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끝나지 않는 전쟁에 관하여

영화 <지슬>

by 박 스테파노
※ 긴 원문은 아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사에 있습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01


1948년 11월, 제주에는 짧고 잔혹한 문장이 내려앉았다. “해안선 5km 밖은 폭도.” 그 말은 곧 삶의 자리에서 사람을 밀어내는 명령이었고, 섬의 주민들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산으로 향했다. 피난은 이동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공포를 견디는 방식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감자를 삶고 나누며 돌아갈 날을 상상했다. 사소한 말과 웃음이 이어졌지만, 그것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서 간신히 남아 있던 체온 같은 것이었다.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는 이 시간을 응시한다. ‘지슬’이라는 제목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어로, 겨울을 버티던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마지막 온기를 상징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토벌대는 시신을 방치했고, 굶주린 돼지들이 그것을 파먹는 참상이 벌어졌다. 영화는 이 장면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감자라는 상징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는 삶의 미약한 불씨를 남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큰넓궤’ 동굴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숨어들었고, 청년들은 바깥을 오가며 생존을 도왔다. 그러나 1949년 1월, 토벌대는 끝내 그들을 찾아냈다. 동굴 입구를 봉쇄하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붙잡힌 이들 일부는 학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약 120명이 살던 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았다. 영화는 이를 제사의 형식으로 풀어내며, 이야기를 넘어 애도의 의식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러나 영화 바깥의 현실 역시 평온하지 않았다. 사실과 무관한 비난과 왜곡, 이른바 ‘별점 테러’가 이어졌고, 역사적 진실은 다시 갈라졌다. 이미 법적으로는 진실 규명과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인식의 층위에서는 여전히 균열이 깊다. 기억은 복원되었으되, 이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다.


이 비극은 단지 지역의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냉전의 긴장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외부의 선택에 맡겨졌고, 그 균열은 제주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 타인의 결정에 의해 굴절된 시간 속에서 4·3은 이미 예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을 맞아 우리는 이 날을 ‘기억일’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항쟁이라는 이름으로는 담기지 않는 침묵과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는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의 섬이지만, 그 아래에는 지워지지 않는 이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러므로 이 섬을 찾는 일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과 조용히 마주 서는 일에 가깝다.


독립영화제 '들꽃영화상' 1회 대상 작 ,지슬, 스틸컷. Ⓒ 자파리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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