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구할 수 있는 건 결국 너뿐이야.
"이 현실에서 그냥 도망치면 되는 걸까?"
스물세 살, 인생의 막다른 절벽에 서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현실이 버거웠길래 무책임하게 떠날 결심을 했을까? 사실 흔한 성공담에 나오는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이
꼭 현실도피의 명분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나는 늘 내 집이 힘들었다. 차라리 밖에서 힘들고 집에서 위로받았다면 이렇게 버겁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원래도 나는 떠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사주를 보면 늘 '역마살'이라는 세단어가 나오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아기일 때는 늘 밖에 나가자고 조르고 꿈도 어린 시절 내내 외교관이었다. 중학교 2학년때는 어른들도 없이 사촌동생이랑 둘이 패키지여행으로 유럽 5개국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처음 비행기를 타보았을 때 세상 모두를 가진 기분이었고 낯선 나라에서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그러한 삶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운명은 너무 일찍 나를 비껴갔다. 사촌동생 여행비용까지 대줄 정도로 부유했던, 아니 부유한 줄 알았던 우리 집은 IMF시절인 고등학생 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락했다. 대기업도 하루아침에 망하던 그 시절 경영이나 재테크에 무지했던 아빠의 작은 건축회사가 버틸 리 없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우리 집은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3년 만에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나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한 가정의 몰락을 체감해야 했다.
자가 주택에서 전세, 전세에서 월세, 방 세 칸에서 방 두 칸, 두 칸에서 한 칸. 냉장고는 텅 비었고 남은 공간에는 부모님의 고성과 한숨이 가득했다. 자신들의 몰락을 자식들에게 전혀 숨길마음이 없었는지 아빠는 술과 친구만 찾아다녔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불평하기 바빴다. 한창 예민했던 시기. 잘 나가던 집이 망했다는 사실만으로 견딜 수 없었는데 매일 마주하는 현실은 더 처참했다. 그 숨 막히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결국 역마살은 방황으로 찾아왔다. 집보다 밖이 좋고 가족보다 친구가 좋았다. 밖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집생각을 안 할 수 있었으니까. 혼자 있어야 할 때는 도서관에 가거나 집 앞 놀이터에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삐뚤 어질 것 같던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나의 방황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붙잡는 쪽으로 향했다. 나의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던
성장에 대한 욕구가 날 그렇게 만들었을 거다. 힘들 현실에서도 늘 성공한 사람들을 롤모델로 삼았으니까. 그렇게 우울했던 사춘기의 끝자락쯤 탈출의 방법으로 공부를 택했다. 뚜렷한 목적이나 계획은 없었지만 공부를 하면 무언가 나아질 것만 같았다. 고3 때 1년을 정말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의 합격증을 손에 넣었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만 같았다. 수원에서 한남동까지 왕복 세 시간을 넘게 통학을 하면서도 매일서울로 향하는 그 길이 너무 좋았다. 버스 안에서 책을 읽고 상념에 잠길 수 있었으니까.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안정된 집안에서 잘 자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껏 공부를 하고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삶은 꿈에 그리던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한남대교를 건널 때마다 보던 한강은 매번 보아도 질리지를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잠깐의 여유도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일정한 수입이 없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림에 보탬을 하게 되었던 게 문제였다. 사실 나에게 9살, 10살 어린 두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혼자서 자립도 할 수 있었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동생들은 그 어두운 집 안에 갇혀있어야 했다.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과외를 하고 그러면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방학기간에는 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밤에는 바텐더로 새벽까지 일을 했다. 가끔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 싶었다.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 자취를 하며 영화도 보고 취미생활까지 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책임감이 강했던 나는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경제적 능력이 점점 커지면서 부모님도 점점 더 나에게 의지를 했다. 주어진 현실도 버거운데 첫째라는 책임감까지 무겁게 얹어졌다. 그러자 나의 모든 일상에 무거운 추가 매달려진 느낌이었다. 물질하는 해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 대부분을 보내는 그런 느낌으로 매일을 살았다.
사람은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데 내 첫 기회는 2004년에 온 것 같다. 당시 휴학을 하고 일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만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너네 호주 워킹홀리데이라고 알아?"
한 친구가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며칠 동안 친구의 말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만 알아보았다. 도망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급하게 한국을 떠나는 과정에서
가족을 버린다는 죄책감까지 들었다. 하지만 우선 내가 살아야 했다. 먼저 내가 살아야 그 지독한 현실에서 모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야.'
물속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나를 진정으로 건져내 줄 수 있었던 건 결국,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의 결정은 도망이 아니라 어찌 보면 구원에 가까웠다. 그때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직도 난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허우적대고 있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이다. 결국 일주일 만에 비자를 신청하고 한 달 뒤에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나는 호주가 건넨 기회를 잡았다. 영어도 잘하고 돈도 많이 벌고 다양한 경험을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스토리가 그렇듯 호주에서의 삶도 만만치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