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의 그늘과 설익은 정의감

청소년 언론 ‘토끼풀’을 향한 진언

by 박 스테파노

기특함의 덫, 혹은 설계된 진실


언론의 자유를 향한 투쟁이 교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은평구의 중학생들이 모여 만든 독립 언론 '토끼풀'이 내민 백지 신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었다.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발행인 등록조차 허락하지 않는 법의 문턱, 교육적 중립이라는 모호한 잣대를 앞세워 신문을 압수하는 학교의 관행—이것들은 마땅히 지적되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용기에만 박수를 보내는 동안, 저널리즘이 본래 갖추어야 할 서늘한 이성과 치밀한 논증은 '청소년'이라는 방어막 뒤에서 조용히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을 때가 됐다.


최근 게재된 기사 〈"이슬람 정권 아니었다면 한국처럼 발전했을 텐데"…이란의 한탄〉은 이 우려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란의 비극적 현실을 담아 분노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그 기사는 저널리즘이라기보다 특정 정치적 서사를 향한 선언문에 가까웠다.


https://www.tokipul.net/news/articleView.html?idxno=1118


기사는 이란 내부의 불만, 팔라비 왕조에 대한 향수,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기대를 여과 없이 전달한다. 독재 정권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 것은 언론의 중요한 책무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전부가 될 때, 기사는 프로파간다로 미끄러진다. 팔라비 왕조의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이란 전체의 지향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1979년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팔라비 왕조가 안고 있던 태생적 한계와 친서방 노선이 빚어낸 내부 균열은 기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복잡한 역사의 인과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는 순간, 저널리즘의 품격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기특함의 덫은 비단 교문 안에만 있지 않다. 대중의 온정이 설익은 정의감을 감싸고 방치한다면, 거대 자본과 국가 권력의 전략적 지원은 저널리즘을 전혀 다른 목적의 도구로 변질시킨다. 시선을 국제 무대로 돌리면, 더욱 정교하고 거대한 '설계된 진실'의 현장과 마주하게 된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숭고한 가치를 내걸고 싸우면서도, 정작 그 펜 끝을 움직이는 동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끊임없이 의심받는 곳—바로 토끼풀신문이 독점 인터뷰하면서도 그저 그대로 받아쓰기해 준 '이란 와이어'와, 그 배경에 자리한 NED의 사례다.



굴절된 빛, 혹은 의도가 흐르는 곳


“<이란와이어>에서 소개한 로카예 레자이기자를 3월 6일 저녁 구글 미트로 인터뷰했다. 그녀는 지금의 전쟁을 "정부가 자초한 필연적 비극"이라고 정의했다. 이란 국민들은 트럼프를 환영하며 ‘해방’이라 칭하고 있다고도 했다. “

- 토끼풀신문. 2026년 3월 16일 <“이슬람 정권 아니었다면 한국처럼 발전했을 텐데”...이란의 한탄> 기사 중에서


저널리즘의 본령은 어둠 속에 가려진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빛이 스스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의 이해관계라는 거대한 반사판을 통해 굴절되어 들어온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란 내부의 억압과 인권 문제를 고발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이란 와이어(IranWire)와, 그 든든한 뒷배인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의 관계는 현대 저널리즘이 직면한 가장 서늘하고도 고전적인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탄생한 NED는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전도사라 칭한다. 과거 CIA가 비밀리에 수행하던 해외 정치 개입을 양지로 끌어올려 투명하게 운영하겠다는 명분은 매혹적이다. 총칼 대신 보조금을, 첩보 활동 대신 시민사회 육성을 내세우며, 국제공화주의연구소(IRI)·국립민주주의연구소(NDI) 등 네 개의 정교한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이 기계장치는 전 세계 NGO와 언론사에 자금을 수혈하며 부드러운 힘을 전파한다.


그러나 질문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그들이 전파하는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인가, 아니면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투사한 기성복인가. NED의 예산이 국무부를 통해 흘러나온다는 사실은 이 기구의 태생적 한계를 규정한다. 전략적 요충지에서는 공격적인 민주화 지원이 이루어지지만, 미국의 이익과 합치하는 독재 국가 앞에서는 그 서슬 퍼런 정의감이 이내 무뎌진다. '제2의 CIA'라는 꼬리표는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자금을 매개로 타국의 여론을 성형하려 할 때 피어나는 필연적인 의구심이다.


스스로가 레이건 대통령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NED 사이트. 매일노동뉴스 제공


그 자금줄 위에서 피어난 이란 와이어는 태생적으로 독립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란 정권의 잔혹한 탄압과 종교적 소수자인 바하이교에 대한 박해를 기록해 온 공로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펜 끝이 향하는 방향이 언제나 서방의 대(對)이란 외교 정책과 기묘하게 궤를 같이한다는 점은 뼈아프다. 언론이 특정 권력의 자금을 받아들이는 순간, 저널리즘은 관찰이 아닌 참전의 도구가 된다. 이란 사회의 복합적인 맥락을 지우고 오직 정권의 실책에만 렌즈를 고정하는 확증 편향은, 독자에게 진실의 전체가 아닌 분노의 단면만을 건넨다.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검증되지 않은 소셜 미디어 정보의 빠른 확산은 또 다른 형태의 눈가림이다.


가장 위태로운 지점은 정보원의 안전이다. 이란 내부의 시민 저널리스트들이 목숨을 걸고 건네는 제보는 이란 와이어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러나 그 무기가 서구의 입맛에 맞는 서사를 강화하는 데 소모되는 동안, 제보자들은 이란 정부의 가혹한 감시망 앞에 무방비로 선다. 보도의 파급력이 제보자의 안전보다 앞서는 순간, 저널리즘은 윤리적 파산에 직면한다. 타국의 고통을 중계하며 얻은 국제적 명성이 정작 그 고통의 주인공을 사지로 몰아넣는다면, 그 보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것은 저널리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착취다.


억압받는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청소년 언론이든, 망명객들이 만든 매체든, 그 용기는 찬란하다. 그러나 진정한 독자의 시선은 용기의 이면을 응시해야 한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돈으로 확성기를 달았는지, 그들이 그리는 지도의 북극점이 진실이 아닌 특정 국가의 국익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비판 없는 지지는 언론을 괴물로 만든다. 이란 와이어와 NED의 관계를 향한 날 선 비판은, 역설적으로 저널리즘이 어떤 권력의 하수인도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가장 강력한 응원이다.


극도로 대립하는 세상에 무해한 자금은 없다. 돈이 흐르는 곳에는 반드시 의도가 흐른다. 이란 와이어가 진정으로 이란 민중의 대변인이 되고자 한다면, NED의 보조금이라는 안락한 온실에서 나와 스스로의 문장이 가진 무게와 편향을 통렬하게 자각해야 한다. 저널리즘은 칭찬의 세례 속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향한 치열한 자기 부정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폭격으로 사망한 이란 초등학교 희생자들. 테헤란 타임즈 제공



펜의 무게를 가르쳐 준 이가 없었다


저널리즘이 청소년에게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하나다. 그것은 단순히 말할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아니라, 말의 무게를 견디는 일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기자는 기성세대의 문법을 비판하며 등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생산하는 콘텐츠는 기성 언론의 가장 나쁜 습성—확증 편향과 자극적 서사—을 고스란히 답습하곤 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취사선택된 사실들(Cherry-picking)은 강력한 울림을 주지만, 진실의 다면성을 가린다. 청소년이라는 신분은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자격이지, 논리적 허술함을 정당화해 주는 면죄부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른들의 부재를 발견한다. 토끼풀신문의 활동에 많은 어른이 찬사를 보낸다. 학교의 탄압에 맞서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후원금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토끼풀신문이 내놓은 기사의 논리적 빈틈을 매섭게 짚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이 이 정도면 대단하다"는 온정주의는 실상 가장 지독한 차별이다. 동등한 주체로 대우한다면, 그들의 글이 가진 편향성과 사실관계의 미흡함을 기성 언론에 들이대는 잣대와 똑같이 엄격하게 비판했어야 한다. 기특함이라는 이름의 박제는 성장을 가로막는다.


진정한 언론은 비난에 맞서는 것보다 자기 검열과 치열하게 싸울 때 완성된다. 토끼풀신문이 미래의 시민이 아닌 현재의 시민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학교의 압수 수색이 아니라 대중의 무조건적인 박수다. 이란의 고통을 한국의 발전상과 평면적으로 비교하며 왕정복고를 희망처럼 묘사하는 시각은,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꼰대들의 세계관과 무엇이 다른가.


토끼풀신문은 청소년 단체 23곳과 함께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생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은평시민신문 제공


언론은 사실의 조각들을 모아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토끼풀신문은 지금 뜨거운 심장으로 펜을 들었다. 그러나 그 펜 끝이 진실의 지도가 아닌 감정의 늪을 향한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의 위기다. 청소년 기자의 발칙한 도발이 단발성 퍼포먼스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제는 용기를 넘어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펜이 무겁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가 없다면, 그들은 자신이 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거나 세상을 오독하게 만드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제 기특하다는 말은 거두자. 대신 그들의 기사를 꼼꼼히 읽고, 논리의 비약에 밑줄을 긋고, 질문을 던지자. 그것이 청소년 언론을 독립된 주체로 대우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들이 진정한 언론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가장 매서운 응원이다.


토끼풀은 아스팔트 위에서도 꽃을 피운다고 했다. 그러나 꽃이 핀 것만으로 농사는 끝나지 않는다. 열매를 맺으려면 비바람만큼이나 차가운 서리도 필요하다. 지금 토끼풀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온실이 아니라, 그들의 문장을 사정없이 해부하고 비판해 줄 진정한 어른의 시선이다. 저널리즘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 무게를 오롯이 견디며 나아갈 때, 토끼풀은 비로소 대안언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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