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Fantasy record

by 박홍진

박홍선(필명 무유자유)님이 1991년에 출간한 산문시집 <환상일지>를 연극 대본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원작 : 무유자유의 詩 <환상일지>




[등장인물]


여인
양복

장군

유령

아이

군중들



Prologue, 빈 공간


무대 중앙 '나'에 탑 조명


[나] 내가 인간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자,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라.

그 또는 그녀는 영원히 살겠지만, 어느 날 그 또는 그녀가 죽는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또는 그녀가 죽었는지를,

만약, 어느 날 누군가가 그 또는 그녀가 죽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누군가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그 누군가가 그 또는 그녀가 죽었다고 이야기한다면 이미, 그 또는 그녀는 다시 태어나 있을 것이다.

이름하여 불멸이니, 그것이 그 또는 그녀의 이름이다.

이 기록을 내 사랑하는 풍경, 나의 사랑, 나의 상징들에게 바친다. 그리고 거대한 세계여, 나를 용서하라....


암전.



1장. 해설, 실내


어둠 속에서 비상벨 소리.

조명 밝아지면 거실에서 속옷 차림의 여인이 전화통화 중이다.

창문 너머로 한 무리의 군중이 거리를 가로지르는데 그들은 1장이 끝날 때까지 계속 거리를 가로지른다.


[여인] 수평선으로 흐르는 슬픈 해류여, 이제 물에 들어갈 시간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그리고 홀로 죽어간 모든 것을 위해....


마치 인물의 역할이 바뀐 것처럼 어조가 급격히 변한다.


우리의 위치는 지도 상에 나타나 있지 않아. 이것은 대화, 시, 노래, 풍경, 생활, 이따금씩 다가오는 뒤섞인 기억, 예언 등이 섞인 거야. 다른 무엇보다 바람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 거지.


비상벨 소리 고조된다.
암전.



2장. 별들의 전쟁, 전장


한줄기 빛. 무대를 가로지르고 있는 선(線).
군중의 발자욱 소리 들려온다.

여인 등장, 선 끝에 서 있는다.


[여인] 아, 달빛이 흘러 내리는 이 밤에 나의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저 발자욱 소리는 누구인가?


[합창] 날씨가 이상해진다는 보고가 들어옴. 태양은 이미 흐려져 있고 짙은 안개가 바다를 덮어 오고 있다. 시야는 완전히 차단됨. 나침판 불능. 키 마비. 대응책 없음. S.O.S 응답없음.


천천히 선을 밟고 걸어오는 양복. 여인에게 다가가며 오른손 치켜든다. "오른손!" 왼손 치켜든다. "왼손!"


[여인] 그대는 정녕 누구십니까? 그대 내 곁을 지나가고 내 곁에서 내게 속삭이는 자여... 세상 모든 여인의 정념을 사로잡는 그대 맹목적인 정열을 나는 무서움에 쳐다 봅니다.


양복, 번갈아 손을 치켜든다. 반복한다. 이에 따라 군인들이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계속되는 깃발의 흔들림.


[양복] 사랑하는 나의 여인이여, 자, 기억을 되살려 봐요. 무엇이 나였던가를.


아이 울음소리. 무대 서서히 어두워지고 길을 밝혀주는 태양.
무대 뒤 배경에 거대한 시계. 그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여인] 우리는 수평선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비명소리, 운다.) 시간의 물보라 위로 뜨는 죽은 자의 한숨들...


여인과 양복, 시계 속에 갇혀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람들이 쫓고 쫓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사람들.

장군 등장,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발을 걸터 놓는다.


[장군] 꽃이여, 꽃이여!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에서부터 화려한 새벽까지 하얀 눈 위에 조그만 발자욱을 남기며 걸어가는 내 탐욕의 여인이여! (여인, 시계 밖으로 뛰쳐 나와 장군 품에 안긴다.) 아, 정지의 불빛! 다음 순간을 위해 죽어도 좋다. (여인을 깊게 껴안는다.)


암전.
군인들이 사방에서 성냥불을 그어댄다. 바람 소리. 다음 순간 극장 전체가 검은 천으로 뒤덮인다.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별. 별 아래로-천 아래에서 여인과 장군이 발가벗은 채로 서로 껴안고 뒹군다. 군인들은 천 위로 폭탄을 설치한다.


[장군] 아직, 아직 난 수많은 육체를 갖고 싶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이 아닌가. 강한자여, 나를 기억하라!


거대한 폭발소리와 함께 별들 사이에서 구두, 총, 제복, 그리고 마네킨이 떨어진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만세'소리.

유령 등장하여 천을 걷어 치우면 하얀 옷의 인형이 태극기를 들고 서있다.

인형, 피아노의 반주에 맞춰 군가를 부른다.



3장. 9시부터 10시까지, 거울의 방


무대바닥이 거울로 덮여 있다.
누워 있는 여인과 나.


[여인] 내 눈? 아직 부재중이야. 벌써 아침이야? 어머 이를 어쩌나.. 뭐, 뭐라고? 횡단보도를 걸어 가다가 신기루와 시간, 공간, 사막과 낙타 한마리를 준비시켜준 자유에게 뭐 어쨌다고? 오, 불쌍해라. 젖은 옷과 낙타 한 마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그런데도 소낙비로 우리의 몸을 적시자고?


[나] 그래, 약한 자들을 위해 울어주마. 연기와 연기, 유행가의 거리에서 약한자가 강한자를 능멸하는 십자가로, 비열한 자가 웃을 수 있는 무대에서, 연애 사건과 정치 혁명, 기다리는 자의 서글픔과 돌진하는 자의 무모함, 사치와 허영, 질 좋은 담배와 나무 한 그루의 우수와 그리고 내가 만들어낸 어이없는 생활이였어.


여자와 남자 계속해서 웃어댄다. 정말 어이없는 웃음.
양복 등장.


[양복] 오, 그래. 태양이 여기 있었구나. 그래 내 너를 상징이라 부르지. 난 살아있는 모든 것 그리고 홀로 죽어간 모든 것들을 위해 축복해 주었어.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여인,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 보인다. 마음껏 몸매를 자랑한다.
장군, 뛰어들어 그녀를 덮친다. 그녀는 그녀의 몸을 허락한다. 그는 마구 손을 흔들어 댄다.

모두 축제를 준비한다.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노래한다.

점점 불어나는 사람들. 열과 오를 맞춰 서기 시작한다.
군가 합창.


[나] 넌 누구지?


[여인] 난, 당신을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나]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아름다운 눈은 누구지?


[여인] 이것은 내가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나, 여인의 눈알을 뽑아 버린다. 여인, 부시시 쓰러진다.


[나] (도취되서) 네가 먼저냐, 아니면 내가 먼저냐? 아니지, 그래. 창조다! 난 너를 만들겠다. 너의 꿈꾸는 눈을 향기로운 입술을, 순수한 목을, 귀여운 어깨, 풍만한 가슴, 옴푹 들어간 배꼽을, 상끗한 수풀, 매끄러운 골짜기, 통통한 다리, 조그마한 발가락을....


기독교의 찬송가-바이올린 연주를 배경으로 군중이 행군한다.


[여인] 난 당신에게서 버림받았어요. 난 당신이 나를 버린 만큼 그 댓가를 받도록 하고 말거야. 난 나 스스로를 버리겠어. 이것은 잔인한 당신 책임이야!


[나] 용서해줘, 제발. 나의 사랑, 나의 풍경!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어.


[여인] 당신은 나의 정신, 나의 육체. 당신은 나의 것이예요. 아니, 아니 그것은 모두 쓸모없는 소리예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뿐이예요.


여인, 이리저리 숨는다. 나, 여인을 이리저리 찾는다. 동시에 "오, 제발!"

여기저기서 피를 토하는 사람들.

경고판1이 세워진다. '태풍이 다가올 예정'

경고판2가 세워진다. '이 곳을 넘는 자는 사살당할 수 있음'

사방에서 "살려 주세요!"


[합창] 그래도 할 수 없지. 여기까지 걸어 왔는데.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러나 바로 저기 수평선이 떠오르고 별들이 가까이 내려온다. (북소리) 천사들의 북소리가 바다 속에서 울려온다. 이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여...


[장군] (코트를 걸쳐 입고 있다.) 여러분! 나의 형제들이여, 거대한 나의 사랑이여. 자, 나를 따르라, 이 미친자의 웃음을, 허위로 가득찬 이 장난꾸러기를, 그러면 너희는 구원받을 것이다.


무너지는 세계. 잿더미로 가득차는 무대.



4장. 천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 폐허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불새의 출현.

남자와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여자의 배앓는 소리.

어디선가 불새를 찾아 걸어 오는 아이. 폐허의 도시위에 순진한 아이의 웃음소리. 불새의 움직임에 따라 지칠 줄 모르고 따라 다니는 아이. 아이에겐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심장이 있다. 그러나 불새의 심장을 지니기 위해 아주 먼 여행길을 천천히 걸어가야만 한다.



5장. 좌표에 관계된 사례, 지도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서로 가방을 교환한다. 안의 것을 확인한다. 반복한다.


[양복1] 잔인한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대사 반복)

[양복2] 평화의 시대죠. (대사 반복)


사람들이 검은 양복의 남자들 사이로 피해 다닌다. 한사람 더하기 한사람, 한사람 빼기 한사람, 한사람 나누기 한사람, 한사람 곱하기 한사람. 그 한가운데로 아이가 뛰어간다. 모두 정지.



6장. 사랑의 뒷면, 언덕

언덕위 나무 한그루, 산, 바위, 시내로 분한 사람들.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다.
한무리의 소규모 부대가 등장하여 시체를 넘고 넘는다. 기대어 앉는다.

경멸하는 자의 웃음. 소리내는 나무, 산, 바위, 시내 그리고 미풍소리.

붉은 입술, 가느다란 허리, 풍만한 둔부를 흔들어 대는 아리따운 여인.

멋진 사내들의 웃음. 여인을 향해 손을 내민다.

모든 사내들의 손을 잡아 모으는 여인.

서서히 어두워진다.



Epilogue

여러 장면의 회상. 템포와 리듬으로 정지와 사라짐으로 이어진다.


[나] 그 언젠가 그 어떤 이유로 전쟁을 맞이한다면, 그래서 이 별에서 떠나 그 먼 곳으로 떠나간다 할지라도 앞으로 다가올 모험과 운명에 그리고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용기에 진실로 경의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비록 어리석은 '나'이지만 이 기록을 그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바친다.


- 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