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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Jul 09. 2016

슈퍼히어로의 서바이벌

5년 전의 일기를 펼치며


0.

세상은 결국 '나'로 인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긴 지난 몇 년이 있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그저 나와 관련된 것들만 괜찮으면 되었다. 왜냐면 나는 이 세상을 구하거나 아니 조금의 방향에 영향이라도 끼칠 수 없는 그냥 자그마한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슈퍼히어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이라는 것이 지극히 소망이 되어 버린 세상의 루져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자신 내면의 감성에만 쫓아다니다 다시 철퍼덕 엎어지게 되었다. 삶이 라는 게 일어나 달리는 순간보다 넘어져 자빠져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5년 전의 글을 꺼내어 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아니 조금 뒤로 물러난 채로 그렇게 있었다. 세상이 제대로 가지 않는데 내 일상의 평범함이 어찌 담보되겠는가. 이렇듯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은 쏟아지는 슈퍼히어로들의 서바이벌만큼이나 가열 찰뿐이다. 일상은 소중하지만 버겁다. 최근 슈퍼히어로 물들을 보았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엑스맨: 아포칼립스> 그리고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5년 전의 글에 거의 살을 붙이지 않아도 지금의 세상에서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에서 슈퍼히어로들은 비범하다. 그러나 그 비범함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이제 생존경쟁에 이르렀다.


1.

미국 코믹스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추억의 한 켠에는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을 터이다. 쫄쫄이 바지에 원색적인 팬티를 덧입은 채 망토를 걸치고 포마드 기름 한 가득 쳐 바르신 영웅의 등장이나, 저걸 입고 뛰어다니기나 하겠나 싶은 시커멓고 육중한 가면에 방탄 슈트를 입은 갑부의 출동에 우리는 한때 열광하고 환호하고 했었다. 어찌 보면 유치 찬란한 공상에다가 마초적 욕구의 표상처럼 보인다. 그래도 ‘만 나이’와 ‘미국 나이’ 들먹이며 마흔넷과 마흔다섯을 넘나드는 내 나이에 가끔은, 아니 이따금, 어쩌면 빈번히 그들과의 조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때때로 마음 한 켠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 갑갑한 세상에서 나를 번쩍 들어 올려줄 초인적 영웅을 기대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꼭 신축성 만땅의 쫄쫄이와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거나, 도로교통법에서 허락하지 않을 엄청난 스펙의 비히클을 타고 질주해야만 영웅은 아닐 게다. 생각보다 쉽게 주변에서 우리는 수많은 슈퍼히어로를 만들어 내고 그들을 평가하고 때로는 그들의 신비스러운 망토를 벗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매스미디어라는 말의 직접 의미답게 이 시대에는 무수한 매체들이 대중의 문화라는 것을 양산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문화와 상호작용하는 대중은 스스로 팬덤을 만들어 트렌드를 조성하거나, 조금 더 깊은 각성으로 담론이라는 문화비평적 흐름을 생산해 내고 있다. 그중에 요즘 넘쳐 나는 것들이 이른바 공개경쟁 프로그램이라는 ‘서바이벌’ 형식의 버라어티쇼 프로그램에 대한 유행 현상이다.


‘슈퍼스타 K’, ‘위대한 탄생’, ‘기적의 오디션’, ‘코리아 갓 탤런트’, ‘TOP밴드’ 등 새 얼굴을 뽑아 대는 선발방식의 오디션 프로그램부터,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2’, ‘도전자’, ‘키스 앤 크라이’, ‘도전 슈퍼모델’, ‘다이어트 워’, ‘사소한 도전 60초’ 등 탈락자 선정을 하는 형식의 생존경쟁 프로그램까지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의 황금시간 내내 경쟁과 생존의 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소위 패밀리 타임이나 주부 타임이라고 일컫는 시간대에 내 보내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에도 PIP형식의 프로젝트성 생존 경쟁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또한 각종 포털사이트의 공모전이나, 신입사원의 선발, 그리고 결혼 상대를 찾는 일에도 비슷한 포맷의 이벤트들이 넘쳐난다.


각 매체들이 유행과 트렌드에 따라 좌턴 우턴하며 지르박 스텝을 밟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쏠림의 정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데에 있다.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최소한의 문화적 고찰이 상실되었으며, 콘텐츠 소비자들도 역시 무분별한 경쟁 프로그램에 노출되어 버린다. 그 결과 부지불식간에 경쟁이라는 문화 사회적인 양상의 일부분이 마치 가치관의 전체를 관장하는 황금률처럼 변질 오용되기 쉬워진다는 점에 있다.


3.

‘비범(非凡)함’에 대한 동경은 원초적인 것이다. 야생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성이 개입되기 이전의 본능적인 것이다. ‘비범’하다는 단어의 뜻은 사전적인 의미로 ‘보통 수준보다 훨씬 뛰어나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말로 ‘평범’이라는 말이 배치되기도 한다. ‘비범’함과 가까운 말은, 그 문장의 의미적 해석에 따라 달라 지겠지만, ‘비상’함, ‘특이’함, ‘불범’, ‘이륜’이라는 보다 좁은 의미의 단어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범’함이라는 것은 평균적인 기대 이상의 성과나 능력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범함의 기준이 될 평균적인 기대라는 것은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비범’이라는 단어에 대한 단편적 고찰은 자칫 이 사회와 인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 이 ‘비범’함을 ‘우수’, ‘양질’, ‘절대적 선’, ‘정답’, ‘이상’과 혼동되어 사용하는 해석의 오류는 사고와 행동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선택인 것이 된다.

요즘 쏟아지는 공개경쟁 형식의 문화 콘텐츠는 바로 ‘비범’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비범’한 일인자를 찾기 위한 프로그램은 ‘비범’함의 기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도전자 간의 물리적, 기능적, 심리적 목표 달성 경쟁을 통한 도태/ 생존 방식의 프로그램과 2) 심사자와 평가자를 선정하여 상대평가 계량하여 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두 가지 형식의 프로그램이 모두 저마다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후자의 순위 부여 방식의 프로그램 형식이 대중에게 보다 자극적이다. 소위 말하는 이슈를 생산하고 그 콘텐츠의 상업적 가치를 높여줄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제공되는 공개경쟁 프로그램의 형식은 대다수가 후자인 평가자에 의한 순위 부여 형식 2)를 취하고 있다.


앞서 말한 목표의 달성을 통한 경쟁방식 1)은 이전 세대에도 익숙한 프로그램의 형식이었다. ‘아빠의 도전’, ‘출발드림팀’, ‘열전 달리는 일요일’, ‘명랑운동회’ 등의 운동기능적 대결 프로그램과 ‘퀴즈아카데미’, ‘장학퀴즈’, ‘도전 골든벨’ 등의 퀴즈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그 예이다. 이들의 비범함의 기준은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지표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기록경기의 일반적인 형식처럼 보편타당한 절대기준을 마련하여 경쟁하게 된다. 그것이 시간의 장벽이든 중력의 극복이든 두뇌 용량의 한계이든지 그 기준에 대하여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누구보다 나은 비범함을 따지기 보다, 절대적 기준을 초월하는 초인의 탐색에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프로그램 형식의 콘텐츠는 반짝하기보다는 지속적이고 매니아적이다.


그러나 요즘 화두로 떠 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 2)는 그 평가 기준의 방식이 다르다. 평가하고 심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에 의해 ‘비범’함을 인정받아야 살아남는 형식의 콘텐츠인 것이다. 그들의 남달리 뛰어난 능력은 평가하고 심사하는 사람들에 따라 비범해질 수도 있고 평범해질 수도 있는 운명이다. 그 평가와 심사는 규정에 의해 선정된 자칭 타칭 분야별 전문가의 몫이기도 하고, 지켜보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이 콘텐츠는 다수의 대중에게 관심을 받고 이슈를 생산하곤 한다. 바로 ‘평범’한 대중들이 ‘비범’한 히어로를 선택하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범’함을 결정짓는 기준이라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인 것이다. 그들이 열광하는 히어로의 ‘비범’함은 절대적으로 우수하거나, 불변의 원칙이거나 반드시 옳은 선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비범’함은 매우 위험하다.



4.

얼마 전 영화 [엑스맨 : 아포칼립스]를 보았다. 나름 마블스의 코믹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에 무척 열광하는 마니아이기도 하고, 남몰래 사모한 슈퍼 히어로들의 처음이 담긴 프리퀄 형식이라 개봉을 손꼽아 기다려 보게 되었다. ‘엑스맨 시리즈’의 키워드는 “변종 (Mutant)”, “절대선(善)”, “비범”, “소수와 다양성”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 이야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엑스맨 : 더 퍼스트 클래스]는 이 ‘비범한 변종’들의 집단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 로 대표되는 돌연변이 초능력자들의 지향하는 세계관의 갈림이다. 영화는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대하여 전달하려 하고 있다. 선과 악의 분절을 말하고, 본질과 형상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시작과 지속의 분리를 보여 주려 한다. 그러한 주장의 예로 인류의 진화에 있어서도 호모 사피엔스라는 다수의 ‘범종’이 당시의 ‘변종’이었던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생존 경쟁의 우위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동등한 기회가 있었다면 진화라는 섭리의 세상에서, ‘평범’과 ‘비범’은 분리된 영역에 서 있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비범한 우월성으로 그간의 차별을 복수하려는 ‘매그니토’ 일당과 평범한 다수의 대중에게 인정받아 공생하는 돌연변이로 살려는 ‘프로페서 X’ 집단으로 갈라놓고 만다. 결국 비범함과 평범함이라는 것은 능력의 우수함에 대한 절대적 평가의 분류가 아닌, ‘내가 갖지 못한 부러운 무언가’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기준에 따라 입장을 바꾸기도 하고, 헤쳐 모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다양하다고 이야기한다. 둘 중 하나라는 이분법적, 양자택일적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큰 그림인 다양성이 보이기 어렵다. 다양성이 매몰된 대중에게 비범한 누군가의 등장은 이채롭고 신비로운 것이다. 그것도 그들이 ‘내 마음’ 대로 선택된 존재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5.

슈퍼 히어로는 분명 ‘비범’한 존재이다. 그들의 등장에 ‘평범’한 우리들은 환호하고 열광한다. 그들은 존경받고 사랑받으며 대우받는다. 그러나 그 존경과 사랑과 대우가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은 답답해진다. 세상은 오해가 생기고 분열한다. 그리고 비범한 그들은 우월한 능력이라는 것으로 권력을 잡고 지배하고 군림한다. 특히 그 ‘비범’함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대중의 평가에 의해서 결정된 히어로는 그렇게 될 위험성이 더 크다.


영화 속의 히어로 들도 번민하고 방황하고 일탈한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그들이지만 그들도 욕구에 쏠리는 인간적 본능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지구를 지키는 일에 지쳐 미모의 여기자와 가정을 이루려고 망토를 벗어던진 슈퍼맨도 그러했을 것이고,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오렌지 재벌로 살아가는 배트맨의 방황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본능에만 충실해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면 슈퍼 히어로는 존경과 사랑을 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영화 속의 슈퍼 히어로는 정신을 차리고 악을 물리치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함으로써 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보다 비범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헌신과 기여로 인해 발전한다. 그들의 비범함은 그들보다 우월하지 못한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범한 능력이 각각 개인의 본연적인 인성보다 우월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헌신적 우월함에 우리는 투표도 하고 지지도하고 인정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정치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검찰과 경찰의 모습으로, 때로는 재벌과 기업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한류(인정하기 싫지만)를 이끌어 가는 아이돌의 모습으로, 그리고 가끔은 내 스스로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의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이지 그들의 쫄쫄이 빤스와 망토가 아닌 것이다.


6.

최근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청춘 합창단’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참 건조한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니컬한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가렸다. 노구의 거친 쉰 목소리로 이어지는 노래에 평가와 심사는 없었다. 80 노파의 어이없는 장단 개념에 비범함이란 없었다. 평범한 그들 삶의 한 조각 한 조각들이 비범한 심사위원들을 울렸다. 한 때 그분들은 각자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히어로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진정한 슈퍼 히어로란 이런 것이다. 나보다 삶에 대한 비범한 통찰과 열정이 있는 분들의 진정성이 바로 ‘슈퍼’의 이유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영웅이 필요 없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내 귀에는 매일 영웅을 찾는 수많은 절규가 들려요.”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슈퍼맨은 그의 여자 로이스를 안고 비행을 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직도 세상에는 수많은 절규들이 떠 돌고 있다. 사상 최고의 현금 보유와 초과이익을 낸 대기업의 그늘에는 정권의 비호와 분식회계라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고, 그로 인해 눈물을 멈추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있다. 오륜기 앞장세워 태극기 거꾸로 들고 환호하는 동계 올림픽 개최지 강원도 두메산골 장맛비에 시름시름 않아 누운 배추밭의 할머니도 있다. 방학이라 어학연수에 해외로 바캉스 떠난 철없는 ‘요즘 세대’의 먼발치에는 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다가 달리는 지하철 선로에서 생을 달리 한 청년도 있다. 등록금 비싸다고 칭얼대며 술 퍼 마시는 학생들 똥 휴지 치우는 화장실에서 먹고 주무시는 어머니들도 있다. ‘저마다의~’라는 다양함이 인지되고 관심받을 때, 우리는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비범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도 진정한 슈퍼 히어로의 ‘서바이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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