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야 다시 세울 수 있는 이 상실의 시대
금융가에서 일하는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내를 막 잃었다. 평소와 같은 동행길에서 자신은 살아 남고 아내는 머리를 크게 다쳐 숨을 거두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충격적인 인생 사건을 앞에 두고도 이상하리 만큼 감정이 올라오지 않는다. 눈물이 나지도 않고 오히려 온갖 피로가 몰려들어 잠만 쏟아진다. 이대로 잠들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최소한의 상식으로 그는 병원 구석 자판기에서 M&M 초콜릿을 꺼내어 먹고자 한다. 이런, 자판기마저 고장으로 멈추어 버린다. 모두가 슬픔에 빠진 아내 줄리아(헤더 린드)의 장례식에서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의 수신자는 병원 자판기 관리회사이다. 아내의 죽음 뒤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이상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그가 집중하는 것은 항의 편지뿐이다. 그의 컴플레인 편지는 이내 서너 번 계속되고, 그 편지를 수신한 고객담당자 캐런(나오미 와츠)의 전화를 새벽녘에 받게 된다. 편지는 무슨 내용이고 그녀의 전화는 어떤 답신일까? 데이비스는 정말 아내 줄리아의 죽음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데이비스는 아내 줄리아와 첫눈에 반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장인이 설립한 회사에서 충실하게 길들여지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외에서 뉴욕으로 가는 통근 기차에서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직업을 ‘매트리스 판매원’이라 부러 속여 말하듯, 그의 일상은 남부러울 것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고이자 상실이라 할 수 있는 배우자의 죽음이다가 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속의 감정이 소용돌이치기는커녕 그냥 무덤덤해질뿐이다. 단지 그 황망한 순간에 마주한 초콜릿 자판기의 고장으로 인해 세상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 외에는 큰 무엇이 없다. 무슨 생각인지 자판기 관리회사에 항의 서한을 써 내려간다. 무덤덤히 아내의 죽음과 그 죽음의 현장인 병원에서 마주한 자판기의 고장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말로 뱉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히 편지로 적어 내려간다. 입으로 던지는 말은 상실하고 내면의 말인 글이 솟아났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끊임없이 적어 본다. 그리고 이내 그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차렸다 편지에 고백한다.
그것은 아마도 ‘본질’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데이비스는 사랑해서 줄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정작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녀와 살면서도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녀의 죽음으로 부재의 상실감을 느끼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아내 가죽기 직전에 말했던 냉장고의 누수를 보며, 그녀의 아버지인 장인(크리스 쿠퍼)이 한 말에 꽂히게 된다. 그녀가 살아서 입버릇 처럼하던 말이 이제야 기억이 나고 무슨 이유인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빠가 그러시더라고, 무언가 고치고 싶으면 분해해 보면 안다.’고 말이야”
누군가를 잃고 무언가를 놓치고 사는 우리는 늘 ‘상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데몰리션>에서 감독은 이 상실에 대한 개인의 대처와 자세를 지적한다. 감독 장 마크 발레의 지난 작품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과 <와일드>에서는 상실에 대한 대처를 직접 이야기하고 있진 않지만, 그보다 큰 틀에서의 세상을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나 이외의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사회, 가족, 회사, 국가, 체제 같은 것들의 가치관과 규범은 그저 그 시스템의 유지를 위한 프로토타입의 예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의 상실과 아픔에 대한 치유는 나 자신의 내면의 모든 것을 꺼내어 놓을 만큼의 해체이고 분해이고 파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허물지 않고서는 새롭게 어느 무엇도 다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줄리아의 장례 바로 직후에 출근한 데이비스는 어느 때보다 일에 열중하고자 한다. 미루었던 미팅들을 다시 조정하고, 진척 없는 직원들의 성과에 대해 힐난하고 다그친다. 그런 데이비스를 보던 장인 필은 그에게 술이나 한잔하자 권한다. 그를 억지로 데리고 들어간 한적한 바에서 데이비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자동차를 수리하는 것과 같아. 모든 검사를 해 보아야 하는 것이지. 그러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네. 잠시 시간을 가지고 마음을 살피게.”
장인의 말이 촉매라도 작용한 듯, 이후에 데이비스는 모든 ‘해체’와 ‘분해’에 열중한다. 줄리아가 평소에 고쳐 달라던 냉장고를 모두 뜯어 버리고, 회사의 랩탑 컴퓨터를 분해한다. 하다 못해 지나가던 공사장에서 해체작업에 참여하게 해 달라며 오히려 웃돈을 주고 노동을 하기도 한다. 아내 줄리아와의 기억이 담긴 집을 부수는 것으로 그의 ‘해체’에 대한 집착과 의식은 최고조에 달 한다. 이렇듯 데이비스는 자신의 상실감의 근본 원인을 보고자 고통스럽고 힘든 ‘해체’를 선택한 것이다.
“If it’s raining, you cannot see me. Ifit’s sunny, you’ll think of me.”
아내 줄리아가 자신의 자동차 앞 햇빛 가리개 안쪽에 써 놓은 포스트잇을 나중에야 발견한다. 아니 발견한 처음에는 그녀의 흔적들이 짜증스럽기라도 한 듯 자동차 바닥에 구겨 던졌던 그 쪽지이다. 햇빛이 강하게 내려 나의 눈을 가릴 필요가 없다면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쪽지였다. 이렇듯 속속들이 꺼내어 놓는 해체와 분해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지만, 그 후 모두 펼쳐 놓은 구성물, 부속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노라면 무엇이 손상되었고 무엇이 부재하는지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데이비스가 항의 편지를 보내고 그 답을 해준 카렌과 빠르게 가까워지고, 그녀의 정체 특이한 십 대 아들 크리스(쥬다 루이스)와도 유대감을 만들어 간다. 카렌은 이혼한 채 힘겹게 생활하는 약물중독자이고, 크리스는 반항기 넘치는 사춘기에 성 정체성까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모두 상실의 삶 속에서 힘들 게살 아가고 있기에 동질감으로 가까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의 만남이 데이비스에게 직접적인 ‘치유제’로 ‘방법’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나의 상실에 대한 이유를 분해하며 찾아가고, 나와 같이 상실된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상실에 대한 현실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에서는 아내 줄리아의 환영을 슬쩍슬쩍 들이밀어 놓는다. 나중에 알게 된 그녀의 외도와 그 외도로 인한 원하지 않은 임신에 중절이든, 줄리아의 보험금으로 장학재단을 만들어 허울만 좋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장인의 고집이든 이제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상실로 인한 해체와 분해 이후에 얻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본질’에 대한 문제이다.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데이비스는 자신이 줄리아를 사랑했었다는 그 본질을 알게 된 것이다.
모두가 가는 휴가철에 휴가지로 떠나는 출장행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비행기에 올라 5시간의 좁은 이코노미석을 지탱해 줄 것은 항공사가 제공하는 식음료와 VoD뿐이다. 다행히 목록에 <데몰리션>이 있어 쉽게 선택하고 영화를 보았다. 생각만큼 명료한 영화는 아니었다. 생각의 잔상이 꽤 남게 되었다. 그러지 않기로 했지만, 최근의 경험들이 투영이 된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어찌 보면 흔하고 흔한 일일 것이다. 그런 경험 중에 이별 후에 대한 남녀의 차이에 대한 작은 글을 접하게 되었다. 남녀가 이별 후의 기간에 따라 그 반응이 정반대라는 이야기였다. 남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이별 직후 남자는 해방감을 느끼고 홀가분하게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랑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병이 든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많은 부분 동의하면서 이견도 가질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람이 살면서 상실의 순간은 늘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장 상실의 순간이 오면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데몰리션>은 그 상실에 대한 멋진 해결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상실과 부재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모든 기억들을 호출하여 하나하나 되새겨 보아야 한다.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참기 힘든 순간도 있을 것이지만, 그 어려운 해체와 분해의 작업이 ‘다시’를 담보해 준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다시’라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이고, 반대로 ‘다시’가 주는 마약 같은 희망고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도 아파도 살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 잘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만이 개인에게 허락된 고민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PS: 영화의 의미가 주듯 이 안의 음악들도 이야기를 풀어 내자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그래도 Heart의 <Crazy on you>와 데이비드를 춤추게 한 Mr.Big의 <Free>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 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