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흉기가 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믿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 대상과 형태가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념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절대적 신앙이라 말한다. 때로는 가치관과 세계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문제는 믿음이 지닌 힘이다. 믿음은 때로 놀라울 만큼 거칠고 두려운 얼굴을 드러낸다.
우리는 믿음을 숭고한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그 믿음이 사실의 토대를 잃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잔인한 흉기가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위협하는 정보를 밀어내고, 신념을 지지하는 근거만을 모으려 한다. 심리학이 말하는 확증편향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영화 <더 헌트>(토마스 빈터베르그, 2012)와 <아이들...>(이규만, 2011)은 이 취약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한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서늘하게 보여 준다.
<더 헌트>에서 루카스는 평온한 마을의 평범한 이웃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사소한 거짓말과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공동체의 맹신이 맞물리는 순간, 그는 단숨에 사냥의 표적이 된다. 의심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폭력을 정당화한다. 공동체는 진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틀을 씌우고, 그 틀 안에 루카스를 가둔다.
실화인 개구리 소년 사건을 모태로 한 <아이들...> 역시 같은 비극을 그린다. 황우혁 교수는 아이를 잃은 부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자신의 가설에 맞지 않는 증거는 외면하거나 왜곡한다. 자신의 믿음을 진실로 확신한 전문가의 오만이 만들어 낸 잔혹한 풍경이다.
두 영화가 함께 비추는 장면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종종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지하실이 없다는 분명한 물리적 사실조차 숨겨진 진실로 해석될 만큼, 확신은 쉽게 스스로를 방어한다. 집단은 진실을 찾는 공동체가 아니라, 누군가를 제물로 삼는 의식의 장이 된다. 도덕적 우월감은 유지되고, 책임은 타인에게 떠넘겨진다.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우리가 상식이라 부르는 확신이, 혹시 누군가를 향한 폭력이 아닌지.
이 인지적 태만이 집단으로 확장될 때, 폭력은 더욱 정교해진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소위 마인드 가드(Mind-Guard)다. 이들은 집단의 균열을 막는 문지기다. 불편한 정보와 반대 의견을 미리 차단하고, 공동체의 도덕적 환상을 보호한다. 특정 정권이나 정파가 반대 의견을 악의적 선동으로 몰아가고, 내부 비판자를 배신자로 낙인찍는 모습은 닫힌 리더십의 전형이다. 사실에 근거한 토론보다 집단적 합리화가 앞설 때, 침묵하는 소수는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공동체는 만장일치의 환상에 빠진다.
그때 진실은 조용히 사라진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정보의 부족에서 오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확신에 찬 선동가가 아니다. 집단의 확신을 흔들 수 있는 고의적 비판자다. 양심과 상식이 건네는 조용한 타이름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향한 사냥을 멈출 수 있다. 그때서야 믿음은 흉기가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언어가 된다.
거짓의 증명, 지하실이 없는 집
이혼 뒤, 루카스(매즈 미켈슨)는 고향 마을에 홀로 남는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오래된 친구들과의 소박한 만남으로 외로움을 견딘다. 삶은 여전히 비어 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다. 새 여자친구를 만나고, 아들 마커스(라세 포겔스트룀)와 다시 함께 지낼 날을 꿈꾸며 조용한 희망을 키운다. 작고 평범한 일상이 그를 버티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균열이 생긴다. 가장 친한 친구 테오(토머스 보 라센)의 어린 딸 클라라(아니카 베데르코프)가 던진 사소한 거짓말 하나가 마을 전체로 번져 나간다. 겨울 독감처럼 빠르게 퍼진다. 의심은 불신이 되고, 불신은 배척으로 변한다. 차가운 눈길과 통제되지 않은 폭력 앞에서 루카스와 마커스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평범했던 삶이 지옥의 문턱으로 밀려난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 (Jagten: The Hunt)>는 작지만 깊은 흔적을 남기는 작품이다. 칸느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정복자 펠레> 이후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덴마크 영화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내러티브는 건조하고 냉정하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시선이 사건의 무게를 더 크게 만든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클라라는 그저 루카스가 좋다. 집 안에서는 부모의 거친 말다툼이 잦고, 사춘기에 들어선 오빠의 소란도 이어진다. 그 사이에서 루카스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어른이다. 그러나 사소한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던 아이의 작은 거짓말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클라라가 묘사하는 루카스의 행동은 실제 경험이 아니다. 오빠 친구들이 보던 포르노 영상이 아이의 상상과 뒤섞이며 만들어 낸 거짓 묘사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
유치원 교사의 질문과 설명은 다른 아이들의 진술까지 이끈다. 아이들은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이야기한다. 어른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응징하려는 열기가 마을 전체를 감싼다. 이 폭력의 배경에는 두 가지 인식이 놓여 있다. 루카스가 이혼 후 혼자 사는 남자라는 사실, 그리고 마커스의 대부가 말한 한 문장이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지,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지."
이 문장은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하다. 대부분이라는 개념을 전체로 확장하는 순간, 오류가 생긴다. 유형화의 오차, 혹은 집단화의 오류다. 경찰과 법원은 사건을 더 조사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반려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근거 역시 아이들의 진술이다. 영화는 그 장면을 짧은 대화로 보여 준다.
"아이들이 루카스 집의 지하실 벽지와 조명 등 자세한 것 까지 진술했다는 것이지, 그래서 경찰들이 집을 조사했더니 어땠는지 알아?"
"루카스 집에는 지하실이 없다는 것을 알아 냈겠지요."
"맞아 지하실이 없어"
사실은 이렇게 간단하다. 그럼에도 공동체는 멈추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이 같은 믿음을 공유할수록 확신은 더 단단해진다. 집단이기 때문에, 다수이기 때문에, 그 오류는 더욱 오래 지속된다.
사냥의 논리, 사슴이 된 사람
어떤 집단이나 범주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 안에 속한 개인을 같은 부류로 단정해 버리는 인식의 오류가 있다. 이것을 지각오류(知覺誤謬)라 부른다. 흔히 유형화의 오차 또는 집단화 오류라고도 말한다. 유형화(類型化)란 특정 집단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fixed idea)이 한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대로 작동하는 심리적 상태다. 사람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은 틀로 해석하려 한다.
'A라는 사람은 유태인이니까 인색하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유태인이라는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이 먼저 작동한 결과다. 실제로 마음이 후한 사람일지라도 그 틀 안에서는 인색한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유형화는 대상이 실제로 가지지 않은 특성을 있는 것처럼 지각(perceive)하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실제의 특성을 지워 버리기도 한다. 일상의 세계는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난수표처럼 서로 다른 삶이 얽혀 있기 때문에 이런 오류는 더욱 쉽게 발생한다.
영화 속에서 루카스가 키우는 애견 패니는 사람들의 대화 중에 루카스의 전처 이름이 나오면 어김없이 짖어 댄다. 패니에게 그녀는 이미 경계해야 할 존재로 유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각과 기억 속에서 불편한 존재로 분류되는 순간, 그 이미지는 오래 남는다.
영화의 제목 헌트 또한 이런 인식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사냥에는 단순한 목적만 있다. 그러나 그 사슴이 반드시 그날 잡혀야 할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냥하기 쉬운 대상이었거나, 사냥꾼이 원하는 표적이었을 뿐이다. 사냥감이 된 순간, 존재의 사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가해자는 쉽게 잊는다. 사건은 지나가고 일상은 돌아온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겉으로 보기에 성스럽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복잡한 검증의 책임을 아이의 순수성 뒤로 밀어 넣는 어른들의 편리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더 헌트>에서 클라라의 짧은 거짓말은 이 믿음을 타고 마을 전체로 번져 나간다. 증거가 없는 자리에 혼자 사는 이혼남이라는 낙인이 들어선다. 루카스는 다정한 이웃에서 사냥해야 할 사슴으로 떨어진다. 공동체는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결속을 확인하고, 분노는 정의의 이름을 빌려 더욱 거칠어진다.
사냥이 끝난 뒤에도 광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보다, 피해자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겨 두는 편을 선택한다. 그것이 공동체의 평온을 지키기에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진실은 조용히 사라진다. 차가운 숲 어딘가에 버려진 채, 집단의 맹신만이 어둠처럼 오래 남는다.
믿음이 진실을 삼킬 때
1991년 3월 26일, 기초의원선거가 치러지던 날, 다섯 명의 초등학생이 도롱뇽을 잡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과 군이 약 30만 명을 동원해 수색했지만 아이들의 행방도, 주검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은 미제로 남은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그 무렵, 특종에 모든 것을 건 다큐멘터리 PD 강지승(박용우)이 지방 발령으로 그 지역에 오게 된다. 자신의 가설로 범인을 단정하는 범죄심리학 교수 황우혁(류승룡), 아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형사 박경식(성동일)이 합류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건에 접근하던 세 사람의 시선은 어느 순간 한 지점을 향한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범인이라는 의혹이다.
영화 <아이들...>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미제사건이며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에는 촘촘한 수사와 인간적 번민을 따라가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한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 영화의 시선은 무거운 사회적 질문으로 이동한다.
영화 초반, 황우혁 교수는 강의실에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을 설명하며 등장한다. 자신이 믿는 생각에 지나치게 확신할 때, 그것과 충돌하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영화는 1950년대 종말론을 주장하던 유사 종교 집단의 사례를 예로 든다. 교주가 선포한 종말의 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신도들은 교주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 종말이 미뤄졌다고 해석하며 더 많은 헌금을 바쳤다. 믿음이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믿음에 맞게 다시 쓰는 순간이다.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각자의 믿음에 붙잡혀 서로 충돌한다. 특종에 집착하는 PD는 또 다른 자극적인 이야기를 좇고, 부모는 장난 전화를 아이의 목소리로 믿으며 수사의 불씨를 붙잡는다. 아이들의 유해가 발견된 뒤에도 경찰 간부는 책임을 피하려 사건을 자연사로 정리하자며 부하를 다그친다. 각자의 믿음이 사건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그때 나타나는 것이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만 모으고, 반대되는 사실은 외면한다.
황우혁 교수의 지성은 타인의 고통을 거름 삼아 자라난다. 그의 가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틀이 된다. 학문적 자존심이 인지부조화의 늪에 빠지는 순간, 아이를 잃은 부모의 집은 시신을 숨긴 범죄 현장으로 읽힌다. 신념이 사실을 압도할 때, 인간의 고통은 연구를 장식하는 차가운 각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이 비극은 한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는다. 특종 지상주의와 공권력의 안일함이 얽히며 거대한 확증편향의 그물을 만든다. 그 안에서 부모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고정된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맞춰 조립된 믿음의 연대는, 미궁에 빠진 사건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진실을 찾는다는 이름 아래 이어지는 확신의 풍경. 그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가장 깊은 인지적 질환의 초상에 가깝다.
다수의 확신, 침묵의 그림자
집단은 종종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 조직의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그 조직이 지닌 도덕성마저 의심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맹신은 때때로 거대한 사회적 혼란을 낳는다. 미국의 엔론 사태, 한국의 금융위기, 월가의 붕괴, 그리고 플랫폼 기업들의 일탈이 그 예다. 이 사건들은 한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집단적 리더십 역시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본다. 국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서 나타나는 닫힌 리더십이다. 겉으로는 의견을 듣는 듯하지만, 결국 자신의 결론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반대 의견은 과소평가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곧 ‘소수’이며, ‘악의적’이며, ‘비뚤어진’ 존재로 규정된다. 우리는 그런 정치의 시간을 이미 오래 지나왔다. 탄핵이라는 국정농단의 경험 이후에도, 또 다른 내란의 권력을 만들어 낸 기억을 갖고 있다.
집단은 때로 다수라는 이름 뒤에 숨어 폭력을 행사한다. 소수의 의견은 조직 안에서 스스로 검열되기 시작한다. 반대는 점점 말해지지 않는다. 침묵은 곧 동의로 해석되고, 다수결의 구조는 어느 순간 만장일치의 환상으로 변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직의 판단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로열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받는다. 반대 의견 자체가 불가능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때로는 직접적인 압박도 뒤따른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존재가 있다. 소위 ‘마인드가드(Mind-Guard)’다. 그들은 집단에 닥칠 피해를 미리 경고하는 척하며, 불편한 질문을 조용히 차단한다. 겉으로는 조직을 보호하는 역할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단의 사고를 더욱 닫히게 만든다. 이런 모습은 스스로 ‘진보적’이라 부르는 정치 집단에서도 발견된다. 사회적 목적을 내세운 여러 이해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선을 조금 넓히면 비영리 영역이나 행정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을 찾을 수 있다. 혁신을 말하는 조직조차 예외는 아니다. 가장 진보적이라 평가받는 광역단체장의 주변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나타난다. 집단 사고의 오류는 개인의 피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문제를 만들고 공동체의 균열을 낳는다. 마음의 상처는 결국 더 큰 파탄으로 번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확증편향'의 장면을 경험해 왔다. 유사종교의 기이한 믿음에서 비롯된 범죄도 있었고, 특정 과학 이론을 인류 구원의 열쇠처럼 선동하는 과학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모습도 있었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비슷하다. 현실의 효과를 따지지 않은 채 전쟁을 말하는 보수 정치 집단이 있었고, 계층 간 대립을 부추기는 각종 ‘연합’과 ‘연맹’도 있었다. 아이들 점심을 제공하는 기본적인 교육 정책을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하는 정치 지도자도 있었다.
종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라며 타인의 신앙을 폄하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교회도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성당 개보수에 매달리느라 주일강론 준비조차 어려워하는 가톨릭 신부도 있었다. 알라의 이름으로 세상을 ‘성전’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 역시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거창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믿음의 과잉을 쉽게 만난다.
학예회 수준의 노래와 춤을 문화의 선봉대처럼 포장하는 팬덤과 미디어, 군대 폭력을 군기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군 조직,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인간을 길러 내는 교육 제도도 그렇다. 그리고 인성교육을 한탄하면서도 아들의 시험지를 옆집 아이와 비교하는 아버지의 마음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확신이라는 감옥, 양심이라는 열쇠
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오래 무거웠다. 동시에 같은 시대의 영화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영동 1985>, <26년>, <부러진 화살>, <두 개의 문>, 그리고 <7번 방의 기적>까지. 2010년대의 많은 영화는 집단적 사고의 오류가 만들어 낸 비극을 비추고 있었다.
2010년대가 국가와 제도의 폭력을 보여 주었다면, 2020년대 중반의 서사는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2023)는 재난 속에서 드러나는 배타적 집단 이기주의를 그린다. 여기에 알고리즘이 강화한 디지털 확증편향이 더해진다. 정보는 넘치지만 진실은 조각난 시대다. AI가 만들어 낸 가짜 뉴스가 숲처럼 번지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서로를 사냥한다.
현대의 ‘헌트’는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비극의 과녁은 더 이상 루카스라는 개인만을 향하지 않는다. 확신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우리 모두를 향한다.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처벌과 인격 살인은 인류가 쌓아 온 상식의 경계를 흔든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고의적 비판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는 일이다.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그것만이 이 거친 사냥의 계절을 멈출 수 있다.
이 장면은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었다. 군중의 함성에 손을 들어 버린 빌라도의 판결, 세계 전쟁으로 이어진 히틀러의 등장,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묵인된 독재 정치의 탄압이 그 예다. 다수의 횡포가 커질수록 인류의 비극도 커졌다. 이런 오류를 막기 위한 장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가자를 확대하고, 의견 수렴 과정에서 지도자는 먼저 말하지 않는 경청의 규칙을 두는 일이다. 외부 전문가와 내부 관찰자를 통해 ‘고의적 비판자 그룹’을 육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우리는 다시 그런 오류의 문턱에 서 있는 듯하다. 오른쪽도 위험하고 왼쪽도 위험하다. 51%의 사람도, 49%의 사람도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은 선동가가 아니라 ‘고의적 비판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믿음은 따로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신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이 유일한 진실이 되는 순간이다. 거기에 약간의 권력과 약간의 재물, 그리고 약간의 잔머리가 더해질 때 세상은 빠르게 어지러워진다. 역사는 그런 장면을 이미 여러 번 보여 주었다.
요즘은 그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아 불안하다. 안 해 본 일이 없다며 모든 일을 확신하는 정치 지도자, 가난을 겪어 본 적이 없어 공동체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벌의 경제관, 자신이 입은 옷이 곧 자신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언론의 확신이 그렇다. 무서운 세상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신념은 소중하다. 지켜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니고 타인에게 위해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념이 아니다. 아집이다. 착각이다. 그리고 준비된 폭거다. 서로의 믿음이 충돌할 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기준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안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두드림이고, 밖에서 건네오는 ‘상식’의 타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