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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승 Jul 21. 2019

박승호 선생님 인터뷰 질문지 2019.07.09

머니투데이 / 이로운넷 인터뷰 기사 응답지 초고

20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지난 6월 21일부로 떠났습니다.
약 3주 정도 됐는데 퇴직한 소감이 어떤가요?
예상했던 것과 같은지 혹은 조금 다른 점이 있나요?


글쎄요. 크게 다른 점은 모르겠어요. 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퇴직 전 1년간 건강상의 이유로 휴직을 했던 터라, 이미 오래전에 퇴직한 느낌이랄까요. 특별히 경험해보지 못한 한가함이나 시간의 여유로움 같은 걸로 새삼스레 감동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교직이 아무래도 일반 사무직보다는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잖아요. 두 번의 방학이 재충전할 시간적 여유도 만들어 주고요. 그런 패턴이 오래 몸에 배어있어서인지 정말 큰 변화는 못 느끼겠어요. 하지만 얼마 전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계산을 하려는데 에러가 뜨는 거예요. 직장 의료보험이 말소되고 지역 의료보험으로 이전되는 행정처리가 늦어져 공백이 생긴 모양이더라고요. 평소 약값의 5배 정도를 지불했는데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딱 그 순간 비로소 내게 직장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만났을 때부터 퇴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와서
학교를 떠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처음 퇴직을 결정했을 때 주위에서 반응은 놀라움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친인척에 교수가 많고, 저희 가족만 하더라도 아버지, 형 모두 교수였어요. 그래서 가족 누구나 제가 대학으로 가기를 원했고 그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분위기였달까…. 근데 저는 그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부모가 바라는 삶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겨요. 괜한 어깃장이었을 거예요. 만약 일반 직장생활을 바라셨다면 오히려 대학에 자리 잡으려 제가 뛰어다녔을 거예요. 하지만 교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박사과정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후배가 운영하는 인터넷 벤처기업으로 도망쳤습니다. 어머닌 아무 말씀 안 하셨지만, 아버진 격분했어요. 그렇게 2년의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강의 요청이 꽤 있었는데 딱 세 곳만 나갔습니다. 모교라는 이유로 서울대에, 여자대학이 궁금해서 이화여대에, 튀는 학생들이 많다고 해서 한예종을 나갔어요. 부모님 희망에 반하고자 직장생활을 시작한 거지만, 한 주에 한두 번 나가는 강사생활이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그러던 중 이화의 부름을 받았는데, 신기하게 지금까지 견지하던 태도는 오간데 없고, 순간의 고민도 없이 학교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관둘 수 있는 거고, 오래갈 생각도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뭔가를 오랫동안 지속해 본 기억이 별로 없거든요. 연애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짧은 시간에 에너지를 쏟는 타입이라 장기전은 해본 적도, 할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전임강사부터 시작했는데, 조교수가 되면 관둘 거야라고 학생들에게 종종 이야기하다가 어느새 부교수가 되고, 또 금방 정교수가 되어 정년까지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 10년의 시간 동안 관둔다 관둔다 버릇처럼 말해왔던 터라 나중에는 양치기 소년이 되어 사람들도 더는 믿지 않게 되었고요. 그러다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껴 조기퇴직을 결정한 것이 5년 전 일이에요. 연구실에 더는 신입생을 뽑지 않았고, 외부 연구 용역들도 정리해 나갔습니다. 매 학기 연구실 학생들이 몇 명씩 졸업했음에도 지난 6월 퇴직 시점까지 세 명이 남더라고요. 논문지도는 다음 학기까지 이어질 것 같습니다. 


교수는 다른 직군보다 정년이 길고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노후가 보장되는
직업입니다. 스스로도 퇴직을 결정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국회의원, 교수, 거지. 이 셋의 공통점은 한 번 잡으면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는 거잖아요.  권력을 휘두르는 국회의원이나 권위 위에 올라 선 교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버린 거지 사이에서 궁극의 선은 거지일 것 같아요. 이 험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무해한 존재니까요. 제가 이를테면 한 번 잡으면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는 직업 하나를 버리고, 공통점이 같은 다른 한 직업을 선택한 셈이 되는데요. 조기 퇴직을 결심하는 것이 저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을 설득하고 주변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았죠. 어머닌 늘 하시던 대로 제 선택을 믿어주셨지만 아버진 그 좋은 직장을 왜 관두느냐며 못마땅해하셨어요. 퇴직을 결심하고 퇴직하는 그날까지 “네 선택에 난 반댈세!” 하는 태도 같은 거? 를 무려 5년 동안 견지하셨습니다. 다른 화제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불쑥불쑥 그리고 뜬금없이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셨어요. 하하.

한편 아내는 기본적으로는 반대하면서도 제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관두더라도 좀 더 다니다가 관두기를 원했죠. 이해는 가요. 고정수입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겁니다. 저라고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65세에 명예롭게 정년퇴직하고 다음날부터 골방 노인네로 전락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건강하게 사는 것의 기준을 정하고 딱 그때까지만 열심히 살자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까지는 아내도 같은 생각이지만, 어떤 기준을 정한다는 것에는 반대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인데요. 저는 종교가 없는 터라 견해는 좁혀지지 않고 있죠.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네요. 그래서 정년 이후의 삶을 생각해보니 정년을 마치고 뭘 새롭게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젊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갑자기 넓어지더라고요. 그건 마치 영화 메트릭스에서 진짜 몸이 깨어나 어리둥절한 네오에게 가혹한 진실을 알려줄 때 감각이 갑자기 쫘악 확장하는 그런 느낌 같은 거였어요. 그러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몰고 온 결정적 계기가 저희 학교에서 미래 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로 시작되었어요. 총장 퇴임을 요구하는 교수 시위로 이어졌는데, 이는 1886년 이화학당 개교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근데 이 과정에서 교수와 교수,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반목이 생겼습니다. 총장 해임을 촉구하는 서명에 참가한 교수가 전체 교수의 1/6에도 미치지 못하고, 10월 19일의 교수 시위에는 참석한 교수는 100명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총장이 사퇴하고 바짝 엎드려있던 교수들이 갑자기 일어나 자기가 얼마나 학생들을 위했고, 그것을 위해 투쟁했는지 떠드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면서 염증을 느꼈습니다. 아마 이 사건 때문에 3년은 더 일찍 퇴직하게 된 것 같네요. 이곳은 더는 상아탑이 아니고, 그저 직장이었던 거죠. 힘 가진 자에게 줄 서고, 남의 공을 제 공으로 둔갑시키고, 거짓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서 이 위기가 퇴화되어가던 나의 감각들을 깨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20년간 학교에서 연구실적도 쌓고 학생들도 가르치면서 뿌듯하고 보람된 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는다면요?


저와 제 석박사 연구원들이 지난 20년간 거둔 성과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저희가 한 해에 진행하는 연구용역 과제 수주액이 조형대 전체 교수들의 연구비 총합보다 많은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름 유명한 랩이었고, 그 덕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안 들어도 되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그런 외형적 성과가 아니라 제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릴 때입니다. 요즘도 가끔 부부동반으로 제 집에 놀러 와서는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밤늦게 갑니다. 와이너리에 빈 공간을 이만큼이나 남기고 말이에요. 그 빈 와이너리에 아이들이 남기고 간 사랑을 대신 채워 넣습니다. 가장 뿌듯한 순간이죠.


퇴직을 한 현시점에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전혀 없어요. 전혀요. 퇴직하면 그동안 사고도 못 읽은 책들을 맘껏 읽어야지 생각하며 흐뭇해했는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이전보다 더 바빠진 현실이 아쉽다고 할까요.


“이화여대에 있습니다”라고 설명하면 되는 삶이 끝났는데요.
지금은 선생님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하나요?


그게 참 편했는데 말이에요. 구구절절한 설명이 따로 필요 없었잖아요. 아직은 명함을 만들만한 직함이 없어서 그냥 백수라고 소개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놀리는 줄 알아요. 진짠데…

한편으로는 마지막 직업에서 부르던 직책이 평생을 가는 거라며 그냥 교수님~ 하며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학교에 있을 때도 교수로 불리는 걸 싫어했던 사람인데, 더는 교수도 아닌 때에 교수라 불리니 몹시 불편하더라고요. 학생들은 늘 쌔앰~하고 불렀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교육자가 아닌 일반명사로서의 선생 정도로 불리면 부담 없겠다는 생각이에요.


퇴직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인지?”라고 했는데요. 저도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세요.


아주 오래전에는 퇴직하고 오토바이 튜닝 워크숍을 만들고 싶었어요. 한적한 제주도 정도로 낙향해서 적게 벌고 적게 먹으며 흥미로운 일들을 하다가 삶을 마감해도 좋겠다 생각했죠. 책과 음악을 가까이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가 아까 말씀드린 이화여대 시위 과정을 통해 각성했을 때, 대학의 부조리에 대해서만 눈이 떠진 게 아니었어요. 

불공정한 세상, 불평등한 젠더 문제, 쇠락한 정치의식, 지구환경과 동물권 등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퇴직 후에 이런 사회적 문제, 개조하기 힘든 구조적 문제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말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고, 행동에는 비용이 필요하죠. 그러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요. 뱅크 로버나 로또는 빼고요. ㅎㅎ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선생님이 꿈꾸는 보다 나은 사회란 어떤 것인가요?


간단해요. 평등한 모든 시민이 합리적인 사고와 공정한 방식으로 주체가 되는 사회예요. 그 과정에서 성별이나 성 정체성, 출생지, 출신학교, 직업, 기타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하여 사회 구성원 서로가 부당하게 차별하거나 받아서는 안되고요. 법이 이를 강제하는 사회가 제가 꿈꾸는 사회입니다.


재단법인 문화예술 ‘기지’를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 준비했고, 기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모습으로 ‘기지’를 구상한 것은 4년 전이예요. 한 집에는 같이 살지 않아도 평생 부모님 주변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아무리 멀어도 차로 10분 이상 걸리는 곳으로 가 본 적이 없었어요. 젊어서는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의탁할 수 있어서였고. 나이 들어서는 점점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을 곁에서 모셔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죠. 아버지가 정년 퇴임하고 몇 년 안 지나서였을 땐데, 혈관이 막혀 쓰러지신 적이 있었어요. 다행스럽게 어머니가 곁에 있어서 119를 부르고 응급실에 따라가 수속을 하는 등, 일을 혼자 다하셨죠. 응급조치와 긴급수술을 마치고서야 자식들에게 연락을 하셨어요. 그때 어찌나 놀랐던지요. 당시에 부모님 댁과 저희 집 사이의 거리는 1km 내외였고, 거실 창에서 바라보면 두 아파트가 서로 보였을 만큼 가까웠지만,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해 말에 부모님이 거주하시는 아파트 1층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아버지가 한 번 더 쓰러지셨는데, 그때는 어머니가 전화하자마자 슬리퍼 신고 8층으로 올라가 119를 부르고, 놀란 아버지를 안정시키고, 가까운 응급실로 이송하고 그랬습니다. 그 이후에 한 번 더 이사를 했는데 그때부터는 한 집의 이사는 다른 집의 이사를 동반했어요. 두 동짜리 아파트였는데 여건이 허락지 않아 서로 다른 동에 살다가 몇 년 만에 다시 같은 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한참 걸어갔어야 했는데 이제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되는 거리로 다시 모인 셈이죠. 그러다 부모님이 정말 정말 연로해지시면서는 저희가 처음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부모님 댁에 차렸던 것처럼, 이전보다 더 가까이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감 같은 것을 공감했습니다. 결국 두 집을 정리하고 연희동에 한 집을 차린 것이 바로 ‘기지’입니다. 결국 기지가 시작된 것은 부모님의 건강 때문이었어요. 말하며 정리해보니 그렇네요.


청년 지식인, 예술가 발굴 및 지원이 주요 목적이라고 적혀있던데요.
기지에서 하는 주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 부탁드립니다.


본 법인의 정관 제3조(목적)를 보면 ‘본 법인은 「민법」 제32조 및 「문화체육관광부 및 문화재청 소관 비영리법인의 설립 및 감독에 관한 규칙」 제4조의 규정에 따라 설립된 법인으로써 박서보 작가의 예술 정신을 기념하고 미래를 이끌 청년 예술가를 발굴, 교육 및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제4조(사업)에서는 제3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박서보 기념사업’, ‘청년 예술가 지원 사업’, ‘일반인 예술교육 사업’, ‘그 밖의 본회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문화 예술 관련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어요. 의미 있는 일을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예술가 지원이나 교육사업은 최대의 목표 사업이지만 결정적인 지출 항목이어서 이 사업이 지속되게 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걱정거리죠. 나중에는 수혜 범주를 점점 넓혀서 ‘청년 예술가 지원 사업’, ‘일반인 예술교육 사업’을 ‘청년 지원 사업’, ‘일반인 교육 사업’으로 확대해가고 싶어요. 사회를 바꾸어 나가려면 같은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저변이 넓어져야 하는 거죠.


기지라는 공간에 대해 검색을 하다 보니, 박서보 화백님이 공간을 꾸리고
이름도 붙이신 것 같습니다.(맞나요?)
활동의 근거지, 뛰어난 지혜 등 여러 뜻을 가진 ‘기지’라는 단어가
무척 매력적입니다. 이 공간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세요.


집을 설계하고 건축하는데 드는 비용은 보모님과 저희 부부가 동일하게 1/4씩 부담하였습니다. 4명 공동소유의 집이에요. 제 노후자금을 깔고 사는 가장 비경제적이고 어리석은 짓을 한 거죠. 그땐 몰랐고 지금은 압니다. 에혀…

기지라는 이름은 제가 작명한 거고요. 처음에는 아버지 이름에서 ‘서’를 제 이름에서 ‘호’를 따서 ‘서호 가택’을 생각했었어요. 아버지가 좀 고풍스러운 이름을 원했어서 내놓은 고육지책이었죠. 이것도 마음에 들어하셨어요. 근데 집 설계도가 나오고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어딜 봐도 ‘서호 가택’은 이 건물에 맞는 이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고쳐 지은 이름이 ‘기지’입니다.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외국인들이 발음할 때 편한 것까지 고려를 했고요. 

저희 아버지의 대표작 묘법은 제가 5살 때 노트에 글씨를 쓰다가 제대로 안 써지니 지우고 그 위에 다시 덧입혀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요.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것도 제가 일본 유학시절에 미용실 비용이 비싸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너무 편하니까 듬성듬성 남은 머리에도 신경을 쓰시는 아버지 모습이 안쓰러워 그냥 밀어버리라고 했던 거고요. 아버진 가끔 제가 한 것을 당신이 한 걸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닌데, 나이 들면 다들 좀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나 봐요. 이젠 뭐 섭섭하지도 않고, 그러려니 해요. 하하하


“모든 타이틀은 내려놓았으나 녹색당 당원임은 자랑스러워한다”는
프로필 소개글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원으로서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사안은 무엇인가요?


그동안은 활동적인 당원이 아니었어요. 1년에 한 번 지구당 총회에 참석하거나 집회에 얼굴을 비추거나 하는 정도였죠. 그러다가 신지예 씨가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고 고은영 씨가 제주지사 후보로 나서서 선거운동을 할 때 조금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신지예 후보에게 선거운동에 사용하라고 100만 원의 정치후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녹색당이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멀어도 우리는 걷고 또 걷는 것입니다. 작은 도토리 하나가 만드는 떡갈나무 혁명이며, 여러 무늬와 색깔을 가진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이 바로 녹색당입니다.

최근에는 녹색당 내에 동물권위원회를 만드는 일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2달 잠정 중단을 선언하셨는데요.
‘아무튼, 애플’은 어떤 작업인가요?


2 달이라고 큰소리쳐놓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사회를 향해 발언을 해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제게 통로는 페이스북 하나였더라고요.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지질한 모습으로 회군하였습니다. 데헿

사실 두 달 동안 미친 듯이 글을 써서 책을 마감하고 싶었어요. 1년 전에 출판 계약한 아무튼 시리즈라고 있는데요. 원래는 ‘아무튼 집사’로 쓰기로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소재가 바뀌어 ‘아무튼 애플’을 쓰게 된 거고요. 애플 매킨토시 시리즈가 발표되고 정식으로 국내에 수입되면서 거의 다섯 손가락에 들게 일찍 구매한 경험으로부터 35년간 애플 대부분의 제품을 경험하며 생긴 개인적 일화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써나갑니다. 제품 리뷰 거나 애플 상찬의 책은 아니에요. 올해 안에는 출간되도록 달려볼 생각입니다.


선생님 칼럼을 보고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할 때도 있었는데요.
글을 쓸 때 소재를 찾거나 영감을 얻는 등 선생님 만의 방법이 혹시 있나요?


제 글은 지식을 나열하는 글쓰기 방식이 아니에요. 아는 것도 일천한 데다가 그것들을 종합해서 나만의 주장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재능도 흥미도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경험의 일상을 그려내게 되는데요. 삶이란 게, 일상이라는 게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보니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가 많다고 봐요. 반려동물을 잃은 상실감이나, 이웃 간에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 직장 시달림의 문제 등은 사실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글을 읽으며 독자 자신의 경험이 하나의 레이어로 덧씌워지면서 자신의 이야기로 재탄생하는 감정이입의 과정에서 몰입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의 보편성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지요. 단점은 물론 “아… 식상하다”겠고요.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궁금한 질문인데요.
고양이와 살기 시작하기 전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포를 보면서 생각이나 생활이 달라진 점이 있을 것 같아서요.


반려동물들에게 제가 마음을 주지 않았어요. 평생… 

아내가 반대해서 결혼생활 30년 동안 반려동물을 키운 적도 없고요. 늘 강아지 한 마리 키우자고 졸랐는데요. 그때마다 “매일 산책시켜줄 수 있어? 난 못 해.”라고 하면 제가 딱히 답할 길이 없었어요. 고양이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 심하게 있었거든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까지 이상하게 봤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날 집사람이 고양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밖에 나가는 거 무서워하고, 산책도 필요 없고 외로움도 덜 탄다고요. 이게 웬 떡이냐, 꿩 대신 닭? 이라며 그날부터 며칠간 아내를 설득했어요. 밥도 내가 다 주고 배설물도 다 치운다 약속하고 아내 얼굴에서 긍정적 눈빛을 읽자마자 다음날 수소문해서 아비시니안과 러시안블루 한 마리씩을 데리고 왔습니다. 당연히 구박받았습니다. 엉엉

그땐 정말 동물에 대해서도, 유기견 유기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어요. 3년이 지난 오늘이라면 브리더에게서 받아오지 않고 유기묘를 입양했을 겁니다. 녹색당 동물권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인데요. 뮤와 포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달까. 우리는 말로 사랑한다 얘기할 수 있지만 얘들과는 온전히 마음으로 얘기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말은 거짓을 담을 수 있지만, 마음은 오직 진실밖에 담지 못합니다. 자신까지 속이기는 힘드니까요. 2년 전에 먼저 떠난 뮤가 제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그 마음으로 하는 사랑이었고, 지금은 그것을 온전히 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존재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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