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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16. 2016

시험

아재의 일상 #12

저는 '시험'을 잘 치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타고난 '시험 머리'와 수많은 '시험 경험', 그리고 나이 마흔이 넘어 겪은 '인생 시험'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 세대의 대학입시 시험인 '학력고사'를 네 번이나 치렀습니다. 그 시절 입시 전형은 선지원 후시험이었고,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두 번의 기회를 주게 되는데, 전기 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은 후기 시험에 지원할 수 있게 하는 제도였지요. 학교도 전기대학, 후기대학, 전후기 대학으로 나누어 있었습니다.


 전기와 후기 사이의 시간이야 말로 지옥과 같은 수험생활의 극한을 경험하게   기억이 있었습니다. 모든 리듬을 전기 시험에 맞추어 일과를 구성하고 체력을 비축해 놓았기에, 책을 들어도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고 그렇다고 죄인의 심정으로 밖으로 나돌 수도 없는 지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번의 학력고사와 세 개의 학번 그리고 번의 입학과 번의 자퇴를 거친  저의 길고  수험생활은 마감되었습니다.


제법 긴 시간을 시험 준비로 보낸 시기였지만 그리 억울함은 없었습니다. 사실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해 본 것이 고2말 무렵이었으니, 열심히 준비한 친구들에 비하면 절대적인 시간은 비슷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비상한 '시험 머리'를 믿고 학창 시절 '시험'을 잘 치러 내었습니다. 70명 중 1, 2등은 못해도 소위 8 학군 학교에서 5등 언저리를 하면서 이런저런 관심과 통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사달은 두 살 터울 친형이 가톨릭 수사신부가 되겠다며 신학교 입학과 동시에 수도원에 입회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남들이 보는 눈에 민감하였던 모친은 제게 '명문대 명문과' 입학에 대한 압박과 구속을 시작하였던 것이지요. 당시 자연계 즉 이과였던 자신 스스로도나 모르게 의대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되어 있었고, 자유로운 영혼이 새장에 갇혀 있다 보니 몸은 코끼리화 되고 팽팽 돌던 '시험 머리'도 자주 오작동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리하게 쓴 신촌의 의대에서 미끄러지고, 2 지망에 공대에 덜컥 붙었습니다. 고민하다가 한 학기를 그냥 날리듯 다니다가 재수를 결심했지요.


다음 해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서 문과로 전과하여 응시한 경제학과에서 또 미끄러지고, 후기에 응시한 법대에 붙게 되었습니다. 사실 법조인으로서의 인생은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학교를 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두어 달 고민하다 '삼수생'이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번의 도전만에 수험생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다섯 번의 대학 입시 과정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과도 마주쳤었습니다. 사상 최 고난도의 수학시험을 치르다 코피를 흘리고, 시험지 도난으로 시험일정이 연기되고, 교과서가 개정되어 새 교과서로 다시 공부해야 했으며, 마지막 해를 지나면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새로운 시험제도에 놓이게 되는 위험도 안아야만 했으니까요.



프랑스 수능 '바까로레아', 사진=인사이트


대학 졸업 후에도 수많은 시험을 치렀습니다. 영어 능력을 위한 공인 점수 취득을 해야 했고, 지금의 청춘들만큼은 아니지만 스펙을 위한 자격증 등도 기웃거렸습니다. 사회에 나오는 시점에 IMF가 닥쳐왔고, 공채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회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면접만 28번 정도를 보고 최종 면접은 16번을 본 기억을 숫자로 기억하게 되었니까요.


시험에 익숙하다 보니, 이제 무언가 자격을 취득하거나 경쟁 우위를 증명하는 '시험'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는 일도 고객을 설득하고 때론 도발하며, 주어진 정보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제안을 하고 평가를 받는 일로 20 년 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험은 일상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제가 사는 삶이 매일매일 시험일 지도 모릅니다. 선택의 딜레마에서의 시험일 수도 있고, 버거운 역경과 사건 사고 앞에서의 시험이기도 할 것이니까요. 아직도 그 '시험의 길' 위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줄타기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험'이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군대를 다녀와 복학 준비를 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고시'준비를 하려고 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시험 통과'면 인생의 궤적이 바뀔 것이라는 통념의 계산으로 악착 같이 과외며 노가다며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습니다. 얼마가 걸릴지 모를 고시 준비 기간을 위한 종잣돈의 마련이었습니다. 그렇게 석 달만에 마련한 일 천이백만 원은 부친의 부도로 인한 경제사범 구속 후 집으로 찾아온 카드사 추심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털어 넣고 고시의 뜻을 접었습니다.


요즘 이따금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때 고시를 준비하고 시험으로 취득한 새로운 사회의 계급장을 달았더라면 지금 어떠할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때 같으면 아쉬움 가득했을 '만약 ~했더라면'이라는 상상이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다행이다'라는 맘으로 다시 들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는 대부분의 주, 종범들은 그 '인생역전 시험'을 통해 새로운 사회 계급장을 단 사람들이었고, 그 계급장을 지키기 위해 '정의'와 '상식'을 내 버린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뿐만 아니라 평소에 그런 사람들과 같은 부류라 스스로 생각하며 남들과 다른 삶이라 착각하는 부류들도 그 '시험' 하나를 종착지로 생각하고 달리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회적인 비용으로 전문가가 된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그 비용의 환수는 생각지도 않고, 지금의 이 불의에도 '중립'이라는 모호한 스탠스로 눈 가리기만 할 뿐입니다.


내일은 '수능일'입니다.

이 엄중하고 무거운 시기에도 내일의 주인들은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꿈을 펼치기 위한 공식적인 '첫걸음'이 내일의 시험으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험'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의 중의적 의미를 생각해 보아도 시험은 늘 진행형이고 완료형이 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해 '시험'은 한 걸음 한 걸음 딛고 갈 과정의 표지석일 뿐 절대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 수없는 '시험'을 맞닥뜨릴 내일의 주인에게 하고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 잘 보기를 기도합니다.

징검다리 수험생 부모의 입장에서 올해는 맘을 잠시 쉬어 가기에 모두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내일을 위한 소망이, 꿈이, 희망이 될 수 있게끔 어른으로서 또 다른 시험을 치러 내야 할 것이라 다짐해 봅니다.


저 또한 세상을 바꾸는 일, 의지, 노력으로 인생의 가장 큰 시험을 잘 치러 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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