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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종 종Mu Aug 25. 2024

오가와 요코 <호박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몰래 캐낼 수 있다면


오가와 요코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에서


"호박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


어렸을 때는 흙만 파면서 놀아도 즐거웠다. 당시에는 여기저기에 공터와 포장되지 않은 길이 있어서, 팔 수 있는 흙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부삽으로, 조각도로, 아이스크림의 나무 스푼으로, 몇 시간이나 싫증 내지 않고 흙을 팠다. □흙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메말라 부슬부슬하더니, 조금씩 파 내려가면 물을 머금고 있어 눅눅하고 입자의 밀도가 높다. 감촉도 싸늘하고 손가락에 들러붙는다.  □자갈은 물론 나무뿌리, 무슨 뼈, 씨앗, 철사, 구슬, 병뚜껑,  달팽이 껍질, 곤충 날개.... 온갖 것들이 흙에서 나온다. 모두 어둠 속에 오래 묻혀 있던 탓에 지상에 있을 때와는 다른  모양이다. 녹슬었거나 깨져서 조각이 떨어져 나갔고 색감도  칙칙하다. 갑자기 파낸 바람에, 모두들 당황해서 언짢은 표정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 가령 고고학자가 놀라고 감격할  만큼 희귀한 공룡의 화석이나 그 한 조각이면 억만장자가  될 수 있는 보석 따위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뼈는 구운 생  선의 뼈이고 구슬은 유리이다.  마음은 한없이 흙을 파내고 싶은데, 반드시 딱딱한 돌이  나와 나를 방해한다. 아무리 힘을 내서 파도 돌은 꿈쩍하지  않는다. 실망해서 구멍을 흙으로 다시 덮지만 왠지 거기만  움푹 들어가 있다. 어둠이 새어 나온 만큼 빈 걸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우치다 하켄의 에세이 <호박>의 주인공은 무턱대고 땅을  파서 보물을 찾는 게 아니라 송진을 흙에 묻어 호박을 만들려 했다. 양조장 아들인 소년은 일꾼에게 술통을 봉인할 때  사용하는 송진을 한 사발 얻어 몰래 흙 속에 숨긴다. 소년은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송진이 착착 호박으로 변화하고  있다, 하는 비밀을 혼자 짊어진 기분에 몹시 초조해한다. □아닌 게 아니라 호박은 매혹적인 광석이다. 색감은 소박하지만 맑고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한없는 존재감을  숨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젤라틴이 연상되어서 그런지, 다른 광석에는 없는 풍요로움에 넘치는 분위기도 갖고 있다.  작년에 폴란드를 여행할 때, 모든 기념품 가게에서 호박을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크라쿠프 시내의 바벨성으로 연결되는 거리에 있는, 무뚝뚝한 청년이 일하는 골동품 가게에서 반지를 하나 샀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 이 호박에 깃들어 있다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여겨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송진을 흙에 묻은 소년은 호박이 생성되려면 몇  만 년이나 걸린다는 것을 알고서 비밀의 무게를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다음 날 방과 후에 송진을 흙에서 파내고 만다.  그 모양새는 광석 같았지만 아름답기는커녕 이상한 냄새까지 났다. 소년은 그것을 휴지에 싸서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게 전부인 작품이다.  □송진이 호박이 되고, 탄소가 다이아몬드가 되고, 삼엽충이 화석이 되니, 흙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인간이 미처 가늠할 수 없다. 물론 인간 세계도 드라마틱하지만 땅속에 비하면 스케일이 아예 다르다. 땅속에서는 모든 변화가 아주 주도면밀하고 합리적인 수순에 따라 쉼 없이, 꾸준히, 끈질기게 계속된다. 지상의 인간이 알지 못하도록 조심스러움도  갖추고 있다.  □하켄의 소년처럼 나도 옛날에 어떤 것을 흙에 묻은 적이  있다. 내가 지은 이야기다.  □글을 쓴 공책 쪼가리를 반듯하게 접어서 빈 간유 깡통에  담아 집 뒤쪽에 있던 화원에 묻었다. 그곳에는 각종 나무 외에 커다란 정원석도 아무렇게나 놓여 있어, 동네 아이들이  다들 오르내리며 놀았다. 미끄럼틀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크고 경사가 절묘해서 마음에 드는 바위가 있었는데, 깡통을 그 아래에 묻기로 했다. 역시 예상했던 것만큼 깊이 파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충 파고 말았지만, 그래도 한껏 깊게 묻었다.  □"너는 산 제물이 되는 거야.  □나는 깡통 뚜껑에 인쇄된 남자아이 사진을 향해서 그렇게  말했다. 볼이 건강하게 토실토실 살찐, 금발의 소년이었다. "내가 지은 이야기와 평생 함께해야 하는, 선택받은 제물. " □흙을 덮자 소년이 잠시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떤 이야기였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가 읽을까 봐 싫었는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는지.  □소설을 쓰다 막혀 고생하고 있을 때 '지금 그걸 파낼 수  있다면' 하고 상상한다. 어쩌면 호박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몽상한다.


(*글 속 □ 는 문단 바뀜의 표시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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