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행광팬 캠프
그러다 공부를 잘하게 해주는 약에 대한 게시글을 읽었다.
ADHD라는 용어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동의 집중력 결핍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처방하는 약이 있는데 이걸 먹으면 집중력
이 몇십 시간이고 간다고 했다. 성인도 병원에서 진단만 받으면
먹을 수 있으며 공부, 특히 시험을 준비하는데 특효라고 했다. 더
검색한 결과 서울 손꼽히는 대학의 게시판이나 의전원, 로스쿨
준비생들 카페에서도 꽤 언급되고 있었다. 미국 유학생들이나 대
치동 학원가에는 이미 공부 잘하는 약으로 널리 알려져 관련 기
사도 많았다.
명백한 불법이었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합격과 성적에 눈이 먼
사람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퍼져있었다. 이거였다. 내 불합격의
원인. 검색 결과를 읽는 내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몸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았다. 얼굴 없는 내 경쟁자들에게 화가 났
다. 이번 시험의 합격자들이 했던 것과 내가 하지 않은 것. 각성
제. 바로 이거였다.
나는 비난의 화살을 내 공부 방법에서 각성제를 먹는 경쟁자들
에게 돌리면서 무너진 자존감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경쟁자들이
실제로 먹었건 말건 상관없었다. 내 멘탈은 바닥을 치다 못해 뚫
고 들어가 지옥의 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원망하고 남
탓을 하지 않으면 숨도 못 쉴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내 불
합격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 공부 방법이 틀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어금니
가 깨질 정도로 공부했는데 내가 잘못했다니? 상대방이 반칙
을 썼으니 내가 진 것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곧장 약 처방에 대해서
검색하자 수많은 정보가 나왔다. 강남의 어느 병원이 처방을 쉽
게 해 준다더라, 한 달에 얼마가 든다더라, 부작용은 있지만 일단
합격하면 만사 오케이다. 등등. 코카콜라가 비싸서 오란씨를 마
시는 형편이지만 합격을 위해서는 밥값을 줄여서라도 처방받아
야겠다고 생각했다.
불법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내 경쟁자들이 먹고 있다고 생각
하니 나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약을 먹겠다고 생각
하자 이제 합격이 정말 코 앞인 것 같았다. 경쟁자들이 쓴 반칙을
알아냈으니 나도 반칙을 쓸 것이다. 이건 100m 달리기에서 30m
나 앞서서 출발한 거나 다름없었다. 반칙을 쓰지 않아도 결과는
간발의 차였으니 나도 반칙을 쓰기만 하면, 각성제를 먹기만 하
면 다음에는 기필코 이길 것이다.
‘후우우....’
심호흡해도 도저히 진정이 안 돼서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신선
한 공기가 필요했다. 벤치에 앉아서 머리를 식히며 당장 내일 처
방을 받고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여기저기로
돌리다 페인트가 벗겨진 창살 너머로 ‘짱아’가 보였다. 짱아는 도
서관 맞은편 냉동식품 창고 앞에 묶여있었다. 항상 가게 앞에 엎
드려있는 통통한 웰시코기. 얼마나 똑똑한지 주인이 타는 흰색
트럭이 올 때만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정말 똑같이 생긴 흰
색 트럭이 지나가도 주인의 트럭이 아니면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따금 짱아는 배달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뒷자리에 두 발로 서서 주인의 어깨 위에 앞발을 착 올리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의 많은 사람이 짱아를 보며 위안을 얻었고 나도 마찬가
지였다. 나는 저 녀석을 보면서 시험에 합격하면 널찍한 마당 딸
린 단독주택에서 레트리버를 서너 마리 키우며 살기로 다짐했다.
퇴근해도 아직 해가 하늘에 걸려있는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
굴을 맞대고 따뜻한 동물을 쓰다듬으며 해가 떨어지는 걸 바라보
는 저녁. 더는 밥줄이 끊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이 시험에 도전했다. 한창 진상 고객들
에게 시달릴 때는 출근길이 회초리를 맞으러 가는 것 같았다. 그
걸 견디며 출근했는데도 어느 날 회사가 사라졌다. 이건 사는 게
아니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좀
더 행복해질 것 같아서 2년째 이 고생을 한 것이다.
나는 합격이 아니라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 순간, 꾸벅꾸벅 졸던 ‘짱아’가 귀를 쫑긋하더니 발딱 일어섰
다. 멀리서 흰 트럭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 엄지보다 짧은 꼬리와
하얀 엉덩이를 흔들며 아직 보이지도 않는 주인을 반겼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약을 먹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합격하기 위해 몸을
망치는 약이라니?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
나는 합격을 하고 싶은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약의 부작용에 대해서 다시 찾아봤다. 공격성, 우울증, 심혈관
질환, 정신착란, 발기부전 등등 합격에 눈이 멀었을 때는 제대로
읽히지 않았던 부작용들이 그제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합격을
위해서 이것들을 모두 안고 간다니 그렇게 합격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한번 쉬운 길에 손을 댄 사람이, 합격하고 나면 손을 끊
을 수 있을까? 나는 코앞에 닥쳐온 불안과 위기에 손쉬운 방법을
택하려고 한다. 남을 비난하고 약물에 의존하기. 그럼 다음 위기
에는? 남을 공격하고 약물에 더 의존해야 할까.
자리로 돌아가 가장 기초가 되는 책 원예학 개론을 폈다. 책을
만지는 것도 괴로웠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그리고 맨 첫 장부터
다시 폈다. 그리고 내가 모두 외운 부분과 시험에 나왔는데 내가
놓친 부분, 그리고 시험에 나오지 않았지만 내가 지나친 부분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마치 2학기가 시작하고 나서야 처
음 본 반 친구처럼 분명 내 눈앞에 있었는데 인식하지 못했던 부
분들이 있었다. 그것은 표나 그림 같은 네모 박스 안에 있는 것들
이었다. 대부분 본문에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어 있었고 표나 그
림 자체는 지엽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 게 화근이었다. 이
극악한 난이도의 시험에서는 표에서 숫자만 하나 바꿔서 또는 그
림에서 그래프 눈금만 바꿔서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 말은 곧 10
권 가까이 되는 책에 내가 놓친 그림과 표를 다 외워야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며칠간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산더미 같은 글자들을 밀고 나
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과수 원예학 마지막 부분에서 나를 멘
붕에 빠트렸던 한 줄이 발견되었다. 작은 사진 밑에 ‘사과 수분에
탁월한 머리뿔가위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