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귀부인
#.
일정 기간의 자유가 생기면 기쁜 나머지 하게 되는 한 가지 행동이 있다. 그것은
지역 소식지를 보며 배우고 싶은 강좌가 있는지 살피는 일이다. 당장
무리가 없으면 한두 개 정도 "지른다".
모처럼이지만 기쁘게도 이번 달이 그런 달이다.
이때 "지른다"는 돈보다는 시간의 사치다. 사치를 그것도 시간 상의 사치를 생계와 상관없이 향유하노라면 귀족이 따로 없다.
"나는 "시간 귀족"이에요."
이 말에 까르르 웃던, 대화가 곧잘 통하던 귀족 부인이 있었지. 그녀와 멀어진 지 거의 2년째. 뚜렷한 계기도 없이 떠난 그녀. 짐작컨대 진짜 귀족이었던 그녀는, 어쩌다 지르기를 하고 금세 '자뻑'하는 나의 천박함에 질렸을 터이다.
#.
사실은, 어제에 비해 여유롭달뿐 일주에 한두 차례 수강하는 게 무리라면 무리.
하던 일을 후닥닥 멈추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선크림에 입술연지 콕콕, 거울을 볼라치면, 나 자신 모파상이 아니더라도 빈한한 하급관리 부인이 상류사회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지... 가슴이 쓰라리다.
#.
사실 안간힘이랄 것도 없다. 찍어 바른 루즈, 푸른 블라우스, 구한 지 얼마 안 된 작은 에코백... 한껏 자긍심 있게 허리를 곧추 세우고 걸어가는 여자.
그나마 대견해서일까. 구름이 나서서 오후의 햇빛을 걸러준다.
#.
무슨 대단한 거나 배우러 가는가?
글쎄다.
하나는 전적으로 행운이다 싶지만 다른 하나는 괜히 신청했다는 후회가 인다. 그렇다고 수업을 빼먹기는 싫어 초긍정주의가 된다.
끝까지 듣다 보면 뭐라도 내 것이 되겠지.
그래도 강의가 지루할 테니 따로 읽을거리가 있으면 좋겠어.
#.
"... 벽에 걸려 있는 액자를 되돌려놓은 것이,
상어는 얼른 바다로 되돌아갔어... "
(송찬호 <분홍나막신>'상어')
시인은,
"내가 상어를 처음 만난 곳이/ 전망 좋은 바닷가 카페,/ 뻬떼루 삐떼루였어"라고 말했다.
#.
난데없이 상어 이야기라니!
그것만으로도 오늘 파티는 괜찮았어.
허물을 벗듯이 가느다란 흰 선이 빗물 같은 푸른 블라우스를 떨구며 중얼인다.
목걸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오늘의 배역이었던 귀부인, ㅡ 하루치를 다했다.
후회는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