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가 아닌 '나는'; not "Me Too", but "I am"
잡지사 칼럼니스트 아니(밀라 쿠니스)는 남들이 보기에 완벽한 조건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될지도 모르는 지금을 좀처럼 맘껏 누리기 힘들어 보인다. 고교시절 경험했던 끔찍한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있고, 출연을 요청이 끊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건에 대한 오해와 세상의 마녀 사냥으로 이름마저 바꾸고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만들기로 한 공들인 결심들이 과거로부터의 사실과 진실, 기록과 기억 사이의 모순들로 무너질까 두렵기만 하다. 아니는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시절의 '티파니'와 마주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넷플릭스가 주는 덤이 있다면, 기대치 않아도 꽤나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을 선물같이 만날 수 있는 점이 아닐까 한다. 하루살이가 버거운 사람에게 거듭되는 연휴란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 넷플릭스 홈 화면을 스크롤하며 의도하지 않았던 만남을 기대하는 잉여의 시간은 그런대로 괜찮다. 그렇게 만난 영화는 밀라 쿠니스 주연의 <럭키스트 걸 얼라이브(Luckeist Girl Alive)>이다. 제목이 직관적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반어법과 아이러니의 씁쓸함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이 들 것 같다.
실제 경험 바탕의 동명 에세이 노블 (저자: 제시카 놀)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의 주제는 예상보다 거대하고 무거운 사회적 이슈였다. 흔한 말이 된 "미투"에 대한 이야기이고, "총기규제 이슈"에 대한 질문이며, 낡은 "페미니즘"에 대한 재정립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철저하게 개인의 시선으로 당사자의 마음으로 담아내고 그려 내고 있다. 미디어와 여론, 그리고 세평들이 만들어 낸 '그럴듯한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처하고 경험한 '실제로 일어난' 일들과 상황을 주관적이지만 진실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근간이 된다.
"진실 언저리의 이야기로는 충분치 않아."
아니(밀라 쿠니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내놓기로 결심한다. 초고를 단숨에 읽어 본 펀집장은 다시 써 보라며 이야기한다. '사실'이라는 것, 그것도 보도나 미디어로 그려진 '진실 언저리'의 이야기는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 이미 세상이 틀을 만들어 남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라는 충고였다. 기록은 기억보다 위대하지만, 기록된 사실이 기억하는 진실을 다 대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영화의 장르가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이따금 모호할 뿐이고, 아주 조금 긴장이 있을 뿐이다. 차라리 아이러니 리얼리티라고 고쳐 써도 무방하게 현재와 과거의 회상이 무덤덤 흘러간다. 하지만, 그 안의 사건들은 따지고 보면 무겁고 충격적이며 날카롭고 여진이 큰 것들이다. 따돌림 피해자들이라 추정되는 학생들이 자신이 다니는 유명 사립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만다. 주범 두 명 중 한 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또 한 친구는 아니, 고교시절 티파니에게 정당방어로 제압당해 죽고 말았던 것이다. 어마 어마한 사건이고, 이 사건은 꽤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었다.
총격에 의해 하반신이 마비된 딘은 자신의 스토리를 셀링 하여 유명 작가가 되고, '총기 규제 운동'의 상징이 된다. 딘의 피해담이 회자되면서 반대급부로 아니의 종범 의혹, 총기 난사범들과 최소한 교감했다는 의혹은 다시 재조명된다. 명문가 자제들만의 전유물인 보딩스쿨에 작문 장학생으로 입학한 아니는 '색 다른' 아이였고, 그 자체로 따돌림과 괴롭힘의 표적이 되었으니까. 같은 처지인 총격 가해자들과 한 편이라는 합리적 의심으로 괴로운 날들을 제법 보내고 이제 '정상 궤도'에 진입하려는 참인데 말이다. 그저 비루한 생존자(alive)로 이 모든 진실을 덮어 버리기엔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무의미해 지기에, 아니는 생존자가 아닌 피해자(victim) 임을 소명하기로 한다. 진실의 언저리에 있는 기록된 사실이 아닌 진실 가운데 살아남은 당사자의 기록으로.
딘과 다른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진실은 총격 사건이라는 커다란 사실로 덮여 버리고 말았다. 생존자 딘은 자신의 또 다른 과거의 범죄를 은닉하고 덮기 위해 총격으로 인한 자신의 처지를 부각하고, 아니를 종범으로 몰아 메신저의 신용을 훼손하려 했던 것이다. 한동안 먹혔던 방법이고, 아니도 티파니 시절의 악몽을 다 잊고만 싶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자극적인 섹스 칼럼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틀에 박힌 '미투'나, '총기 규제'같은 이슈들은 그저 식상한 프레임이라 자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가 아닌 '나는'으로 이야기가 다시 써지기 시작하면서, 사실이라 포장된 편견과 인식에 갇혀 있던 진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서로 믿고 싶었던 사실 속에 감추어진 진실은 후련하지만은 않다. 꽤나 불편한 모습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통증 관련 지병으로 병원에서 주기적인 진료를 받을 때, 가장 곤혹스러운 문진이 있다. 바로 통증의 정도를 0에서 10의 숫자로 표현해 달라는 것. 어느 정도 아파야 7이 되고 8이 되는 것인지, 나의 8이라는 통증은 또 다른 동일 질환자도 8이라고 느끼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이 힘들다. 마케터의 예수님 정도 되는 피터 드러커의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라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달고 있지만, 이 통증의 주관적 측정이란 늘 곤혹스럽기만 하다. 흔히 '정성적'이라고 하는 주관과 감정이 개입되는 평가와 측정에 대하여 드는 반감이자 질문이 아닐까 한다.
개인의 불행한 고통을 정량적인 지표로 나타내기란 이렇게 힘든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얼마만큼 가난한지, 얼마만큼 불행한지, 얼마만큼 아픈지를 규정하고 틀을 만들어 '불행의 척도'를 캐치 프레이징 하려 든다. 특히 미디어는 이런 불행한 개인의 고통 총합이 사회의 병폐라며 이슈를 포장하고 개념을 이념화하기 바쁘다. 돈이 되고 이득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 하기 마련이니까. 매우 불편한 견해일 수 있으나 그중 대표적인 것이 '미투'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미투라는 성적 학대와 폭력에 대한 피해자들의 나름 나름의 아픈 이야기들은 숨어 버리고, 모든 포커스는 위력이니, 위계이니, 반복이니, 상습이니 하는 사회적 해석과 계량으로 '가해의 행태'만 집중 조명하고 마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는 선언은 분명 용기 있는 고백임에 틀림없지만, 각자의 아픔과 각기의 진실이 전체의 동조로 뭉퉁그려 지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고통받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각자의 이야기와 아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미투'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모습이다. 말미에 아니의 진솔한 고백에 동조하며 여성들이 내뱉는 마음의 이야기는 (작위적이긴 하지만), 미투에 대한 낡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받아들여진다. 대단하고 엄청난 사회의 슬로건에 내 이야기는 작게만 느껴져서 오히려 쉽게 이야기 꺼내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이 정도는 아파야 해당이 된다'는 오해와 선입견이라는 진실의 언저리 이야기가 '나는 어떻게 아프다'라는 각자의 진실 가운데의 고백을 주저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총기 규제나 성공과 결혼에 대한 관점도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로 이야기하려 한다.)
진실은 바라보는 입장과 위치에 따라 아주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이렇듯 언뜻 보아서는 여러 면을 지닌 다면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절대 조각내어 지거나 분리되거나 파편화될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한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고로, 또한 타인의 위해로 고통받아 아픈 사람들의 진실의 덩어리는 '아프다'는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어느 영역이 되고, 진보와 보수의 판가름이 되고, 사회에 대한 지표가 되어 구호로 남는 일이 아닐까.
주위의 누군가 힘들어하고 아파한다면, '얼마나' 아픈지 가늠하여 그 고통을 규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1만큼의 통증은 타인의 10만큼의 아픔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선 '아프다'는 진실의 한가운데에서 부터 공감하고 동조하는 서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