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er을 꿈꿨던 Tourist
언젠간 학교에서 Tour(투어)과 Travel(트래블)의 차이를 영어 선생님이 알려주신적이 있다. 투어는 그저 그 지역을 소비하는 “관광”에 가깝고 트래블은 그 지역을 이해하고 느끼며 “여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의 나는 왠지 “관광객”은 멋있지 않고 “여행자”는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훗날 여행을 할 것이라 다짐했었다.
머지않아 성인이 되어 해외에 나갈 때면 한정된 시간과 예산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하에 나는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블로그 리뷰를 뒤졌다. 이름만 자유여행이었지 서로가 서로의 동선을 베껴가며 만들어낸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행 코스를 따랐고, 합리적인 호스텔과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여행에 실패를 맛보는게 두려웠고, 확실한 행복을 원했다. 리뷰와 별점은 나의 실패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확신을 가지게 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예상되지 않는 미래에 불안한 청춘에 여행마저 불확실한 나날들을 보내기는 싫었던 것 같다. 보장되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미래와 행복을 제공하는 관광이 오히려 내 삶과 동떨어진 경험을 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이었다.
숨길 수 없는 관광객의 차림으로 캐리어를 끌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금 인생의 모든 고민은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갈 것인지가 전부인 나와 같은 상황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를 들렀는지, 얼마나 여기에 머무를 것인지, 여기에 온지는 얼마나 됐는지, 자신의 여행기간은 얼마인지 같은 모레면 기억에서도 사라질 질문과 답이 오갔다. 그 대화들의 알맹이가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번 여행에서도 본 적 있는 듯한 카고바지에 민소매를 입고, 동남아에서 싸게 받은 아물고 있는 타투를 자랑하는 서양 여행객의 기억에 내가 여행자로서 기억되는 것. 그래서 마치 나도 마치 여행객이 된 듯한 기분이 좋았다. 껍질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분이 그 대화의 효능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여행객의 기분을 잠시나마 즐기고 10인실 도미토리 2층 침대에 돌아와 귀마개를 끼고 매일 2만보씩 걸어 아픈 발을 주무르며 문득 고개를 저었다. 30살에도 10인실 도미토리에서 여행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Travel을 꿈꿔왔던 어린 시절의 나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17살때 쯤부터 어른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었다. 주민등록증이 나온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대학생이 된다고 해도 어른이라고 느낄 순 없을 것 같다고. 대학교 2학년에 떠났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머물렀던 집 호스트 37살의 언니에게도 물었다. 어른이란건 뭐인 것 같냐고. 그랬더니 그 언니는 웃으며 대답했었다. “나는 어른인 걸 잊기 위해 노력해. 어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아.” 그것이 내가 누군가에게 어른은 무엇인지 물어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른이란게 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내리지도 얻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어른이구나를 어느 순간 느낄 뿐이었다. 처음 쏘카에서 차를 빌려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 내가 멈추고 싶을 때 길가의 찐옥수수 가게에서 감자떡을 살 때, 뒷자리에 누워자던 내가 너무 멀게 느껴지는 순간에. 내가 가는 결혼식의 주인공이 더 이상 부모님의 지인이 아니라 나의 지인일 때, 내가 어린시절 기억하는 부모님의 세대가 이제 나의 자리구나 깨닫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 질문을 하지 않는 걸 넘어서 37살 이탈리아 언니의 말에 공감한다.
여행 속에서 얻을 수 있을 수많은 경험들에 설레기보다 여행 속 고단함과 피로함이 먼저 떠오르며 지친 어른이 된 내 자신을 마주할 때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속세 속 어른이 된 나는 다음에는 관광이 아닌 휴양을 하고싶다고 생각한다. 리뷰와 별점에 전전긍긍하지 않으며 충분한 돈만 내면 보장된 기대와 맛을 충족해줄 수 있는 리조트에 가고싶다고 말이다.
한때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경계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청년이라는 말이 내 것 같았다. 여행자들과 만나 서로의 문화와 경험을 넓게 바라보고싶어했다. 그래서 의례 여행지에서 하는 어디서 왔는지에서부터 시작하는 뻔한 알맹이 하나 없는 질문을 청춘의 나는 지겨워했고, 뻔하다며 블랙코미디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 시간을 건너온 것 같다. 뻔하디 뻔한 “어디서 왔나요?”에 대한 질문이 즐겁다.
아무 힘도, 아무 감정도, 목적도 없이 상대와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내 말에 무게가 없어도 돼서 편안하다.
청년의 나는 나를 찾기 위해 어딘가로 향했지만, 이제는 하루 하루 말에 힘을 주고 살아오는게 싫어서 내가 있던 곳을 떠난다.
기고 문의 parklyyj@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