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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gital wanderlust Oct 06. 2019

02 부산

부산 국제 영화제(BiFF)

독서실에 다녀온 어느 늦은 고3 때의 밤 습관처럼 쳐다본 우편함에 엽서가 한 장 와있었다.

꺼내 보니 중학교 동창이 보낸 봄여름가을겨울의 '내가 걷는 길'이라는 노래 가삿말이었다.


때론 바쁜 하루 일과를 등 뒤로 돌리고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다보면은 코끝이 찡한 것을 느끼지

하루 이틀 사흘 지나고 문득 뒤돌아보면

가슴 아픈 일들도 즐거운 추억도

빛바랜 사진처럼 옅어만 가고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야

거리의 네온이 반짝거리듯

잠깐 동안 눈앞에 떠올라

거리의 바람이 스쳐 지나듯

이내 가슴에 사라져 버리는

오 내가 지금껏 걸어온 이 길은 흩어진 발자욱만 가득하고

오 내가 이제 걸어갈 저 길은 텅 빈 고독으로 가득하네


내 이름을 불러주거나 본인의 안부를 전한 것도 아니었고, 이 가사만을 담아 직접 우편함에 넣고 돌아갔다.

이따금씩 친구가 보낸 엽서를 꺼내 읽어 보았는데 왜 이 가사를 보냈을까 와 한켠엔 나보다 어른 같다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중 3 때 무척 친했던 친구였는데 학교가 달라지고, 이메일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 수험생이라는 압박감에 자연스레 멀어지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약속 시간 늦는 사람을 무척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고등학교 친구가 대학에 간 이후 만날 때마다 늦게 나왔다. 휴대폰도 없던  때라 두어 시간을 기다리다 친구 집으로 전화하니 동생이 언니가 다른 곳에 들렀다 오는 중인데 차가 엄청 밀려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 전해 달라고 했단다. 이미 시간 늦는 것에 대해 쌓일 대로 쌓인 나는 너무 화가 나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친구는 집으로 전화해 또 사과했지만 상한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던 무렵, 집에 들어가면서 우편함을 보는데 그 친구로부터 온 두터운 편지가 있었다. 역시나 우표 없이 직접 우편함에 넣고 간 편지였다.


오늘날엔 상상조차 안 되는 행동들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대한 진정성이라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아날로그적으로 진정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타인에 대한 형식적인 배려, 형식적인 예의, 형식적인 관계가 점점 더 많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본 아나 루이자 아제베도 감독의 영화 <에르네스토의 시선>에서 따뜻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고, 줄곧 등장하는 손편지라는 모티브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직접 우편함에 넣고 간 편지들이 동일시되는 느낌이었다.

아나 루이자 아제베도 감독

전혀 내용을 모른 상태에서 봐선지 영화는 재밌고, 감성적이며, 감동적이어서 브라질 영화에 대한 새로운 선입견이 생겼고, 영화 상영 후 만난 감독과의 대화에서 그녀의 신념에 다시 한번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성을 가지고 나이 들어간다는 것.

쉽지 않지만 끊임없이 노력해야겠다.




<부산>

거의 1년 내내 야근하던 사원, 대리급 시절. 금요일 밤 퇴근 후 부산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밤새 달려 새벽녘 부산역에 떨어졌고, 잠시 호텔 로비에서 쪽잠을 자고 난 뒤 하루에 3, 4편의 영화를 봤다. 영화제 초창기 때는 그 좁은 남포동이 영화관과 이벤트 무대의 전부였다. 그러다 부산 곳곳의 상영관에서 영화를 상영해 영화 한 편 보고, 이동하기에 바빴는데 이젠 영화의 전당과 근처 영화관들에서 많은 영화 상영과 오프라인 행사를 하고, 일부가 상징적으로 남포동에서 열린다.

그 시절엔 영화 예매하기가 이렇게까지 치열하지 않았고, 페스티벌이라는 느낌보단 영화쟁이들이 미친 듯이 영화보기에 좋은 시기와 장소로 기억된다. 어쩌다 배우 무대 인사를 우연히 보게 되면 엄청난 행운이고, 그중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아그네스 자우이 감독과의 대화에 참석해 사인까지 받은 건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곳 부산은 국제 필름 페스티벌로 자리를 잡아 감독이나 배우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도 다양하게 많아졌고, 특히 해운대는 예전에 내가 봐오던 모습을 찾아볼 수가(파라다이스 호텔, 글로리 콘도 빼고)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부산은 영화제로, 출장으로, 여행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이 가 본 장소인데 이번처럼 일주일을 머물며 생활하기는 처음이다. 아직 시간이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서울에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오래간만에 '쉼'이라는 낭만을 만끽 중이다.


https://youtu.be/MHD_hxJbA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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