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연장 분위기의 역사(3)

여(如) -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빈 악파 1/3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시끌벅적한 이탈리아스러운 열정과 광기가 무대를 뒤덮던 그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던 즈음에, 음악은 다시 한번 조용히 방향을 틀기 시작합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교회의 경건함과 도시의 대중성 사이에서 강제로 새로운 공연감상의 형태를 만들어냈다면, 그 이후에는 음악이 궁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벗어나 도시 전체의 공공적 공간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한 번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처우가 좋아지긴 했지만 이전 시대의 음악가들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간 음악가들이 있었고, 이전 시대의 공연장의 분위기와 비슷한 것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를 동시대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씩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한 번은 들어봤을 이 시대의 유명한 작곡가들이 있죠. 바로 훗날 빈 Wien 악파로 불리게 되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3인방입니다. 이 3인방 중에서 가장 맏형인 하이든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 Joseph Haydn(1732~1809)은 "프리랜서 음악가" - 정확히는 완전 음악가라기보다는 1인 제작사에 가까웠지만 - 의 전형적인 모델처럼 살아간 헨델과는 다르게 "직장인 음악가"로 거의 평생을 산 음악가입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수도 빈 근처의 작은 시골마을 로라우 Rohrau(지금도 인구 1500명 남짓의 정말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하이든 박물관 소재; 저자 주)에서 마차 바퀴를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무렵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부모님에 의해 로라우 근처의 좀 더 큰 마을 하인부르크에 사는 친척집에 맡겨서 기초적인 음악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바이올린, 하프시코드, 성악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보이 소프라노를 너무 잘해서 카스트라토가 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8살 때 수도인 빈의 주교좌성당인 성 슈테판 대성당 성가대 오디션에 합격해서 빈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기초 음악 이론들과 라틴어, 각종 악기 연주법까지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변성기로 성가대에서 방출되는 1749년까지 11년간 이어졌습니다. 하이든은 훗날 "나는 엄격한 규율과 훌륭한 교육을 그 성가대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며 자신의 음악적 토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변성기로 첫 번째 직장을 잃고 본의 아니게 "프리랜서 음악가"가 되어버린 하이든은 후원자도, 안정된 수입도 없었기 때문에 빈의 아주 작은 다락방에서 레슨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나중에 그의 자서전에서 그 당시의 궁핍했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Nach dem Bruch der Stimme war ich auf die Gasse gesetzt, ohne Geld und ohne Freund…
Ich mußte mein Brot suchen, wie ich konnte.“

“목소리가 변한 뒤 나는 거리로 내던져졌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내 빵을 찾아야 했다.”

- Lebenslauf, 하이든 저(1776)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면서 다른 작곡가들의 악보를 필사하며 그들의 음악을 흡수하고 있던 시기였던 1754년, 이전 글에서 헨델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귀족 오페라단"의 작곡가이자 불세출의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의 스승이었던 니콜라 포르포라가 빈으로 오게 되었고, 하이든을 자신의 반주자이자 악보 필사자 겸 조수로 고용하게 되면서 하이든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조수로만 고용한 것이 아니라 제자처럼 작곡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의 작곡수업이 하이든의 공식적인 첫 작곡수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앞으로 그의 평생을 책임질 빛나는 자산을 갖게 된 것이었죠.

당시 정말 유명했던 작곡가였던 포르포라는 빈에 와서도 유명세 덕에 귀족들과 많은 인맥을 쌓을 수 있었고, 그 덕에 하이든도 귀족들의 연회에서 연주를 하며 서서히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반주 잘하는 젊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다 드디어 1757년 보헤미아의 귀족이었던 모르친 백작의 오케스트라의 부악장으로 고용되면서 8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을 마치고 다시 "직장인 음악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순탄한 음악가의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던 하이든은 불과 4년 만에 재정이 악화된 모르친 백작의 몰락으로 - 현대의 상황으로 비추어보자면 기획사 파산 -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될 뻔했으나, 그가 모르친 백작을 위해 작곡한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폴 안톤 에스테르하지 Paul Anton Esterházy 공작이 바로 인터셉트해서 1761년에 자신의 영지인 아이젠슈타트 Eisenstadt로 데리고 오면서 직장인으로서 매우 성공적인 이직을 하게 됩니다. 백작가보다는 공작가가 당연히 돈도 많으니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옮겨온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하이든은 이곳을 1790년에 거액의 퇴직금을 받고 계약해지 되기 전까지 29년간 정말 충실한 "직장인"으로서 많은 작품들을 작곡하게 됩니다. 정말 음악에 진심이었던 안톤 공작이 하이든을 데려온 지 1년 만에 사망했지만 형보다 더 음악에 진심이었던 동생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Nikolaus I. Joseph Esterházy de Galantha가 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이른바 하이든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Ich möchte, daß Sie mutig schaffen, und daß Sie ein eigenes Feuer zeigen.”

“나는 그대가 대담하게 창작하길 원하오. 그리고 그대만의 불꽃을 보여주길 바라오.”


-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공작


만약 여러분이 직장인인데 고용주가 직접 저렇게 말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 같으신가요? 모르긴 몰라도 정말 회사를 위해서, 아니 고용주를 위해서 영혼까지 갈아 넣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이든은 자신을 믿어주는 니콜라우스 공작을 위해서 29년간 약 80여 편의 교향곡, 45편의 현악 4중주, 13편의 오페라, 7편의 미사곡, 40여 편의 피아노 소나타, 50여 편의 실내악 작품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아, 물론 아주 열렬한 바리톤 Baryton 연주자였던 니콜라우스 공작을 위해 175편이나 되는 바리톤 연주곡들도 작곡했습니다.




바리톤. 사람 목소리 바리톤도 아니고, 관악기 바리톤도 아닌 지금은 거의 연주하지 않는 비올라 다 감바 Viola da Gamba 스타일의 현악기... 라고 하기엔 지판 뒤쪽에 피치카토로 연주할 수 있는 현이 달려있는 이상한(!) 악기입니다. 이 이상한 악기는 당시로서는 가장 제작 난이도도 높고 원가도 많이 드는 악기라 귀족들이나 연주하는 악기였고, 더군다나 유럽에서도 딱 오스트리아와 독일 일부에서만 연주했던 악기였다고 하니 니콜라우스 공작이 자신을 과시하기에 아주 적합한 악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그림을 그려보죠. 여러분이 공작입니다. 그런데 악기연주를 제법 잘해요. 그런데 아주아주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만한 악기도 있어요. 그런데 전속 작곡가가 무려 하이든이에요. 그 사람이 작곡한 곡을 내가 솔로로 연주하면 뒤에서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해줘요. 그럴 수 있는 나만의 작품이 175개나 돼요.

와.... 정말 취미생활은 이렇게 해야 한다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나요?

정말 니콜라우스 공작은 평생 행복했을 것 같네요.




이렇게 아이젠슈타트에 안착하게 된 하이든은 고용 5년 차에 궁정악장이었던 베르너 Gregor Werner (1693~1766)가 사망함으로써 1766년에 궁정악장이 됩니다. 하이든이 훗날 “나는 외부와 단절된 그곳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직장인으로서 고용안정이 가져다준 효과는 10점 만점에 100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용주로서 니콜라우스 공작은 그리 쉬운 상사는 아니었습니다.

대략 궁정악장이 되기 얼마 전, 하루는 공작이 하이든이 작곡한 곡을 듣던 중에 갑자기 "이 곡은 언제 작곡한 거지?"라고 물었는데 하이든이 "작곡한 곡이 너무 많아서 기억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자 공작이 발끈해서 "왜 날짜를 기록하지 않는가!"하고 따지는 통에 이후로는 모든 악보에 작곡한 연도와 날짜, 악기 편성 등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하이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주 수월하게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할 수 있었죠.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작은 고용주로서 고용인들의 근태 관리, 사생활 관리, 악단의 자료 관리 등등 상당히 많은 업무를 하이든에게 맡겼습니다. 그 덕에 에스테르하지 궁정악단은 군대처럼 엄격한 규율로 유명했습니다. 단원들은 무단으로 외부행사에 출연할 수 없었고(오브리 금지), 결혼할 때에는 공작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실제로 단원 중 바이올리니스트는 허가를 늦게 받는 바람에 결혼식을 연기할 수밖에 없던 일도 있었음; 필자 주), 복장에 관한 규율도 엄격했으며, 연주나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연습에 지각하는 것도 전부 공작에게 보고되었습니다. 하이든이 1766년에 악장으로 승진하면서 단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역시 본업은 작곡가였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궁정은 아침음악 - 식사 때의 음악 - 저녁 실내악의 매일 음악은 기본이었고, 연회용 오페라, 지역 축제일에 연주할 음악, 종교행사에 쓰일 음악 등을 하이든에게 요구했습니다. 공작은 하이든에게 매주 새로운 실내악을 작곡하고, 새로운 오페라를 정기적으로 작곡하고, 자신을 위한 바리톤 작품을 수시로 작곡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현대로 생각해 보면 상당한 연봉을 받고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간다는 모 대기업 간부들의 삶을 보는 것 같네요.

그러다 공작이 1768년경부터 오페라에 심취하면서 업무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이든에게 궁정 오페라 제작 총괄이라는 업무가 떨어졌습니다. 인사관리에 작곡, 이번엔 오페라 총 예술감독이라고나 할까요. 성악가를 캐스팅하고 그 배역을 조정하고 합창 연습을 시키고 물론 오케스트라 연습도 시키고 게다가 무대장치 감독까지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업무가 주어졌지만 하이든은 그 어려운 걸 은퇴할 때까지 해내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업무를 해내던 하이든에게 더욱 큰 시련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1768년 지금의 헝가리 북부의 페르퇴드 Fertőd에 공작의 여름궁전이 완공되면서 봄에 아이젠슈타트의 모든 악단을 이끌고 내려갔다가 5, 6개월을 지내고 늦가을에 복귀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 단원은 몇 명 되지 않아서 단원들은 1년에 반은 본의 아니게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헝가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꿈꾸고 지은 신축 궁전이다 보니 궁전 안에는 아름다운 호수 정원, 인공섬, 대형 오페라 하우스, 수많은 연회장 등 화려한 시설들이 가득했지만 궁전 주변에는 그 궁전을 뒷받침할만한 도시 시설이 전무했습니다. 예전에 서울 근교에 분당이나 일산 신도시 개발되고 난 직후를 떠올려보시면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편의시설 없이 덜렁 아파트들만 줄지어 서 있던 그때를요. 심지어 이 여름궁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마차로 하루거리를 가야 했기 때문에 일단 궁전에 들어서면 다시 아이젠슈타트로 돌아갈 때까지는 궁전 안에서만 강제 합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인 공동숙소에서 거의 매일 같은 메뉴의 식사를 하고 하루 종일 연주와 연습을 하는 생활을 반년 동안 매일같이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1772년 늦가을, 이 여름궁전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공작이 이미 8개월이나 - 이전에는 6개월 정도만 머물렀지만 - 여름궁전에 머무르면서 아이젠슈타트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단원들은 하이든에게 집단으로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이든은 기지를 발휘하여 아주 간접적으로 단원들의 의사를 공작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이때 탄생한 곡이 하이든 교향곡 45번 F#단조, 일명 "고별 교향곡"으로 알려진 곡입니다.

여느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교향곡은 3악장까지는 정상적으로 모든 악기가 연주를 하고 마지막 악장에서 곡이 진행될수록 악기들이 하이든이 악보에 적어둔 순서에 따라 하나둘씩 촛불을 끄고 무대를 떠나게 됩니다. 호른이 가장 먼저 퇴장하고, 이어서 오보에, 바순, 콘티누오, 비올라와 제2바이올린이 줄지어 퇴장합니다. 마침내 무대 위에는 제1바이올린 두 명만 남아 아주 조용히 음악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악기가 하나씩 퇴장할 때마다 그 악기가 있었던 곳의 촛불이 꺼지며 무대 위의 어둠은 점점 커져만 갔고 최후의 바이올린 연주자 두 명이 피아니시모로 연주를 마치고 마지막 촛불을 끄면서 무대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공작님, 이제 제발 집에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라는 항의이자 간청이었습니다.

직접적인 항의보다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서 악단의 의사를 알게 된 공작은 웃으면서 "알겠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였고, 결국 악단은 즉시 아이젠슈타트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 공연한 이 고별 교향곡의 무대를 접했을 때에 마지막에 두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연주를 마치고 불을 끄고 나간 뒤에 텅 빈 무대를 향해서 아낌없이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 글을 쓰면서 그때의 아련함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이렇듯 "직장인 음악가"로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하이든의 삶의 들여다보니 보는 시각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음악"은 치열한 "노동"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용주의 명령에 따라 매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오페라단을 관리했으며, 밤이든 낮이든 음악을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고용주 덕에 전반적인 처우는 많이 나아졌지만 고용의 형태 때문에 노동의 형태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전 시대의 궁정작곡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럼 하이든이 거의 평생을 바쳐 일했던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공연장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이전 시대의 궁정 공연장의 분위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공작이 직접 바리톤을 들고 나와서 연주를 했기 때문에 관객들 중에 감히 소란스럽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정도였습니다. 공작이 직접 연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해도 음악 애호가인 공작이 경청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때 또한 그 경청을 방해할 정도로 담이 큰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연회의 배경음악에 불과했던 궁정음악이 귀족들이 악기연주나 노래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덕분에 연회의 중심에 있을 수 있는 정도까지는 지위가 향상되었다고나 할까요.


이렇듯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고전주의 음악이라는 형식을 성실하게 만들어 간 하이든이 한창 청년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 빈 악파의 둘째이자 궁정의 음악을 거부하고 도시의 음악을 만들어 낸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나게 됩니다. 하이든과 출발은 비슷했지만 이후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 모차르트, 그리고 모차르트가 살아간 시대의 도시의 성장과 공공 대중공연장의 확산을 살펴보면서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공연장의 분위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갈길이 머네요.ㅎㅎ



■ 추천음악


이번에도 두 곡을 추천하겠습니다.


첫 번째 곡은 하이든이 니콜라우스 공작을 위해 작곡한 바리톤을 위한 곡 중에서 바리톤 트리오 나 장조. 하이든 작품번호 Hob. XI:5입니다. 아마추어 악기 연주자인 공작을 위해 작곡된 만큼 연주 난이도가 높지 않고 템포도 빠르지 않지만 바리톤이라는 악기의 기본기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두 번째 곡은 앞서 언급한 교향곡 45번 "고별" 4악장입니다. 프레스토 Presto로 활발하게 시작하여 일반적인 진행을 하다가 갑자기 안단테 Andante로 빠르기가 바뀌면서 서서히 악기가 하나씩 퇴장을 하면서 사운드가 줄어듦과 동시에 뭔가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주제로 진행되어 마지막엔 바이올린 두 대만 연주하고 마무리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영상으로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Baryton Trio in D major, Hob. XI:5

Haydn Symphony No.45 in F# minor 4th movement Hob. I: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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