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進) - 공연장 같은 공연장의 등장. 그리고 헨델.
바로크 Baroque. 단어부터가 이미 낯설고 조금은 요란합니다. 어원학자들은 이 말을 두 갈래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이상하게 뒤틀린(난삽한) 논증"을 뜻하던 이탈리아어 Barocco에서, 다른 하나는 "비정형의 울퉁불퉁한 진주"를 뜻하던 포르투갈어 Pérola barroco에서 왔다는 설이죠. 어느 쪽이든 핵심은 같습니다.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그러나 눈을 잡아끄는 과장과 굴곡. 그게 17–18세기를 휩쓴 양식의 별명으로 굳었습니다. 건축도, 미술도, 음악도.
르네상스 시대가 음악들의 질서를 세우는 시기였다면, 바로크는 그 질서 위에서 여러 가지 기교들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음악은 미사나 연회의 ‘배경’이 아니라, 사람을 불러 모으는 주인공으로 변신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등장하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대, 객석, 그리고 관객(혹은 티켓).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공연장의 3요소입니다.
베네치아 산 카시아노 극장 Teatro San Cassiano 은 1637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돈을 내고 누구나 입장해 오페라를 보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티켓을 예매해서 찾는 공연장의 최초의 형태라고 할 수 있겠죠. 개관작은 프란체스코 마넬리 Francesco Manelli의 안드로메다 L’Andromeda. 이 사건은 오페라를 궁정의 사적 향유에서 도시 대중의 상업 공연으로 이동시켰고, 이후 전 유럽의 오페라 붐에 불씨를 댕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처음의 공기"는 어땠을까요?
음악학자 엘렌 로잔드(Ellen Rosand)는 베네치아 오페라가 “사회적으로 다양한, 그리고 대가를 지불하는 청중에게 열린 혼성(극과 음악, 무대장치) 공연”으로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정리합니다. 한마디로, 돈을 내고, 마스크를 쓰고, 신분이 섞인 군중이 모여드는 "도시형 스펙터클"이었습니다.
17세기 베네치아 카니발은 가면과 일시적 신분 해제의 시간. 그 마스크는 극장 안까지 들어왔고, 박스석에서의 만남, 흥정, 농담, 복도와 로비의 소란이 공연과 공존했습니다. 외지인 여행자들은 그런 “해방된 예식”의 한복판에서 베네치아 극장을 경험했습니다. 당시에 베네치아를 여행하고 그 문물을 본 것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던 영국인 존 이블린(John Evelyn)은 1645–46년 베네치아 체류 일기에서, 베네치아에는 “17세기에만 해도 여러 극장이 있었고, 연극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고 적습니다. 그가 언급한 오페라 극장의 무대와 소프라노 안나 렌치아(Anna Rencia) 그리고 카스트라토에 대한 대목은, 공연 자체가 도시의 화제였던 당대의 열기를 엿보게 합니다.
오늘 밤, 브루스 경과 함께 자리를 잡고 오페라에 갔습니다. 오페라에서는 희극과 다른 연극들을 뛰어난 성악가와 기악 연주자들이 낭송 음악으로 표현했고, 다양한 장면들이 원근법의 예술로 그려지고 고안되었으며, 공중을 나는 기계와 다른 놀라운 동작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인간의 재치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웅장하고 값비싼 오락거리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역사는 "리디아의 헤라클레스"였습니다. 장면은 열세 번 바뀌었습니다. 유명한 성악가 안나 렌치아는 로마 출신으로 여성 중 가장 뛰어난 고음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녀를 능가하는 환관(아마도 카스트라토 가수; 필자 주)도 있었습니다. 또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음역을 부른 제노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새벽 2시까지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후략)
This night, having with my Lord Bruce taken our places before, we went to the Opera, where comedies and other plays are represented in recitative music, by the most excellent musicians, vocal and instrumental, with variety of scenes painted and contrived with no less art of perspective, and machines for flying in the air, and other wonderful motions ; taken together, it is one of the most magnificent and expensive diversions the wit of man can invent.The history was, Hercules in Lydia; the scenes changed thirteen times. The famous voices Anna Rencia, a Roman, and reputed the best treble of women; but there was an eunuch who, in my opinion, surpassed her ; also a Genoese that sung an incomparable base. This held us by the eyes and ears till two in the morning,...(후략)
- 존 에블린의 일기(1645) 중에서
요컨대, 산 카시아노에서 시작된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은 엄숙함과 정숙보다는 가면과 사교, 상업이 먼저였습니다. 무대 아래에서는 일상의 역동감이, 무대 위에서는 다양한 무대적 실험들이 넘쳐났고 그 사이에서 "경청의 질서"가 천천히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의 콘서트홀에서 기침 한 번,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문제가 된다면, 바로크 시대의 극장은 달랐습니다. 관객들의 왁자지껄한 입퇴장, 공연에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 서로 간의 대화, 그런 교제를 하면서 나누는 간식, 박수와 야유가 공연의 일부였죠. 베네치아만이 아니었습니다. 런던에서도 이탈리아 오페라가 인기를 얻자, 영국의 유명한 수필가 조셉 애디슨 Joseph Addison은 자신이 발간한 잡지 스펙테이터 Spectator 18호(1711)에서 “영어권 관객이 자기 나라에서 외국어 오페라를 통째로 보고 앉아 있는” 기현상을 서술합니다. 말하자면, 언어 장벽조차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 ‘보는 재미’(무대장치, 오페라 스타 등)가 컸다는 뜻입니다. 마치 오늘날에도 외국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으면 자막이 없어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이 당시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것이었죠.
조지아 시대(1714-1830. 영국왕 조지 1세부터 4세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대; 필자 주) 런던 극장의 관객 매너를 훑은 연구들을 보면 당시 공연장의 분위기는 좌석을 잡기 위해 파견된 하인들로 분주했으며, 사교를 위해 박스석에 앉아 자신들이 "문화"를 즐기는 계층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귀족과 자본가들이 많았으며, 공연 중이라도 떠들썩하게 대화하고 때로는 공연 내용에 대한 논쟁도 서슴지 않았으며, 때로는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거침없는 야유와 소요까지 오늘날의 잣대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일상이었습니다. 즉, 오페라하우스는 음악만이 아니라 도시 엘리트의 ‘보여주기’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의 영국 런던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를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에서 음악의 어머니라고 가르치는 헨델(Geroge Frideric Handel 1685-1759)일 겁니다. 헨델은 이 시기 영국 런던에서 자신이 작곡한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 "리날도 Rinaldo"(1711)로 대성공을 거둡니다. 1705년에 개관한 킹스 시어터 King's Theatre가 베네치아의 산 카시아노 오페라 극장과 같은 성격의 상업적인 공공 오페라 극장으로 개관한 이래 무려 그 시즌에만 15번 공연되는 대히트작을 작곡하게 된 것이죠. 헨델은 바로 1년 전 하노버 선제후국 궁정의 왕실악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합당한 시기에 돌아온다"는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 1712년에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살게 되죠.(헨델을 왕실악장으로 임명한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 게오르크 루드비히가 이 당시에 헨델에게 뒤통수를 맞은 건데, 이 선제후가 1714년에 영국 국왕 조지 1세에 즉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후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인연이라면 인연, 악연이라면 악연인 두 사람에 대해서요.) 그만큼 헨델에게는 오페라 극장에서 그의 이탈리안 오페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전의 시대의 세속 음악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하인들의 위치에서 서서히 상승하고 있다고 전술한 바 있는데, 헨델의 예를 보면 "예술이 교회와 궁정을 떠나 시장을 만난 최초의 순간(음악학자 엘렌 로잔드의 서술)" 이래로 시장의 맛을 제대로 보아 금전적으로는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 히어로 영화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듯이 당시의 이탈리안 오페라의 유행도 30년을 채우지 못하고 저물어 갔습니다. 1733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창단된 반(反) 헨델 연합 오페라단 Opera of the Nobility(귀족 오페라단)에서 1734년 제작한 오페라 "나쏘의 아리안나 Arianna in Nasso"에서 우리에게 영화로 익숙한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 Farinelli(본명 Carlo Maria Brosdchi, 1705-1782)가 데뷔하면서 말 그대로 런던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헨델과 반 헨델의 두 진영으로 갈라진 런던의 이탈리안 오페라 계는 생존을 위한 치킨게임을 전개하면서 어마어마한 비용을 쏟아부으며 상호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단적인 예로 헨델이 받던 왕실연금이 당시 기록으로 1년에 200파운드였는데, 파리넬리는 5000파운드(!)나 받았으니까요. 오페라라는 것이 종합예술이다 보니 오페라 가수의 출연료를 비롯하여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무대장치 제작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무렵에 헨델이 남긴 편지를 보면 "이번 시즌이 망하면 나는 끝이다"라고 썼을 정도가 됩니다. 귀족 오페라단에게 가수들도 빼앗겨서 자신의 작품을 보러 오는 관객의 수가 급감하고 수입이 역시 급감했지만 헨델의 고군분투는 1737년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1737년에 제작한 이탈리안 오페라 베레니체 Berenice가 흥행에서 대참패를 하게 되었고, 귀족 오페라단의 간판스타였던 파리넬리는 스페인 왕비의 초청을 받아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런던의 오페라계를 양분하던 두 진영이 동시에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의 충격으로 헨델은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마비되고 말도 어눌하게 되어 작곡과 연주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人間之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음악가로서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헨델은 요양을 위해 독일 아헨 Aachen에 있는 온천으로 요양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주 만에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게 됩니다. 이후 지인들에게 "나는 다시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어. 주님께 감사드릴 뿐이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회복이 정말 신의 가호였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헨델은 화려한 이탈리안 오페라가 아닌 거룩한 오라토리오 Oratorio라는 장르로 매우 성공적인 컴백을 하게 됩니다.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를 잘 모르시는 독자를 위한 잠깐 상식! 오라토리오는 기도하는 곳을 뜻하는 라틴어 오라토리움 Oratorium에서 파생된 이탈리아어 단어로 "기도하는 곳에서 행하는 음악적 기도, 종교극"을 뜻합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형식으로 설명하자면 오페라처럼 여러 인물들이 나와서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무대장치나 연출 없이 오로지 음악만으로 진행되는 극 장르의 음악입니다.
헨델은 이탈리안 오페라에 피로감을 느낀 관객들의 니즈 Needs를 제대로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헨델은 1739년 1월 다윗왕과 사울왕의 갈등을 그린 오라토리오 "사울 Saul"을 영어로 작곡하여 화려하게 컴백을 하게 되고 이 작품은 초연 당시 대성공을 거두고 무려 6회나 연속 공연을 할 정도로 흥행에도 성공하게 됩니다. 오페라 제작자로서 엄청난 자본을 투입했다가 쓴맛을 본 감각이 살아있어서 일까요, 무대와 음악가들만이 필요한 오라토리오 공연은 헨델에게 있어서 저자본으로 구현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영어로 작곡된 작품은 현지 관객들 입장에서 그동안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일방적으로 "보는" 공연에서 비로소 "듣는" 공연으로 관객들의 관람 태도의 전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후 헨델은 20년간 죽기 전까지 영어 오라토리오의 황금기를 이끌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매년 어디선가 연주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1741)와 영국의 국민찬가라고 불리는 "주다스 마카베우스 Judas Maccabaeus"(1747) 등 20편 이상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게 됩니다. 그의 오페라가 무너진 자리에 오라토리오가 태어났습니다. "사울"은 그의 귀환이었고, "메시아"는 그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다스 마카베우스"는 영국이 그를 "국가의 음악가"로 받아들인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노래는 바로 "내가 아는 노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최소한 알지 못하더라도 가사가 모국어로 들리는 노래라면 공연장을 시끄럽게 하기는 어려운 분위기였겠죠. 예술이 교회와 궁정을 떠나 시장을 만나 헨델에게 큰돈을 벌어다 주었지만 과다경쟁으로 이어져 다 같이 멸망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렇게 된 상황에 헨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예술을 그것이 떠나온 교회의 엄숙함과 궁정의 화려함에 다시 밀어 넣어 자국어 오라토리오라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들이 집중해서 "듣는" 음악의 관람문화를 만드는 씨앗을 심게 되었습니다.
물론 헨델 이후에도 런던에서 이탈리안 오페라를 시도한 작곡가들이 더러 있었지만 이미 유행이 지나버린 장르를 찾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상대적으로 한산해진 객석에선 헨델의 전성기처럼 열광하는 관객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아리아가 끝나고 치는 박수는 예의였지 감동이 아니었으며, 박스석에 앉아있는 귀족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공연보다는 맞은편 박스에 앉아있는 다른 귀족들의 의상이나 장신구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들해진 이탈리안 오페라는 지금으로 치면 코미디 장르로 옷을 갈아입으며 관객들을 다시 오페라 극장으로 불러 모으며 다음 시기에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게 됩니다.
쓰다 보니 많이 길어졌네요.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음악공연장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관객들의 자본력과 지위가 올라가며 음악 또한 다양한 형식을 만들어가며 오늘날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고전주의 시대로 가겠습니다. 다음 글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구독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천음악
이번엔 두 곡을 추천하겠습니다.
첫 번째 곡은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나오는, 우리말로 "울게 하소서"라고 번역한 "Lascia ch'io pianga"입니다. 영화 "파리넬리"에서 절절한 멜로디로 파리넬리가 불러서 대단히 유명해진 곡인데, 놀랍게도 실제 역사에서 파리넬리는 헨델의 작품에서 노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일단 데뷔 자체가 반 헨델 연합이었던 귀족 오페라단이었고, 초연 작품 또한 파리넬리의 스승이자 반 헨델 연합의 선봉이었던 나폴리 출신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 Nicola Porpora(1686-1768)의 "낫소의 아리안나"였기 때문입니다.
조사를 해보니 파리넬리가 영화에서 헨델에게 착취당하는 천재 카스트라토 가수로 그려진 것은 감독의 각색에 의한 가상의 스토리였던 것입니다. 이럴 수가!
두 번째 곡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주다스 마카베우스"에 나오는 합창곡 "보라, 정복의 영웅이 오신다 See, the Conquering Hero Comes"입니다. 제목만 보면 굉장히 생소할 수도 있는데 이 곡을 검색해서 듣게 되실 독자님의 종교가 기독교 계열이라면 듣자마자 "아, 이 노래!" 하시면서 무릎을 탁 치실 것입니다. 부활절 시기에 반드시 한 번은 부르게 되는 성가 "주 경배하라(가톨릭 성가제목)", "주님께 영광(개신교 성가제목)", "Thine be the glory"의 원곡이 바로 이 곡입니다.
Lascia ch'io pianga
See, the Conquering Hero Co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