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소맨의 잔상 그리고 공명
이끼가 가득 찬 듯한 초록빛 눈동자가 영롱하다.
바다도, 호수도 아니었다.
그 눈동자는 어둠을 품고 있으면서도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숨겨진 것인지 숨긴 것인지, 스스로도 모른다.
한 끗 차이의 마음으로 계속된 망설임은 시간을 타고 간다.
앞으로 남겨질 기억의 시간.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입속에서 꺼내든 축축한 꽃 한 송이가 그 순간을 터뜨렸다.
새하얀 거베라를 심장의 꽃병에 숨겨두었었다.
여전히 부서지지 않고 그녀 앞에 싱그럽게 피었다.
여리고 작은 꽃 한 송이에 그녀의 울음도 멎었다.
그 무결점의 미치광이 같은 마음에 그녀도 호기심이 가득해진다.
고요한 밤. 둘만의 교정.
그녀는 알고 있다는 듯, 평범한 학교 생활을 그에게 선사한다.
둘의 작디작은 간지러움이 여태 쓰러져서 잠들어 있던 미세한 감각을 한 올 한 올 일으켜 세운다.
닮은 듯 다른 듯.
그녀의 꿈속에 사는 시골쥐는 악의 원대함에 도망칠 수 없었고,
그는 매일 아침 갓 구운 토스트와 신선한 과일을 먹는 것에 목숨을 내던진다.
결국, 시골쥐와 도시쥐는 사냥개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잔혹한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폭발시킬 수 있다.
그의 마음까지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를 향한 거침없는 몸짓과 웃음에 그는 이미 마음의 존재를 실감하고 있다.
하지만 폭발음도 삼켜버릴 것 같은 폭우가 그들을 영원히 그곳에 가뒀다.
끝내 그녀가 품은 지옥의 습관적 본성이 다시 눈을 뜬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가녀리게 떨리는 그녀의 노래가 폭우 밑으로 깔린다.
울 것 같았지만 그 세찬 빗방울이 그녀의 눈물을 짓눌러 뒤덮어 버렸다.
그렇게 달콤함도 잠시.
그녀와 계약된 검은 정신이 모든 것을 뒤덮는다.
잠깐의 부드러움 끝에, 황홀했던 그의 마음이 입속에서 잘려나가 버린다.
와그작.
그녀의 입에 흐르는 피는 그의 입 속에서 터져 나오는 피와 같은 것이었다.
입을 틀어막은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뒷걸음질에 주저앉아 일어설 수가 없다.
마침내 그녀는 인형 핀셋을 뽑아 올리더니 사랑스럽던 얼굴이 차가운 폭탄으로 변신한다.
붐!
시작됐다.
그녀의 가벼운 손짓 하나면 굉음이 뿜어져 나와 치열하고 처참한 전쟁터가 되었다.
광의 불바다가 세상을 집어삼킨다.
세상도, 사랑도, 우정도... 한순간에 찢겨 나간다.
어느 누구 하나 없어져야만 이 불바다가 끝이 난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그는 그녀가 가르쳐 주었던 방식으로 함께 물속에 뛰어든다.
낯선 물속, 처음 서로의 체온을 공유했던 그때처럼.
체인에 휘감겨 서로에게 기댄 채 천천히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잔잔한 파도가 모래를 쓰다듬으며 밀려온다.
겨우 살아남아 조난당한 외톨이들처럼 둘은 넋 놓고 나란히 앉아있다.
왜 나를 살렸냐 묻는 그녀에게 평생 목에 가시 걸린 듯 살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죽는다면 미인손에 죽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에게, 그녀는 다시 한번 입맞춤을 하려다 그냥 그를 넘어뜨리고 뒤돌아선다.
그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그의 외침을 뒤로하고 묵직한 모래를 밟아 나아간다.
이제야, 그녀도 붉은 거베라를 받아 든다.
빙그르르.
멍하니 꽃만 만지작 거리며 플랫폼에 어둑하니 서있던 그녀는 기차에 차마 올라타지 못했다.
타박타박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 그가 기다리는 카페로 발길을 돌린다.
가까워져 가는 카페에 점점 다급히 뛰어가는 가벼운 발걸음.
하지만,
길목을 가로막는 지배의 악마에 의해 이제 막 피려던 꽃봉오리는 힘 없이 잘려 나갔다.
그녀는 왜 처음부터 그를 죽이지 못 했는을까. 죽음 앞에서 떠올린다.
영롱한 초록 눈동자는 감기지도 못했다.
그렇게,
그는 꿈도 두려움도 뒤로한 채, 그녀를 위한 꽃다발 한 아름 품고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
'사실은.'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 최근 나를 깨운 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