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지내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4월 1일은 우리가 다른 364일 동안 어떤 존재인지 기억나게 해주는 날이다.”
- 마크 트웨인, 『바보 윌슨의 비극(바보 푸딩헤드 윌슨)』-
이 문장은 『바보 윌슨의 비극』에 실린 ‘바보 윌슨의 달력(Pudd'nhead Wilson's Calendar)’ 가운데 한 구절이다. 장의 문턱마다 놓인 짧은 문장들은 이야기 밖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거울처럼 놓여 있다. 그 거울은 맑지 않다.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어, 우리가 미뤄 두었던 표정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만우절(April Fools' Day)은 흔히 장난과 웃음이 허락된 날로 여겨진다. 그러나 트웨인의 문장은 그 하루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어리석음은 정말 하루로 끝나는가. 우리가 웃어넘기는 그 장면이, 오히려 나머지 날들을 비추는 증거는 아닌가.
이 문장은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곧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에는 빠르게 반응하면서도, 자신의 오류에는 둔감하다. 시선은 바깥을 향하고, 성찰은 자주 뒤로 밀린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예외로 두는 법을 익혀 왔는지도 모른다. 트웨인은 이 결을 오래 바라본 작가다. “바보들에게 감사하자.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중 나머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도 같은 자리에 놓인다. 누군가를 바보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바깥에 서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경계는 쉽게 이동한다. 오늘의 관찰자가 내일의 대상이 되는 일은 낯설지 않다.
그래서 이 문장은 비판이라기보다 환기에 가깝다. 우리가 어떤 상태로 하루를 건너고 있는지 조용히 비춘다. 만우절은 그 빛이 가장 또렷해지는 순간이다. 웃음 사이에서 우리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묻게 된다. 지금의 나는 어떤 얼굴로 서 있는가.
어쩌면 필요한 일은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는 일인지 모른다.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타인을 향한 조롱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이해로 바뀐다. 트웨인의 문장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기 위해.
4월 1일은 지나간다. 그러나 그날이 남긴 물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은 364일을 건너는 동안, 우리는 그 물음을 얼마나 오래 붙들 수 있을까.
비둘기의 귀환, 고립의 끝에서
매년 4월 1일이면 짧은 소회를 적어 왔다. 만우절의 기원을 더듬을 때마다 “네 걱정에 기쁨을 섞어라(Interpone tuis interdum gaudia curis)”라는 문장이 곁에 남았다. 근심을 지우지 못한다 해도, 그 사이에 기쁨을 놓아 두라는 오래된 권유. 올해는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마음 한켠의 여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오래 붙들어 온 이야기를 불러낸다. 노아의 방주 비둘기 이야기다.
에덴에서 밀려난 뒤, 인간은 자주 길을 잃었다. 방황은 서서히 기울었고, 분노는 물로 번졌다. 세상을 씻어내겠다는 결심 아래 노아에게 방주가 맡겨졌다. 짐승과 식물의 씨앗이 함께 실렸다. 사십 일 동안 비가 이어졌다. 땅은 사라지고, 세계는 하나의 물결로 잠겼다.
물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보냈다. 돌아오지 않았다. 끝없이 떠돌았다. 이어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처음에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보냈을 때, 감람 나뭇잎을 물고 돌아왔다. 보이지 않던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명이 다시 시작된다는 조용한 징표였다. 그 약속은 인간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이 세계가 인간의 소유가 아님을 밝히는 선언이었다. 흙과 물, 짐승과 식물 위에 우리의 삶이 놓여 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바깥의 존재들이 허락해 준 시간인지 모른다.
나는 이 단순한 이야기에 오래 머물렀다. 노아가 비둘기를 처음 보낸 날이 4월 1일이라는 기원설 때문이다. 헛수고를 알면서도 심부름을 보내는 일,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의 모습. 그 어리석음이 만우절이 되었다는 이야기. 사실 여부보다, 그 안의 윤리가 오래 남는다. 더구나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는 사실이 이 이야기를 깊게 붙든다.
세상은 늘 불안의 징후로 가득하다. 전쟁의 그림자, 환경의 균열, 설명되지 않는 질병. 인간의 계산을 벗어난 자리에서 균열은 번진다. 그 틈을 채우는 것은 근거 없는 말들이다. 공갈은 공포로 번지고, 불확실성은 커진다.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 선택한 물러섬. 그러나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는 자리. 자발적 격리라는 말은 오래 마음에 걸렸다. 격리(隔離)는 본래 떨어짐을 뜻한다. 외부에 의해 나뉘는 상태를 품고 있다. 그러니 자발성과 격리가 만날 때 어딘가 어긋난다. 차라리 고립(孤立)에 가깝다. 스스로 물러났으되, 끝내 벗어나지 못한 상태.
방주 안도 그와 닮았을 것이다. 물로부터 보호되었으나,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에 머물렀다. 생존의 공간이 곧 고립의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 그 안을 채운 것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버티게 한 것은 약속에 대한 신뢰였다. 그리고 돌아온 비둘기. 작은 생명의 징표가 공포를 밀어냈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만우절 생일에 초대한 친구들이 오지 않던 날들. 몇 해를 그렇게 보냈다. 어느 해에는 칠판 가득 생일과 주소를 적었다. 그날은 많은 아이들이 집으로 왔다. 어머니의 놀란 얼굴과 따가운 손길. 그 소란 속에서도 남아 있던 기쁨. 가장 또렷하게 남은 생일이다. 이후의 생일은 대부분 사순절 안에 놓였다. 절제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지나갔다. 축하보다 성찰이 가까운 날들. 시간이 흐르며 나이도 변했다. 마흔을 넘고 쉰을 지나며, 불혹(不惑)과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말이 비로소 몸에 닿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르렀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비둘기를 다시 떠올린다. 확신 없는 비행을 거듭하면서도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 흔들림 속에서도 길을 따르는 모습. 그것이 불혹의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미 지천명에 가까운 자리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까마귀에 가까웠다. 끝을 모르는 곳을 떠돌며 돌아갈 자리를 잊은 채 머문 시간들. 선택이라 믿었으나, 밀려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 피로와 원망이 쌓였다. 믿음을 내려놓고 싶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마음이 먼저 신호를 보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조용한 경고. 그래서 다시 걷는다. 크지 않은 걸음이지만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몇몇 사람 때문에 세상을 저주하는 쪽으로 기울지 않기를. 그 바람 하나를 붙들고 살아가고 싶다.
나에게 솔직하고, 시간 앞에 공손하며, 오늘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귀가 순해져 들리는 대로 받아들이는 나이. 과도한 해석 없이도 견디는 자리. 지천명과 이순(耳順) 사이, 그 어딘가에 조용히 머문다.
건너가는 자의 심장, 질문이라는 용기
"대답은 멈추는 것이고
질문은 건너가는 것이다."
-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중에서 -
대답은 쉽게 굳는다. 틀에 박혀 버린 뻔한 것처럼, 이미 지나간 길 위에 놓인 표식처럼, 더 나아가지 않는다. 반면 질문은 살아 있다. 머물지 않고 움직이며, 익숙한 자리에서 우리를 밀어낸다. 이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개념과 이론, 철학과 미학은 모두 그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고정된 해답이 아니라, 불안정한 물음에서 태어났다.
건너간다는 일은 언제나 낯설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이름 붙이지 못한 영역을 향해 발을 내딛는 일. 그래서 우리는 자주 멈춘다. 위험을 먼저 상상하고, 익숙한 자리에 머무르려 한다. 그러나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한 걸음은 열 걸음의 깊이를 얻는다. 그 변화를 우리는 용기라 부른다.
돈키호테는 바로 그 건너감의 형상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속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운 노기사로 등장한다. 맨 오브 라만차의 무대 위에서도 그는 현실과 어긋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존재의 기록이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장면만으로 그를 기억하기 쉽다. 하지만 그 끝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야기는 슬픔으로 닫힌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더 이상 기사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그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광기를 잃은 자리에 남은 것은 무력이다.
“자네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 스스로 어떤 인간인지 알도록 노력하게. 이것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지식일세. 자네를 알게 되면 황소와 같아지고 싶었던 개구리처럼 몸을 부풀리려는 일은 없을 게야.”
-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 -
이 문장은 이야기를 넘어 삶으로 번진다. 자신을 아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그래서 나는 돈키호테를 ‘나를 섬기는 자’라고 부르고 싶다. 최진석 교수의 해석을 빌리자면, 이는 노자의 “승인자유력 자승자강(勝人者有力 自勝者强)”과 맞닿아 있다. 남을 이기는 힘보다, 자신을 이기는 힘이 더 깊다는 뜻이다.
돈키호테는 세상의 시선과 자신의 습속을 함께 넘어선다. 그것이 그를 강하게 만든다. 그의 말 역시 그 길을 가리킨다.
“산초야,
행운은 빼앗을 수 있을지 몰라도
노력과 용기는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결과보다 태도를 말한다. 원하는 것이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쥐고 있는 것, 노력과 용기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주저한다. 계산하고, 망설이며, 결국 시도하지 않는다. 닿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손을 거둔다. 그때마다 마음은 조금씩 오그라든다. 아마도 그 모든 망설임의 시작은 쭈그러진 심장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이 남는다.
“우선 쭈그러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이 단순한 요청은 하나의 방향이 된다. 다시 펴는 일, 다시 뛰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건너가기 위한 준비다.
돈키호테는 또 말한다. 겉모습으로 자신을 꾸미는 이들과, 오히려 자신을 낮추며 버티는 이들에 대해. 그리고 가난한 기사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덕뿐이라고 한다. 온화함, 교양, 신중함, 근면함. 그 모든 것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그래서 그는 타인을 향한 연민과 동정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가난한 기사는 바쁘다.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 바쁘다.
그 마음은 결국 한 방향으로 흐른다. 모든 연극이 끝난 뒤, 우리가 입고 있던 역할을 벗어 던지는 순간. 그때 남는 것은 같은 무게의 존재뿐이다. 풍차를 향한 돌진은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 굳어버린 마음을 펴는 행위다.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다시 살아 움직이기 위한 몸짓이다.
“Interpone tus interdum gaudia quris.
네 걱정에 기쁨을 섞어라.”
-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 -
이 경구를 돈키호테와 함께 다시 만났을 때, 처음에는 낯설었다. 걱정 속에 기쁨을 섞으라는 말이 가볍게 들렸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건너가려는 사람만이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질문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이 문장은 하나의 리듬이 된다.
내 수많은 걱정에 기쁨을 섞으라니, 언뜻 조롱이나 자기 비하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려는 자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건너려는 자신을 자각하고 깊게 경험할 때 신묘한 진동으로 품어 들게 된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위를 건너는 감각이 생길 뿐이다.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떨림이 몸을 채운다. 우리는 그것을 황홀경이라 부른다. 질문을 포기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짧은 빛.
결국 인간은 질문으로 길을 만든다. 그 길 위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일, 그것이 모든 시작이다. 존재론적 사유가 말하듯, 모험은 인간이 쌓아 올리는 탑의 첫 번째 돌이다. 그리고 그 돌을 놓는 순간, 우리는 이미 건너고 있다.
서 있을 자리, 한 장의 넓이로도 충분한
돈키호테를 떠올리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인물보다 끝내 물러서지 않으려 했던 한 인간의 자세가 먼저 떠오른다. 그 고집스러운 직립의 감각은 문득 기타노 다케시의 얼굴로 이어진다. 희극인으로 출발해 감독과 배우, 작가와 화가로 살아온 그의 궤적에는 웃음과 폭력, 침묵과 폭발이 겹쳐 있다.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그 중심을 비틀어 온 시간. 그 리듬은 일정하지 않다. 대신 낙차를 남긴다.
1980년대 이후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와 함께 ‘BIG 3’로 불리던 시절과 <소나티네>, <하나비>, <자토이치>가 쌓아 올린 성취는 서로 다른 층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결은 하나로 이어진다. 웃음의 끝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정적,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얼굴. 그의 문장은 그 간극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남자는 대단한 대접을 받거나 체면을 세워달라고 구걸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집 안에서든 사회에서든 단 0.01평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서 있어도 좋다’는 허락이 필요한 법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작은 발 디딜 곳 하나만 있다면 남자는 버틸 수 있다. 그것이 남자라는 생물의 가련하면서도 본질적인 모습이다.”
- 기타노 다케시, 『거들먹거리는 법』(원제: 『挨拶の作法』) -
이 문장은 표면적으로 ‘남자’를 말한다. 그러나 한 겹 벗기면, 결국 존재의 문제로 남는다. 누구든 서 있어도 괜찮다고 허락받는 최소한의 자리. 그 작고도 절실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0.01평. 약 330.6㎠. A5 한 장에 가까운 넓이다. 손으로 짚으면 금세 끝난다. 그러나 그 면적은 단순한 수치를 넘는다. 타인의 시선에서 밀려나지 않는 자리,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 그곳에서 비로소 사람은 서 있다.
우리는 더 넓은 공간을 원한다고 말한다. 더 많은 인정, 더 큰 자리. 그러나 버티게 하는 것은 그 이전의 감각이다. 여기에 있어도 괜찮다는 신호. 그 감각이 무너질 때 세계는 낯설어지고, 자신은 쉽게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이 문장은 체면이 아니라 존재의 최소 조건을 말한다. 서 있을 자리 하나. 그것으로 충분한 순간이 있다.
지금의 나에게도 필요한 것은 그 정도의 넓이다. 확장이 아니라 한 장의 면적. 그 위에 조용히 서 있을 수 있다면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삶은 그 작은 자리에서 다시 움직인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진 채로도 머물기 위해.
병은 시간을 바꾼다. 하루는 길어지고, 밤은 깊어진다. 통증은 단순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지금에 묶어 둔다. 미래를 계산하던 습관은 흐려지고, 현재를 견디는 일이 남는다. 그 안에서 좌절은 조용히 자란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다시 쓴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멈추지 않기 위해. 문장은 자주 끊기고 생각은 흐트러진다. 그래도 몇 개의 단어를 붙잡아 한 줄을 만든다. 그 한 줄이 오늘을 지탱한다. 돌아보면, 글쓰기는 언제나 어떤 허락 위에 있었다.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감각, 이 문장을 이어도 괜찮다는 미세한 승인. 병은 그 허락을 흔들지만 지워 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다시 작은 자리로 돌아온다. 종이 한 장의 넓이. 그 위에 문장을 올리고, 나를 올린다.
쉰넷. 숫자는 앞서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불혹(不惑)을 지나고,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시간도 쌓였다. 그러나 앎은 늦게 오고, 이해는 더 늦게 따라온다. 여전히 배우고, 자주 넘어지며, 다시 일어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래서 이번 생일에 큰 결심은 내려놓는다. 더 버티겠다는 말 대신, 더 머물겠다는 다짐. 허락된 이 작은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기보다, 그 안에서 나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때로는 까마귀처럼 방향을 잃고, 때로는 비둘기처럼 돌아온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중요한 것은 멀리 나는 일이 아니라 돌아올 자리를 잃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그 자리에 선다. 0.01평의 자리. 조용히 발을 디딘다. 그리고 적는다. 아직 여기 있다고.
0.01평의 자리, 분별력을 쓰는 곳
돈키호테는 미쳐 살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죽는다. 표면만 보면 슬픈 결말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을 섬긴 시간이었다. 외부의 거울이 아닌, 오롯한 각성의 자리. 그가 미쳤다는 말은 다르게 읽힌다. 자기 모습으로 살았다는 증거다. 결국 그는 평범한 존재로 돌아와 죽었다.
이 장면은 또 다른 유언처럼 남는다. 미쳐 있을 때는 풍차와 싸우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평온을 준비하는 작은 인간이 된다. 걱정이 기쁨을 삼켜 버린 순간. 그는 다른 선택을 권하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평가에 움츠러든 심장을 펴고 살라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서문에서 한 가지를 남긴다. 가난한 자도 명예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부도덕한 사람은 가질 수 없다. 궁핍은 고귀함을 흐리게 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덕은 언제나 틈 사이에서 빛난다. 그래서 존경은 물질이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가 말한 “글은 그저 백발로 쓰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으로 쓰는 것이며, 분별력이란 나이가 들면서 더 나아지고 한다”는 문장은 자연스럽게 마음에 남는다. 분별력이 깊어진다는 말. 그것이 지천명에 닿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영화만큼 뮤지컬을 좋아한다. 여러 작품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맨 오브 라만차>다.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옮긴 작품. 처음 마주했을 때, 책 속 인물이 현실로 걸어 나온 듯해 낯설었다.
볼품없는 노구와 집요한 모험은 그를 괴짜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는 무뎌진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 그 말은 무모함을 권하지 않는다. 틀을 깨고 본질에 다가가려는 질문을 요구한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중년이 세상과 겨루는 모습은 허튼짓으로 보일 수 있다. 나 역시 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과 꿈꾸는 세계가 불가능에 가깝다 해도,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가 걸어야 할 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
*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이룰 수 없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