으로 호출된 이들이다. 처음에는 임시로 엮인 동지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천천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느슨한 결합이 때로는 혈연보다 더 가족처럼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지키고, 같은 위험 속에서 같은 숨을 쉰다.


하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시선은 곧장 이 ‘조립식 가족’의 균열을 향한다. 이 공동체가 어디에서 흔들리는지, 무엇이 내부를 갈라놓는지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모든 혁명은 악마와 싸우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 속 이 대사는 농담처럼 흘러나오지만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프렌치 75는 외부의 적 때문에만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의 틈이 더 깊다. 신뢰의 균열. 이념의 순수성을 둘러싼 다툼. 누가 더 진짜 혁명가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소모적인 논쟁.


이 장면들은 낯설지 않다. 스타워즈의 반란군 역시 내부 분열을 겪었다. 늑대와 춤을의 케빈 코스트너는 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 영화의 인물들도 같은 진동 속에 서 있다. 소속과 이탈 사이에서 흔들리는 삶.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가장 복잡한 인물은 와일라(체이스 인피니티)다. 그녀는 밥의 딸이다. 혁명가의 피를 이어받은 두 번째 세대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언어를 모른다. 암구호의 진정한 쓸모를 알지 못하고, 그 전쟁을 직접 겪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혁명은 그녀에게 설명되어야 하는 역사로 남는다. 살아온 기억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이야기. 바로 이 지점에서 세대교체의 비극이 시작된다. 계승은 언어의 전달이지만, 언어는 경험 없이 온전히 이어지지 않는다. 딸은 같은 세계를 물려받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


영화 속 퍼피디아의 대사도 그 균열을 드러낸다.


"This pussy don't pop for you."


단순한 성적 도발이 아니다. 혁명 내부에 숨어 있는 성정치학을 한 문장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남성 혁명가들이 여성의 몸을 전리품처럼 대하는 오래된 습관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퍼피디아는 프렌치 75의 도덕적 중심에 서 있지만, 그 공동체 안에서조차 자신의 몸의 자율성을 반복해서 확인해야 한다. 혁명은 자동으로 평등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것 역시 영화가 수행하는 결함 분석의 일부다.


아버지와 자녀의 갈등은 오래된 이야기다. 성경에는 비정한 아버지 아브라함과 순종의 아들 이사악의 장면이 있다. 역사 속에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이 있다. 왕위와 권력을 둘러싼 부자 간의 싸움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신화에서도 다르지 않다. 제우스는 그의 아버지 티탄과 크로노스의 살을 찢고 태어났다.


이처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인간 역사 깊은 곳에 놓인 오래된 운명처럼 보인다. 영화는 바로 그 낡은 플롯을 살짝 비튼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부모의 세대와 자식 세대의 긴장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어느 시대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관심을 갈구하고 이해를 원한다. 그러나 질책과 원망도 함께 쏟아진다.


이 양가적 감정이 역사의 한 축을 움직여 왔는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애증은 시간의 톱니를 밀어 올리는 힘이다. 사랑만으로도, 증오만으로도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단지 세대 ‘차이’ 때문만은 아닌 이유다. 겉으로 보면 같은 시간을 걷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서로 다른 시계를 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날은 기쁘고, 어떤 날은 슬프다. 함께 웃다가도 곧 서로 등을 돌린다.


그렇게 같은 길을 걸으며, 아들들은 어느 순간 아버지가 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들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문득 살아난다. 지금의 아버지들은 또 먼 훗날 다른 세대의 기억 속에서 다시 모습을 얻을지도 모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가족계획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족은 계획되지 않는다. 퍼피디아와 밥의 딸 와일라는 혁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록죠가 와일라를 추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증거다. 그래서 가족은 여기서 단순한 혈연이 아니다. 정치적 위협이다. 와일라의 생존은 과거의 저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 연결이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국가는 바로 그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영화의 마지막 질문도 그 지점에 닿는다. 깨어 있는 신부는 다음 세대인가, 아니면 지금의 세대인가. 기름을 준비한 자는 누구인가.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가족은 해체된다. 그러나 또 다른 방식으로 다시 엮인다. 그리고 그 재조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가치다. 함께 믿는 것. 가족은 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을 때, 다시 태어난다.



잠든 자를 깨우는 영화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연기하는 센세이 세르지오 성 카를로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한 인물이다. 그는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지하 조직을 운영한다. 말이 적고 동작은 단정하다. 가라테 사범처럼 침착하고, 인디언 추격자처럼 지형을 읽는다.


그에게는 프렌치 75의 화력이 없다. 대신 길을 안다. 사람을 숨길 곳을 알고, 다음 경계선이 어디인지도 안다. 그렇게 그는 누군가를 국경 너머로 넘긴다. 소리 없이, 이름 없이. 영화는 이 인물을 통해 또 다른 저항의 방식을 보여준다. 요란한 구호 대신 조용한 이동. 기록되지 않는 구조. 다음 세대를 안전한 곳으로 건네는 오래된 기술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비스타 비전(VistaVision)의 화면비는 이 이야기들을 광활한 풍경 속에 펼쳐 놓는다. 1960년대 이후 거의 사라졌던 이 포맷은 캘리포니아의 땅을 서부극처럼 넓게 펼쳐 보인다. 국경의 건조한 평원, 보레고 스프링스의 협곡,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 추격전.


이 땅은 황야의 7인의 무대였던 곳이기도 하다. 동시에 오늘의 이민자 수용소가 세워진 장소이기도 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오래된 풍경 속에 지금의 공포를 끼워 넣는다. 서부극의 문법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뉴스 화면처럼 서늘하다. 신화와 현실이 같은 화면 안에서 겹친다.


밥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다. 대마초 연기 속에서, 낡은 <알제리 전투>의 필름 속에서. 과거의 장면을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와일라가 도착했을 때 그는 겨우 눈을 뜬다. 딸이 아버지를 깨운다. 세대교체는 횃불을 넘기는 장면이 아니다. 잠든 사람의 어깨를 흔드는 순간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의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의 구조를 해부한다. 그러나 영화는 포기하지 않는다. 싸움은 다음 세대로 이동한다. 더 낯선 방식으로, 더 새로운 언어로. 그래서 이 작품은 세대교체를 비극이 아니라 열린 질문으로 남긴다. 혁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얼굴을 바꾼다.


이 영화를 둘러싼 시네필들의 담론은 종종 기술적 언어로 흘러간다. “70mm 필름의 질감”, “광각 렌즈의 왜곡” 같은 표현들이 반복된다. 영화는 어느새 살아 있는 이야기라기보다 분해 가능한 장치처럼 다뤄진다. 그들은 로버트 알트먼의 다성성(Polyphony)이나 스탠리 큐브릭의 대칭미를 소환하며 작품의 계보를 정리한다. 그러나 정작 프레임 안에서 고통받는 인물들의 얼굴에는 무심하다. 화면 속 삶보다 이론이 더 크게 들린다.


미장센이라는 말도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단어는 때로 영화의 깊이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비평의 성벽이 된다. 기술적 성취를 찬양하는 말이 늘어날수록 영화의 정동은 점점 옅어진다. 관객은 감독의 의도를 해독해야 하는 시험장에 서게 된다. 이런 ‘박제식 비평’은 영화를 동시대의 숨결에서 떼어낸다. 살아 있는 매체를 오래된 시네마테크의 자료처럼 보이게 만든다.


더 흥미로운 장면은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예술적 순수성을 강조하던 팬덤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 발표에 일희일비할 때다. 주류 영화 산업을 자본주의의 논리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제도가 주는 트로피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인정받으려 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오스카 후보에 오르는 순간, 담론은 비평에서 수상 가능성으로 기울어진다. 분석은 곧 확률 계산으로 바뀐다.


아카데미는 이들에게 예술의 기준이라기보다 일종의 승인 도장처럼 작동한다. 자신들의 취향이 대중적으로도 승리했다는 확인. 그러나 그런 태도는 영화 자체를 보려는 시선을 흐린다. 권위의 후광 속에서 작품을 소비하게 만든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결국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도달한 곳은 세대의 평온한 교체가 아니다. 잠든 자를 흔들어 깨우는 현장이다. 시네필들이 비스타비전(VistaVision)의 넓은 화면에 감탄하는 동안, 영화는 그 아름다운 풍경 아래 숨겨진 오늘의 지옥을 보여준다. 국경의 철조망과 초법적 폭력. 밥이 대마초 연기와 <알제리 전투>의 기억 속을 떠도는 동안, 와일라는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를 깨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관객에게 던지는 비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혹시 영화의 미장센을 분석하고 아카데미의 트로피를 점치며 안락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의 괴물이 국경을 넘고 과거의 암구호가 힘을 잃는 순간에도, 시네필의 언어는 여전히 필름의 입자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센세이 세르지오 성 카를로스(베니치오 델 토로)의 조용한 저항이 말해준다. 진짜 영화적 행위는 화려한 수사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읽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건네는 실천이다.


혁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얼굴을 바꾼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낡은 문법을 깨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충돌과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비평이 서야 할 자리도 함께 묻는다. 레드카펫의 조명이 아니라, 시대의 바람이 부는 광장 위에서.


이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등불에 채울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영화라는 달콤한 마취 속에서 아직도 잠들어 있는가.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이 영화의 암구호는 오래 남는다. 우리를 향해 조용히 묻는다. 정말로 깨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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