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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무요 Jul 26. 2022

15. 패션과 전시*

물과 기름?

*본 글에서 가리키는 전시는 옷을 시각적 매개로 활용한 작품의 전시가 아닌 제작 목적이 판매였던 상품들을 전시장으로 불러온 경우로 제한한다.


학부 졸업 전시부터 갤러리의 기획전 나아가 이 업계의 거장을 다루는 세계적인 박물관의 회고전까지, 패션에게 더 이상 전시라는 개념은 낯설지 않다. 분명 패션 디자인은 거리에 머무르지 않고 화이트 큐브로 침투해왔고, 패션 디자이너면서 동시에 작가인 경우도 더 이상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이 패션 전시들은 우리가 매장 혹은 패션쇼를 통해 상품들을 구경하는 경험과 어떻게 다른가? 전시는 브랜드 혹은 디자이너 개인의 이름을 위한 마케팅 수단 그 이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명품 브랜드들의 홍보 수단으로 대규모 패션 전시가 흔해지고 있고, ‘구시대적’인 패션쇼에서 벗어나고자 전시의 형태로 브랜드들의 발표 방법이 바뀌면서 우리는 전시들 사이에 구분이 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상호 간의 경계가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이러한 현상이 문제가 될 요소는 아니지만, 문제는 필자가 “패션 전시”를 말로 들을 때와 달리 현장에서 실재를 바라볼 경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는 데 있다. 이 위화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선 근본적인 원인은 옷의 목적에 있다. 우리는 옷을 단순히 바라보기 위해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목적에 부합하지 않게 사용하거나 부적절한 장소에 있으면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서순이다. 더욱이 인체를 배제한 옷은 편평한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그림처럼 벽에 걸어둘 수는 없다. 입체적으로 기능해야 할 대상을 평면에 머물게 하면 감상자로서 감상을 할 미적 요소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결국 화이트 큐브 속 작품으로서 옷은 기능하지 못하고(사람과 함께하지 못하고) 피사체가 될 뿐이다.


이러한 괴리에 대해 다들 인지하고 있다 보니 패션 전시에서 마네킹은 필수불가결적 존재다. 하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마네킹은 사람이 아니다. 마네킹은 옷을 걸어두는 대상일 뿐, 옷을 입는 주체가 아니다. 굳어있는 마네킹에 ‘걸려있는’ 옷을 보고 우리는 그 옷의 활동성, 소재의 조화 등을 인지할 수 없다. 차라리 옷을 입고 현실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촬영한 동영상이 고정된 옷을 바라보는 편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옷은 언제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부합하는 장소와 시간 등 여러 주위 요소들과 함께 맞물려 작동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의 흐름이 차단된 공간 속에서 인간의 실루엣과 비슷한 ‘덩어리’에 옷을 끼워 넣어도 옷이 작동할리 만무하다.


따라서 아무리 실물을 전시하더라도 입어볼 수 없는, 경험에 한계가 있는 전시의 특성은 제약일 뿐이다. 결국 패션이 대중에게 제공하는 환상성과 거리감을 극대화했다. 즉 전시라는 플랫폼을 통해 패션은 미술의 아우라를 획득했을지는 몰라도, 대중이 접근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달리 말하면 패션의 경우, 전시장에서 우리는 작품을 수용할 수 없다. 패션 전시 현장은 사실상 패션 디자인과 옷에 대한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엄숙한 분위기의 쇼윈도 매장에 불과하다.


Balenciaga: Shaping Fashion - Exhibition at South Kensington · V&A


패션 전시의 또 다른 문제는 패션 디자인의 작업 과정을 디자이너 한 사람이 완수하는 경우가 드문 현실에서 기인한다. 달리 말하면 패션 디자인은 패션 디자이너 개인의 작업이 아니다. 물론 졸업 전시에 참여하는 학생이 스스로 끝까지 옷을 제작한 경우, 혹은 한 개인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제품의 ‘샘플’을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하는 경우 해당 단계까지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패션 디자인의 프로세스는 원단의 직조부터 제품의 생산, 최종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까지 내포하기 때문에 역시 디자이너 개인이 전체 과정을 홀로 도맡는다고 볼 수 없다. 으레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 산업은 지금까지 협력 위에서 작동해왔다.


가령 메트로폴리탄의 레이 가와쿠보 전시의 경우에서 '그의 아카이브'들은 디자이너 개인 혹은 소수의 사내 디자인 팀의 업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옳은가? 이 기념비적인 전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속 비밀에 싸인 양복 공장 편의 고토구에 위치한 꼼 데 가르송 담당 가내 공장, 꼼 데 가르송 내부 패턴사 등 저마다 자신이 필요한 단계에서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생략하거나 축약했다. 이로써 레이 가와쿠보의 아우라는 확보되었고, 그의 유일무이한 독창성을 우리는 여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전시를 통해 패션을 뒤덮은 아우라만 바라볼 뿐, 패션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브랜드의 홍보용 전시를 제외하면 패션 전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옷들은 ‘급진적’이다. 이들 옷은 분명 일상과 거리가 존재한다. 즉 패션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 중에서도 소수를 위한 옷들만 전시로 이어진다. 이 난해한 옷들은 화이트 큐브를 통해 다시금 어려워진다. 그리고 대중들의 현대미술에 대한 반응에서 읽을 수 있듯, 대중과의 거리감은 그들의 조롱으로 이어지며 간극을 좁히기 어렵게만 한다. 벌어진 간극은 결국 패션=난해한 옷이라는 공식의 증명이 되어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차단하는 악순환을 야기할 뿐이다.


물론 필자가 생각하기에 패션 전시가 옷의 범주 안에서 얼마나 기이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자리는 아니다. 오히려 옷의 개념적 접근이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자리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자리는 패션쇼, 박람회 같은 상업적인 행사에 한정된다. 되려 비평적 접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할 전시는 디자이너들의 기이한 옷들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며 자신들의 옷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만 눈으로 확인하는 곳이다. 지금껏 외면해온 측면에 대해 돌아보며 패션에 대한 다각적 차원의 해석을 시도해야 할 전시는 '화이트 큐브에 입성'이 목적이 되어 대다수 패션 현장의 참여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화이트 큐브에는 작가도, 작품도 없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결국 화이트 큐브와 결탁한 패션 디자인은 엘리트 의식을 탈피하지 못한 채 대중과의 간극을 줄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선을 긋고 난해하다는 평을 '부족한 이해'정도로 치부해버릴 것이다. 이렇다면,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결국 화이트 큐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예술품으로 ‘전락’한 옷은 과연 옷일까. 이는 옷에 대한 디자인적 허용에 불과하다. 전시장 바깥, 현실 속 생산 시스템에서 패션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보일' 뿐, 디자인의 최종 결정자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옷의 결정권자는 소비자이자 대중이다. 이 같은 구조 속에서 옷을 화이트 큐브로 불러들인다고 한들 예술품처럼 보이기만 하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패션 전시의 방향은 착용자들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감상하는 옷 사이의 간극을 체험하고 보고 있는 옷이 입고 있는 옷과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유도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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