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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골든 글로브] 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

고발이나 고백이 아닌, 더더욱 모험도 아닌

by 박 스테파노
넷플릭스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오래 간만의 "반전 메시지", 그러나 색다른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이나 영화는 대체로 "반전"의 의미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20세기 초반의 1차 세계 전쟁, 크림전쟁, 스페인 내전, 2차 세계 전쟁에 대한 작품들은 직접 참전한 경험자이거나, 전장의 한가운데서 목도한 목격자로서의 이야기가 대세였으니 "반전"의 이유는 납득하고도 남는다. 한 때 우후죽순 격으로 "반전"의 깃발을 단 전쟁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영화도 편승하였다.


그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가 나온 뒤, 모든 주변 작품들이 시시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이유로 보자면, 현대 영화도 <플래툰>의 강렬한 반전 주제의식의 표출로 인해 다른 전쟁물들은 그 나물의 그 밥 같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오락거리를 중시한 상업 영화가 파편화되기는 하였지만, 그 작품에서 전쟁은 그저 배경으로 그치는 경우가 다수였다. 이렇듯 최근 "반전 주제의 전쟁 영화"는 시들한 소재가 된 것은 틀림없다.


지난 10일 진행된, 제80회 골든글로브 비영어영화상 후보작 중 전쟁영화 한 편이 눈에 띄었다. 독일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과 인도 발리우드 대작 <RRR>의 틈에서 유력 작품상 후보로 거명되고 있었다(수상은 뜻 밖으로 <Argentina 1985>가 받았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1929년에 출간된 원작은 물론 영화도 주목할 작품들이 있었다. 특히 히틀러가 '약해 빠진 정신'이라고 혹평하며 상영금지 시킨 1930년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그 완성도와 고증에서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1979년에 만든 작품도 촘촘한 원작 재현 구성, 연기가 뒷받침되어 TV영화임에도 제법 유명세를 얻었다. 우리나라에서도 KBS 등을 통해 주말의 안방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30년 작, 1979년 작, 원적 소설 (사진=루리웝, 씨네21, 이키백과)

사실 "세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꾸준히 선을 보이긴 했다. 팬데믹 이전에는 <덩케르크>와 <핵소고지> 같은 2차 세계 전쟁 배경의 영화가 주목을 받았다. 특히 팬데믹 한가운데 개봉한 <1917>의 경우 1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전쟁의 허무주의에 대한 영상을 "원테이크" 기법으로 평단과 관객들의 찬사를 받은 바가 있다. 그 뒤에 나온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여러 의미에서 앞선 작품들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두 번 의 세계 전쟁 패전국인 독일의 시각에서 다룬 사실주의적 전쟁 묘사와 다시 뚜렷해진 "반전 메시지"가 그 이유로 서 있다.



전쟁의 마지막은 죽은 자의 눈동자에 남는다


"이 영화는 고발이나 고백이 아니며, 모험은 더더욱 아니다. 죽음에 직면한 이들에게 죽음은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 다음 영화 소개 중 -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일종의 레퀴엠이다. 아무리 달아나려 해도 도망치지 못해 죽음을 맞은 모든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전쟁은 늘 상상 이상이다 (사진=다음영화)


1917년 독일의 상급학교(고등학교) 한 학급의 20명이 담임교사의 선동에 넘어가 자진 입대에 지원한다. 파울과 알베르트, 프란츠, 뮐러, 벰은 혹독한 신병 훈련을 마친 후 전선으로 향한다. 머릿속으로 그리는 전쟁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리만 내밀면 적탄에 두개골에 구멍이 나기 일쑤이고, 기민하게 방독면을 쓰지 않으면 독가스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포탄의 강철비는 그저 요행과 운빨에 기대야 하는 곳이 실제 전장이다.


전선에 배치되자마자 주위에 떠밀려 입대한 벰은 전사하여 관찰자의 기록으로 최초의 사상자가 된다. 다리를 결국 절단하게 되는 프란츠는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난동을 부리다가 병원에서 사망하고 만다. 한편, 장난기 많던 뮐러는 대전 말기에 조명탄에 맞아 전사하고, 물려받아 좋아했던 죽은 프란츠가 아끼던 군화는 결국 파울의 몫이 된다.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은 예비역 상등병 카친스키는 농가에서 거위를 훔치다가 어린 소년의 총에 맞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파울과 카친스키 (사진=다음영화)


형처럼 의지하던 카친스키의 죽음으로 파울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부상 때문에 잠시 돌아온 고향은 여전히 "전쟁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낭만적인 상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신물을 느낀다. 입대를 종용하던 담임교사가 후배들에게 독려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파울은 "전쟁에서의 죽음은 그저 총알받이의 개죽음"이라고 말하며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다.


파울은 모든 고민과 갈등은 목적을 잃어버린 듯하다. 아무런 드라마도 없이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평온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세상을 떠난다. 이 시기는 독일이 항복을 결심하고 이미 전쟁을 종료하기로 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파울의 죽음은 아쉬움을 주지 않는다. 그의 짧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꽃이 피어날 시기에 만난 친구와 전우들을 거의 다 잃었고, 자신의 삶의 목적마저 잃었기 때문이다. 맑은 10월 가을 하늘에 빠져 파울이 적탄에 숨을 거두던 날, 최고 사령부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고 공표하며 교착된 전선을 최종 경계로 확정한다.


대규모 장기 전쟁의 마지막은 교착상태를 유지한 국지적 소모전의 연속이 된다. 한 뼘 전진하면 한 뼘 물러서는 전선은 총량적으로 변동이 없는 것이다. 땅따먹기에서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상태가 "이상 없음"이 된다. 얼마나 죽어 나가고 얼마큼 다쳤는지가 아닌 전선의 상태가 전쟁 말기에는 더 중요한 사안이다. 미시적 전투와 전장이 거시적인 전쟁과 전선을 대변할 수 없는 것. 결국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비극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처연한 현실을 소설과 영화는 이야기 전한다.


전쟁은 로망스가 될 수 없다 (사진=다음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는 의미


원작의 독일어 제목은 <Im Westen nichts Neues>으로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서부(전선) 새 소식 없음"이 된다. 영어 제목도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로 "서부전선은 전부 고요하다" 쯤으로 번역된다. 이것이 한국에 와서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번역된 것은 일본어판의 중역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외국어 도서의 번역은 해당 언어의 전문 번역인이 희귀하여 일본어, 영어판의 중역이 대세였다. 일본어판의 제목이 <西部戦線異状なし>인 것으로 보아, 이 판본을 그대로 가져왔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목에 대한 해석이 혼란의 여지가 되었다.


이상 없는 생태란 이런 것 (사진=iMdb)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는 말은 전황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에 여러 유추의 해석이 가능하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큰 특이점"없이 평온하다는 뜻이 먼저 다가선다. 그러나 작품을 접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내 그 실질적인 뜻에 다가서게 된다. 전쟁의 참혹함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인간적인 행태가 반복되는 그런 일상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 지옥에서의 일상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버팀의 행군일 테니까. 그런 전쟁의 나날은 묵시록처럼 숨 쉴 틈 없이 오늘도 똑 같이 지옥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전선"은 적군과 아군이 대치하여 만들어 낸 면과 면의 경계를 말한다. 이 경계야 말로 날마다 생물처럼 꿈틀대지만, 결국 "전황"이라는 헤드쿼터의 이해로는 "큰 차이"없는 상황을 보고 받을 뿐이다. 특히 장기 전쟁의 말기에 가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장군 멍군의 일진일퇴가 반복된다. 눈앞의 고지가 어제는 적군의 것이었다가, 오늘은 아군의 것이 되는 데자뷔 같은 날들이 반복된다. 지도층과 고위층이 젊잖게 자리 잡고 않아 "종전 협상"의 문구, 자구 공방만 하는 중에도 전선의 젊은 병사들은 의미 없는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를 반복하는 셈이다.


1차 세계전쟁 말기의 서부 전선도 마찬가지였다. 알자스-로렌 지방이라고 지리 시간에 익숙한 지역은 철광석, 석탄의 매장지라 영국-프랑스의 "협상국"은 물론 독일-오스트리어ㆍ성가리-오스만의 "동맹국"도 전세의 유불리를 떠나 한 뼘이라도 더 가져야 했다. 그뿐 아니라 군국주의자들은 "전투에서의 승리"가 "전쟁의 종결"보다 소중한 덕목이 되었다. 익숙한 이야기가 우리의 역사에도 떠 오른다. 십여 년 전 개봉한 영화 <고지전>이 이어진 생각 끝에 있었다.


https://alook.so/posts/njtXZbe

영화 <고지전>은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으로 인한 휴전이 되기 전 7개월을 다룬 이야기다. 1951년 6월 이후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밀물 썰물이 드나들 듯 일 년 남짓한 남하와 북진의 일진 일퇴를 끝으로 전쟁은 한반도 허리에서 팽팽한 교전상황으로 2년 2개월을 보내게 된다. 영화는 이 교착상태의 전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시작하여 한국전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이전의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와는 차별 점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차별 점은 여기까지다. 미시적 고지전 전투 관점으로 거시적인 전황,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의 무의미성을 이야기한다는 소재적 참신함만이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다. -본문 중-

한국전쟁의 마무리 단계인 정전협정 중에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과 전투는 계속되었다. 지도상 1mm의 땅을 더 얻기 위해 동부전선 애록고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는 고지전이 일상이었다. 애록고지 탈환과 수성의 선봉에는 놀라운 전투력의 전쟁 영웅의 서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뺐고 빼앗기는 소득 없는 제로섬 게임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가늠하기 힘들게 만든다. 한국 영화 <고지전>은 오래된 고전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서로 텍스트 교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록고지의 남과 북의 병사들과 서부 전선의 교섭국과 동맹국들의 교착이 주는 긴장은 당사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이 되었다. 부상을 치료하고 허무한 마음으로 서부 전선으로 복귀한 파울의 죽음 위로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전령이 교신되고 전쟁은 결국 마무리되고 만다. 전선은 이상 없지만 누군가의 아집으로 젊은 인생들은 끝을 마주한 것이다. 결국 전장에서 볼 수 있는 전쟁의 끝은 "죽음" 뿐이었던 것이다.


파울 보이머는 영혼은 이미 사망한 채 (사진=다음영화)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엎드린 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을 뒤집어 보니 그가 죽어 가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된 것을 마치 흡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무척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 책들 출판 본 마지막 쪽-


누구를 위하여 "전쟁" 이야기하는가?


전쟁이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금 주축 세대들은 전쟁과 먼 시간을 살고 있다. 그 실감과 체감도 멀어져서일까? 아니면 현재 진행형인 전쟁이 먼 거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쉽게 전쟁의 승리와 전적을 응원하고 치하한다. 그 불감의 파장이 정치적 지도자에게 이어진 탓일까. 전쟁이 나면 최전선에 나설 이유가 없어서 그런지 이 나라 최고 군통수권자의 발언은 "전쟁 주의자"들과 닮아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1/0002551106?sid=100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고 “일시적 가짜 평화에 기댄 나라는 역사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고 사라졌다”라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 국가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나라 문명 발전, 인류 사회에 기여했다”라고 밝혔다. -기사 본문 중-


그는 작년 대선 때 선제타격론에 이어 집권 후에도 "군사적 대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1000배로 응징하겠다느니, 미국이 주지도 않을 핵을 보유하겠다느니, 협약과 협의에 의한 평화는 "가짜 평화"라고 단정 짓기도 하였다. 그의 말은 지지자의 입장애서 멸공 주의자들의 견지에서 환영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위험한 이야기다. 전쟁이 무엇인지 실제로 감을 잡기 어렵다면 그 참상을 고증한 이야기를 보고 읽기를 권해 본다. 수많은 젊은 영혼에게 지옥을 선사할 것이 뻔한 일을 "나라가 먼저"라고 부추기는 일은 당시 군국주의자들 욕심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신은 실제 전선에 설 일이 없다는 것이 설익은 용기를 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진짜 전쟁이란 (자진=iMdb)


90여 년 전의 독일의 에리히. M. 레마르크는 그 참혹한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그의 영혼은 함께 오지 못하였다. 마치 유체이탈자처럼 그의 영혼은 종전 15분 전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파울에게 남았으니 말이다. 그 파울은 참전 전만 해도 전쟁터에 나가지 못해 안달이 난 17세의 젊은이였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호 속의 비참함은 애써 상상할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원작의 소설보다 "반전의 메시지"가 더 강하게 표출된다. 부모의 동의서까지 위조해 전쟁터로 향한 청춘들이 진짜 전쟁의 모습을 목도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널브러진 토막 난 시체와 포탄에 찢기는 주검들, 강철비처럼 쏟아지는 총격에 진흙 구덩이 속의 쥐들과의 동침. 10대 소년 파울의 시선으로 광경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무의미성은 그저 나와 전우들의 죽음과 처지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파울이 죽어가는 프랑스군 옆에서 죄책감에 오열한다. 전쟁에서의 박멸은 살인과 뭐가 다를까. 전투를 정리하며 뒤져 본 프랑스군의 주머니에는 아내와 딸의 사진,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살육의 도구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존재의 허망함은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군인이 되고 허송세월했어. 반세기나 전쟁이 없었다니. 군인이 전쟁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영화 중 고위 장성의 독백-


장병들의 참혹한 참상과 비교되는 따뜻한 벽난로에서 만찬을 즐기던 중얼거리 듯 군 장성이 말을 던졌다. 파울 같은 젊은이들이 영혼까지 무력화되는 이유치고는 허무하기 끝이 없을 뿐이다. 그들의 무지함만 탓하기에는 세상의 아이러니는 일상이 되었다. 참혹한 참호전의 음침한 화면 뒤에 파란 하늘 밑의 우거진 숲과 나무, 계곡과 하천의 모습을 보여 준다. 파울과 전우들이 거위와 먹을거리를 서리하여 달음질로 도망치는 그 들판마저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은 아이러니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래서 허무한 그의 죽음은 덜컥 마음을 주저앉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상상과 현실 (사진=iMdb)


전쟁을 체감하기란 어려운 시절이다.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남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기 십상이다. 50여 년을 살아 내며 전쟁과 유사한 두려움은 94년에 겪었던 심정이 전부인 듯하다. 1994년 여름 북쪽의 수령 김일성의 사망이 전해졌을 때, 철원 문혜리의 포사격장에 원정 훈련 중이었던 전포부대의 사수 일등병이었다. 유서를 써내고 줄지어 집에 전화 한 통 하던 그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참 두려웠다. 미련이라고 있을 것이 없던 비루한 청춘이었지만, 막연하게 단절되는 내 소소한 일상과의 이별이 참 두려웠다.


영화이든 소설이든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권한다. 특히 강대강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기록은 고백도 고발도 탐사적 관찰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험과 달성의 기억도 아니다. 그저 참혹한 두려움의 날 것이다. 혹자는 책이 필요 없고, 작가가 흔한 시대라고 하지만, 기록은 위대하고 작가의 고된 수고는 언젠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전쟁 이야기에서 "전쟁"을 그대로 바라보는 처절한 기록. 내 마음속으로 트로피 하나 주고자 하는 맘으로 긴 글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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