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길도 없이 달려올지라도 그 또한 삶이라서

지나간다는 것은 서운함보다 안도다

by April

삼십 대 중반에 할 말인지 싶지만,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아빠가 돌아가시기도 하고

이직, 퇴사를 반복하며 가장 잘 맞는 옷을 찾으려다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기도 하고

이보다 더한, 맨정신엔 감당 못할 일들마저도 결국 다 지나가고 무뎌진다


지나간다는 것은 이제 내게 서운함보다 안도다

만개하고 지고

슬펐다가 잊고

끝났다가 시작하고 또 이어지고

너무 자연스러워 다행인 것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얀 브뤼헐 1세, 1608년)>


합스부르크 전시에서 봤던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이 주는 메시지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인생의 덧없음인데, 어차피 죽는다는 회의론이 아니라 모든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바꿔 생각하기로 했다


화병 속 점점 말라가는 꽃이 곧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은 이토록 자연스럽고 때로는 그대로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희비(喜悲)도 느닷없이 생겼다가 어느새 지나가며 내 기분과 상관 없이 인생을 흘러간다

삶은 이렇게 주어져서 무너져도 다시, 어떤 식으로든 잘 가꾸어가는 것이 일상이고, 원래 삶은 그런 것이라고 여기며-


불행이 길도 없이 달려올 때
우리는 서로의 눈을 가려주었지

박준 <계절산문> 세상 끝 등대4


불행에 맞서지 않고도 서로의 눈을 가려주는 것만으로 그 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삶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다짐한다


살면서 좋은 일에 미련을 갖지도 나쁜 일에 매몰되지도 않(도록 노력하)겠다

희비는 삶과 죽음처럼 순환하기에

붙잡으려 하지 않고

나를 스쳐 지나갈 때 의연하기를


설령 불행이 길도 없이 달려올지라도 그 또한 삶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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