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트 어웨이>와 조난의 미학
기다림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이면서 동시에 태도다. 희망과 불안이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며 교차하는 자리, 그 경계 위에 놓여 있다. 대개 기다림에는 기대가 배어 있다. 무언가가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조용히 손을 내미는 감각. 그러나 그 시간이 자발적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인내로 바뀌는 순간, 기다림은 곧장 무게를 얻는다. 무료함과 곤혹이 서서히 스며든다.
그 말을 붙잡고 있으니, 2023년 12월의 겨울이 떠오른다. 새벽이었다. 혈변과 토혈이 멈추지 않았고, 체중은 이미 20킬로그램 넘게 빠져 있었다. 응급실로 실려 갔고, 입원 직후 일반 병동으로 올라갔지만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다시 출혈이 시작되었다. 세상이 하얗게 번졌고, 식은땀이 온몸을 덮었다. 콧줄로 위세척을 하자 선혈이 따라 나왔다. CT를 찍고 내시경으로 확인한 위의 궤양, 그곳에 박혀 있던 클립이 떨어져 있었다. 그 작은 이탈이 모든 균형을 무너뜨렸다. 바이탈은 경계선 위를 흔들렸고, 곧바로 응급 시술이 이어졌다.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ICU. 중환자실이라는 이름은 너무 단순했다. 그곳은 이계와 저계의 경계처럼 느껴졌다. 의식은 또렷했기에, 통증을 참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연명을 내려놓은 사람, 고비를 넘기려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멈춰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자리.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고, 아내 또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혈이 멈추자, 또 다른 것이 찾아왔다. C.D라고 불리는 감염,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 (Clostridioides difficile infection)’. 항생제로 무너진 장내 균형 속에서 균이 번져 대장염을 일으키는 병. 설사와 복통, 발열이 이어졌고, 병원 안에서 쉽게 옮겨 다니는 성질을 가졌다. 포자 형태로 남아 일반 소독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도, 이 병을 더욱 집요하게 만들었다.
격리가 필요했지만, 병원에는 빈 병실이 없었다. 결국 6인실 한쪽 창가에 파티션을 세워 작은 구획이 만들어졌다. 몸에는 여러 장비와 약물들이 매달렸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빛 대신 선과 관이 얽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이쪽 세계로 돌아왔다. 완전한 복귀가 아니라, 경계 위의 복귀였다.
격리된 병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워 있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책을 펼칠 수 없었고, 오래된 노트북을 여는 일도 쉽지 않았다. 두 팔에는 여러 장치들이 매달려 있었고, 작은 움직임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러자 어린 시절의 밤이 떠올랐다. 잠들지 못해 어둠을 바라보던 시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방 안의 사물들이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외계인과 우주선, 도깨비와 요정이 그 틈에서 태어났다. 그때처럼, 나는 병상에 반쯤 몸을 세우고 좁은 공간을 바라보았다. 0.8평의 세계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상상력이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문득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떠올랐다. 고립과 단절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림뿐이었다. 다만 그 기다림을 어떻게 견디는가는 각자의 몫이었다. 그것을 능동으로 바꾸는 일,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톰 행크스의 연기는 인간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에게 ‘윌슨’이 있었다면, 내게도 몇몇 존재가 있었다. ‘필립스’와 ‘주렁이’들. 필립스는 24시간 나를 지켜보는 기계였다. 말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IBM 초기에 보았던 CRM 더미 스크린을 닮아 있었고, 그래서인지 묘한 친근함이 스며 있었다. 주렁이들은 그때그때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내 몸에 연결되어 약과 영양을 흘려보냈다. 최근에는 붉은 색의 것이 자주 왔다. 그것이 지나가면, 몸에 다시 온기가 돌았다.
기다림의 끝에서, 나는 그들과 헤어졌다. 필립스와 주렁이들, 그리고 그 시간과도 작별을 했다. 돌아보니, 그 모든 시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무엇인가를 내어주며 버텨낸 시간. 그리고 그만큼 다시 채워지는 시간.
살아간다는 것은, 늘 그런 방식으로 이어진다. 내어주고, 다시 받는 일. 그 단순한 순환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음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부유하는 고독, 섬과 바다 사이의 존재론
인간을 ‘세계-내-존재’로 규정하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따른다면, 조난(Cast away)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로부터 밀려나는 사건이며, 관계의 끈이 끊어지는 급작스러운 단절이다. 그러나 그 단절은 고요한 고립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떠다니는 상태, 곧 부유의 감각이 스며 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 (로버트 저메키스, 2000)는 이 상반된 두 상태를 한 화면 안에 묶어낸다. 고립의 정지와 부유의 움직임, 그 사이에서 현대적 실존이 감당해야 할 공포와 희미한 구원의 가능성을 함께 비춘다.
조난자는 섬에 도착하는 순간, 비로소 갇힌다. 발을 딛고 선 곳은 육지지만, 그 육지를 둘러싼 것은 끝없는 바다다. 이때 섬은 더 이상 자유로운 대지가 아니다. 사방이 물로 막힌,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이 된다. 척 놀랜드(톰 행크스)는 원래 페덱스(FedEx)라는 체계 속에서 살아가던 인물이다. 그에게 시간은 분 단위로 쪼개진 채 관리되는 효율의 질서였다. 그러나 표착 이후, 시간은 더 이상 측정되지 않는다. 흐름을 잃은 채 늘어나고, 끝을 알 수 없는 상태로 펼쳐진다. 그 안에서 그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새로 배운다.
이 고립은 단순한 고독과 다르다. 문학미학의 시선에서 보면, 그것은 ‘정지된 시간’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장면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공간처럼, 섬은 현실의 질서가 잠시 멈춰 선 자리다. 사회를 구성하던 규칙과 기호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직업도, 시계도, 약혼녀라는 관계도, 그를 규정하던 모든 표지가 사라진다.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아무것도 덧붙지 않은 생명.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으로 되돌아간 존재다.
이 장면을 가로지르는 가장 깊은 상징은 ‘방주’다. 성서 속 노아의 방주는 홍수로부터 생명을 건져 올린 유일한 구조물이었지만, 동시에 외부와 단절된 채 떠다니는 폐쇄된 공간이었다. 척 놀랜드에게 섬으로 밀려온 페덱스 소포들은 현대적 방주의 파편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문명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그를 붙잡아 두는 마지막 연결선이다.
그는 소포를 하나씩 열어 물건을 꺼내고, 그것들로 삶의 형태를 다시 만든다. 그 과정에서 배구공 ‘윌슨’이 등장한다. 윌슨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고립 속에서 말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대상, 타자의 흔적을 대신하는 존재다. 동시에 떠다니는 정신을 붙잡아 두는 정박지(Anchor) 역할을 한다. 부유는 방향을 잃은 움직임이지만, 그 안에도 붙잡아 둘 무엇이 필요하다. 윌슨은 그 기능을 수행한다.
시간이 흐르며, 척은 더 이상 섬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뗏목을 만든다. 그 선택은 정지된 고립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부유의 상태로 내던지는 결단이다. 바다는 더 넓고, 더 위험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다시 흐름이 있다. 뗏목은 노아의 방주처럼 완전한 보호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만을 붙들고 있는 위태로운 기반이다. 그 위에서 그는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을 다시 떠올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생존 서사를 넘어선다. 핵심은 살아남는 기술이 아니라, 의미를 붙드는 방식에 있다. 척이 끝내 열지 않은 ‘날개 문양’의 소포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도달하지 않은 가능성, 이름 붙일 수 없는 희망의 형상이다. 고립 속에서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의미의 공백이다.
척은 윌슨에게 말을 걸며 침묵을 대화로 바꾸고, 날개 소포를 간직하며 부유하는 삶에 방향을 부여한다. 그 움직임은 블랑쇼가 말한 ‘고독’의 형식과 닿아 있다. 고독은 혼자 남겨진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정지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흔들리고, 미끄러지고, 다시 붙잡힌다.
바다 위에서 윌슨을 잃는 순간, 그가 붙들고 있던 또 하나의 세계가 무너진다. 그것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다. 자신을 지탱하던 환상적 타자와의 작별이다. 그 장면은 하나의 의식처럼 보인다. 상징을 떠나보내고, 더 이상 대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기 위한 통과의례.
그렇게 그는 다시 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부유를 통과한 존재만이, 다시 땅을 밟을 수 있다.
사거리의 바다, 돌아온 자의 부유
영화의 마지막에서 척은 사거리에 선다. 섬에서의 고립은 끝났지만, 그 앞에 펼쳐진 것은 또 다른 바다다. 이번에는 물이 아닌 세계 전체가 흔들린다. 조난과 표류의 본질은 어딘가에 갇히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잃는 데 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세상은 이미 그를 지나쳐 있었다. 시간은 복원되지 않았고, 관계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연인은 떠났고,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있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조용히 전복된다. 섬에서의 시간은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오히려 또렷했다. 견뎌야 할 대상이 분명했고, 버텨야 할 이유가 손에 잡혔다. 그러나 문명으로 돌아온 그는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면서,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다. 방향을 잃은 채 떠다니는 정신의 상태, 그것이 새로운 표류다.
<캐스트 어웨이>는 조난을 단순한 재난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을 인간 존재의 원형적 풍경으로 펼쳐 보인다. 우리는 각자의 섬에 홀로 서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타인이라는 바다 위를 떠도는 방주들이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려 하지만, 끝내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거리 위에 놓여 있다.
이 작품이 남기는 통찰은 명료하다. 인간은 고립을 통과해야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부유하는 고통을 견딜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대지를 발견한다. 척 놀랜드가 마지막 갈림길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는 더 이상 고립을 밀어내려 하지 않았고, 흔들림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흐름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 조난은 상실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가장 혹독하고도 고요한 항해가 된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겹쳐진다. 십 년 전, 회사 프로그램으로 받은 집단 심리 상담에서 나는 ‘회복 능력’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상담사는 그것을 과장된 언어로 치켜세웠다.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 말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어쩌면 그 과장된 칭찬의 잔향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서는 데 작은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인간은 언제나 표류 중인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넓은 바다 위에서, 우리는 잠시 방향을 잡고 있을 뿐이다. 신념과 지식은 나침반이 되고, 믿음과 두려움은 별자리가 된다. 그것들을 이어 보며 키를 잡아보지만, 물결은 언제나 예측을 벗어난다. 이 떠돎은 아이러니하다. 동시에 조난이면서 고립이다. 그 모순된 상태가 인간의 기본 조건처럼 자리 잡는다.
그 부조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이다. 그의 직장인 ‘페덱스’가 상징하듯, 매일 어김없이 도착하는 우편물 같은 리듬. 그것이 삶을 지탱한다.
일상은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다. 반복되는 업무는 지루하고, 하루는 때로 모욕처럼 느껴진다. 욕망은 커지는데, 채워지는 것은 더디다. 결핍은 이어지고, 충족은 늘 미뤄진다. 그런 점에서 일상은 비참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다른 얼굴도 있다. 반복은 축적이 되고, 축적은 어느 순간 의미를 만든다. 사소한 행위들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 일상은 창조의 밑거름이며, 기쁨의 씨앗이기도 하다. 목표는 먼 곳에 있지만,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현재는 언제나 이 반복 속에 있다.
그럼에도 일상이 더 크게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지속성과 모호함에 있다. 끝이 보이지 않고, 방향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삶의 대부분은 이런 시간으로 채워진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몸을 씻는다. 좌절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어떤 날은 깊이 골몰하고, 어떤 순간은 이유 없이 멍해진다. 어제의 하루가 오늘을 닮고,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이 이미 반복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은 분명 흐르지만,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선으로 잇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루를 다시 바라본다. 눈에 띄지 않던 시간의 결을 더듬어 본다. 결국 이 모호한 반복이야말로, 인생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구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일상은 작지만, 그 작음으로 버틴다. 그리고 그 버팀 위에서, 우리는 다시 내일로 나아간다.
돌아온 시간의 결, 다시 시작되는 일상
유전자 수치가 마침내 안정적인 관찰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발병 이후 2년 6개월 만이다. 기준으로 삼았던 평균보다 250배나 벗어났던 수치가, 긴 시간을 돌아 제자리를 찾아왔다. 진료 주기도 달라졌다. 주 2~3회 병원을 오가던 시간이 이제는 두 달, 세 달로 늘어났다. 몸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혈소판은 절반에 머물러 있고, 자가면역질환과 약의 부작용이 겹치며 크고 작은 통증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 또한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표식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몸의 형태는 거의 회복되었다. 타고난 골격 위에 근육이 다시 얹히며, 체중도 85% 이상 돌아왔다. 가볍게 유지하는 쪽이 더 나을 듯하다. 다만 체력은 아직 멀다. 한두 시간만 외출해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돌아오면 앓아눕는 날이 잦다. 움직임이 적었던 시간의 흔적, 여전히 취약한 면역의 그림자가 겹쳐 있다. 감기는 쉽게 스며든다. 그럼에도 이번 부활절은 분명 하나의 시작으로 자리 잡는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전환의 지점이다.
그 사이 뜻밖의 소식도 찾아왔다. 외부 기고를 이어오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계약 칼럼니스트 제안을 받았다. 4대 보험이 보장되고, 온라인 무한 발행이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어 왔던 ‘기자’라는 이름이, 이제야 조심스럽게 손에 닿는다. 흔한 표현이지만, 만감이 스며든다. 대학 졸업반 시절,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스터디의 밤들이 떠오른다. 최종 면접까지 올랐으나 개인사로 입사가 번복되던 순간도 다시 겹쳐진다. 이후 여러 기고를 전전하며 <오마이 뉴스>, <민들레언론> 등에 이름을 올리던 시간들, 에디터의 기계적인 첨삭을 견디며 버텨내던 날들도 함께 떠오른다. 작지만 오래 품어 온 소망 하나가, 이제야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올해는 다시 일어서는 해로 남기를 바란다. 거창한 도약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일상의 회복이면 충분하다. 지난 시간들이 부유와 방랑의 연속이었다면, 이제는 뭍을 찾아 닻을 내리는 시간에 가깝다. 노아가 방주를 내려놓던 순간의 떨림처럼, 다시 돌아왔지만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르는 척의 망설임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게 일상을 향해 손을 뻗는다.
기다려 준 이들, 조용히 곁을 지켜 준 이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전한다. 멀리서 지켜보며 아무 말도 건네지 않던 이들에게도 고마움을 남긴다. 그 거리 또한 나를 버티게 한 힘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기다림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이미 어떤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였다.
어쩌면 그래서, 사순과 부활의 시기가 시작으로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도착을 알리는 시간이 아니라, 다가옴을 알아차리는 감각의 시간. 우리는 이미 가까이 와 있는 것을 자주 놓친다.
기다리던 것이 이미 곁에 와 있음에도, 끝내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