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언어의 난립, '독서 챌린지'라는 형용모순
한 해를 접어 두는 시점에, 몇 줄의 흰소리를 적어 두고 발행을 망설였다. 늘 그랬듯 소신을 밝히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오늘까지 글을 내고 잠시 숨을 고를 생각이었고, 신년의 다짐보다도 한 해의 끝자락이 더 정직한 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일 12.28일까지 ‘브런치 독서 챌린지’ 참여 모집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 프로모션의 소개를 접했을 때부터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현실적으로 카카오 연동 프로모션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렵고, 구버전 앱을 사용하는 처지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챌린지’라는 단어였다. 기획자는 이 말의 뜻과 유래를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선택한 것일까. 전자라면 독서와 출판을 말하면서 인문학적 사유의 빈틈을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고, 후자라면 사용자들을 향한 무례에 가까운 도발로 읽힌다.
오늘날 프로모션과 진흥 이벤트에서 가장 흔히 마주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단연 ‘챌린지(Challenge)’다. 독서 챌린지, 100일 챌린지, 미라클 모닝 챌린지. 수많은 ‘도전’이 우리의 일상을 포위한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독서’라는 고유한 사유 행위에 이보다 어긋난 이름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언어는 사고의 윤곽을 만들고, 잘못 붙여진 이름은 사물의 본질을 비튼다. 범람하는 챌린지의 열기는 독서를 내면의 확장이나 사유의 축적이 아닌, 타인의 시선 앞에 전시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고통스러운 과제’로 밀어낸다. 읽기는 도전이 아니라 체류에 가깝다. 속도를 겨루는 경주가 아니라, 오래 머물며 스스로를 낮추는 일에 더 닮아 있다.
도전이라는 이름의 그림자
‘챌린지’의 어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그 뿌리는 라틴어 ‘칼룸니아레(calumniare)’에 닿는다. ‘비방하다’, ‘중상하다’, ‘기만하다’라는 어둡고 공격적인 의미를 품은 말이다. 고대 로마의 법률 용어에서 출발한 이 단어는 중세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로 스며들며, ‘권리에 대한 이의 제기’, ‘법적 자격에 대한 의심’이라는 의미로 변주되었다. 시작부터 그것은 평온한 자기 성찰과는 거리가 먼 언어였다.
역사 속에서 ‘챌린저(Challenger)’는 결투를 신청하는 자였다. 상대의 명예를 건드리고 자격을 의심하며, 칼을 뽑아 드는 공격적 주체. 전쟁과 스포츠의 맥락에서 챌린지는 늘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적대적 대결이었고, 기득권을 향한 도발적 몸짓이었다. 다시 말해 챌린지는 내면을 닦는 수양의 말이 아니라, 외부의 적이나 난관을 상대로 싸워 이겨야 하는 ‘전투적 극복’을 전제한 언어였다.
이 호전적 어휘의 확장은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오만을 상징하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졌다. 나사(NASA)의 아폴로 프로젝트, 그리고 그 연장선에 놓였던 ‘챌린저호’의 명명이 그렇다. 자연의 법칙과 우주의 미지를 향한 겸손한 탐구가 아니라, 감히 ‘도전’한다는 식의 명명은 기술 만능주의에 취한 인간의 자의식을 드러냈고, 그 끝은 우리가 기억하는 참혹한 폭발 사고로 남았다.
문제는 이 ‘챌린지’라는 말이 현대 SNS 환경과 결합하며 급속히 오염되었다는 데 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에서 비롯된 숏폼 중심의 유행은 취지를 가볍게 증발시키고, ‘행위의 전시’만을 남겼다. 댄스 챌린지와 각종 미션 수행은 사유의 깊이를 요구하지 않는다. 타인과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며 인증하는, 동질성의 확인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챌린지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놀이이자 과시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여기에 한국의 독서 문화로 스며든 ‘미션(Mission)’과 ‘퀘스트(Quest)’ 같은 표현은 일본식 영어의 잔재로 조어된 콩글리쉬와 게임 서사가 결합한 결과다. 일본 대중문화에서 파생된 ‘미션’은 주어진 과업을 수동적으로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을 남기고, ‘퀘스트’는 보상을 위해 단계별로 해치워야 할 숙제로 독서를 끌어내린다. 독자는 책을 읽는 주체가 아니라, 시스템이 부여한 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활자를 ‘소비’하는 존재가 된다. 이런 언어의 오염 속에서 독서는 자율적 사유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수행되는 노동이자 전시성 이벤트로 오해받기 시작한다.
읽기의 이름을 되돌려 놓기
독서는 본래 저자와 독자가 시공간을 건너 마주 앉는 깊은 대화이며, 내면의 자아가 조금씩 확장되는 리듬의 과정이다. 그러나 여기에 ‘챌린지’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독서는 곧장 ‘빨리 해치워야 할 고난’이 되고, ‘인증샷을 남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30일 동안 매일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은 문장 사이에 머무를 권리를 박탈하고, 여백을 음미할 시간을 서둘러 지운다.
우리는 때로 난해한 철학서를 읽으며 곤경에 처한다. 그러나 독서 연구가들이 말하듯, 그 곤경은 쓰러뜨려야 할 적이 아니라 사유를 단련하는 마찰력에 가깝다. 이를 ‘챌린지’라 부르는 순간, 독서라는 행위는 부정적인 장애물로 규정되고, 극복의 대상으로 격하된다. 출판 시장의 진흥을 위해 차용된 이 용어는 오히려 독서를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성공하면 멋있어 보이는 도전’이라는 프레임에 가둔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피로감을 먼저 불러오는 이름이 과연 독서 인구의 저변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지, 의문은 남는다.
‘독서 챌린지’라는 말이 유독 불편하게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서의 본질을 담아낼 더 따뜻하고 품격 있는 언어는 없을까. 예컨대 ‘독서 동행’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책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걷는 친구이며, 출판사와 서점은 그 여정을 곁에서 안내하는 가이드에 더 가깝다.
습관 형성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독서 습관 만들기’라는 직관적인 우리말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굳이 영어를 덧붙이는 이유가 ‘폼새’라면, 그 점이 오히려 안타깝다. 만약 세련된 외래어가 필요하다면 ‘독서 리츄얼(Reading Ritual)’이라는 대안도 가능하다. 리츄얼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의식을 뜻한다. 독서를 단순한 미션 수행이 아니라, 삶을 정돈하고 영혼을 돌보는 경건한 행위로 격상시키는 이름이다.
게임적 재미를 더하고 싶다면 ‘퀘스트’보다는 ‘독서 여정(Reading Journey)’이나 ‘탐험’이 독서의 역동성을 더 정확히 전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가 독서를 무엇이라 부르느냐에 따라 그 행위의 결이 달라진다. 이제는 투쟁적인 ‘챌린지’의 굴레를 벗어나, 독서가 지닌 본래의 평온함과 사유의 기쁨을 다시 불러낼 이름을 찾을 때다.
기록되는 읽기, 사라지는 사유
브런치가 내놓은 ‘브런치 독서챌린지’는 앞서 살핀 ‘챌린지’라는 언어의 오용과 변색이 어떻게 거대 플랫폼에 의해 제도화되고, 마침내 마케팅의 수단으로 굳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장면이다.
성인 독서율의 감소와 지역 서점의 위기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독서라는 숭고한 정신적 행위를 디지털 데이터의 파편으로 쪼개어 플랫폼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한 소모품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짙다. 무엇보다 이 캠페인은 독서의 본질인 ‘깊이 있는 사유’를 ‘자동 기록되는 수치’로 치환함으로써, 읽기를 성취해야 할 과업이자 감내해야 할 노동의 영역으로 더욱 밀어 넣는다.
가장 먼저 문제 삼아야 할 지점은 ‘라이브독서’라는 기능이 지닌 기만성이다. 카카오는 이를 ‘러닝 앱으로 달리기를 기록하듯 실시간으로 독서 시간과 분량을 기록하는 기능’이라 소개한다. 그러나 육체적 한계를 넘어 물리적 거리를 이동하는 ‘달리기’와, 활자 사이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독서’는 애초에 같은 저울 위에 놓일 수 없다. 달리기에서 속도와 거리는 곧 성과가 되지만, 독서의 성취는 페이지를 넘긴 속도나 머문 시간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 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시간 안에서 자아의 성찰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충분히 깊은 독서다. 그러나 브런치의 시스템은 독자를 ‘실시간 기록’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둔다. 화면 위에 기록되는 숫자는 텍스트로부터 독자를 떼어내어, 읽고 있는 문장이 아니라 ‘기록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만든다. 이는 독서가 지닌 탈아(脫我)의 경험을 방해하고, 독자를 플랫폼이 요구하는 ‘활동 로그’를 생산하는 기계적 주체로 전락시킨다.
‘3일 이상 기록 시 추첨을 통한 굿즈 증정’이라는 보상 구조 역시 독서 진흥이라는 명분의 빈약함을 드러낸다. 독서의 가치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내적 충만함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챌린지는 30일 가운데 단 3일의 기록만으로도 경품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지속성과 진정성이라는 독서의 핵심 가치를 스스로 허문다. 이는 독서를 권하는 장치라기보다, 카카오라는 거대 플랫폼 내부의 활동성을 높이기 위한 미끼에 가깝다.
참여자 전원에게 제공된다는 ‘톡디지털카드’ 또한 실제 지식의 축적보다는 SNS상에서의 과시를 위해 소비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책 읽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디지털 카드로 박제해 전시하는 행위가 과연 한국 사회의 독서율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오히려 이는 독서를 ‘힙한 취미’로 포장해 유행의 파도에 띄우는 또 하나의 사례, 곧 언어 오염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수치가 읽기를 대신할 때
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독서를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류사에서 문자의 등장은 고작 수천 년 전의 일이며, 뇌는 기존의 시각 인식과 언어 처리 회로를 재배치하며 어렵게 ‘읽는 뇌’로 적응해 왔다. 이 가소성의 역사 위에서 볼 때, 카카오 브런치의 ‘라이브독서’ 기능은 뇌과학적으로 위험한 실험에 가깝다. 독서 시간과 분량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시각적 피드백을 제공하는 행위는 인지 자원을 ‘텍스트의 해석’이 아니라 ‘자기 상태의 모니터링’으로 돌려세운다.
뇌과학자 매리언 울프는 『책 읽는 뇌』에서 깊이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신경 회로의 섬세함을 강조했다. 깊이 읽기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작업 기억’이 맥락 파악과 추론, 비판적 사고에 온전히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화면 한켠에 측정되는 타이머와 분량 수치는 전두엽에 끊임없는 ‘평가 지표’를 던진다. 또한 인지 부하를 급격히 높여, 뇌가 의미의 심층으로 내려가기보다 ‘기록을 유지하는 상태’를 관리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그 결과 독자는 행간을 읽기보다 수치를 맞추기 위해 활자를 훑는 ‘하이퍼 리딩’의 늪에 빠진다.
‘라이브독서’는 몰입(Flow)의 조건 역시 근본에서부터 흔든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했듯 몰입은 자의식이 사라지고 시간 감각이 흐려질 때 발생한다. 그러나 실시간 기록 시스템은 독자에게 ‘지금 얼마나 읽고 있는가’를 계속 자각시키며 자의식을 증폭한다. 이는 몰입의 반대편에 놓인 ‘자기 객관화적 감시’ 상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수치화는 과잉 정당화 효과를 불러온다. 마크 레퍼와 동료들의 연구가 보여주듯, 내재적 즐거움의 활동에 외적 보상이 결합될 때 주체는 즐거움보다 보상을 위한 수단으로 그 행위를 인식하게 된다.
라이브독서의 기록 장치는 독서라는 내밀한 기쁨을 ‘데이터 생성 노동’으로 바꾼다. 뇌는 더 이상 문장이 주는 지적 자극이 아니라, 기록 달성 뒤에 주어질 도파민적 보상(톡디지털카드, 경품 응모권)에 반응한다. 장기적으로 독서의 내재적 동기를 마모시키고, 기록할 수 없는 환경에서의 읽기를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끼도록 뇌의 회로를 재편한다.
디지털 환경 자체가 주의력을 분산시킨다는 연구는 이 위험을 더욱 분명히 한다.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터넷 환경이 인간의 뇌를 ‘산만한 뇌’로 바꾸고 있다고 경고했다. 스마트폰 앱 안에서 작동하는 라이브독서는 독서 중에도 각종 알림과 인터페이스의 유혹에 뇌를 노출시킨다. ‘챌린지 기록 중’이라는 표식과 미세한 UI의 움직임은 시냅스 연결을 조각내고, 깊은 사유를 위한 연속성을 끊어낸다.
가소성은 적응을 뜻하지만, 이 환경에의 적응은 결국 표면 정보만을 빠르게 처리하는 ‘경박한 뇌’로의 후퇴를 의미한다. ‘습관 형성’이라는 미명 아래, 실제로는 고등 사고를 담당하는 영역의 활동을 억제하고 반응적 체계만을 강화하는 셈이다.
결국 ‘라이브독서’가 지향하는 수치화된 읽기는 성인 독서율을 높이는 해법이 아니라, 독서의 질을 훼손하는 인지적 재앙에 가깝다. 뇌는 의미의 연결망 속에서 성장하지, 초 단위의 기록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수만 명이 만들어낼 방대한 라이브독서 데이터는 플랫폼에는 자산일지 모르나, 개별 독자의 뇌에는 사유의 흔적 대신 피로의 얼룩만을 남긴다.
진정한 독서 진흥은 기록의 강요가 아니라, 뇌가 텍스트와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인지적 고립’의 시간을 보장하는 데서 출발한다. 시스템에 의해 박제된 기록은 사유의 결과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책을 통해 도달해야 할 깊은 바다로의 잠항을 방해하는, 떠 있는 부표에 지나지 않는다.
사유를 숨 쉬게 하는 읽기
플랫폼의 수치 경쟁이 독자의 뇌를 파편화한다는 비판을 넘어, 이제는 인간의 인지 구조에 걸맞은 독서 문화를 다시 그려야 한다. 독서는 정보의 습득이나 시간의 누적이 아니라, 뇌의 여러 영역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의미의 세계를 짓는 창조적 행위다. 이를 위해 ‘브런치 독서챌린지’식의 외적 보상과 실시간 감시를 걷어내고, 내면의 성장을 중심에 둔 ‘뇌 친화적 독서 모델’을 상정할 수 있다. 이 모델은 기록의 양이 아니라 사유의 깊이를, 전시의 욕망이 아니라 고립의 미학을 지향한다.
첫 번째 원칙은 ‘인지적 고립’의 확보다. 디지털 알림과 실시간 기록은 주의력 조절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흔들어 몰입을 방해한다.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경고했듯, 산만한 환경의 독서는 시냅스의 결속을 약화시킨다. 필요한 것은 디지털 세계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딥 리딩 존’이다.
플랫폼은 독서 시간을 추적하기보다, 시작 전 모든 알림을 차단하는 ‘디지털 디톡스 모드’를 제안하고 텍스트에 온전히 잠길 조건을 조성해야 한다. 기록은 독서가 끝난 뒤, 사유가 가라앉고 여운이 정제된 다음에야 허용되어야 한다. 텍스트와 충분히 대화할 시간을 보장하는 것, 거기서 모델은 출발한다.
두 번째 원칙은 수치화된 목표를 질적 경험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3일이나 30일 같은 인위적 기간과 페이지 집계는 독서를 ‘서둘러 끝내야 할 과업’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이런 압박은 편도체를 자극해 스트레스 반응을 높이고, 전전두엽의 고등 사고를 둔화시킨다. 대신 ‘슬로 리딩’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한 문장을 오래 붙들고 삶을 반추하며 질문을 낳는 과정 자체가 보상이 된다. 플랫폼은 ‘얼마나 오래 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문장이 당신의 세계를 흔들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이 말하듯,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기 목적적’ 경험에서 인간은 가장 깊은 만족과 인지 효율을 얻는다. 그러므로 ‘독서 챌린지’라는 적대적 개념은 ‘독서 리츄얼’이나 ‘사유의 여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보상 또한 디지털 배지가 아니라, 사유가 깊어졌음을 스스로 체감하는 ‘질적 피드백’이어야 한다.
마지막 원칙은 ‘전시적 기록’을 ‘공동체적 통찰’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현재의 방식은 독서 노트를 성취의 전시물로 만들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해 사회적 인지 자원을 소모시킨다. 평가는 도파민을 자극해 독서를 내실보다 ‘보여주기 좋은 문장’ 찾기로 기울게 한다. 진정한 뇌 친화적 공동체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질문을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매리언 울프가 말했듯,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생각이 만나 ‘제3의 생각’을 생성하는 사건이다.
플랫폼은 기록을 감시·비교하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를 두고 서로 다른 관점들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비평적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지역 서점과의 연계 또한 굿즈의 유통을 넘어, 이러한 대화가 실제로 일어나는 ‘사유의 거점’이 될 때 상생의 의미를 얻는다.
결론적으로, 플랫폼 주도의 독서 캠페인은 데이터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 ‘인간 중심의 인지 과학’을 수용해야 한다. 독자를 체류 시간을 늘리는 데이터 공급자가 아니라, 고유한 사유의 주체로 존중할 때 독서 문화는 다시 숨을 쉰다. ‘라이브독서’라는 이름의 감옥을 허물고, 독자가 자신의 뇌를 마음껏 유영하게 하라. 기록되지 않는 침묵의 순간—그 공백이야말로 독서가 건네는 가장 깊은 선물이자, 뇌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진화의 형식이다.
동행의 자리, 남겨진 질문
지역 서점과의 상생, 출판 생태계의 활성화라는 목표 역시 실효성 면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특정 작가의 리커버 에디션을 한정 판매하고 오프라인 팝업을 여는 방식은 순간적인 관심을 모을 수는 있으나, 소멸의 위기에 놓인 지역 서점의 구조적 문제를 건드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특정 지역의 한 서점을 ‘전시적 장소’로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다른 지역 서점들은 더 깊은 그늘로 밀려날 위험마저 생긴다.
지역 서점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독자가 서점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머물며 책을 발견하는 우연의 기쁨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플랫폼은 그 모든 과정을 ‘온라인 신청’과 ‘디지털 기록’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지역 서점은 책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 플랫폼의 브랜드 이미지를 장식하는 감성적 배경으로 소비된다.
이슬아 작가가 말한 ‘읽고 쓰는 힘’에 대한 믿음은 분명 고귀하다. 다만 그것이 구현되는 방식이 ‘챌린지’라는 이름의 데이터 경쟁이어서는 곤란하다. 앞서 살폈듯 챌린지는 본래 비방과 대결, 적대적 극복의 어원을 지닌 단어다. 독서를 챌린지라 부르는 순간, 책은 함께 호흡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해치워야 할 숙제가 된다.
독서의 괴로움은 사유가 깊어질 때 따르는 내적 긴장에서 비롯되어야지, 시스템이 부과한 미션을 달성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압박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 브런치가 진정으로 독서 문화를 지키려 했다면, 기록을 강요하기보다 ‘기록되지 않아도 좋은 자유’를 보장하고, 수치화된 성취가 아닌 사유의 깊이를 나눌 수 있는 느슨한 연대의 장을 먼저 열었어야 한다.
결국 이번 ‘브런치 독서챌린지’는 독서라는 행위의 고유한 가치를 디지털 플랫폼의 논리로 재단한 성급한 기획처럼 보인다. 의미의 혼란은 ‘라이브독서’라는 부자연스러운 기능에서 드러나고, 기대 효과의 빈약함은 일회성 경품 중심의 이벤트 구성에서 확인된다.
챌린지라는 이름 아래 이어지는 이러한 시도는 독서를 삶의 ‘리츄얼’로 뿌리내리게 하기보다는, 잠시 스쳐 지나갈 또 하나의 숏폼 유행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제는 독서를 향한 플랫폼의 ‘도전’을 멈추고, 책과 함께하는 고요한 ‘동행’을 시작해야 할 때다. 보여주기 위한 30일의 투쟁보다, 평생 이어질 내밀한 사유의 습관이 우리에게는 더 절실하다.
일개 사용자의 고민이 이 정도라면, 담당자들 또한 고민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독서와 뇌과학, 그리고 읽고 쓰는 행위의 숭고함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충분했는지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의 출판 시장이 겪는 어려움은 독자들의 변심 때문이 아니라, 공급자들이 현상을 읽어내는 기민함과 치밀함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되묻게 된다.
이 글의 발행이 각성보다 불편함을 낳고, 곱지 않은 시선이 나에게 머물 가능성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바라는 것은 크지 않다. 이 공간에서 성실히 글을 써 내려가는 이들의 진심이 제대로 꽃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어떤 일에 오래 몸담다 보면, 그 안에서 가장 쉬운 길만 찾게 된다.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밖으로부터 건네는 조언은 언제나 쓰고 아프다. 그것이 사용자로부터의 말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곳의 내일 또한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또 그렇게 겪었다.
※ 잠시 숨을 고르고, 쉼에 머뭅니다.
1월 마감의 기고 원고가 세 편이나 남아 있지만, 새해를 맞이하기 전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작은 쉼표 하나를 찍어 둡니다. 늘 그랬듯, 이 멈춤이 길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시 걸어가기 위해, 잠시 호흡을 되찾는 시간으로 남겨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